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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 한 인욕의 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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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14 조회3,4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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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형렬이 어느 날 상제를 모시고 있을 때“정(鄭) 집전이라 하는 사람은 지식이 신기한 사람이외다. 저의 증조가 계실 때에 저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렀나이다. 동리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앞에 두고 걱정하였는데 이 걱정을 알고 금광을 가리켜 주어서 고생을 면케 하였으며 많은 영삼(靈蔘)을 캐어 병든 사람을 구제하였고 지난 임술(壬戌)년에 경상도에서 일어난 민란을 미리 말하였나이다. 저의 증조께서 그의 지식을 빌어 명당 하나라도 얻어서 그 여음을 후세에 끼치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이 오늘날 저의 한이 되는 일이로소이다”고 여쭈는지라. 듣고만 계시던 상제께서 가라사대“그런 훌륭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찌 남인 너의 집의 밥을 헛되게 먹으리오.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 한 인욕의 사가 없나니라”하셨도다. (행록 2장 17절)

 
  “천리(天理)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나니라.”는 『대학집주 장구대전(大學集註章句大全)』에서 대학지도(大學之道)에 대한 주자(朱子)의 주석에 나오는 글귀다. “머문다는 것은 반드시 옳음에 이르러서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요, 지선은 곧 지극히 당연한 사물의 이치다.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모두 마땅히 지선의 경지에 머물러 옮기지 않는 것이니 대개 반드시 그것이 있음으로써 무릇 천리의 지극함을 다하여 털끝만 한 인욕의 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대학의 강령이다(止者必至於是而不遷之意 至善則事理當然之極也 言明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之地而不遷 蓋必其有以盡夫天理之極 而無一毫人欲之私也 此三者 大學之綱領也).” 주자는 ‘명명덕(明明德: 명덕을 밝히는 일)’,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어지선(止於至善: 지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3강령(三綱領)이라 하면서 대개 이것이 있음으로써 천리의 지극함이 일호(一毫)의 사사로운 욕심이 없다고 하였다. 
  도전님께서도 도(道)에 대하여 “도(道)란 부단불식(不斷不息)하여 무형무적(無形無跡)하고, 무성무취(無聲無臭)하지만 공명정대하여 무위무가(無僞無假)하며, 무편무사하여 두과지리(豆瓜之理)와 같다.”라고 하셨다. 도는 끊임이 없고 쉼이 없어, 형적이 없고 소리와 냄새의 기미도 없지만 지극히 공정하여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으며, 편벽됨이 없고 사사됨이 없어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오이 심은 데 오이 나는 이치와 같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다는 상제님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말씀이라 하겠다. 
  위의 『전경』 구절에서도 정집전이라는 사람이 지혜가 있어 동네의 어려움을 많이 도와주었으나 자신의 증조부 집에 오래 머물며 신세를 지은 대가로 명당자리 하나 얻지 못한 것이 한이라는 김형렬 종도의 말에 상제님께서는 그런 훌륭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찌 너희 집에 신세만 지었겠느냐. 천리의 지극함에는 털끝만한 차착(差錯)도 없다고 하셨다. 좋은 자손을 얻는 것이 명당이 발음하는 것이다. 쓸만한 자손인 김형렬이 태어났으니 명당을 받은 것과 같다. 게다가 김형렬 종도는 상제님을 가까이 모시고 천지공사를 받들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홍복(洪福)이 어디에 있겠는가. 
  천리의 극진함이 이와 같으므로 우리의 수도생활에서도 ‘공사(公事)에는 무사정(無私情)!’을 중시해야 한다. 상제님께서 어느 날 박공우 종도가 도통을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니 그를 꾸짖으시며 “각 성(姓)의 선령신이 한 명씩 천상 공정에 참여하여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이제 만일 한 사람에게 도통을 베풀면 모든 선령신들이 모여 편벽됨을 힐난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정을 볼 수 없도다. 도통은 이후 각기 닦은 바에 따라 열리리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수도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개인 사정이지만 운수와 도통을 받는 것은 사(私)가 없고 공(公)에 지극한[至公無事] 인도(人道)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천리의 지극함이 지공무사함으로 우리의 수도생활은 어두운 골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하여야 한다. 이에 대하여 도전님께서는 “‘크고 작은 일을 천지의 귀와 신이 살피시니라(大大細細 天地鬼神垂察).’ 하셨으니, 도인들은 명심하여 암실기심(暗室欺心)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털끝만 한 인욕의 사가 없는 수행이 바로 무자기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무자기가 도인의 옥조(玉條)인 것이다. 
  천리와 인사(人事)의 합일은 차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이 모르는 음덕(陰德)을 힘써 행하되 남이 나의 덕을 모름을 괘의치 말아야 한다. ‘음덕양보(陰德陽報)’라는 말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 모르게 행한 음덕은 뒤에 반드시 그만한 보답이 있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무슨 보답을 바라고 음덕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 들꽃이 그저 향기를 퍼뜨리듯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은 인성(人性)의 자연스러운 덕성(德性)이기 때문이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그 마음이 자신의 심신을 아름답게 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잘 되게 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도 남에게 덕을 베푸는 것은 내가 할 일을 할 뿐이고 타인이 알아주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천리의 지극함은 일호의 사사로운 욕심이 없으므로 우리의 수도생활은 공명정대하고 무편무사하여야 하며, 무자기를 근본으로 수행하여 공사의 분(分)과 상하의 의(義)를 바로 행하여 도인의 본분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도전님께서는 『대순지침』에서 “공과 사의 구분과 상하의 의(義)를 바로 지키지 않으면 도인의 본분을 이탈한 것이다.”, “사(私)는 인심(人心)이요 공(公)은 도심(道心)이니, 도심이 지극하면 사심(私心)은 일어나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시며, “모든 도인은 처사에서 무편무사(無偏無私)하고 공명정대하여 욕됨이 없게 하라.”, “도인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사적 욕망을 버리고 서로 믿음을 주고받아 믿고 따르도록 하는 데서 성공이 이루어진다.”라고 훈시(訓示)하셨다.  
  우리는 천리의 극진함이 털끝만한 인욕의 사가 없음을 깊이 자각하고, 도전님께서 훈시하신 바와 같이 상임원이나 수반을 막론하고 개인적인 사적 욕망을 버리고 서로 믿음을 주고받아 신뢰를 바탕으로 이끌고 따르도록 하여 체계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데에 우리의 성공이 있음을 수유(須臾)도 잊지 말고, 무자기를 근본으로 한 수도생활에 성·경·신을 다하여야 하겠다. 

 

대순회보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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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순지침』, pp.91~92. 
02 교운 1장 33절.
03 『대순지침』, p.93 참조.
04 『대순지침』, p.51 참조.
05 교법 3장 11절.
06 『대순지침』, pp.92~93.
07 『대순지침』, pp.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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