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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방축 공사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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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04 조회4,0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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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박인규

 

  상제께서 무더운 여름날에 신방축 공사를 보시고 지기를 뽑으셨도다. 종도들이 상제께서 쓰신 많은 글을 태인 신방축의 대장간에 가서 풍굿불에 태웠나니라. 며칠 후에 상제께서 갑칠을 전주 김 병욱에게 보내어 세상의 소문을 듣고 오게 하셨도다. 갑칠이 병욱으로부터 일본 신호(神戶)에 큰 화재가 났다는 신문 보도를 듣고 돌아와서 그대로 상제께 아뢰니 상제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일본의 지기가 강렬하므로 그 민족성이 탐욕과 침략성이 강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을 일삼느니라. 옛적부터 우리나라는 그들의 침해를 받아 왔노라. 이제 그 지기를 뽑아야 저희의 살림이 분주하게 되어 남을 넘볼 겨를이 없으리라. 그러면 이 강산도 편하고 저희도 편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전날 신방축 공사를 보았음은 신호(神戶)와 어음이 같음을 취함이었으니 이제 신호에 큰 불이 일어난 것은 앞으로 그 지기가 뽑힐 징조이로다”고 하셨도다. (공사 3장 31절)

 

  우리나라와 일본은 지리적으로 동해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고대에는 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 조상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그들에게 농사를 가르쳤고 문자와 불교를 전했다. 역사학자들은 4세기 말과 5세기 말,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4세기 말에는 일부 가야 세력의 멸망과 함께 가야 유민이 일본으로 유입되었고 5세기 말에는 한성 백제의 멸망에 따라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했었다고 추정된다.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이주민들은 일본의 고대 문화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자취를 일본의 고분과 건축물 그리고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주로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약탈과 침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까지 왜구가 끊임없이 침입하였고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국토 전체가 피폐해지고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리고 근대에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여 식민 지배하면서 문화적 말살, 물질적 수탈, 강제 징용 등 우리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일본은 역사 교과서의 왜곡과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의 행위에서 보듯 2차 세계대전 시 자신들이 저질렀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참회를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익 정치인들이 득세하고 있으며 이들이 종종 언론에 망언을 하여 일본에 피해를 당했던 아시아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상제님께서는 이런 일본의 탐욕과 침략성을 염려하시어 일본의 지기를 뽑으시는 공사를 행하셨다. 이 글에서는 공사 3장 31절의 각 말씀들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하며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그들의 탐욕과 침략성에 대해 그들의 종교와 문화적 특성 속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탐욕과 침략성을 지니게 되었을까? 이것은 그들의 문화적ㆍ정치적 특성과 함께 민족성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일본의 지기가 강렬하므로 그 민족성이 탐욕과 침략성이 강하고
  일본은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등 네 개의 큰 섬과 주변 3,000여 개의 작은 섬들로 구성된 섬나라이다. 일본 열도는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하며 태평양과 동해로부터 옆 방향의 압력을 받는 지역이다. 따라서 지각 변동이 심하여 지진과 화산 활동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고 국토의 80%가 산지이다. 일본은 화산의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화산 지형이 펼쳐져 있으며 세계 화산의 10%가 일본 열도에 있다. 일본 열도는 지진 다발 지대로 1923년에 일어난 간토 대지진이나 1995년의 한신 대지진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일본이라는 땅은 끊임없이 변동하여 언제 갈라지고 꺼지거나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한 땅이다. 이처럼 땅 아래 뜨거운 용암이 흐르며 끊임없이 요동치는 일본의 땅은 그 기운이 강렬하다 할 수 있다. 이런 땅에 사는 일본인들은 땅에 대해 다른 지역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인 편안함과 안정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된다. 서로 다른 자연 환경에 사는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와 문화는 각각 다르게 발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제님께서도 “지기가 통일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제각기 사상이 엇갈려 제각기 생각하여 반목 쟁투하느니라.”01고 하시며 사람들이 사는 각 지역의 지기 차이에 의해 독특한 사상이 발생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일본의 강렬한 지기가 어떤 과정에 의해서 일본 민족의 탐욕과 침략성으로 발전하였을까? 일본의 강렬한 지기는 일본 땅을 뒤틀어 많은 화산을 만들어냈다. 언제 갑자기 폭발하거나 변할지 모르는 불안한 땅에 사는 일본인들은 ‘신도(神道)’02라고 하는 그들 나름의 고유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학술이사인 정혜선은 그의 저서 『한국인의 일본사』에서 이 신도는 일본 고대에서 자연 발생한 하나의 종교로서 일본인의 문화와 가치관, 정치에 흡수되어 고대 이래로 존속해왔으며 여전히 엄청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도는 일본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본 사회 곳곳에 스며있다고 한다. 
  일본의 신도는 원시 신앙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땅이 쩍쩍 갈라지고 화산이 폭발하며 쓰나미가 지나가 순식간에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자연 환경에 사는 일본인들은 심오한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심원한 하늘을 섬기기보다는 당장 목숨을 살려주고 현실의 소원을 들어주는 주술적인 대상으로써의 신을 섬겼다. 원시 신도의 신앙체계는 지극히 지역적이었으며 자연에 존재하는 영적 대상을 섬기거나 씨족이나 가계의 조상신을 주로 섬겼다. 그 후 여러 부족 중 야마토(大和) 세력이 힘을 얻으면서 그들의 조상신인 태양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 天照大神]이 약 800만 신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일왕은 이 신의 직계 후손으로 종교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왕의 혈통이 한 번도 끊기지 않은 채 현재 일왕인 아키히토까지 이어져왔다. 우리나라로 비유를 들자면 제정일치 시대였던 고조선시대의 단군의 혈통이 지금 현재까지 이어져왔으며 전국 곳곳에 단군을 위시로 한 고유의 신앙이 현존하는 것과 같은 형태라 할 수 있다. 전국에 교회와 절은 거의 없고 성황당과 무속이 일색인 모습을 연상하면 쉬울 것이다.
