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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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6.08.02 조회28,195회 댓글0건본문
너희들이 믿음을 나에게 주어야 나의 믿음을 받으리라. (교법 1장 5절)
상제님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 상제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믿음을 보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사례(事例)는 ????전경????의 ‘선술에 통한 머슴의 고사’와 ‘최풍헌과 유훈장의 고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머슴의 고사에서는 스승이 선술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머슴에게 성의를 보이라고 합니다. 머슴이 10년 동안 진심갈력을 다한 농사 끝에야 스승은 머슴을 연못가에 데리고 가서 물 위에 뻗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물 위에 뛰어 내리라고 하였고, 머슴은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선술에 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최풍헌과 유훈장의 고사에서는 유훈장이 자기 하인 최풍헌이 늘 술에 취해 언행이 거칠었는데도 일 처리에 남보다 뛰어난지라 평소에 그를 아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훈장은 피난할 길을 그에게 부탁하자 이를 승낙한 최풍헌은 유훈장에게 가산(家産)을 팔아서 자신에게 맡길 것을 요구합니다. 유훈장은 이를 기꺼이 승낙하고 가산을 팔아서 최풍헌에게 맡겼습니다. 최풍헌은 그 돈으로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지내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유훈장에게 들려왔습니다. 유훈장은 크게 낙담하면서 그의 집에 가서 유언이 없었더냐고 그의 아들에게 물었더니 유훈장과 가족에게 자신을 지리산에 장사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언을 듣고 유훈장은 평소에 최풍헌을 크게 믿었던 터이므로 큰아들과 함께 운상하여 지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보니 집 한 채에 풍부한 식량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머슴의 고사에서는 스승이 머슴에게 먼저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했고, 그에 부응하여 머슴은 진심갈력으로 10년의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스승은 마지막으로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머슴에게 연못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올라 연못으로 뛰어 내리라고 요구했습니다. 머슴은 이에 응했고 그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선술에 통하게 되었습니다. 최풍헌 고사에서는 재산을 팔아 맡기는 성의와 최풍헌의 죽음에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먼저 보이라는 믿음의 요구 조건은 그때그때 다릅니다. 그러면 상제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의 요구 조건은 어떠한 것일까요? 상제님께서 화천 하시기 전 종도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장차 어디로 가리니 내가 없다고 핑계하여 잘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다 잊으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능히 따르지 못할지니라. 내가 가서 일을 행하고 돌아오리니 그때까지 믿고 기다리라. 만일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을 지니라.”(행록 5장 19절)고 하셨습니다. 또한, 상제님께서는 무신(1908)년 어느 날 고부인에게 “내가 떠날지라도 그대는 변함이 없겠느냐?”고 말씀 하시니 부인이 대하여 “어찌 변함이 있겠나이까.”고 대답하니 이 대답을 듣고 상제님께서 시(詩) 한수를 지으셨습니다.
無語別時情若月 有期來處信通潮 말없이 헤어질 때의 정은 달과 같지만, 기약이 있어 이르는 곳의 믿음은 조수와 통하리라.
위 시에서 상제님 화천 후의 정(情)은 달로, 믿음은 조수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상제님에 대한 인간적인 정(情)은 달이 기울며 모습을 바꾸듯 변화되어 가겠지만, 약속한 기한이 되어 상제님께서 이르실 때는 조수가 때가 되면 반드시 밀려들어 오듯 어길 바가 없을 것임을 암시한 시라 하겠습니다.
결국, 상제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상제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변함이 없고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僻)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差異)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 하며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經過)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期約)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限度)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精誠)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즉, 믿음은 한마음을 정하면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삿된 것과 바른 것을 좁은 소견으로 측량하며, 치우치거나 다른 것에 의지하면서 자기 생각으로 바꾸어 고치고 변하여 옮기며 처음에 먹은 마음과 어긋나 차이가 생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겁이라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약이 있어 이른 것과 같이 하고 한도가 있어 정한 것과 같이 하고‘에서 보듯이 정해진 약속이나 기한은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에 정성을 다하여 기대하는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도전님께서는 ????대순지침????에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훈시하셨습니다.
1) 자각이 없으면 확신이 서지 않는다.
