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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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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근준 작성일2018.07.02 조회4,0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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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9 방면 교감 유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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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철수에게 전화 온 것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며칠 뒤의 일요일 늦은 오후였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허하고 오전부터 방에서 뒹굴고 있는 내 모습이 보기 싫은지 아내는 아이들과 밖에 나가고 없었다.

전화 저 편의 목소리는 항상 밝고 경쾌하다.

“상호냐”

“응”

“뭐해?”

짧은 인사말 속에는 요즈음의 근황과 안부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뭐하긴… 전화 받고 있지.”

“아하! 다 죽어가는 놈 목소리 치고는 날카로운 센스는 여전한데?”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웬일이냐?”

“일이 있어 전화 하냐? 소식이 없기에 살았는지 확인 중이다.”

“… 지랄하네.”

“하늘 공원 옆 돼지 껍데기 집이다. 영식이도 온다고 했는데 나와라!”

“자식이 계속 명령이네...”

투덜거리며 옷을 챙겨 입었다.

‘하필 하늘 공원이 뭐야! 뒷동산 꽃동산 새동산 이름도 많은데… 갈 때마다 죽은 사람 생각나게 이름도 지랄같이 지었네… 다음 선거 땐 구청장을 바꾸던지 해야지…’ 하는 턱도 없는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다.

“한 잔 받아라.”

영식의 얼굴이 반갑다. 항상 우리 곁에서 마음 써주는 몇 안 되는 시골 친구이기도 하다.

“회사는 잘 되어 가냐?”

“뭐… 그럭저럭…”

“너 부장 됐다며?”

“응”

“그래도 친구들 중에 네가 제일 높은 사람 됐구나!”

“헛소리… 너는 슈퍼마켓 사장 아니냐? 높다면 네가 제일 높지.”

“그거 하고 비교가 되냐? 늦었지만 어쨌든 축하한다.”

서울 와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여러 명 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혹은 두 달에 한 번 만나는 친구는 철수와 영식이다. 특별히 친구들 모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서울 살이에 생활들이 빠듯하다. 그중에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큰 규모의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영식이는 비록 학력은 별로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시골 고향 마을에서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너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얼굴이 영 안 좋다. 부장되었으면 더 좋아져야지. 제수씨가 속 썩이냐? 아니면 회사가 어렵냐?”

“자식이… 네가 관상쟁이야?”

“안 좋아 보여서 그런다. 거 오늘따라 분위기 안 좋네.”

철수 말마따나 오늘 기분은 확실히 좋지 않다. 나도 모르게 삐딱한 건 사실이다.

“자, 한 잔 하고 힘내라. 사는 것이 다 그렇지 뭐. 너나 할 것 없이 별수 있냐?”

영식의 말이 아니더라도 취하고 싶은 마음이다.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소주의 알싸한 기운이 오늘따라 더욱 허전하다.

“야 임마! 네가 도사면 나는 산신령이다. 어디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듣고 와서는…”

"비오는 날 밤에 산길 가면 기분이 어떻겠어?”

“당연히 무섭지!”

“왜?”

“… 그거야 귀신 나올까봐 그렇지.”

“거봐! 귀신이 있다 없다 하는 말 자체가 이미 존재 하고 있다는 거야. 비록 TV나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 몸 어딘가에는 그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지. 과학적으로 말하면 우리 유전인자는 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지!”

“듣고 보니 그 말이 참 묘하네.”

술이 취하고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는 중에서 철수의 말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도술을 배운다느니 산에서 수도 한다느니 하면서…

“산신령이나 신선은 무슨 색깔 옷을 입어?”

“흰색”

“TV나 책에서 등장하는 귀신은 무슨 색깔 옷이지?”

“흰색”

“외국 동화나 소설에 나오는 천사의 색깔은?”

“… 흰색”

“왜 모두 흰색 즉 하얀 색으로 표현했을까? 그리고 그 사는 곳을 왜 환한 빛으로 나타냈을까? 그것은 신명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이고, 우리 인간이 그러한 신명과 기운을 통하면 마음이 밝아진다는 뜻이기도 하지.”

듣고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술 취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두운 너의 마음에 내가 밝음을 선사해 줬으니까 오늘 술값은 네가 내라.”

