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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여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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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선근 작성일2019.03.05 조회3,6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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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선근(대순종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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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는 화천하시기 직전에 당신께서 “죽은 후에는 묶지도 말고 널 속에 그대로 넣어두는 것이 옳으니라.”01는 말씀을 전하셨다. 염을 할 때 시신을 꽁꽁 동여매는 일은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전해지는 풍속일진데, 상제님께서는 왜 묶지 말라고 하신 것인가? 물론 이 말씀은 훗날 상제님의 뒤를 이으실 도주님에 의해 정식으로 장례가 치러지게 될 때까지 염을 하지 말고 초분으로 둔 채 기다리라는 의미일 수 있다.02 그런데 상제님의 이 말씀을, 사람이 숨을 거두면 그 시신은 묶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으로 일반화시킬 수도 있을까? 이 물음은 시신을 꽁꽁 단단히 잡아 묶어내는 행위가 비록 사회풍속이라고 하더라도, 그 묶을 때의 풍경이나 묶인 후의 고인 모습이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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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현대 장례문화를 보면, 사람이 숨을 거두면 일단 장례식장으로 운구한 후 고인의 옷과 몸을 바르게 하는 수시(收屍)를 하고 안치(安置)를 한다. 그리고 영정사진을 마련한 뒤 빈소를 설치하고 부고를 돌리며 제사상을 마련한다. 그 다음날에는 고인의 몸을 깨끗하게 닦고 수의를 입히는 염습(殮襲)을 하는데, 바로 이때 몸을 세 마디 혹은 일곱 마디로 꽁꽁 묶는다. 시신을 단단히 동여매는 이유는 시신이 흩어지지 않고 한 자리에 자리를 잡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허나 단지 이 이유만이라면 굳이 묶지 않고도 관 안에 이불솜을 촘촘히 박아 넣어두면 될 일이다.
  한 민속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시신을 묶는 풍습, 즉 ‘묶여진 죽음’의 이면에는 한국인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령신앙(死靈信仰)이 숨어있다고 한다. 죽은 자는 살아있는 자에게 복을 줄 수도 화를 줄 수도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죽음은 이 세상과의 이별을 뜻하므로 그 자체가 이미 서러운 것이고, 따라서 대체로 죽은 자는 그 서러움을 풀기 위해서 해코지를 할 가능성이 큰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더구나 그 죽은 자가 저승에 넘어가지 못하고 이승에 머물게 되면 화를 줄 가능성이 크다. 고인에게 저승으로 잘 가도록 노잣돈을 쥐어주거나 혹은 관을 빙빙 돌려 아예 돌아오는 길을 완전히 잊어버리도록 유도하는 일은 그 때문이다. 만약 고인이 저승에 가지 않고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 살아있는 자와 접촉한다면 더 큰 해악을 끼친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고인을 꽁꽁 결박하여 자유롭게 무덤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둔다. 원래 결박이란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니, 시신을 꽁꽁 동여맴으로써 혹 시신이 줄지도 모를 해악을 미리 제거하겠다는 말이다.04
  그런데 도인들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별개가 아니며 오히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더구나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도를 닦을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는 존재로 상정된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산 자는 수도에 더욱 매진해야 하고, 이로써 수도를 한 자와 죽은 자(조상)들은 모두 같은 운수를 누릴 수 있다.05 이렇게 보면, 시신을 묶는 행위가 비록 사회풍속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면에 죽은 자를 배척하는 죽음관이 담겨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일정한 행동지침을 전해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고인의 시신을 결박하든지 결박하지 않든지, 그에 대해서는 종단 내에 전해지는 분명한 지침을 아직 전해 듣지 못했기에 어디까지나 그 결정은 장례를 치르는 각자에게 달린 일이기는 하다.06 
  여담이지만 십 수 년 전, 필자의 조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셨던 조부께서는 어렸을 때 집 안에 설치된 글방에서 독선생(獨先生)을 초빙하여 한학(漢學)을 전문적으로 배우셨으며 평생을 유학자로 사신 분이다. 더구나 성명학과 사주학, 풍수에도 나름 조예가 깊으셨다. 어느 날은 문득 집으로 찾아오시더니, 나에게 특정한 어느 날짜를 말씀하시며 그 날이 네 평생에 가장 좋은 날인데 아느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도를 닦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에 나를 시험해보고 싶은 모양이셨다. 물론 나는 날짜나 뽑고 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날짜는 필자가 군 복무 기간 동안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시학공부를 제대 후에 다시 들어가게 된 바로 그 날이었다! 이렇게 항상 필자를 신경써주시던 조부께서는 추석날 차례를 모시기 위해 온 가족이 다 모여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앉아서 운명하셨다. 안방에 온 가족이 빼곡히 모인 그 자리에서 앉은 채로 갑자기 숨을 거두셨으니 무척이나 놀랠 수밖에 없었다. 조부께서는 평소 지병이 있던 것도 아니셨으니, 그야말로 한명(限命)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생일이 설날이셨던 조부께서는 추석날을 제삿날로 하게 되셨다. 조부의 급한 죽음을 당해, 온 가족은 옛날 방식 그대로 장례를 치렀다. 필자가 처음으로 완전한 전통 장례절차를 직접 보고 겪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조부의 딱딱해진 시신을 꽁꽁 동여매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났다. 비록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아직 육신은 그대로인데, 그 고통이야 오죽 하셨을까? 하지만 집안 항렬과 서열에서 제일 막내뻘인 내가 나서서 풍속과 어긋나게 그 일을 제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필자는 아직도 돌아가신 조부의 유품인 낡은 나경(羅經: 패철) 하나를 가지고 있다. 어쩌다 그 나경을 볼 때마다 그 때의 일이 떠오르면서 ‘묶여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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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전경』, 행록 5장 35절.
02 신상미, 「상제님의 성골(聖骨」, 『대순회보』 139호, 2012, pp.42~47, 참조.
03 “염의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시신의 결박이 가혹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공포감마저  자아내게 하는 장면이다.” (김열규, 「전통문화 맥락 속의 원한-증산교적 원령관념의 배경으로서-」, 『증산사상연구논집』 6, 증산사상연구회, 1980, p.223.)
04 김열규, 같은 글 참조.
05 차선근, 「근대 한국의 신선관념 변용-대순진리회의 지상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종교연구』 62, 한국종교학회, 2011, pp.163-164; 윤용복, 「대순진리회의 조상의례와 특징」, 『종교연구』 69, 한국종교학회, 2012 참조.
06 증산교단의 다른 경전에는, 상제님께서 시체를 거두어 염할 때 시신을 묶는 것은 선천의 악법이라고 하셨다거나,(『천지개벽경 연구』, 동곡서원, 1996, p.404) 혹은 부모의 시신을 묶어서 묻는 것은 부모를 원수(怨讐)스럽게 아는 자라고 하셨다는 내용이 있다.(『대순전경』 6판, 동도교증산교회본부, 1965,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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