2) ????전경????에 “농부가 곡식 종자를 갈무리하여 두는 것은 토지를 믿는 까닭이라.” 하셨으니 가식(假飾) 없는 신앙의 본의(本意)에 위배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3) 수도자가 믿음이 부실하면 결과적으로 난법난도자가 된다.
4) 일관성의 믿음을 사실화 하여 삼계삼법(三界三法)의 성ㆍ경ㆍ신으로 자아대성(自我大成)을 위한 작업이 신(信)인 것이다.
5) 믿음은 의심 없는 굳은 신념인 것이다.
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도통과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변함없는 일관성의 믿음과 가식 없는 진실한 믿음, 의심 없는 전폭적(全幅的)인 믿음,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한 일심(一心)의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상제님 재세 시에 종도들은 상제님을 인간적으로 믿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쫓았습니다. 그러나 종도들은 상제님 화천 후 하나둘 흩어지게 되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종단을 만들어 상제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의 믿음은 퇴색되고 빛바랜 자취와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그것은 진리에 대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 시(詩)는 종도의 변함없이 믿고 따르겠다는 대답에 대한 것으로, 상제님을 끝까지 쫓겠다는 종도의 신앙고백(信仰告白)은 변하기 쉬운 심정적(心情的)인 것으로 진리에 대한 자각에 이르지 못하면 확신이 없어 끝까지 따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종도들은 상제님의 진리를 자각할 수 없었습니다. 상제님의 진리는 종통을 이으실 도주님에 의해 밝혀지도록 천부적으로 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상제님에 대한 진실 되고 의심 없는 일관성의 믿음 그리고 의심 없는 전폭적인 믿음은 자각에 의해 가능하고 이는 상제님을 믿고 따르며 수도할 수 있는 법방과 진리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듯 상제님에 대한 진실 되고 변하지 않는 전폭적인 믿음은 진리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옵니다. 상제님께서는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로 오라고 하심으로써 도의 근원인 증산(甑山) 정산(鼎山)의 양산의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결국, 상제님을 뵈려거든 즉, 운수 마당에 가서 상제님을 뵈려거든 양산의 진리가 암시하는 연원(淵源)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상제님 당시의 종도들은 도주님과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연원의 맥을 알지 못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결국 상제님의 그늘이란 종통으로 이어지는 연원의 맥과 양산도로서 대순진리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 떨어지면 죽는다고도 하셨습니다.
대순진리회는 구천상제님의 유지를 계승하신 도주님의 50년 공부종필로써 전(傳)하신 유법(遺法)을 숭신(崇信)하고자 도전님께서 창설하신 종단입니다. 신앙의 대상은 구천상제님이시지만, 이를 위해서는 도주님의 유법 또한 숭신하여야 하며 종통계승으로 연원의 맥을 이어 받으신 도전님의 말씀 또한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상제님에 대한 이러한 믿음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상제님으로부터 믿음을 받게 됩니다.
상제님으로부터 믿음을 받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상제님께서는 일심을 가진 자에게는 서촉에 계실지라도 빠짐없이 찾으리라 하셨습니다. 일심은 원시반본(原時反本)된 마음으로 시간을 초월한 마음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기약(期約)이 있어 도달할 때까지 변함없는 믿음을 주었을 때 믿음을 받게 되지만, 상제님을 믿는 마음이 일심이 되는 순간 지체 없이 상제님으로부터 믿음을 받게 됩니다. 춘무인(春無人)이면 추무의(秋無義)라 하여 농부가 봄에 씨앗을 토지에 뿌리는 것은 토지를 믿기 때문이고, 그 결과 토지로부터 가을에 곡식의 추수로 보답을 받는 것과 같이 상제님과 그 진리를 믿고 남 잘되게 하고 해원상생을 실천한다면 운수가 올 때 도통으로 보답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수도인은 상제님으로부터 믿음을 받는 도인이 되기 위해 먼저 상제님께 믿음을 주는 수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순진리의 자각(自覺)과 확신을 통한 변함없는 믿음에 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전경????을 많이 읽고 진리 공부를 부지런히 하며,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대순진리를 생활 속에 실천하여 체득하고, 상제님을 신앙하는 신실(信實)한 도인으로서 훈회와 수칙을 진실하게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상제님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 상제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믿음을 보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사례(事例)는 ????전경????