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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훈장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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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광희 작성일2019.12.11 조회5,1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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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조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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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지리산(두방산)에서 내려다 본 전경 

 

   『전경』 교법 3장 17절에 최풍헌(崔風憲)에 관한 고사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임진왜란을 맞아 류훈장(柳訓長)에게 피난의 길을 간청받은 최풍헌이 그를 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내용의 전개 과정을 보면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최풍헌에게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대개 이러한 류의 옛이야기에서는 뛰어난 기지로 사람들을 구출하는 영웅이나 기인(奇人)이 중심인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념으로 최풍헌의 고사를 읽어보면 류훈장을 구하는 데 성공한 그의 신묘한 재주가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달리해서 본다면 오히려 류훈장이라는 인물의 범상치 않은 가치가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최풍헌에 대한 류훈장의 ‘한결같은 믿음’이라 할 수 있다.

  믿음이란 어떻게 성립하는가? 일단 믿음의 반대말인 의심은 ‘무언가를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믿음은 확실히 알 때 발생한다고 볼 수 있는데, 도전님께서도 믿음에 대해 “믿는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때 생긴다. 의심이란 잘 모르는 것을 말한다. 의심은 확고하게 알 때 없어진다. 의심이 있으면 믿음이 생길 수 없다.”01라고 말씀하셨다. 도전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란 어떠한 대상에 대해 ‘확실한 앎’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한 앎’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단순한 정보나 지식 습득에 그치는 차원의 앎은 아닐 것이다. 오랜 세월 부단한 탐구와 노력을 통해 얻은 지혜와 남다른 안목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류훈장의 믿음 역시 이를 전제로 한다. “최 풍헌(崔風憲)이라는 고흥(高興) 사람은 류 훈장(柳訓長)의 하인인데 늘 술에 취해 있는 사람과 같이 그 언행이 거칠으나 일 처리에 남보다 뛰어난지라 훈장은 속으로 그 일꾼을 아꼈도다.”(교법 3장 17절)라는 구절에서 류훈장은 신분의 고하에 얽매이지 않고 최풍헌의 비범함을 알아보는 안목과 통찰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류훈장이라는 인물은 사람을 ‘신분’으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람의 진면목을 판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는 것이다. 전남 고흥 지방의 최풍헌에 관한 민담에서도 류훈장은 학문에 정진하여 뛰어난 식견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02

  또한, 류훈장은 지혜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품과 덕성을 겸비한 인물임을 뒷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훈장은 왜군이 침입한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악해지는 터에 피난할 길을 그에게 부탁하였으되 풍헌은 수차 거절하다가 주인의 성의에 이기지 못하여 “가산을 팔아서 나에게 맡길 수 있나이까” 하고 물었느니라. 류 훈장이 기꺼히 응낙하고 가산을 팔아서 그에게 맡겼도다. 풍헌은 그 돈을 받아가지고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하여도 류 훈장은 아예 모르는 체하더니 하루는 최 풍헌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뜻밖의 일로 크게 낙담하면서 풍헌의 집에 가서 보니 초상난지라. 그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을 위로하고 “혹 유언이나 없었더냐”고 물으니 그 아들이 “류 훈장에게 통지하여 그 가족들에게 복을 입혀 상여를 따라서 나를 지리산(智異山) 아무 곳에 장사하게 하라”고 전하니라. 이 유언을 듣고 류 훈장은 풍헌을 크게 믿었던 터이므로 집에 돌아와서 가족에게 의논하니 다만 큰아들만이 아버지의 말씀을 좇는도다.03

 

 

   류훈장은 자신의 가산을 팔아 맡겼는데 대책 마련은 뒷전인 채 술을 마시며 방탕하는 최풍헌을 보고도 모르는 체했다. 이는 평상시 최풍헌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다. 또 최풍헌의 부고를 접한 상황에서도 보통 사람이라면 장사(葬事)는 고사하고 사기죄로 최풍헌의 식솔들을 관아에 고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류훈장은 크게 낙담하였음에도 끝까지 사람에 대한 도리를 잊지 않는다. 이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최풍헌의 식솔들을 위로하며 “혹 유언이나 없었더냐”라고 담담하게 묻는 그의 언행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자신의 식솔들을 함께 데려가기 위해 의논하고 지리산 깊은 곳까지 최풍헌의 상여를 묵묵히 따라가는 모습에서도 그의 덕성을 엿볼 수 있다. 조선의 뿌리 깊은 신분 사회에서 자신보다 천하고 게다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한 사람의 장사를 지내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큰아들을 제외한 류훈장의 뜻을 따르지 않은 나머지 가족들의 행동이 보통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일화에서 류훈장은 표면적으로는 임란을 당해 최풍헌이라는 기인에게 피난을 요청하는 힘없는 백성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최풍헌의 비범한 능력을 정확히 알아보고 한번 믿음을 준 사람에게는 끝까지 도리를 다하려는 자세에서 그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지덕을 겸비한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재탄생한다. 즉 ‘류훈장의 믿음’은 단순한 우격다짐식이 아니라 지혜와 덕성이라는 훌륭한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류훈장의 숨겨진 가치를 살펴보았다. 전반적으로 류훈장은 최풍헌에 비하여 덜 주목받는다. 하지만 류훈장의 최풍헌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최풍헌이라 할지라도 류훈장의 전폭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이야기는 하나의 비극으로 그쳤을 것이다.          

  최풍헌의 고사에 나타난 류훈장의 모습은 수도인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도에 대한 믿음이 단순히 ‘열심히 믿어야지’라는 생각만으로는 유지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건을 하나 살 때도 우리는 상품에 대한 가격과 정보를 꼼꼼히 알아보고 산다. 이때 상품의 정보가 불분명하여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대개 그 물건을 사지 않는다. 고가의 물건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상제님의 도를 믿고 나간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진리에 대한 탐구 없이 그저 믿기만 한다면 그것은 맹종에 불과하다. 또 진리에 대해 잘 모른다면 유언비어나 조언비어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진리 탐구는 상제님의 도를 믿고 스스로 확신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믿음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고 지켜나갈 때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를 지켜나가는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과 유혹이 따른다. 특히 작은 이익에 일희일비하고 조금만 손해가 와도 원망과 불신을 품는 성품으로는 믿음을 지켜나가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류훈장처럼 한번 믿음을 준 것에 대해서는 수긍하기 힘든 상황이 닥쳐도 함부로 원망하지 않고 끝까지 도리를 다하려는 덕성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성품은 수십 년의 세월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고칠 수 없다. 그렇기에 덕성을 함양하는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오랜 시간 믿음을 지켜나가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수도과정에서 지(智)와 덕(德)을 부단히 닦아나갈 때 우리의 믿음도 더욱 견고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01 「도전님 훈시」 (1990. 4. 24)

02 《대순회보》 117호, 「전경속 옛 이야기: 최풍헌(崔風憲)의 예지」, pp.40-42 참조.

03 교법 3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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