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도 스타일대로 하면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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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남우 작성일2021.01.17 조회4,178회 댓글0건본문
잠실5 방면 선무 이남우
세상에 스타일 없는 사람 있을까? 사람마다 성격과 행동이 각인각색이다.
“이건 내 스타일이야, 난 이런 스타일 마음에 들어.”
“난 이런 스타일은 별로야!”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같이 일을 이루고, 앞으로 같이 잘 살 수 있을까? 얼마 전 후각과 좀 더 좋은 관계를 위하여 시원하게 대화하고 싶어서 작정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처음 시도해봤다.
“선무는 사람을 만나고 교화할 때 모든 진액을 뽑아내듯 힘을 가득 실어 말해요. 교화 전에 열심히 준비해서 계획대로 다 쏟아내듯 교화하는 게 느껴져서인지 좀 급한 감이 있고, 그러다 보면 부담스럽기도 해서 편하지 않거든요. 좀 더 여유를 갖고 편안하게 대화하면 더 좋은 거 같아요. 근데 선사는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시는 거 같아요. 전 선사랑 스타일이 비슷해요.”
후각은 이렇게 말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이어서
“그렇지만 그동안 선무의 진심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고요.”
“아! 그렇죠. 내 스타일이 사교적이지 않아서 일하듯 상대를 대하다 보면 딱딱해지고, 상대방은 그걸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요. 허 허….”
나는 후각의 말 뒷부분은 건너뛴 채, 앞부분에 다급히 수긍했다. 후각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제야 복잡한 감정을 뒤로하고, 머릿속 대화를 다시 풀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아, 어디서부터 다른 걸까?’
사실, 나는 대순진리회에 입도해서 상제님을 알고 진리를 알게 되어 정말 좋았지만, 사람과 관계 맺음은 힘들었다. 나는 내향적인 편이라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일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데 익숙하고, 과정을 즐긴다기보다는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사람이다. 성향이 이렇다 보니 포덕을 하긴 해야겠는데,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일하는 것 같고 마치 나 자신이 가면 하나를 쓴 양 연기하는 것 같아 영 어색했다.
반면, 선각인 김 선사는 나와는 반대다. 사람 만나는데 스스럼없는 듯하고 시야가 넓고 상황에 맞춰 계획을 변경하는 게 자유로운 편이다. 어떤 부분에선 무심하기도 하다. 이런 무심함은 소심한 나로서는 서운함으로 쌓여 상대 의도와 상관없이 내식대로 오해하는 일이 적잖았다. 가벼운 흙먼지도 오래되면 배수구를 막을 수 있듯이 오래된 감정은 수도와 포덕을 막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선감께서 “서로 스타일이 다른 것이지, 그 마음을 보려고 해야 해요.”라고 충고하셨다. 그땐 무덤덤했던 이 말씀이 몇 년이 지난 이제야, ‘아하! 그렇지.’ 한다. 마치 다락방에 먼지 가득 뒤집어쓴 책상 서랍 속에서 잊었던 보석 하나를 건진 기분이랄까?
나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성인력센터의 경력단절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라는 성격 유형 검사를 한 적이 있다. 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성격 유형 검사 중 하나로 사람의 성격과 행동의 패턴을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서로 깊이 이해하여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어 기업이나 교육계 등에서 많이 활용한다고 한다. 그 검사지의 맨 앞장에는 유의 사항 중 ‘본 검사는 맞고 틀린 답이 없습니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인쇄된 고딕체 한 줄이 눈에 띄었다.
“모든 유형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 검사는 나와 네가 어떤 정보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에 개인차가 있구나 이해해서, 나도 이해하고 남도 이해하고 사회도 이해해 도움을 주고자 하는 데 있어요.”
라는 강사의 말을 듣고 나는 질문지를 풀었다. 결과는 16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외향적인 사람은 에너지의 방향이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에너지를 사용해서 외부에 주의 집중이 잘되는 편인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개념이나 아이디어에 에너지를 사용해서 자기 내부에 집중이 잘되는 편이라는 것이다. 내 유형에 대해 해석을 들으면서 나라는 사람의 행동과 사고방식, 내가 왜 그런 걸 추구하고 힘들어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가 갔다. 물론 이 테스트로 나라는 사람이 다 설명될 순 없지만, 나와 내 주위 사람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내 스타일을 고집하며 남들에게 강요했던 나를 돌아보니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한 인물이 떠올랐다. 프로크루스테스라고 아테네 근교에 사는 노상강도인데, 철로 만든 침대에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서 눕히고 침대보다 큰 사람은 다리를 자르고, 침대보다 작은 사람은 억지로 키를 늘려 침대에 맞춰 사람들을 죽였다. 침대엔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장치가 있어 그 누구도 침대에 키가 딱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지 않으면 이리저리 자르고 늘려서 기필코 자기 기준에 맞춰 놓으려는 현대판 프로크루스테스가 지금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닦고 하늘의 뜻을 받든다는 나도 혹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분명 갖고 있다. 그것도 굉장히 튼튼한 놈으로. 평생 얼마나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을 끌고 와 내 침대에 맞춰 함부로 재단하며 살아왔을지, 그간 잘려나간 피 흘리지 않는 생각의 토막들을 만약 보고 느낀다면 무섭고 섬뜩하다. 거기다 포덕사업을 하면서 후각에게도 내 선에서 허용한 도 닦는 모습대로, 내가 해오던 정성 들이는 모습대로 해야지만 도를 잘 닦는 거고 정성이 있는 거라고 착각하며 스스로 안심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남을 대할 때 침대가 아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사람마다 생각과 의식이 다르지만, 지금 사람이나 백 년 혹은 그 이전 사람 그리고 나라와 인종, 문화, 종교 상관없이 변치 않는 기준은 분명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구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양심’이라고 하는 천품성에 있지 않을까? 그 씨앗은 인(仁)인데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 사랑하려는 마음, 그런 의지가 담긴 마음에서 출발이 아니겠는가.