의 ‘선술에 통한 머슴의 고사’와 ‘최풍헌과 유훈장의 고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머슴의 고사에서는 스승이 선술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머슴에게 성의를 보이라고 합니다. 머슴이 10년 동안 진심갈력을 다한 농사 끝에야 스승은 머슴을 연못가에 데리고 가서 물 위에 뻗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물 위에 뛰어 내리라고 하였고, 머슴은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선술에 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최풍헌과 유훈장의 고사에서는 유훈장이 자기 하인 최풍헌이 늘 술에 취해 언행이 거칠었는데도 일 처리에 남보다 뛰어난지라 평소에 그를 아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훈장은 피난할 길을 그에게 부탁하자 이를 승낙한 최풍헌은 유훈장에게 가산(家産)을 팔아서 자신에게 맡길 것을 요구합니다. 유훈장은 이를 기꺼이 승낙하고 가산을 팔아서 최풍헌에게 맡겼습니다. 최풍헌은 그 돈으로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지내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유훈장에게 들려왔습니다. 유훈장은 크게 낙담하면서 그의 집에 가서 유언이 없었더냐고 그의 아들에게 물었더니 유훈장과 가족에게 자신을 지리산에 장사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언을 듣고 유훈장은 평소에 최풍헌을 크게 믿었던 터이므로 큰아들과 함께 운상하여 지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보니 집 한 채에 풍부한 식량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머슴의 고사에서는 스승이 머슴에게 먼저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했고, 그에 부응하여 머슴은 진심갈력으로 10년의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스승은 마지막으로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머슴에게 연못으로 뻗은 나뭇가지에 올라 연못으로 뛰어 내리라고 요구했습니다. 머슴은 이에 응했고 그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선술에 통하게 되었습니다. 최풍헌 고사에서는 재산을 팔아 맡기는 성의와 최풍헌의 죽음에도 변하지 않는 믿음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먼저 보이라는 믿음의 요구 조건은 그때그때 다릅니다. 그러면 상제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의 요구 조건은 어떠한 것일까요? 상제님께서 화천 하시기 전 종도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장차 어디로 가리니 내가 없다고 핑계하여 잘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다 잊으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능히 따르지 못할지니라. 내가 가서 일을 행하고 돌아오리니 그때까지 믿고 기다리라. 만일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을 지니라.”(행록 5장 19절)고 하셨습니다. 또한, 상제님께서는 무신(1908)년 어느 날 고부인에게 “내가 떠날지라도 그대는 변함이 없겠느냐?”고 말씀 하시니 부인이 대하여 “어찌 변함이 있겠나이까.”고 대답하니 이 대답을 듣고 상제님께서 시(詩) 한수를 지으셨습니다.
無語別時情若月 有期來處信通潮 말없이 헤어질 때의 정은 달과 같지만, 기약이 있어 이르는 곳의 믿음은 조수와 통하리라.
위 시에서 상제님 화천 후의 정(情)은 달로, 믿음은 조수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상제님에 대한 인간적인 정(情)은 달이 기울며 모습을 바꾸듯 변화되어 가겠지만, 약속한 기한이 되어 상제님께서 이르실 때는 조수가 때가 되면 반드시 밀려들어 오듯 어길 바가 없을 것임을 암시한 시라 하겠습니다.
결국, 상제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상제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변함이 없고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僻)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差異)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 하며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經過)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期約)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限度)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精誠)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즉, 믿음은 한마음을 정하면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삿된 것과 바른 것을 좁은 소견으로 측량하며, 치우치거나 다른 것에 의지하면서 자기 생각으로 바꾸어 고치고 변하여 옮기며 처음에 먹은 마음과 어긋나 차이가 생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겁이라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기약이 있어 이른 것과 같이 하고 한도가 있어 정한 것과 같이 하고‘에서 보듯이 정해진 약속이나 기한은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에 정성을 다하여 기대하는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도전님께서는 ????대순지침????에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훈시하셨습니다.
1) 자각이 없으면 확신이 서지 않는다.