이상하게 저 자식하고 술 마시면 반박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야! 이름이 철수가 뭐냐? 대한민국에서 제일 흔한 이름이 바로 철수야!”

한 번 이겨보겠다고 꺼낸 말이 이름이었는데…

“흔한 것 즉 평범한 것이 왜 좋은지 알아? 그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야! 흔히 평범하게 사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어른한테 물어봐라. 그저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거야.”

분명히 약간은 궤변 같았는데 어쨌든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저 자식은 술 마시면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것 같다. 정말 희한한 놈이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 길에 마지막에 했던 철수의 말이 자꾸 눈에 밟힌다. 10대에는 세상일이 궁금하고 학업에 매진하지. 20대에는 주로 결혼을 하고 30대에는 누구 아들 딸 돌이다 뭐다 하면서 세월이 가고 40대에는 누구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더라. 50대에는 누구 아들 딸이 결혼한다더라 60대에는 친구 누가 죽었다더라. 우리 삶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일들이 주로 이렇게 만들어지지.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을 크게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이렇게 삶을 살아간다 ….

철수의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열심히 살 수 밖에 더 있겠는가?

그날도 빌어먹을 그 일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짓고 계신다. 형은 명문 대학이라고 하는 서울 소재의 대학을 나왔다.

나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중견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다. 이제 막 40고개를 넘어섰지만 회사는 건실한 편이어서 정년은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여동생은 전업주부로서 인천에 살고 있다. 형은 골프장을 운영하며 골프샵도 같이한다. 골프에 관련된 사업체가 꽤 큰 편이다. 이리 저리 아는 인맥도 많다. 형수는 헬스 클럽사장이다. 크지는 않지만 피부 미용실도 같이 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나보다 훨씬 부자이다. 대학 다닐 때 그쪽 계통의 학과를 나와서 그런지 사업수완도 좋다. 아들 하나는 중학생인데 유학 보내고 딸은 고등학생인데 외국 대학으로 갈 거란다. 이제 초등학생 딸만 둘인 나는 전업 주부인 아내와 열심히 살고 있다.

그날은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1년에 제사가 4번이다. 아니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그리고 명절 2번 하면 모두 6번이다. 그날 제사가 끝나기 무섭게 형과 형수는 아버지께 땅을 좀 팔아달란다. 시골에 아버지 명의의 땅이 있긴 하지만 그 절반은 아마 형이 다 썼을 것이다. 사업한다 돈이 급하다 하면서… 그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말 않고 땅을 팔아 주셨다. 내색은 안했지만 아내는 그때마다 불만이 많았다. 왜 형만 주고 우리는 안 주느냐! 우리는 자식이 아니냐! 형은 사업을 해서 돈이 필요 하지 않느냐! 우리는 당장 필요하지 않고… 그래도 집을 좀 더 큰 데로 옮길 수 있지 않느냐! 왜 바보 같이 말하지 않느냐… 등등의 이야기로 싸우기도 했었다.

시골에서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온갖 고생하며 모은 그 재산을 비록 자식이지만 달라는 말이 선뜻 나올까? 장에 갔다가 이십 리 길을 걸어오는 것도 나는 보았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그게 남의 집 부탁을 받고 소를 몰아 준다던지 물건을 옮겨 준다던지 하면서 돈을 벌었음을 철이 들어서 알았다. 어떻게 하다가 시절이 좋아서 좋은 값으로 한 번 땅이 팔린 적이 있었다. 그것을 밑천으로 소를 사고 농사를 짓고 다시 땅을 사고… 촌부로 살아가며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대학까지 공부시켜 키웠으면 부모로서의 할 일은 다한 셈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또 땅을 팔아달라니….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고 어머니만 난처한 얼굴이었다. 아내는 그릇이 깨어져라 설거지하고 있고. 사실 지난번 증조할머니 제사에 형은 오지도 않았다. 오늘은 할아버지 제사라서 마지못해 온 것이다. 그렇게 온 제삿날 미안해하거나 죄송한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사업 핑계로 늦었다며 온 것이다. 아내는 오전부터 시골에 가 있었고 나도 회사 퇴근하고 부랴부랴 온 것인데… 빌어먹을 인간… 형 내외를 대하는 얼굴이 좋을 리 없었다.

“사업 확장을 좀 할까하는데 은행 대출이 어려워서요.”

“꼭 사업을 확장해야 되니?”