  일본처럼 최초의 종교적 군주가 대가 끊어지지 않은 채 아직까지 존속한다는 것은 세계사에서 유일하다03. 일본 중세에 사무라이들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지배하여 일왕은 상징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여 정치적 힘이 전혀 없던 때에도 사무라이 정부는 일본 민중의 종교적 상징인 일왕을 감히 제거할 수 없었다. 곧 일왕은 일본인들의 정신적 고향인 신도의 상징이며 고대 일본과 현대 일본을 관통하는 일본의 정체성인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바다라는 물리적 장벽과 화산열도라는 자연 환경 속에서 형성된 독특한 문화를 지님으로써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의 보편성을 얻지 못하였다. 일본의 석학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은 문명사에서 완전 예외’라고 말하며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지역으로 보기도 하였다.
  일본 사상의 특성을 살펴보면, 일본 사상에는 진리, 영원한 가치, 하늘과 같은 것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04. 절대로 변하지 않는 가치에 대해 관심이 없기에 선악의 개념이 모호하고 현실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을 중시하며 그 집단의 가치를 목숨처럼 지키는 것이 그들의 특성이다. 그러나 집단이 잘못된 목표를 향해 가도 진리를 내세우며 집단에 저항한 경우는 드물며 현실의 강자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한다. 그리고 일본은 영원한 진리를 거의 추구하지 않기에 담아낼 정신이 거의 없어서 일본 문화는 지극히 형식에 집중한다. 그래서 형식이 목적이고 미(美)이며 불교 사상, 유교 사상도 형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긴다. 유교와 불교의 본 정수를 추구하고 철저히 이해하려했던 우리와 다르게 신도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서 적절히 ‘디자인’한 디자인 문화인 셈이다. 일본에 전해진 유교와 불교의 본래 정신과 사상은 일본 신도 안에 용해되어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정리하자면, 일본은 원시에 발생한 신앙이 현재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종교적 수장이 현존하고 있다. 그 문화는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고 지극히 형식적이고 탐미적인 것을 추구하며 집단적인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2차 세계대전 시에 ‘천황폐하만세’를 외치며 온 국민이 전쟁에 동참하였던 그들의 집단적 광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신도와 더불어 일본 문화의 특징은 사무라이 문화이다. 이 사무라이가 등장한 것은 일본의 중앙집권 실패와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이라는 대국과 인접하여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수차례 외적의 침입으로 힘을 한군데로 모으기 위해 일찍부터 중앙집권을 이루었다. 반면, 바다라는 장애물 때문에 외적의 침입이 없었던 일본은 중앙집권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못하였다. 또한 지리적 환경도 산이 많고 지역색이 강하여 통일된 상태로 유지하기 힘들었다. 일본은 8세기 즈음에 겨우 왕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다시 왕권이 붕괴되어 혼란한 정국이 되었다. 미약한 중앙 정부는 지방과 농촌 지역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할 능력이 없어 자연히 지방에서는 스스로 무장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사무라이들이다.
  사무라이 사회는 무려 700년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일본인들의 속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실을 넘어선 절대 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일본 문화에서 사무라이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잔인함을 지녔으며 생존을 위한 집단의 단결을 최우선시하였다. 곧 사무라이 사회는 지독한 집단성, 생존을 향한 필사적 노력, 죽음도 불사하는 극단주의, 힘과 강자의 전통이라는 가치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사무라이 사회에서는 서열이 굉장히 중요하여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는 상태를 가장 불안하게 여긴다. 일본인들은 심지어 인사를 할 때에도 서열에 따라 고개를 숙이는 각도가 다르다고 한다. 이러한 사무라이 문화는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정해져 있지 않은 서열을 일왕의 후손인 자신들을 최고위(最高位)로 하여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명분과 어우러져 일제의 군국주의로 변하게 되었다05.
  결론적으로 선과 진리의 보편성이 결여된 일본 신도의 막강한 영향력과 그 상징인 일왕에 대한 맹목적 숭배, 일왕의 후손이라는 우월함과 교만함, 오랜 사무라이 문화 속에 쌓인 잔인함, 그리고 선(善)보다는 집단의 가치를 최우선시 하는 집단성이 한데 융합하여, 20세기 초 우리나라와 중국 뿐 아닌 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전쟁의 폭력성으로 폭발한 것이다. 일제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아시아인 2,000만, 자국민은 310만 명을 희생시켰으며 1945년 대패배로 광란의 폭주를 멈추었다06.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왜곡을 통해 볼 때 그들의 군국주의와 침략성은 사라지지 않고 내면에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 옛적부터 우리나라는 그들의 침해를 받아 왔노라
  사료 상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해를 받은 최초의 시기는 13세기이다. 『고려사』에는 1223년부터 1265년까지 약 40여 년 동안 11건의 왜구 침략이 있다고 전한다. 그 규모는 선박 2척 정도에 인원은 100여명으로 연근해 주민들의 생활에 위협을 주는 정도였고 고려군에 곧바로 제압당하였다07.
  그런데 1350년 이후부터 고려가 멸망하는 1391년까지의 왜구는 이전에 비해 규모와 빈도가 13세기의 왜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빈번하였다. 이 시기는 일본의 내란의 시기로 피폐한 경제를 해결하고 부족한 전쟁 물자를 채우기 위해 우리나라를 침해하였다. 그 규모는 최소 선박 20척에서 최다 500척으로 약 40년 동안 591회나 침략하였고 고려의 정규군과 맞설 정도로 위협이 되었다08. 그 활동 영역은 고려의 전 해역은 물론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까지였으며 중국 조정은 고려에 대해 왜구 진압을 요구하는 등 고려와 중국 간의 외교 문제로까지 발전하였다. 왜구의 침해로 고려는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어 행정을 포함한 여러 기능이 약화되었으며 심지어 1377년에는 왜구의 침략에 의해 개성에서 철원으로 천도까지 하게 되였다. 당시 왜구의 해결 없이는 고려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문제가 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는 왜구가 건국 이후부터 1555년 을묘왜란에 이르기까지 약 160년 동안 165회 침해하였다09. 조선은 강경책으로 태종 때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를 토벌하였고 회유책으로 항구를 개방하여 일본과의 무역을 허가하였다.
  왜구가 민간차원의 노략질이었다면 임진왜란은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를 정복하려 한 전면적 성격의 침략전쟁이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15만의 군사를 파견해 조선을 침략하였다. 7년 동안 지속된 이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약 1백만 명 정도가 사망하였고 농토는 170만 결에서 54만 결로 줄어드는 등 국토가 초토화되어 훗날 발발한 한국전쟁과 비견될 정도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10. 임진왜란은 한일관계를 크게 악화시킨 사건이며 일본 초대 일왕인 진무의 치세 이래부터 메이지 유신이 도래할 때까지 일본이 저지른 가장 큰 범죄행위이며 그 죄의 무게는 일제강점기에 비견될 정도라 할 수 있다.

