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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王陽明)의 용장오도(龍場悟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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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04 조회4,1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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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박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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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중국 사상의 양대 산맥이라고 하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를 들 수 있습니다. 유가사상은 유위(有爲)를 추구하며, 도가사상은 무위(無爲)를 추구합니다. 곧 유가사상은 인간의 개조를 통해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그 주된 목표이고, 도가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치에 따라 인간의 천품성(天稟性)을 지켜나가는 것이 도화낙원을  이룩하는 길이라고 여깁니다.

  유가의 유(儒)는 인(人)과 수(需)를 합한 글자입니다. 수(需)는 필요하다는 뜻이니 유가사상은 사람에게 필요한 예의범절, 인륜도덕을 밝히는 학문사상이라 하겠습니다. 유가사상의 흐름은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 시대의 원시유학을 춘추시대에 공자께서 집대성하여 오늘날 정치적 이념과 학문체계로서의 유교(儒敎)가 형성되었고, 그 후 맹자와 순자의 사상으로 논쟁이 활성화되면서 그 내용이 풍부해졌습니다. 진(秦)나라 때는 분서갱유 사건으로 일시 경학이 단절되었고 한(漢)나라의 동중서(董仲舒)는 유교를 국학의 위치로까지 올려놓았습니다. 이 시기와 수(隋)ㆍ당(唐)시대에는 경전의 자구 해설에 치중한 이 성행하였습니다.
  송(宋)나라 때는 경전의 자구에 매달린 훈고학과는 달리 , 소강절(邵康節), 장재(張載), 정자(程子), 주자(朱子) 등의 현철(賢哲)이 대거 출현하여 전통적인 음양오행사상과 불교ㆍ도교의 이론을 섭취하여 전통유교에 새로운 요소를 부가하여 새로운 유교이념을 창출하였기 때문에 신유학(新儒學)이라 하고, 주자가 리(理)사상을 중심으로 집대성하여 주자학 또는 성리학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주자학의 대항자로 육상산(陸象山)은 주자의 ‘성즉리(性卽理)’라는 리학(理學)에 ‘심즉리(心卽理)’라는 심학(心學)으로 대립하였습니다.
  명대에 들어와 왕수인(王守仁: 호 陽明, 1472~1529)은 육상산의 심학에 기초하여 용장이라는 유배지에서 깨달은 ‘용장오도’의 내용으로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주자의 리학을 비판하고 심즉리(心卽理)론, 지행합일(知行合一)론, 치양지(致良知)론 등으로 양명학을 완성합니다. 이 글에서는 왕수인이 용장에서 깨달았다는 ‘용장오도’의 내용과 의의를 『전경』의 성구를 근거로 한번 유추해 보고자 합니다.
  백사천난(百死千難), 즉 백번의 죽을 고비와 천번의 난관을 겪었다고 이야기되는 왕양명은 명대 중기인 1472년 9월 30일에 절강성(浙江省) 소흥부(紹興府) 여요현(餘姚縣) 서운루(瑞雲樓)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모친이 임신한 지 14개월이 지나도 아이를 낳을 기색이 없던 어느 날 밤 양명의 할머니가 꿈에 신인이 적색 옷을 입고 구름 속에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나타나 갓난아이를 건네주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갑자기 아기가 태어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 후 사람들은 양명이 태어난 집을 상서로운 구름의 누각이란 뜻으로 서운루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집안은 관료 지주였으며 부친 왕화는 이부상서까지 역임한 명가였습니다.    
  대부분의 천재처럼 그도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했습니다. 11세에 조부 죽헌공을 따라 북경을 간 적이 있는데 조부가 손님과 경치를 보면서 시상을 떠올리던 중 양명이 오히려 먼저 시를 다 지었습니다. 손님이 소년의 시를 듣고 놀라 이번에는 폐월산방(蔽月山房: 달을 가린 산방)이란 제목으로 시를 짓게 했는데 이번에도 즉시 다음과 같은 멋진 시를 읊었습니다.