“지금이 적기입니다. 골프 인구도 많아지고 앞으로 정말 유망한 사업입니다. 어려우시겠지만 저를 믿어 주십시오.”

“………”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셨다. 어머니는 더욱 난처한 얼굴이고 나는 그저 지켜볼 밖에.

“사업이라는 것은 기회를 잘 봐야 됩니다. 지금이 사업 확장의 적기입니다. 지금 확장을 하면 크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확장을 하면 니 돈으로 하면 되지 왜 아버지한테 달라는 거야 잘 논다…’ 목구멍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땅을 팔아 주면 제사 모셔 갈 거냐?”

“예?”

“전에 얘기한 것처럼 나도 이제 늙었다. 사실 이제 농사일도 힘에 부치고, 이참에 땅을 팔아줄 테니 제사를 모셔 가거라. 네 엄마도 많이 힘이 든다.”

갑자기 방안 공기가 싸늘해졌다. 형은 아무 말 없었고 형수는 얼굴이 벌게졌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없는 거냐? 장남이면 당연한 것이고 이제껏 땅 판 것도 모두 너에게 주지 않았더냐? 서울 있는 네 집은 넓어서 음식 하기도 편할 것이고.”

옆에서 쳐다보는 어머니는 형 내외의 눈길을 피했다. 모두 잘 난 아들 잘 난 며느리를 두신 어머니의 업보려니…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직은 안 됩니다. 지금은 사업도 바쁘고 무엇보다 집 사람이 제사 모실 준비가 안 되어서… 여하튼 그것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형의 말에 아버지 눈빛에 노기가 떠올랐다.

“장남이면 당연히 해야 될 일이거늘 그래 얼마나 바쁜 일이기에 그 일을 못한단 말이냐! 사업 한답시고 밤새 술은 마셔도 이 일을 못 하겠다는 거냐? 1년에 몇 번 되지도 않는 일이 그렇게 힘이 들더냐? 그럼 네 엄마는 쉬워서 이 일을 해 왔겠느냐? 네가 부탁 할 때마다 아무 소리 없이 땅을 팔아 준 것은 모두 집안을 지키고 이런 일을 위해서인데 그것을 못 하겠다는 거냐?”

난데없는 호통소리에 옆 집 개만 왈왈거렸다.

“죄송해요. 아버님 하지만 제사는 사실 풍습적인 측면이 많고 어떤 사람은 미신이라고도 해요 꼭 모실 필요는 없다고 봐요.”

형수의 말이었다.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그래 네 친정에는 그래서 제사를 모시지 않느냐?

“안 모시는 것이 아니라 1년에 날을 받아서 하루에 모아서 합니다.”

“그게 어째서 제사가 되느냐?”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어디서 듣긴 들었다. 제사를 1년 중에 날을 정해서 하루에 모두 모아서 지낸다는 것이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한때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착잡했었다. 그런데 형수 친정에서는 그렇게 한단다.

“허… 참”

아버지는 더 이상 말씀을 않으셨다. 여기까지였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텐데.

“사실 땅을 팔아서 보태주신 것은 맞지만 저희들 사업자금에 비해 큰돈은 아니었어요. 대부분 저희들이 준비했고요. 그리고… 어차피 아버님 돌아가시면 그 땅 저희들이 상속 받을텐데 좀 일찍 주셨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아마 여기까지 들었던 것 같다. 그 순간 아무도 말이 없었고 내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삿날 싸우면 조상 묘자리가 좋지 않다고 언젠가 옆집 할머니가 한 말이 생각났다. 아직도 우리 집은 조상 묘자리가 안 좋은지 여하튼 그날 저녁 대판 싸우고 서울로 올라왔다.

아내는 잘 했다고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형수 말에 공감을 하는 듯 했다. 어차피 주실 거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시부모 앞에서 그게 할 말이냐고 고래고래 고함지르고는 입을 다물었다.