 
▣ 신방축 공사를 보았음은 신호(神戶)와 어음이 같음을 취함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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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는 일본의 침략성의 근본 원인을 그 지기에 있다고 진단하시고 그 지기를 뽑으시는 공사를 행하셨다. 그런데 이 공사를 직접 일본에 가서 행하시지 않고 현 전라북도 정읍시 감곡면 통석리(通石里) 순촌(蓴村)마을에서 행하셨다. 통석리는 본래 태인군(泰仁郡) 감산면에 속한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정읍군 감곡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방죽인 순지제(蓴池堤)가 ‘순방죽’ 또는 ‘신방죽’으로도 불리는데 이것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을 순촌이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방죽’은 ‘방축(防築)’과 같은 말이며 ‘신방축’은 참호를 뜻하는 ‘濠(호)’자를 써서 한자 지명으로 ‘神濠’라고 표기되었다. 상제님께서 신호(神戶)와 어음(語音)이 같음을 취하셨다고 하신 말씀은 신방축의 한자 표기인 ‘신호(神濠)’와 일본 ‘신호(神戶)’의 어음이 같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상제님의 공사는 발음의 유사성을 통해서 해당 지역을 직접 가지 않으시고 하신 사례가 있으시며11 특정 공사를 받들었던 종도의 인명과 그 공사를 행하신 지역의 지명과도 상관성이 있다. 이 공사는 일본 전체의 지기를 뽑으시는 공사로 대장간의 풍굿불12에 쓰신 글을 태우시면서 행하셨다. 공사보신 후 일본 신호(神戶)에서 큰 화재가 났다는 보도를 갑칠을 통해 들으시고 화재가 일어난 것은 그 지기가 뽑힐 징조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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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신호(神戶)는 일본말로 고베이며 인구 150만 명으로 일본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항구 도시이다. 오늘날의 고베시는 1889년 4월 1일에 성립되었고 고베라는 이름은 도시에 있는 이쿠타 신사의  신사에 기부된 봉호로 이곳의 주민들은 신사에 조세를 바친다.) 취락이 있던 데에서 유래한다13. 고베항은 일찍부터 중국의 송, 명 등의 여러 나라와 거래하여 일본 최초의 국제 무역의 거점으로 번창하였다. 중세에는 이 항구를 통하여 중국의 문물이 흘러들어왔고   1868년 쇄국정책을 펴오던 에도 막부가 고베항을 포함 5개항을 개항하면서 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최대 관문이 되었다. 고베항은 일본 최대, 아시아 최고, 세계 5위의 항구였지만 우리에게 고베대지진으로 알려진 한신ㆍ아와지 대지진14 이후 2005년 기준 일본에서 4위이자 세계에서 38위로 떨어졌다. 일본의 최대 항구였었고 현재 주요 항구여서 외국 문물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고베의 특성은 ‘신호(神戶)’라는 한자 명칭과 맞아 떨어진다. 신명이 배에 실어오는 화물표에 따라 넘어온다는 말씀과15 ‘戶’는 출입구 또는 집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에서 화물표에 따라 신들이 드나드는 문호(門戶)와 같은 곳이 고베 즉 ‘신호(神戶)’라 추측할 수 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문을 거쳐야 하고 양택에서 대문이 상당히 중요한 것처럼 일본이라는 큰 집의 대문이라고 볼 수 있는 신호(神戶)를 통해 상제님께서는 일본의 지기를 뽑으신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이 공사 후 일본의 지기는 앞으로 뽑힐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후 일본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신방축 공사를 보신 해는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1909년 이전이다. 1909년 이후 일본은 일본 역사 이후 가장 폭력적이고 잔인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2차 세계대전 때 최고조에 이른다. 일본의 지기를 뽑으셨는데 왜 일본의 침략성은 오히려 증가했을까? 이를 유추해본다면 질병이나 허약 체질로 인해 균형을 잃었던 사람의 몸이 정상화 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증상이 악화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닐까 한다. 이를 한의학에서는 ‘명현 반응’ 또는 ‘호전 반응’이라고 한다. 명현 반응은 좋지 않았던 몸이 새롭게 질서를 잡으면서 몸속의 나쁜 기운이 나올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동양 의학에서는 “명현 반응이 없으면 병이 낫지 않는다.”라고 할 정도로 오랫동안 앓아왔던 병이 낫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일본의 오랜 병리적인 침략성이 치유되는 과정에서 그 기운이 최대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한다. 
  일본에게 일시천하통일지기를 맡겨주신다는16 상제님의 말씀처럼 일본은 자신들의 침략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우리나라, 만주, 필리핀 등 아시아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해 미국에 항복하였고 일본 건국 이래 최초로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일본 헌법을 제정하도록 강제하였다. 일본 헌법이 평화헌법이라고 불리는 핵심은 제9조에 있다. 전쟁을 영원히 포기하고, 어떠한 군사력도 가지지 아니한다고 하는 조항이 그것이다. 이 평화헌법이 아주 오랫동안 지켜지게 된 것은 일본 내 우익과 진보세력 간의 팽팽한 균형과 일본 국민의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 그리고 국제 사회의 압력 때문이다. 미국은 이 평화헌법을 토대로 일본을 농촌국가로 만들려 하였지만 냉전 시대의 개막과 함께 소련의 위협과 한국전쟁의 발발로 일본을 전략 상 전진기지로 인식하며 대일정책을 수정하였다.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경기가 호황을 이루어 빠른 시간 내에 전후복구를 하였고 이후 공업국가로 발돋움하여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저희의 살림이 분주하게 되어 남을 넘볼 겨를이 없으리라.”17는 말씀처럼 분주하게 살림한 일본은 현재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인 경제 대국이 되었으며 UN에서 미국에 이어 최대 분담금을 내는 공여국가18로 인류 공영에 긍정적 역할도 하고 있다.
 
