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용(如有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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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6.08.02 조회29,246회 댓글0건본문
또 대학(大學)의 다른 장(章)을 외워주시며 잘 기억하여 두라고 이르셨는데 글귀는 이러하도다.
若有一介臣 斷斷兮 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尙亦有利哉 人之有技 媢疾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 俾不通 寔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교운 1장 57절)
상제님께서 김형렬 종도에게 잘 기억하여 두라고 이르신 위의 글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진서(秦誓)’에 있는 것으로 『대학(大學)』에 재인용되어 있는 글입니다. 진서(秦誓)는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맹서’라는 뜻입니다. 중국 춘추시대의 진나라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나 건숙(蹇叔)과 같은 현인을 등용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국력을 신장하여 서융(西戎: 티베트)의 패자(覇者)라 불리었습니다.
이 글은 목공이 젊은 장수들을 믿고 욕심을 앞세워 건숙과 백리해가 불가하다며 반대하는 전쟁을 일으켜 참패하고 모든 신하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맹세하여 고하는 연설문의 일부입니다. “만약 한 신하가 있어 꿋꿋하고 별다른 재주는 없지만, 그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워 남을 용납하는 정도가 남이 가진 재주를 자기가 가진 것처럼 여기며, 남이 어진 것을 마음에 좋아하기를 자기 입에서 나온 것보다 더하다면, 이는 진실로 남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니,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것이며, 또한 이로울 것이오(若有一介臣 斷斷兮 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尙亦有利哉).
남이 지닌 재주를 싫어하여 시기 질투하며, 남이 어진 것을 거슬러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진실로 남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위태롭게 할 것이오(人之有技 媢疾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 俾不通 寔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이 말에는 목공의 인재 등용관이 담겨 있습니다.
일찍이 공자는 이런 목공의 됨됨이를 평가하면서 “능히 왕자(王者)의 업(業)이라도 이룰 수 있었는데 패업(覇業)으로 끝난 것은 오히려 작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두고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7~1101)는 “지극하다. 목공이 두 사람을 논함이여, 앞의 한 사람은 방현령(房玄齡)과 같고, 뒤의 한 사람은 이임보(李林甫)와 같으니, 후세의 군주가 이것을 거울로 삼으면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사의 성패를 가늠하는 두 가지 마음
방현령과 이임보의 예와 같이 신하로서 군주에게 충성하느냐 반역하느냐 하는 것이 이 두 가지 마음에 달려 있고, 나라의 흥망이 이 두 가지 마음에 달려 있으며, 나아가 천하사의 성패가 또한, 이 두 가지 마음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은 달리 말하면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고,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입니다. 원래 인간 성품(性品)의 본질은 양심입니다. 사람이 예의에 벗어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감행하는 것은 사심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과 사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의 본바탕에 머물면 그것이 곧 양심이요, 마음을 속이거나 정성스럽지 못한 마음이 발동하는 것이 곧 사심입니다. 사심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인간의 마음은 선(善)한 것입니다. 그러니 범사에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양심을 되찾고 정심(正心)에 머무를 수 있는 위력(偉力)한 방법이 도전님께서 강조하신 바와 같이 도주님의 포유하신 인도에 따르는 것입니다. “나의 심기를 바르게 하고, 나의 의리를 세우고, 나의 심령을 구하여, 상제님의 임의에 맡기라(正吾之心氣 立吾之義理 求吾之心靈 任上帝之任意).”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상제님께서 부여하신 인간의 자유의지로 언제나 양심의 명령에 따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같이 너그럽게 마음을 쓰며, 모든 것을 상제님의 임의에 맡길 때, 비로소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도의 무한대한 진리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을 상제님의 임의에 맡긴다는 것은 인간의 에고(ego)가 펄펄 살아 있는 조건에서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제님께서는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교법 2장 6절)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도의 수도 법방을 따라가다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고 자각하는 것이 열쇠입니다.
정심입의(正心立義)하고 구심령(求心靈)하여 임상제(任上帝) 하는 일과 천하사의 성패를 가늠하는 두 가지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데서 도전님께서 훈시하신 “인류의 평화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이해하라.”는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입각한 마음이 바로 여유용(如有容)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상제님의 임의에 맡기면서 다음 몇 가지 심법(心法)을 병행하여 실천하는 것이 심령(心靈)을 통일하여 수도의 완성을 기하는 데 긴요합니다.
첫째,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수도하여 양심 회복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인성(人性)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정성을 지극히 하여 맑고 밝은 천품성인 양심을 되찾기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둘째, 항상 남을 사랑하고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춘무인(春無仁)이면 추무의(秋無義)라,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추수할 것이 없듯이 마음씀의 출발점은 남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입니다. 항상 남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으로 따뜻하고 공손하며, 착하고 순하며, 겸손하고 사양하면 남에게 척(慼)지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난을 피하고 잘 사는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척을 짓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시속에 ‘무척 좋다, 무척 잘 산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르는 것입니다.