100년 전 만해도 우리나라에 양반이 반을 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양반 혹은 평민의 신분으로 제사를 모셨다고 해도 지금처럼 거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 몇몇 종교를 빼고는 모두들 제사를 모셔야 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서로 내켜하지 않으니 속된 말로 상놈의 후손이 양반 흉내를 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땅 이야기는 결론 없이 끝나고 제사로 인해 가족 간의 골만 깊어졌다. 어차피 이럴 거면 다른 각도로 생각해 봐야 되겠다고 하면서도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아버지의 상심은 컸을 테고 지켜보는 어머니 또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면 어떻게 될지 나 또한 자신 없기는 마찬가지다. 혀를 수술해서라도 영어를 잘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얼빠진 부모들이 있기는 하지만 흔한 말로 국경이 사라지는 글로벌 시대에 언제까지 지난 풍습을 지키며 살아야 할지, 정말 지켜야 할 전통 미덕인지 요즈음처럼 헷갈린 때도 없었다. 그리고 자식들이 모두 나처럼 딸 뿐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절 우리네 조상님들은 그렇게 아들에 목매었던가?

애들하고 어디서 놀다 왔는지 아내는 코까지 골아 가며 잠들어 있다. 결혼 10년이면 마누라가 남동생으로 보인다는데… 사실인 것 같다.

부장이라고 하지만 윗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닭 모이 쪼듯이 쪼아대는 상사 눈치 보랴 실력 있는 후배들과 경쟁하랴 내 사는 것도 피곤한데 이런 일 저런 일로 마음은 더욱 심란하다. 거기다가 철없는 마누라 땅 이야기로 헛물켜는 모습을 보니 문득 철수 도사가 부러워졌다.

아버지 전화를 받고 시골로 내려간 것은 그 후 몇 주일 지나서이다. 그 동안 상심을 많이 하셨는지 그날따라 주름이 깊어 보였다.

“네 형수 말이 맞긴 맞다. 제사가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느냐! 시절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그러나 마음만큼 형식도 중요한 것이어서 마음을 앞세워 형식을 소홀히 하면 안 되느니… 시절이 달라지면 다소의 형식이 바뀔 뿐 형식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라.”

70평생 시골에서 살아온 촌부의 말이 그날따라 엄숙했다. 과장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다시 한 번 네 형과 의논해 보마. 땅을 모두 팔아서 준다면 아마 허락할 것이다. 그도 저도 안 되면 조그만 암자에 이름을 올리고 부탁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곳도 있다는 것을 내 들어서 알고 있다. 네 엄마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1년에 한 번 모아서 지내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구나.”

엄숙함이나 비장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늙고 힘없는 노부부의 처량함이었다.

“제삿날 초저녁에 지내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좋은 생각이다. 다음 날 직장도 가야하니 그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예(禮)’라는 것이 그렇지 않다. 하루의 시작은 아침에 있고 1년의 시작은 정초에 있거늘 하루해가 다 지나고 제사를 모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아니함만 못할 것이다.”

“제가 형하고 의논해 보겠습니다.”

“그래라. 그러나 형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네 형수는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살아온 환경과 마음 바탕이 달라서 그런 것이다. 형수를 원망하지는 말아라.”

옆에 앉은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삶의 대부분을 남편인 아버지에게 의지하였을 테고 이제 자식을 의지 삼고자 노년의 삶이 조심스러운데 그 자식이 외면한 것일 것이다. 아들 특히 장남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누구보다 컸던 어머니였다. 그런 만큼 어머니의 상심과 실망 또한 누구보다 클 것이다. 그 눈 빛 속에 삶에 대한, 자식에 대한 회의나 배신감은 안 들어 있을지…

“저 나무를 봐라. 저렇게 크고 울창하려면 저 높이만큼 저 가지가 벌어진 만큼 뿌리도 그래야 한다. 땅 위 솟은 만큼 뿌리가 땅 속에 박혀 있는 것이다. 모든 세상의 이치가 이와 같다. 조상의 음덕이 있고서야 후손들의 복도 있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그것을 알아야 하느니 후손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조상의 음덕 없이는 절대 복을 받을 수 없다.”

내가 말귀를 알아듣는다고 생각 하셨는지 그날따라 아버지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물론 마음도 많이 허전하셨을 것이다.