▣ 맺는말
  상제님께서는 일본의 지기가 강렬하므로 그 민족이 탐욕과 침략성이 강하다고 하시며 그 지기를 뽑는 천지공사를 행하셨다. 일본의 강렬한 지기는 땅을 뒤틀어 육지와 떨어진 화산열도라는 독특한 지형을 만들었고 이 지형에 사는 일본인들은 보편성이 결여된 그들만의 신도라고 하는 독특한 신앙과 사무라이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이 신도와 사무라이 문화의 특성을 살펴보아 그들의 탐욕과 폭력성의 근본을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일본의 독특한 문화는 일제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을 낳는 근본이 되었고 인류에게 커다란 범죄를 저질렀다. 현재 일본은 내부에 우익세력이 세력을 뻗치며 건재하고 있지만 다행히 진보세력과 양심 있는 시민세력이 이를 저지하며 평화헌법을 잘 수호하고 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인류에게 긍정적 역할도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성의 약화와 역할 변화는 상제님의 공사 때문이라 추측된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안위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의 평화와 인류 전체의 공영을 위해 일본의 근저에 흐르는 탐욕과 침략성을 통찰하시고 신방축에서 그 지기를 뽑는 공사를 행하신 상제님의 덕화와 그 넓고 깊으신 혜안에 깊은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광구천하와 광제창생 하시려고 하신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널리 알려 많은 창생이 지상낙원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포덕ㆍ교화ㆍ수도에 임하여야겠다.
 