2) ????전경????에 “농부가 곡식 종자를 갈무리하여 두는 것은 토지를 믿는 까닭이라.” 하셨으니 가식(假飾) 없는 신앙의 본의(本意)에 위배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3) 수도자가 믿음이 부실하면 결과적으로 난법난도자가 된다.
4) 일관성의 믿음을 사실화 하여 삼계삼법(三界三法)의 성ㆍ경ㆍ신으로 자아대성(自我大成)을 위한 작업이 신(信)인 것이다.
5) 믿음은 의심 없는 굳은 신념인 것이다.
이 말씀에서도 우리는 도통과 지상천국 건설이라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변함없는 일관성의 믿음과 가식 없는 진실한 믿음, 의심 없는 전폭적(全幅的)인 믿음,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한 일심(一心)의 믿음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상제님 재세 시에 종도들은 상제님을 인간적으로 믿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쫓았습니다. 그러나 종도들은 상제님 화천 후 하나둘 흩어지게 되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종단을 만들어 상제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의 믿음은 퇴색되고 빛바랜 자취와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그것은 진리에 대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 시(詩)는 종도의 변함없이 믿고 따르겠다는 대답에 대한 것으로, 상제님을 끝까지 쫓겠다는 종도의 신앙고백(信仰告白)은 변하기 쉬운 심정적(心情的)인 것으로 진리에 대한 자각에 이르지 못하면 확신이 없어 끝까지 따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종도들은 상제님의 진리를 자각할 수 없었습니다. 상제님의 진리는 종통을 이으실 도주님에 의해 밝혀지도록 천부적으로 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상제님에 대한 진실 되고 의심 없는 일관성의 믿음 그리고 의심 없는 전폭적인 믿음은 자각에 의해 가능하고 이는 상제님을 믿고 따르며 수도할 수 있는 법방과 진리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듯 상제님에 대한 진실 되고 변하지 않는 전폭적인 믿음은 진리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옵니다. 상제님께서는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로 오라고 하심으로써 도의 근원인 증산(甑山) 정산(鼎山)의 양산의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결국, 상제님을 뵈려거든 즉, 운수 마당에 가서 상제님을 뵈려거든 양산의 진리가 암시하는 연원(淵源)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상제님 당시의 종도들은 도주님과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연원의 맥을 알지 못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결국 상제님의 그늘이란 종통으로 이어지는 연원의 맥과 양산도로서 대순진리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맥 떨어지면 죽는다고도 하셨습니다.
대순진리회는 구천상제님의 유지를 계승하신 도주님의 50년 공부종필로써 전(傳)하신 유법(遺法)을 숭신(崇信)하고자 도전님께서 창설하신 종단입니다. 신앙의 대상은 구천상제님이시지만, 이를 위해서는 도주님의 유법 또한 숭신하여야 하며 종통계승으로 연원의 맥을 이어 받으신 도전님의 말씀 또한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상제님에 대한 이러한 믿음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상제님으로부터 믿음을 받게 됩니다.
상제님으로부터 믿음을 받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상제님께서는 일심을 가진 자에게는 서촉에 계실지라도 빠짐없이 찾으리라 하셨습니다. 일심은 원시반본(原時反本)된 마음으로 시간을 초월한 마음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기약(期約)이 있어 도달할 때까지 변함없는 믿음을 주었을 때 믿음을 받게 되지만, 상제님을 믿는 마음이 일심이 되는 순간 지체 없이 상제님으로부터 믿음을 받게 됩니다. 춘무인(春無人)이면 추무의(秋無義)라 하여 농부가 봄에 씨앗을 토지에 뿌리는 것은 토지를 믿기 때문이고, 그 결과 토지로부터 가을에 곡식의 추수로 보답을 받는 것과 같이 상제님과 그 진리를 믿고 남 잘되게 하고 해원상생을 실천한다면 운수가 올 때 도통으로 보답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수도인은 상제님으로부터 믿음을 받는 도인이 되기 위해 먼저 상제님께 믿음을 주는 수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순진리의 자각(自覺)과 확신을 통한 변함없는 믿음에 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전경????을 많이 읽고 진리 공부를 부지런히 하며,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대순진리를 생활 속에 실천하여 체득하고, 상제님을 신앙하는 신실(信實)한 도인으로서 훈회와 수칙을 진실하게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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