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잘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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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10 조회2,975회 댓글0건본문
글 연구위원 주현철
인류는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발전해왔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전력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지도 경쟁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선의(善意)의 경쟁보다는 상대방을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약육강식의 악의적(惡意的) 경쟁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경쟁에는 필연적으로 온갖 잔인하고 비양심적이고 불법적인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 반목과 투쟁을 불러일으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 세상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남을 위한 배려이다. 세상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도(道)는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다. 남을 잘 되게 함은 상생대도(相生大道)의 기본원리(基本原理)이며, 구제창생(救濟蒼生)의 근본이념(根本理念)이다. 그래서 남을 위해서는 수고(手苦)를 아끼지 말고, 성사(成事)에는 타인(他人)과의 힘을 합(合)하여야 된다는 정신(精神)을 가져, 협동생활(協同生活)에 일치(一致) 협력(協力)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대순진리회요람』, 20-21쪽 참조)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이 남만 잘 되고 나는 잘못된다면, 어느 누구도 이를 실천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러한 도(道)는 아무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은 내가 잘 되기 위한 방법상의 문제로서, 남을 잘 되게 하면 반드시 나도 잘 되는 상생(相生)의 법칙에 근거한 것이다. 내가 남을 잘못되게 하면 상대방은 나에게 악감정을 갖게 될 것이고, 이것이 실행에 옮겨지면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부정적인 결과로 돌아올 것이다. 반면 내가 남을 잘 되게 하면 상대방은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로써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상생적 관계를 형성하여 화합의 장(場)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남을 잘 말하면 덕이 되어 잘 되고 그 남은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나 남을 헐뜯는 말은 그에게 해가 되고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라.”(교법 1장 11절)고 하셨다. 이것은 단순히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는 교훈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모든 방법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자 근거를 포괄적으로 함유하고 있다.
남을 배려하는 데는 많은 돈과 권력과 학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회적 강자(强者)만이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弱者)라도 진실한 마음과 실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오히려 남보다 많이 소유하고 잘났다고 해서 남을 무시하고 짓밟고, 갖지 못한 자들에게 인색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남에게 감동을 주고, 우리 사회에 등불이 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거창하지는 않아도 작지만 진실한 배려가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온 세상을 더욱 훈훈하게 해주고 환하게 밝혀줄 수 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다. 길에서 만난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 어리석군요. 당신은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 그가 말했다.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배려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또 남을 잘 되게 하는 데에는 큰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된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자라도 이런 마음이 없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남에게 고통을 주면 고통을 준 것 이상으로 되돌려 받게 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한 배려가 된다. 배려는 받기 전에 주는 것이며, 사소하지만 위대한 것이다. 남을 잘 되게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가식(假飾)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진실하고 자발적인 마음 없이 상황에 얽매여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무엇인가 보상을 받기 위해서 남을 잘 되게 하는 척하는 것은 알게 모르게 상대에게 가식으로 전해진다. 사람은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사람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부정과 불의가 싹트고 다수가 불행해지는 것이다. 위선(僞善)은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남을 위한 배려가 가식적이거나 욕심을 채우려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그 효력은 곧 소멸된다. 배려는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올 때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 없이 진실은 전달되지 않는다. 어떤 것도 진실한 마음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배려를 위해서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감싸주고 받아들이는 포용력(包容力)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잘못을 덮어두고 포용력을 발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잘못을 반성하여 개선(改善)하려는 의지가 확고하고 발전적인 삶을 향한 의지가 보일 때 포용력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서로가 친분이 있다고 해서 잘못을 감추고 덮어두려고 하는 것은 그 상황을 일시적으로 모면하려는 술수에 불과하며, 본질적으로는 사랑의 탈을 쓰고 상대를 방관(傍觀) 내지 방치(放置)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포용력(包容力)이란 지속적인 행복과 발전을 바라는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정을 베풀어 끌어안는 훌륭한 힘인 것이다.
‘남을 잘 되게 하라’는 말속에는 자신의 삶과 가치를 좀 더 성숙하게 완성시키고, 이해관계가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타인과 평온하고, 모두가 상생(相生)할 수 있는 지혜가 담겨져 있다. 남을 잘 되게 하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 주고 신경을 써주는 것이다. 이러한 배려(配慮)는 사회에서 존경받고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공통적 습관 중 하나라고 한다. 그들은 혼자만 잘 되려고 하면, 아무도 그들을 돕지 않는다는 것을 불변의 진리로 삼고 있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기만 손해 보고 자기만 희생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러한 이타적인 행동은 실제로 자신에게 상상하는 것 이상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배려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를 아름답고 조화롭게 바꾸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남을 잘 되게 하라는 상생의 원리는 추상적인 법칙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이 서로 발전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과학적 법칙이다. 이 결과는 곧 상대방의 행복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과도 직결된다. 다시 말해서 남을 잘 되게 하면 반드시 나 또한 잘 된다는 것이다.
《대순회보》 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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