“굽은 소나무 산소 지키고 눈 먼 자식이 효자 노릇한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아느냐? 세상일에 바쁘면 조상 섬길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네 형이 그렇다. 바쁜 줄 알지만 조금만 신경 쓰면 될 것을 때로는 네 형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아버지 입에서 철들고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버지도 형을 원망 할 때가 있구나! 사실 어머니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장남 자랑은 대단했다. 고등학교까지 거의 수석을 도맡아 했고 대학교도 명문대에 들어가고, 집안의 희망이었는데 세월이 지나 자랑거리가 지금은 근심거리로 바뀌고 말았으니 실망과 상심이 대단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서울에 와서 형과 형수를 만났지만 별반 진전된 것은 없었다. 그일 후로 형수는 나와 얼굴을 안 보려고 했고 형은 형대로 미안해하면서도 살기 바쁘다는 말로 피해 버렸다. 돌아오면서 온갖 욕을 했던 것 같다. 빌어먹을 인간 바쁘면 혼자 바쁘냐 똥물에 튀길 인간…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소릴 질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철들고 형과는 그렇게 좋은 사이를 유지하지 못했다. 바쁜 농사철에도 형만 공부하는지 집안 일은 나와 여동생 차지였다. 어머니가 몸져누웠을 때도 대학교 1년 휴학하며 집안일을 돌본 것도 나였다.

‘형 아니냐! 원망하지 마라’ 어머니 말에 몇 번이나 마음을 삭혔는지 모른다.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잘난 아들이라서 그런지 부잣집 딸을 데려와 인사시키는데 내 눈에는 영락없는 여우 탈을 쓴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내색은 않으셨지만 탐탁치 않아하셨고 어머니는 잘난 아들 결혼이라서 그런지 끝내 반대를 못하셨다. 그런대도 뭐가 좋은지 낄낄대는 모습이란… 어쨌든 모든 것이 잘되면 좋으련만 아들 딸 낳았으면 자주 찾아뵙고 전화 자주 하던지 시골에는 가뭄에 콩 나듯 오고 요즈음에는 애들은 데려오지도 않는다. 시골이라서 적응을 못한다나 어쩐다나. 에라이 빌어먹을 인간아! 이런 저런 이유로 한 세월을 보내고 나니 어느 순간 좋은 감정보다는 섭섭함이 이제는 원망이 앞서게 된 것이다. 제사만 해도 그렇다. 땅을 팔던 말던 아버지 땅이니까 알아서 하시겠지만 그래도 자식인데 나에게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조금은 섭섭했지만 집안이 조용해야지 하며 참아온 세월이 십 년이 넘었다. 이제는 제사도 안 지낼 모양이니… 처갓집이 부자라던데 거기 가서 돈을 융통하던지 동생이면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패줬을 것이다. 기다리던 아내는 그 보란 듯이 입을 삐죽 내밀고 또 형과 형수를 싸잡아 흉을 본다. 이래저래 마음만 분란하고 시골에는 전화할 면목도 없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선선한 저녁이다. 해거름 할 때라서 그런지 마음은 더욱 착잡했다.

철수에게 전화한 것은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후였다. 그날은 괜히 마음이 들뜨고 하루 종일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퇴근길에는 마음이 흥분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 것이 꼭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술 마시러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선보러 가는 기대에 찬 들뜬 마음이랄까? 이 기분을 주체할 수 없어 이리저리 전화하니 맥 빠지게 모두 바쁘단다. 집에 그냥 가기도 그렇고 해서 생각 없이 전화한 곳이 철수였다.

“웬일이냐? 네가 전화를 다하고”

“뭐… 그냥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의논할 일도 있고”

특별히 의논할 것은 없었지만 말이 그렇게 나왔다.

“부장님이 도사님에게 전화할 때는 다 이유가 있지. 내가 고민하는 인생들의 영원한 카운셀러 아니냐! 그래 사정없이 의논해라 모두 들어주마. 대신 술값 준비하고”

자식이 꽈배기만 처먹었나? 말을 못하면 밉지나 않지.

“돼지 껍데기 집으로 와라 거기서 기다릴게”

그날 둘이서 과음을 했던 것 같다. 무슨 귀신 씨나락 이야기는 여전했고. 혀 꼬부라진 말로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부르고, 그런데 마음 한켠이 그렇게 시원했다. 근심 걱정이 모두 사라지는 듯 했다. 그간의 집안일을 들어보더니 어떤 이야기를 한 것 같았는데 모두 잊어 버렸다. 그 대신 무슨 약속을 했던 것 같다.

“조상이 잘 되어야 자손이 잘 되는 거야 달나라에 우주선이 가는 21세기이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아”

“야 임마! 우리 아부지하고 똑같은 말 하지마.”

