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을 뉘우치고 습성을 고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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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10.16 조회24,614회 댓글0건본문
무신년 여름에 문 공신이 동곡에 와서 상제께 배알하니라. 그 자리에서 상제께서 그를 보고 “네가 허물을 뉘우치고 습성을 고치지 아니하면 앞날에 난경이 닥쳐오리라”고 꾸짖고 타이르셨도다.(행록 4장 37절)
위 성구(聖句)는 무신(1908)년에 있었던 일로 고부화액(古阜禍厄)01 이후 상제님께서 동곡약방을 찾은 문공신을 꾸짖고 타이르시며 하신 말씀이다. 이 일은 고부화액 후에 상제님을 원망하며 불경한 패설을 일삼다가 옥(獄)에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죽을 처지에 있었던 문공신이 “찹쌀 아홉 되로 밥을 지어 먹이라.”(제생 35절)는 상제님의 처방으로 병에 큰 차도를 보고 황송한 마음으로 동곡약방에 계신 상제님을 찾아뵈었을 때 있었다.
문공신이 상제님을 원망하게 된 원인은 고부화액 때 외상으로 달아두었던 밥값을 고부 음식점 주인이 자신에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문공신은 고부화액 당시 신경수의 집에 계시던 상제님께서 약간의 돈과 무명실로 짠 백목(白木) 몇 필을 인부에게 지게 하여 따르게 했는데도 그 돈으로 음식값을 치르지 않은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자신에게 음식값이 청구되자 그 돈과 백목을 다른데 써버리고 음식값을 갚지 않으셨던 상제님께 불평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문공신의 이러한 불평을 들으신 상제님께서 독조사 도수로 인하여 그 돈을 쓸 수 없었다는 사정을 말씀하시자 그는 “일이 그와 같을진대 그만두사이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전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화난이 있은 후 어느 날 상제께서 문 공신의 집에 가시니 공신이 불쾌한 어조로 불평을 털어놓느니라. “일전에 고부 음식점의 주인이 나에게 와서 외상으로 달린 주식대를 갚으라는 독촉을 하였는데 생각컨대 고부화액 때 가지고 갔던 백목과 돈을 흩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 음식 값을 갚지 아니하셨나이까.” 상제께서 묵묵히 들으시고 가라사대 “네 말을 들으니 그러하리로다. 순창 농암에 사흘 동안 계속 머물면서 너를 만나 여러 가지 큰 공사를 참관케 하였고 또한 고부 도수에 감당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 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으니 남의 돈을 따 보지도 못하고 제 돈만 잃고 바닥이 난 후에야 개평을 뜯어가지고 새벽녘에 본전을 회복하는 수가 있음을 말함이니라. 고부에서 음식 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그때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다고 했으면 달리 주선이라도 하여 주었으리라” 하시니 공신이 잠잠히 듣고만 있다가 여쭈기를 “일이 그와 같을 진대 그만두사이다” 하니라. 상제께서는 동곡으로 돌아가셨도다. (행록 3장 65절)
그가 이렇게 불평을 한 후 옥에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집안 출입도 제대로 못 하게 되었다. 이때 문공신은 가까이 사는 황응종으로 하여금 동곡에 계신 상제님께 처방을 부탁했는데 “좀 기다리라”라는 소식을 듣고 ‘불끈 화가 나서’ 약도 쓰지 않고 드러누웠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던 사연이 서두에 인용한 사건의 배경이다.
서두의 성구에서 먼저 살필 부분은 ‘허물’에 대한 반성일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문공신뿐 아니라 따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신이 그동안 지내 오던 허물을 낱낱이 회상하여 마음속으로 사하여 주시기를 빌게 하신 바 있다.02 ‘잘못 저지른 실수나 과실’로서의 허물은 예로부터 수양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 개념이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그의 산문(散文)에서 “예로부터 성현(聖賢)들은 모두 허물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고, 허물을 고친다면 애초에 허물이 없는 것보다 낫다.”03고 하였다. 이는 허물의 반성으로 덕성을 쌓음이 더러운 똥으로 작물의 거름 삼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공자는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04라고 했으며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이 바로 허물”05이라고도 지적했다. 공자가 안회(顔回)를 “같은 잘못을 다시 하지 않는다(不貳過)”라고 하였는데 이는 가장 배움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공자가 한 대답이었다.06
문공신의 허물은 일의 정황을 살피기에 앞서 불경한 언사를 일삼거나 불끈 화를 내는 ‘습성(習性)’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습성이란 버릇이 되어버린 성질이다. 자신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나타내는 일정한 행동이므로 흔히 ‘버릇’이나 ‘습관’이라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한번 몸에 밴 습성이 여간해서는 고쳐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쁜 습관을 갖기 전에 좋은 습성을 익히도록 하는 일이 예로부터 중시되었다. 8세가 되면 아동을 향교·서원·서당 등에 보내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灑掃應對進退之節)을 가르쳤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07 자신의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 사람의 부름이나 요구에 응하여 사안에 따라 공손하게 대응하는 것, 어떤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지와 않아야 하는지를 알고 처신하는 것 등을 어릴때 익히게 한 가르침이 소학(小學)이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스승이기도 한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했다. 그는 “시(詩)를 지어도 천리를 알지 못했는데, 『소학』을 읽고 나서야 지난 잘못 깨달았네”08라고 말하곤 했는데 옛사람들이 좋은 습관 들이기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느냐도 언어 습관이다. 말은 복을 짓기도 하지만 허물을 지어 화(禍)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남에게 말을 악(惡)하게 하면 남 해치는 여앙이 밀려 점점 큰 재앙이 되어 내 몸에 이른다.”09라는 내용에서 보듯 당시에 문공신과 더불어 상제님을 원망하여 패설을 일삼던 이화춘은 의병에게 총살되고 박장근은 의병으로부터 매를 맞아 뼈가 부러졌다. 상제님께서 이 사실을 전해 들으시고 공신에게 마음을 바로잡을 것과 천노가 있음을 알려주셨다.10
도주님께서는 “인숙무죄(人孰無罪)요 개과하면 족하니라.”(교운 2장 15절)라고 하셨다. 잘못에 대한 시인과 반성은 개전(改悛)의 정을 느끼게 하여 용서를 구하고 화해(和解)의 장으로 나가게 하지만, 허물을 위세(威勢)로 덮으려고 하는 것은 상대의 반감을 유발할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허물의 개과는 개인의 수양은 물론 자신으로 인해 맺혔던 상대의 원한을 풀게 하여 해원상생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01 고부화액은 1907년 12월 25일 발생한 일이다. 상제님께서는 이 화액에 대하여 “의병의 혐의를 받은 것이었으되 백의 군왕 공사에 따
른 화난”이라고 하셨다. 옥중에서 새해를 맞으신 상제님께서는 다음 해 무신년 2월 4일 경칩 일에 출옥하셨다.
02 교운 1장 2절 참고.
03 『다산의 마음-정약용 산문 선집』, 박혜숙 역, (경기: 돌베개, 2008), pp. 30~3 1.
04 『논어』 「학이」, “過則勿憚改.”
05 『논어』 「위령공」, “過而不改, 是謂過矣.”
06 『논어』 「옹야」,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07 『소학』 「소학서제」, “古者小學, 敎人以灑掃應對進退之節.”
08 남효온, 「사우명행록」, “嘗作詩曰,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 참고.
09 『대순진리회요람』 p19
10 교운 1장 31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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