『대순지침』에 “내 경위만 옳고 남의 주장을 무시하는 데서 반발을 일으켜 서로 미워하다가 마침내 원한을 품어 척을 맺는 법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지난날 아니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도 돌아보면, 내 기준인 침대를 놓고 맞을 수도 없는 다양한 키의 사람들을 함부로 틀렸다고 재단했음을 반성한다. 인정하기 싫은 단어지만 알게 모르게 미움과 원망의 씨앗을 심었던 일이 꽤 있었던 거 같다. 그게 다 척을 맺는 길이라는 말씀에, 번개 같은 신명의 눈이 내 가슴속을 들여 보고 있을 텐데 싶으니 절로 반성 될 수밖에.
6년 전 진안 마이산에 답사 간 적이 있다. 그곳에 공들여 쌓은 천지탑을 보면서 감동적이고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30년에 걸쳐 피, 땀으로 탑을 쌓은 이갑용 처사의 정성은 물론이겠고, 전국의 똑같을 거 없는 돌들이 모여 서로를 믿어주고 의지하듯 하나의 탑을 당당히 이뤄서 아니겠나. 이 정성으로 이뤄진 탑이 버틸 수 있는 것은 큰 돌 사이 사이에 있는 각양각색 작은 돌, 중간 돌이 틈을 메꾸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유지되고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나와 스타일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일을 하면 잘되고 편할 거 같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처럼 서로 발전도 덜하고 여러 사람이 힘을 합치는 효과는 나지 않을 것이다. 왜 하늘에서 각기 다른 성품과 성향을 주셨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탑을 보며 다시 생각하니 그것은 하늘에서 주신 그 각기 다른 것으로 힘을 합치면서 그 길 위에서 성장과 성숙을 해나가라는 이러한 메시지가 바로, 무너지지도 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된 게 아닐까 싶다.
더구나 훈회 중 ‘남을 잘 되게 하라.’ 는 말씀을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찾아보면,
‘…남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성사에는 타인과의 힘을 합하여야 된다는 정신을 가져 협동생활에 일치협력이 되게 하라.’는 말씀에서도 ‘협동’이란 단어가 ‘남을 잘되게 하는 마음’과 뗄 수 없다는 걸 말씀해 주신다. 그러려면 나의 고집부터 내려놓아야 하는데,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협동하려는 데서 오히려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이득을 얻으며 포용력이 커지고 스스로 뜻이 잘 다듬어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똑같은 성격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게 잘되고 잘사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르면서 조화를 이뤄야 발전하는 사회도 건강하게 살아 호흡하는 사회도 될 것 같다.
2020년 5월 23일 기준 세계 인구의 수는 약 77억 8천 6백 명이라 한다. 다양한 얼굴만큼 다양한 기질, 성격, 성향이 약 77억 8천 6백 가지 만큼 존재하고, 지구상의 누구나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살아간다. 수도하러 들어온 사람 역시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끼리 만나 수도를 시작한다. 가장 먼저 사람은 성향, 성격, 기질이 다 다르고 다양하다는 걸 인정하고 모든 존재는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것부터 출발점이다. 그렇다! 모든 캐릭터는 가치 있다. 나도 너도 가치 있다. 스타일엔 옳고 그름이 없고 따라서 정답도 없고 다름만 있을 뿐이다. 또 스타일을 통일하는 것도 수도가 아닐 것이다. 내 것만 고집하거나 강요하지 말고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다가선다면, 만물에서 배우고 자연히 내가 도야하지 않겠나.
그래! 이제는 나도 고집이라는 테두리에서 나와 투덜거리는 걸 그만두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수도는 혼자 수도가 있을 수 없다는 이 명확한 사실을 받아들이겠다. 후각과 나, 선각과 나의 다름에서 오는 불편함과 괴로움에 그만 몸부림치고, 다르기에 서로서로 채워주면서 혼자선 가기 버거운 길도 같이 가며 도달할 수 있는, 감사한 일이라는 관점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장착하자. 그동안 어울리고 화합하는 게 부족했던 건 훈련이 덜 된 것이지 원래부터 못 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횟수가 늘어나고 익숙해지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되지 않을까. 누가 그랬다, 많이 하면 잘하게 된다고.
아직은 첫걸음에 내딛는 시작이지만 혼자서 일을 하기보다 이해하려 하고 힘을 합치면서 일을 이루는 자세를 열쇠로 삼는다면, 타인은 더는 지옥이 아니라 내 세계의 확장이 되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길성이 비추는 곳이 바로 ‘너였구나!’ 하고 신나게 무릎을 칠 날이 내게도 어서 오리라 믿는다.
끝으로 나의 소심하고 까탈스러운 스타일에 그간 눈치를 보며 마음고생 많이 했을 선각께 그리고 후각들에게, 외롭지 않게 이 길을 같이 가줘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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