여하튼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에 시간을 약속하고 집으로 왔다.

지금까지 여러 곳을 보고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그런 곳은 처음이었다. 음식을 차려놓고 한복을 입고 내 생전 그렇게 많은 절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다소간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집안 상황을 잘 아는지라 아내는 두말없이 따라왔다. 철수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아담한 양식 건물이었다. 향냄새가 은은한 것이 어린시절 제사 때 맡아보던 그 냄새였다. 절하는 동안 아내의 얼굴을 보니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남동생 같던 아내가 그날따라 이상하게 예뻐 보였다. 귀신에게 홀리는 중인가… 입도식을 무사히 끝내고 철수와 마주앉았다.

“신이 있긴 있어? 조상님이 좋은 데로 가긴 가냐?”

“믿어라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마음 따라 가거늘 조상님과 제사에 대한 너의 생각이 너를 편안케 할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억지로 되는 것은 없다. 조상님의 음덕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하긴 그렇다. 내가 제사 지내려고 마음먹고 철수에게 의논하고 이왕이면 조상님을 잘 모시는 곳이 있다고 해서 아내와 같이 입도식 하고 했던 이런 일들이 나를 굉장히 편안하게 했다. 그러고 보면 그날 괜히 마음이 설레고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이리저리 전화 하다가 생각 없이 철수에게 연락한 것은 이미 예정 되었던 일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 그런 흔쾌한 마음은 근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직은 완전히 믿을 수 없지만 조상의 음덕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아내 역시 이왕 이렇게 된 것 우리가 제사 모시자고 말을 해주니 고맙기도 했다.   

그 후로 아내와 같이 집에서 기도를 모시고 도장에 참배도 다녀왔다. 그런 큰 규모의 한옥 건물은 태어나고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큰 건물도 있었나 싶었다. 단청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쉽게 잊혀지지 않은 그날의 종소리는 내 마음을 산산이 흔들어 놓았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그동안 왜 몰랐을까 작은 충격이기도 했고 가슴 벅찬 설레임이기도 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조상님을 모신다고 할 수 있지… 참배의 여운은 길게 남았다.   

얼마 후 토요일 오후에 시골에 내려갔다. 가을걷이로 바쁜 때였다. 저녁에 밥을 먹고 난 후였다.

“제사… 제가 모실게요.”

“뭐 네가? 그래도 장남이 모셔야 되는데…”

“장남이 안 되면 저라도 해야죠.”

“그래 너라도 하면 애비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런데 너 이후에는 어떻게 하려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요 지금은 제가 모실게요. 그리고 제삿날은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오랜만에 환해지는 어머니 얼굴이 보였다. 진작 이럴 걸. 철수 자식이 오랜만에 친구 노릇을 해준 것 같았다.

일요일 저녁 인천 여동생이 전화를 했다.

“작은 오빠가 제사 지낸다며?”

“응”

“잘했어. 사실 큰 오빠는 문제가 좀 있어. 언니도 그렇고. 자기들은 안 늙는 줄 아는가봐 자기 자식은 어떻게 될지 내 두고 볼 거야.”

“옆에 애들 있냐?”

“응 놀고 있어.”

“잘 한다. 애 엄마가 애들 앞에서 할 말 못할 말 가릴 줄 모르고 아줌마 되더니 조심성이 하나도 없어.”

“히히 미안 그래도 그런 말 해주는 작은 오빠가 제일 좋더라. 작은 오빠 멋져 파이팅.”

그 다음날 아내가 점심시간에 전화를 했다. 시골에서 택배가 왔는데 아버지가 횡성까지 가서 한우 갈비를 보내셨단다.

“우리가 제사 지낸다고 하니까 일부러 보내셨는가봐. 와! 우리가 진작 모실 걸 그랬다.”

한우 갈비에 완전히 갔구만!

“어머니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애들한테 일부러 전화도 하시고 당신 정말 훌륭한 부모님을 뒀어!”

선물과 뇌물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속물인 듯 한 아내의 칭찬이 과히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아버님이 우리에게 땅을 팔아 주실까? 이왕이면 일찍 주시면 좋겠다 그치?”

그것은 남동생이 아니라 틀림없는 옆집 아저씨 목소리였다.

 

<대순회보 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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