__주__
01 공사 3장 5절.
02 일본어 발음으로 ‘신토’라 하며 다른 종교와 달리 명확한 교리나 경전이 없다. 대순진리회의
 신도(神道)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03 정혜선, 『한국인의 일본사』, 현암사, 2008, p.416.
04 위의 책, p.11.
05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을유문화사, 1974, pp.32~35 참고.
06 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동아시아 역사와 일본』, 동아시아, 2005, p.196.
07 이영, 『잊혀진 전쟁 왜구』, 에피스테메, 2008, p.9.
08 위의 책, p.10.
09 위의 책, p.10.
10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9E%84%EC%A7%84%EC%99%9C%EB%
 9E%80
11 상제께서 “청주(淸州)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고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 하시고 청도원 류 찬명의 집에 이르러 천지 대신문을 열고 공사를 행하
 셨도다. 그때에 김 송환이 그 시종을 들었느니라. (공사 2장 6절)
12 풍구는 다른 말로 풀무이며 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이다. 골풀무와 손풀무 두 가지가 있다.
13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B%B2%A0
14 1995년 1월 17일 효고현의 아와지 섬 북쪽을 진원으로 발생한 진도 7.2의 도심 직하형 지진. 6,434명이 사망
 하고 43,792명이 부상한 1923년 간토대지진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최대 지진이다.
15 예시 29절.
16 공사 2장 4절.
17 공사 3장 31절.
18 참고로 우리나라는 원조 수혜국에서 2009년 1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개발원조위원회
 (DAC)에 가입하여 공여국이 된 유일한 국가이다. 
 
 
참고자료
.『전경』, 대순진리회 출판부, 1974.
. 정혜선, 『한국인의 일본사』, 현암사, 2008.
. 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동아시아 역사와 일본』, 동아시아, 2005.
. 이영, 『잊혀진 전쟁 왜구』, 에피스테메, 2008.
.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을유문화사, 1974.
.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
 

 《대순회보》 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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