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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에 남긴 동양 밀교의 선도자 혜초(慧超)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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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04 조회3,5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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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신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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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로드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거니는 상인들의 행렬을 떠올린다. 그러나 오아시스 말고도 초원로, 해로가 있었다. 단,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이용도에서 많은 기복을 보여 왔던 초원로나 해로와는 달리 고대로부터 변동 없이 줄곧 중요한 동서교역로였기에 실크로드라 하였을 때 사막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단길’이라는 의미가 있는 ‘실크로드’는 100여 년 전에 출연한 낱말로서 독일의 지리학자 리흐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1833~1905)이 처음 사용하였다. 중국으로부터 서북 인도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이 비단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 ‘자이덴스트라센(Seiden strassen: seiden=비단, strassen=길, 영어로 Silk Road)’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01 수출 또는 수입되는 품목에는 비단뿐만 아니라 소금, 양모, 비취를 비롯한 갖가지 상품과 종교, 예술 등의 문화가 있었다.
  특히 1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전역의 정치ㆍ경제ㆍ문화 모든 면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남긴 불교를 비롯하여 현대에도 여전히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중근동02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실크로드의 주변에서 생겨난 종교이다.
  우리나라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면서 불승(佛僧)이나 유학생들의 입당(入唐)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신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약 400년 동안에 구법(求法)을 위해 수나라와 당나라에 들어간 신라승의 수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신라승은 당에서 구법한 뒤 대부분 귀국했고 일부는 인도로 갔으며, 일부는 중국에 남아서 불사를 주지(住持)하기도 하였다. 인도로 향한 스님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이라 할 수 있는 답사 기록을 남긴 혜초(慧超) 스님을 통해 배움을 향한 종교인의 정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704년(성덕왕 3)에 출생한 신라 스님인 혜초는 719년(성덕왕 18) 16살의 앳된 나이에 서해를 건너 당(唐)의 광주(廣州)로 떠났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 서역의 각종 문물과 경교(景敎)ㆍ조로아스터교ㆍ마니교ㆍ이슬람교 등의 종교 그리고 사람들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때이다. 혜초는 광주에서 남인도 출신의 승려 금강지(金剛智, 671~741)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밀교03 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승의 권유로 불법을 직접 체험하고 깨닫기 위해 723년에 광주를 떠나 인도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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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사람들은 인도를 천축(天竺)이라 불렀다. 천축이라는 말은 인더스 강을 일컫는 옛 페르시아 어인 ‘헨뚜’ 또는
미얀마 어인 ‘떤뚜’에서 유래되었다. 혜초가 이 천축을 크게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그리고 중천축 등 5개 지역으로 나누어 돌아보고 남긴 기록이 바로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중국 둔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에서 수많은 고문서를 수집하면서 발견하였다. 이 책은 한 권의 두루마리로 총 227행 5,893자, 총 길이 358cm로 되어 있다.04 혜초가 인도에 도착하여 불교의 8대 성지를 순례한 후 서쪽으로 간다라를 거쳐 페르시아와 아랍을 지나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이어 쿠차와 둔황을 거쳐 727년 11월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돌아왔다. 이 답사의 기록들은 8세기 무렵 각국의 역사, 정치, 문화, 풍습, 물산, 종교 등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멀리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기 어려운 고통마저도 수행의 과정으로 받아들인 수도자로서의 모습 또한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지금은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운송 수단으로 낙타, 말, 배 등이 고작이었으니 그 고생은 이루다 말할 수 없다. 『왕오천축국전』에 어느 겨울 견딜 수 없이 힘든 고통과 추위를 오언시로 표현한 부분이 있다.
 
 
冷雪牽氷合(냉설견빙합) 차디찬 눈이 날려 얼음 위에 쌓이고
寒風擘地烈(한풍벽지열) 차가운 바람이 땅이 갈라질 듯 매섭네.
巨海빙墁단(거해빙만단) 대해는 얼어붙어 단을 깔아놓은 듯하고
江河凌崖설(강하능애설) 강물은 제멋대로 기슭을 갉아먹는구나.
龍門절瀑布(용문절폭포) 용문(龍門)은 물이 얼어 폭포가 끊어지고
井口盤蛇結(정구반사결) 우물 테두리는 똬리 튼 뱀처럼 얼었구나.
伴火上해歌(반화상해가) 불을 벗 삼아 층층대를 오르며 노래하지만
焉能度播蜜(언능도파밀) 어떻게 파밀(播密: 파미르 고원)을 넘을 수 있을까.
 
 
  힘든 고통을 이기며 목적지를 향하지만 도착할 수 있을지 불안해하는 자신과의 싸움을 느낄 수 있다.   
  장장 4년에 걸친 약 2만 km의 대장정을 다녀와서 장안으로 돌아온 그는 밀교 교리를 한역(漢譯)하는데 힘써 중국 밀교를 정리하고 발전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곳에서 혜초의 입지는 뛰어났다. 774년 오랜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을 때 황제의 명에 따라 흑하(黑河)의 옥녀담에서 기우제를 주관했을 뿐만 아니라, 스승 금강지가 입적하고 스승의 첫 제자였던 불공(不空, 705~774)마저 입적하였을 때 황제의 지원으로 장례를 치른 후 황제의 베풀어준 하사와 부조에 감사하는 표문을 여섯 제자 중에서 대표로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다 고향 땅을 밟지도 못하고 780년 7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05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당나라에서 존경받는 고승으로 자신의 일에 전력을 다하였던 그는 『왕오천축국전』에 그 마음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16살의 어린 나이에 타국으로 떠나 밀교를 연구하는 스승 금강지를 만났고, 20살에는 부처의 발자취를 따라 불법을 직접 체험하고 깨닫고자 4년 동안 40개국을 다니는 등 그의 정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현재의 최신 운송기로도 큰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다닐 수 없는 거리를 그는 걸어서 또는 배를 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디뎠다.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그에게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하여 지극히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인간의 모든 일을 가능케 한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혜초는 적심(赤心)과 진심(眞心)을 의미하는 성(誠)으로 자신의 수행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밀교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남을 잘 되게 함은 상생대도의 기본원리요 구제창생의 근본이념이라.”06 라는 우리의 근본이념과도 통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강한 의지와 신념을 비롯하여 남을 잘 되게 하려 한 그의 노력만큼은 인류구원의 천지공사를 행하신 상제님의 은덕을 이 세상에 펴는 우리 수도인이 가져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내 마음을 정직히 하고 내 주변 사람이 잘 될 수 있도록 작은 것부터 성실하게 실천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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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수잔 휫필드, 『실크로드 이야기』, 이산, 2001 참조.
02 리비아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의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를 가리킨다.
03  또는 밀의(密儀)종교의 약칭. 진언(眞言)밀교라고도 하는데, 일반의 불교를 현교(顯敎)라 하는 것에 대한 대칭어이다. 밀교는 7세기에 대승불교의 화엄(華嚴)사상ㆍ중관파(中觀派)ㆍ유가행파(瑜伽行派)사상 등을 기축으로 하여 인도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
04 1,300년 만의 귀향 아! 왕오천축국전, 동아일보, 2011. 1. 2, 제 1면.
05 정수일 역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참조.
06 『대순진리회요람』, p.20.

 

​《대순회보》 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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