 
 
山近月遠覺月小 산은 가깝고 달은 멀어서 달이 작은 듯하니
便道此山大於月 이 산이 달보다 크다고 쉽게 말하네.
若人有眼大如天 만일 사람의 눈의 크기가 하늘과 같다면
環見山小月更闊 오히려 산이 작고 달이 더욱 광활함을 보게 되리라.
 
 
  양명의 총명이 극에 달했고, 재기 발랄한지라 부친은 그에게 개인 선생을 붙여 공부시켰는데, 12세가 된 양명이 천하에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선생이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라고 말하자 그는 “그것은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학문을 하여 성현이 되는 것이 천하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세 때에 활쏘기ㆍ말타기를 배우고 병서를 읽으며, “지금의 유학자들은 공연히 문장만을 공부하며 부귀를 추구하고, 글짓기나 즐기며 태평을 탐하고 있지만 일단 사변이 나면 전혀 손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하였습니다.
  큰 뜻을 품은 양명은 15세에 집을 떠나 용관, 산해관 등 변방 지역을 유람하며 영웅들의 발자취를 둘러보았습니다. 선비답지 않게 호탕했던 그는 말타기와 활쏘기 등에도 능했고 병법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왕조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므로 봉기와 민란이 잦았는데 그 대책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양명은 17세 가을에 부친의 명에 따라 고향으로 가서 신부를 맞이하였는데 결혼한 날 식을 마친 그는 집을 빠져나와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철주궁(鐵柱宮)이란 도교 사원에 들어가 그곳의 도사를 만나 함께 정좌하며 양생설을 논하다가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어 집안에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자유분방하면서도 뜻이 컸던 양명은 학문하는 데 있어서도 제자백가 등을 섭렵하며 좌충우돌하였으나 21세에 향시에 합격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유학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체계를 얻기까지 세 번 자각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회고한 바 있는데 먼저 그는 주자의 격물(格物) 학설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錢)이라는 친구와 함께 대나무밭에 가서 대나무를 보며 격(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하기 시작했는데 양명의 친구는 사흘 만에 쓰러져 병을 얻었고 양명도 아무 깨우침을 얻지 못한 채 7일 만에 몸져누워 버렸습니다. 그래도 그는 주자의 도를 깨우치기 위해 5~6년간 수많은 철학 서적을 열정적으로 섭렵해 나갔습니다.
  양명은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과거 시험에 25세까지 두 번이나 응시했지만, 운이 없었던지 연속 떨어졌습니다. 그때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자 양명은 껄껄 웃으면서 태연히 말했습니다. “세상은 낙방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나는 낙방한 일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네!” 호탕했던 양명은 결국 세 번만인 28세에 합격하여 진사로 급제했고 그때부터 관직에 나아갔습니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그 후에도 식지 않아 ‘성현의 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는데 ‘주자학의 도’에 대한 철저한 분석 끝에 그는 회의적인 결과만 얻게 되었습니다. 방황하던 양명은 불가와 도가 서적을 탐닉하며 자신을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30세 때, 그는 공사를 처리하는 길에 우연히 구화산(九華山)을 유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선도에 조예가 깊은 한 도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찾아갔으나 도사는 두 번이나 양명의 청을 거절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그는 물러나지 않고 또 자리로 쫓아가 거듭 절하며 진리를 청했습니다. “아무리 나를 공경해도 소용이 없다. 그대는 세속의 한 관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직도 명예와 이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니, 선인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선인을 좋아하는 데 불과하다.” 도사의 말을 들은 양명은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짚은 것이라 생각하며 비로소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도 양명은 도가에 깊이 빠져 유명 도사들을 방문했고, 자신도 수련에 몰두했습니다. 31세, 양명은 병을 핑계로 정사를 중단한 뒤 절강에 돌아와 양명동에 집을 짓고 정식으로 수련 공부를 시작, 여러 가지 술법과 도술을 연마하여 마침내 신통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양명은 친구들이 오고 있다며 하인에게 성문으로 가서 친구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하인이 가보니 과연 성문 앞에는 친구들이 오고 있었습니다. 놀란 친구들은 그때부터 왕양명을 도사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양명은 이런 신통술이 철학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더 높은 도를 얻기 위해 입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차마 부친에 대한 효 때문에 망설였고 심사숙고 끝에 그 결심을 포기했습니다.