셋째,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바다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 만물 중에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바다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데서 바다의 어원이 ‘받아들이다.’의 ‘받아’가 ‘바다’로 된 것입니다. 영어로 ‘이해하다.’라는 말은 ‘under-stand’인데 이는 ‘아래에 선다.’는 뜻이니 사물을 이해하는 길은 낮은 데로 임하여 바다와 같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있는 것입니다. 남을 용납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해원상생입니다.
넷째, 항상 남을 잘 되게 하려는 상생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이 대인수행의 궁극적인 과제이고, 해원상생 대도의 기본원리이며, 구제창생의 근본이념입니다. 남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내 어깨를 먼저 내밀어 실속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을 이루는 데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힘을 합하여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협동하고 협력하여 일을 도모해야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상 네 가지, ‘양심, 어진 마음, 너그러운 마음, 상생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마음을 여러 가지로 명명해도 그 마음이 종류별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성 그대로의 본심’ 그 자리를 달리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서전』 「서문」에서 채침(蔡沈)은 “이제삼왕은 이 마음을 잘 간직한 분들이요, 하의 걸과 상의 수는 이 마음을 잃어버린 자들이며, 태갑과 성왕은 고생 끝에 이 마음을 간직한 이들이다. 마음을 간직하면 다스려지고 잃어버리면 어지러워지나니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의 갈림이 돌아보건대 그 마음을 간직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二帝三王 存此心者也 夏桀商受 亡此心者也 太甲成王 困而存此心者也 存則治 亡則亂 治亂之分 顧其心之存不存如何耳).” 하였는데 여기서 그 마음[其心]이 바로 도심(道心)이자 양심(良心)입니다.
이제 우리 시대는 인존시대(人尊時代)이고 평화시대이며 양심의 시대입니다. 상제님께서 “이제 말세를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 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천지 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예시 17절) 하셨듯이 이번 운수에는 역발산(力拔山)도 쓸 데가 없고 기개세(氣蓋世)도 소용없으며, 강절(康節)의 지식도 필요 없고 양심 이자(二字) 밝혀내어 마음 농사짓는 것이 제일입니다.
상제님의 무한무량하신 덕화(德化)로 후천 5만 년 동안 후천 중생으로 하여금 선으로써 먹고 살 도수를 짜 놓으셨으니 앞으로 양심이 아닌 모든 것은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양심으로 밥을 먹고 양심으로 옷을 입으며, 양심으로 자고 일어나며, 양심으로 보고 양심으로 듣고 양심으로 말하고 양심으로 행동하여야 합니다.
若有一介臣 斷斷兮 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尙亦有利哉 人之有技 媢疾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 俾不通 寔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교운 1장 57절)
상제님께서 김형렬 종도에게 잘 기억하여 두라고 이르신 위의 글은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진서(秦誓)’에 있는 것으로 『대학(大學)』에 재인용되어 있는 글입니다. 진서(秦誓)는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맹서’라는 뜻입니다. 중국 춘추시대의 진나라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나 건숙(蹇叔)과 같은 현인을 등용하여 선정(善政)을 베풀고 국력을 신장하여 서융(西戎: 티베트)의 패자(覇者)라 불리었습니다.
이 글은 목공이 젊은 장수들을 믿고 욕심을 앞세워 건숙과 백리해가 불가하다며 반대하는 전쟁을 일으켜 참패하고 모든 신하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맹세하여 고하는 연설문의 일부입니다. “만약 한 신하가 있어 꿋꿋하고 별다른 재주는 없지만, 그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워 남을 용납하는 정도가 남이 가진 재주를 자기가 가진 것처럼 여기며, 남이 어진 것을 마음에 좋아하기를 자기 입에서 나온 것보다 더하다면, 이는 진실로 남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니,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할 것이며, 또한 이로울 것이오(若有一介臣 斷斷兮 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尙亦有利哉).
남이 지닌 재주를 싫어하여 시기 질투하며, 남이 어진 것을 거슬러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진실로 남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위태롭게 할 것이오(人之有技 媢疾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 俾不通 寔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이 말에는 목공의 인재 등용관이 담겨 있습니다.