  양명이 어느 날 서호(西湖)에 있는 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3년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좌선 수행하는 승려가 있었습니다. 양명은 그 스님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무얼 그렇게 하루 종일 중얼거리느냐!”고 외쳤습니다. 고승은 고함에 깜짝 놀라 그를 노려보며 화를 냈습니다. 화를 내는 고승에게 눈을 감고도 고향의 집을 그렸고, 부모 친지들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면서 형식적인 수도를 하는 것을 꾸짖자 선승은 눈물을 흘리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양명이 이미 도가와 불가의 출가 제도를 비판한 것을 넘어서 스스로 심도(心道)를 터득했음을 보여줍니다. 34세 되던 무렵부터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때 그는 “사람은 우선 반드시 성인이 되고자 하는[爲聖人] 뜻을 세워야[立志]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양명의 나이 35세 때, 무종이 즉위하자 조정의 권력은 환관들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왕양명이 환관 우두머리 유근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유근은 칙령을 빌려 양명을 체포하고 투옥한 후 곤장 40대를 때려 그의 엉덩이가 찢어지고 허벅지의 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는  심한 충격으로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최악의 상태로 투옥되어 12월 혹한의 옥중에서도 『주역』 읽기에 열중하였습니다. 그가 상처를 딛고 살아나자 유근은 다시 국경 근처의 오지인 ‘용장’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유근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자객을 보내 그를 도중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양명은 유근의 자객에게 술을 먹이고 그가 만취한 틈을 타서 두건과 신을 강가에 벗어두고 전당강에 투신한 것처럼 위장하였습니다.
  그가 37세 되던 봄, 도망 끝에 도착한 곳은 귀양지인 용장의 묘족 원주민 마을이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서 귀양 온 몇 명의 망명자와 만날 수 있었는데, 모두들 비참한 처지였습니다. 조정에서 언제 자객이 올지 모르고 열악한 오지에서 언제 병에 걸려 객사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양명은 2년간 살았습니다. 그 동안 그는 을 만들고 스스로 맹세하여 ‘나는 다만 천명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며 그 옆에 앉아 밤낮으로 침묵 속에 고요함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래되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병에 걸렸으나 양명만은 오히려 심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는 병든 망명가들을 위해 나무를 하고 물을 긷고 밥도 지었으며, 도학을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인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갈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잠자리에서 생각하다 갑자기 크게 깨우쳤습니다. 10년 동안 고민하고 찾아 헤매던 도중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 충분하며, 이전에 바깥의 사물에서 이치를 구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01을 깨달았습니다. 이 험한 귀양지에서 마침내 진리를 찾았으니, 이를 ‘용장오도(龍場悟道)’라 합니다. 용장의 생활 이후 양명은 ‘내 마음이 이치이다’라는 심즉리설을 토대로 지행합일설, 치양지설 등을 차례로 주창하면서 그의 사상적 체계를 구축해 나갑니다.
  불혹의 나이(40세)가 된 양명은 그해 1월에 관리의 직위부여를 검토하는 벼슬인 이부험봉청리주사(吏部驗封淸吏主事)에 발탁되어 북경에 머물게 되고 제자들은 나날이 증가하였습니다.
  1516년(45세), 양명은 도찰사로 부임하여 남부의 도적을 진압한 이후에 수년간 강서 여러 곳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1519년 강서성 남창에서 일어난 모반 사건까지 신속하게 진압했으나 조정에서 상을 받기는커녕 환관들의 시기와 비방, 위해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 사이에도 틈만 있으면 그는 당대 학자들과 토론했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들은 주희 제자들처럼 구속되어 공부하지 않고 생기발랄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산중의 적을 깨뜨리는 것은 쉽고 마음의 적을 깨뜨리는 것은 어렵다.”고 했습니다.