일찍이 공자는 이런 목공의 됨됨이를 평가하면서 “능히 왕자(王者)의 업(業)이라도 이룰 수 있었는데 패업(覇業)으로 끝난 것은 오히려 작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두고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7~1101)는 “지극하다. 목공이 두 사람을 논함이여, 앞의 한 사람은 방현령(房玄齡)과 같고, 뒤의 한 사람은 이임보(李林甫)와 같으니, 후세의 군주가 이것을 거울로 삼으면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천하사의 성패를 가늠하는 두 가지 마음
방현령과 이임보의 예와 같이 신하로서 군주에게 충성하느냐 반역하느냐 하는 것이 이 두 가지 마음에 달려 있고, 나라의 흥망이 이 두 가지 마음에 달려 있으며, 나아가 천하사의 성패가 또한, 이 두 가지 마음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은 달리 말하면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고,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입니다. 원래 인간 성품(性品)의 본질은 양심입니다. 사람이 예의에 벗어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감행하는 것은 사심에 사로잡혀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과 사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의 본바탕에 머물면 그것이 곧 양심이요, 마음을 속이거나 정성스럽지 못한 마음이 발동하는 것이 곧 사심입니다. 사심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인간의 마음은 선(善)한 것입니다. 그러니 범사에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양심을 되찾고 정심(正心)에 머무를 수 있는 위력(偉力)한 방법이 도전님께서 강조하신 바와 같이 도주님의 포유하신 인도에 따르는 것입니다. “나의 심기를 바르게 하고, 나의 의리를 세우고, 나의 심령을 구하여, 상제님의 임의에 맡기라(正吾之心氣 立吾之義理 求吾之心靈 任上帝之任意).”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상제님께서 부여하신 인간의 자유의지로 언제나 양심의 명령에 따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같이 너그럽게 마음을 쓰며, 모든 것을 상제님의 임의에 맡길 때, 비로소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도의 무한대한 진리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을 상제님의 임의에 맡긴다는 것은 인간의 에고(ego)가 펄펄 살아 있는 조건에서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제님께서는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교법 2장 6절)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도의 수도 법방을 따라가다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고 자각하는 것이 열쇠입니다.
정심입의(正心立義)하고 구심령(求心靈)하여 임상제(任上帝) 하는 일과 천하사의 성패를 가늠하는 두 가지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데서 도전님께서 훈시하신 “인류의 평화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이해하라.”는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입각한 마음이 바로 여유용(如有容)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상제님의 임의에 맡기면서 다음 몇 가지 심법(心法)을 병행하여 실천하는 것이 심령(心靈)을 통일하여 수도의 완성을 기하는 데 긴요합니다.
첫째,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수도하여 양심 회복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인성(人性)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정성을 지극히 하여 맑고 밝은 천품성인 양심을 되찾기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둘째, 항상 남을 사랑하고 어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춘무인(春無仁)이면 추무의(秋無義)라,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추수할 것이 없듯이 마음씀의 출발점은 남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입니다. 항상 남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으로 따뜻하고 공손하며, 착하고 순하며, 겸손하고 사양하면 남에게 척(慼)지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난을 피하고 잘 사는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척을 짓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시속에 ‘무척 좋다, 무척 잘 산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르는 것입니다.
셋째,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바다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 만물 중에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바다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데서 바다의 어원이 ‘받아들이다.’의 ‘받아’가 ‘바다’로 된 것입니다. 영어로 ‘이해하다.’라는 말은 ‘under-stand’인데 이는 ‘아래에 선다.’는 뜻이니 사물을 이해하는 길은 낮은 데로 임하여 바다와 같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에 있는 것입니다. 남을 용납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해원상생입니다.
넷째, 항상 남을 잘 되게 하려는 상생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이 대인수행의 궁극적인 과제이고, 해원상생 대도의 기본원리이며, 구제창생의 근본이념입니다. 남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내 어깨를 먼저 내밀어 실속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을 이루는 데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힘을 합하여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협동하고 협력하여 일을 도모해야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이상 네 가지, ‘양심, 어진 마음, 너그러운 마음, 상생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마음을 여러 가지로 명명해도 그 마음이 종류별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성 그대로의 본심’ 그 자리를 달리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서전』 「서문」에서 채침(蔡沈)은 “이제삼왕은 이 마음을 잘 간직한 분들이요, 하의 걸과 상의 수는 이 마음을 잃어버린 자들이며, 태갑과 성왕은 고생 끝에 이 마음을 간직한 이들이다. 마음을 간직하면 다스려지고 잃어버리면 어지러워지나니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의 갈림이 돌아보건대 그 마음을 간직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二帝三王 存此心者也 夏桀商受 亡此心者也 太甲成王 困而存此心者也 存則治 亡則亂 治亂之分 顧其心之存不存如何耳).” 하였는데 여기서 그 마음[其心]이 바로 도심(道心)이자 양심(良心)입니다.
이제 우리 시대는 인존시대(人尊時代)이고 평화시대이며 양심의 시대입니다. 상제님께서 “이제 말세를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 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천지 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예시 17절) 하셨듯이 이번 운수에는 역발산(力拔山)도 쓸 데가 없고 기개세(氣蓋世)도 소용없으며, 강절(康節)의 지식도 필요 없고 양심 이자(二字) 밝혀내어 마음 농사짓는 것이 제일입니다.
상제님의 무한무량하신 덕화(德化)로 후천 5만 년 동안 후천 중생으로 하여금 선으로써 먹고 살 도수를 짜 놓으셨으니 앞으로 양심이 아닌 모든 것은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양심으로 밥을 먹고 양심으로 옷을 입으며, 양심으로 자고 일어나며, 양심으로 보고 양심으로 듣고 양심으로 말하고 양심으로 행동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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