 『전습록(傳習錄)』02의 기록에 의하면 양명은 양지(良知)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가슴속에 각각 하나의 성인을 지니고 있다[人胸中各有個聖人]. 다만 스스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자신이 성인을 묻어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양명은 56세 때, 한 개의 화살도 부러뜨리지 않고 한 명의 부하도 사상시키지 않으며 묘족의 반란을 진압했고, 오랑캐의 습격도 오는 길에 평정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피로가 쌓여 병을 얻었는데 양명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1528년, 57세). 이처럼 역동적이고 반권위적인 생기발랄한 사상은 그가 죽은 후에도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명대의 양명학의 체계를 완성하는 전기를 마련한 용장오도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앎이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의식(意識)의 작용입니다. 의식이란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깊이 궁구해보면 깨달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해 이보다 더 명쾌한 경구는 없을 것입니다. 심부재도(心不在道)나 도재심공(道在心工)이라, 마음에 도가 있는 것은 아니나 도는 마음으로 닦은 공력으로 깨닫게 된다는 경구입니다. 이 구절이 어느 정도 밝게 알아져야 도와 마음의 관계를 이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道)가 영(靈)이고 영이 신(神)입니다.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 이것이 깨달음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그러면 용장에서 그 옛날 왕수인이 깨달은 바는 무엇일까요. 그가 우주적인 이치를 밝게 안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자신의 체험과 학습에 따라 형성된 그릇에 준하여 깨닫게 됩니다. 물론 사람들은 저마다 그릇을 타고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후천적인 체험과 학습을 통하여서도 깨달음의 그릇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배움이 있는 사람이 깨달아도 더 크게 깨닫는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르는 것입니다.
  왕수인이 공부한 것은 주자학이었습니다. 주자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세상에 이치가 있다는 것은 알고 그 이치가 사사물물에 모두 담겨 있으며 자신의 본성에도 담겨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자신은 성인군자가 되어 있지 못한가 하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뜻을 세우기를 꼭 성인의 도를 깨달아 성인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주자가 제시하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방법으로 성인의 도를 깨치고자 하였으나 사물을 격(格)하여 앎에 이르는 격물치지의 과정은 자신에게 아무런 깨달음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도 깨달음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본질을 알지 않고서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새롭게 도를 추구하는 학습의 과정으로 다가온 것은 불가의 참선이었습니다. 그리고 도가의 호흡법이었습니다. 그는 도가적인 수련방법을 통하여서도 어느 정도 마음의 이치를 터득하였습니다. 자그마한 신통력을 얻었지만, 그것은 마음의 작용 중의 일부일 뿐 신통력을 부린다고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지식도 찾아다녔습니다. 당대의 가장 권위 있는 학문이었던 주자학으로 그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고 선지식을 찾아다녔으나 그의 진정한 스승은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수행하는 출가승을 하산시키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를 좌절케 하였지만, 그의 구도심을 꺾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용장으로 유배되는 사건입니다. 당시 권세가이던 한 내시의 모함으로 용장으로 유배를 간 것인데, 그것은 정식적인 유배가 아니라 죽음을 피하여 숨어든 곳이 용장이었으므로 유배생활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그는 선가에서 배운 장생술로 석관을 만들고 약초를 섭취하면서 자신의 섭생을 잘 조절하였습니다. 선가의 도술은 그의 건강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생존조건이 열악한 환경이었으므로 그러한 환경에서 도를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그의 마음은 안으로 향하게 됩니다. 열악한 환경이 그를 내면으로 들어가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그가 37세 되던 해 어느 날 밤에 꿈에서 깨어 일어나면서 그는 대오각성하게 됩니다. 그가 깨달은 내용이란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며 찾아 헤매던 성인의 도가 자신의 마음 안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심즉불(心卽佛)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는 유가적 표현으로 심즉리(心卽理)라 한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방법에서 불가의 돈오(頓悟)와 점수(漸修)가 유가에서 존덕성(尊德性: 덕성을 높임)과 도문학(道問學: 묻고 배우는 길을 밟음)으로 전이된 것으로 그것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본질적인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돈오가 존덕성이고 점수가 도문학입니다. 돈오와 점수는 깨달음이라는 과정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영(靈)이 내재하므로 돈오가 가능한 것이고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점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실제적인 과정이므로 돈오와 점수 또한 실제로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어디까지가 돈오이고 어디까지가 점수인지 그 경계를 구분 짓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이것을 두뇌의 작용으로도 말할 수 있는데 우뇌의 작용이 돈오라면 좌뇌의 작용이 점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맹자는 인간이 배우지 않고도 본래부터 아는 것을 양지(良知)라 하였고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능력을 양능(良能)이라 하였습니다. 양명은 이 둘을 합하여 마음의 본체를 양지(良知)라 하고, 이 양지는 조화의 정령(精靈)이라 하늘을 낳고 땅을 낳고 귀신[鬼]을 이루며 주재자[帝]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성인의 양지는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의 해와 같고, 현명한 사람의 양지는 엷은 구름이 떠 있는 해와 같으며, 어리석은 사람의 양지는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의 해와 같다고 했습니다. 비록 밝고 어두운 차이는 있지만, 흑백을 구분할 수 있는 해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이것이 만물일체론의 근거가 됩니다.
  그는 만년에 장생(長生)이라는 시의 끝에 양지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간결하게 표현하였습니다.
 
 
千聖皆過影  뭇 성인은 모두 지나가는 구름이요
良知乃吾師  양지가 곧 나의 스승일세
 
 
  양명의 양지는 도주님께서 「포유문」에 밝혀주신 심령(心靈)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만일 양명이 「포유문」을 읽었다면 아마도 무릎을 치며 통쾌해했을 것입니다. 성공을 이루고 문리(文理)를 이룩하는 첩경이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양명이 용장에서 얻은 깨달음과 같은 것입니다. 도주님께서는 한량없이 지극한 보배가 바로 나의 심령이라[無量至寶 至寶卽吾之心靈也] 하시며 심령과 통하면 귀신과 더불어 수작할 수 있고 만물과 더불어 질서를 함께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세상에 상제님께서 펼쳐놓으신 한량없는 대도가 있으니 나의 심기(心氣)를 바르게 하고 나의 의리(義理)를 세우고 나의 심령(心靈)을 구하여 상제님의 임의(任意)에 맡기라는 달관하신 수행의 심법(心法)을 만수도인들에게 내려주셨습니다. 도전님께서도 『대순지침』에서 도주님의 포유하신 인도에 따르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실로 ‘정오지심기(正吾之心氣) 입오지의리(立吾之義理) 구오지심령(求吾之心靈) 임상제지임의(任上帝之任意)’의 가르침은 상제님과 도주님, 도전님의 연원 맥을 사상적으로 관통하는 핵심적 교의가 아닌가 합니다. 왕양명의 용장오도를 빌어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참고자료
.『전경』
.『대순지침』
.『대순진리회요람』
. 최재목, 『내 마음이 등불이다』, 이학사, 2003.
. 유명종, 『왕양명과 양명학』, 청계, 2002.
. 김학주 역저, 『전습록』, 명문당, 2005.
. 유명종, 『왕양명과 양명학』, 청계, 2002.
. 陳來/ 전병욱 옮김, 『양명철학』, 예문서원, 2003.
. 조준상, 『음양의 조화』, 서광사, 1999.
. 한국종교연구회, 『세계종교사입문』, 청년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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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始知聖人之道, 吾性自足, 向之求理於事物者誤也. (「연보」 37세조), 최재목, 『내 마음이 등불이다』, 이학사, 2003, p.116.
02 양명의 제 학설과 가르침, 서간 등을 그 제자들이 편집한 것으로 ‘전습’이라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전(傳)한 바를 익혔는가(習)”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순회보》 1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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