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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검이란 도적을 다스리는 자이거늘 도리어 도적질을 하여 도적에게 맞아 죽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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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2.20 조회22,88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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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鄭) 순검의 방약무인(傍若無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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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께서 四월 어느 날 정 괴산의 주막에서 상을 받고 계셨는데 전에 고부(古阜) 화란 때 알게 된 정(鄭) 순검이 나타나 돈 열 냥을 청하는 것을 거절하시자 그는 무례하게 상제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돈 열 냥을 빼앗아 갔도다. 이 방약무인을 탄식하시고 상제께서 그를 한탄하셨도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다시 전주에서 서신으로 돈을 청하여 오니 상제께서 형렬로 하여금 돈 열 냥을 구하여 보내시니라. 며칠 지낸 뒤에 정 순검이 고부로 돌아가던 중 정읍의 어느 다리에서 도적들에게 맞아 죽으니라. 이 소식을 전하여 들으시고 상제께서 “순검이란 도적을 다스리는 자이거늘 도리어 도적질을 하여 도적에게 맞아 죽었으니 이것이 어찌 범상한 일이리오” 하시고 다시 한탄하셨도다.


(행록 4장 16절)

 

  위 『전경』 구절은 상제님께서 무례한 짓과 도적질을 일삼는 정(鄭) 순검의 언동을 한탄하신 내용이다. 무신년(1908) 4월에 상제님께서는 금구 수류면 평목점에 있는 정괴산(丁槐山)의 주막에서 음식상을 받고 계셨다. 이때 고부 경무청[경찰분서]의 정 순검이 나타나 상제님께 돈 10냥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이에 그치지 않고 상제님의 조끼 주머니를 뒤져 돈 10냥을 빼앗아 갔다. 순검(巡檢)은 민생의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 고유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정 순검은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환히밝은 대낮에도 도적질을 서슴지 않은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강도(强盜)의 대담성을 보였다.
  이처럼 방약무인은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뜻으로, 주위의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성어는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의 이야기 속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위(衛)나라에서 문학과 무예에 뛰어난 형가(荊軻)가 살았다. 형가는 합종연횡(合從連衡)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위나라의 원군(元君)에게 유세(遊說)했지만, 원군은 그를 쓰지 않았다. 이후로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많은 호걸과 현인을 사귀었다.
  형가가 연(燕)나라로 건너갔을 때 전광(田光)이란 처사가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후원했다. 이곳에서 형가는 개 잡는 백정과 축(筑: 중국 고대의 현악기)의 명인인 고점리(高漸離)와 매우 친한 사이가 되었다. 술을 좋아했던 형가는 매일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취기가 오르면 시장바닥에서 고점리는 축을 울리고 형가는 곡에 맞추어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둘은 서로 즐기다가 감정이 복받치면 함께 울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相樂也 已而相泣 傍若無人者]. 그는 연나라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최강국인 진(秦)나라 영정(嬴政: 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자객(刺客)인 형가의 ‘방약무인’은 자유분방하여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체면에 구애받지 않는 당당한 태도를 말했다. 그런데 이후 변용되어 정 순검의 경우와 같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교만과 무례한 태도를 표현할 때 더 많이 쓰인다. 당시 정 순검은 자신의 직위를 내세워 온갖 오만을 떠는 등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굴었다. 그의 방약무인함은 정 괴산의 주막에서 상제님의 돈을 도적질한 것도 모자라 또 서신으로 40냥의 돈을 청구하여 10냥의 돈을 받기에 이른다. 그 후 도적을 감시할 의무를 저버리고 도리어 도적질을 저지른 정 순검이 백주대로에서 도둑무리에게 타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상제님께서는 범상한 일이 아님을 더욱 한탄하셨다.
  상제님과 정 순검의 만남은 고부 경무청의 화액(禍厄)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미년(1907) 12월 25일 밤중에 순검들이 신경수의 집을 급습하여 상제님과 종도 20여 명을 고부 경무청에 의병(義兵)혐의로 압송하였다.01 당시 상제님께서 “나는 실로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 하노라”고 심문에 답하자, 경무관은 상제님의 머리를 풀어헤쳐 보기도 하고 달아매는 등 심한 고문을 가했다.02 의병혐의에 대한 문초는 무신년(1908) 새해가 지나도 계속되었으나 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결국, 고부 경무청은 1월 10일에 모든 종도를 먼저 석방하고, 2월 4일에 상제님을 석방하였다.03 상제님께서는 이 사건을 백의장군(白衣將軍) 공사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고부 화난(禍難)이라고 말씀하셨다.
  고부 화난의 시기(1907년 12월 25일~1908년 2월 4일)는 호남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의병의 봉기가 무장투쟁으로 격화되는 단계였다. 이때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대한제국 경무청(警務廳)04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한반도 주둔 일본군) 소속의 수비대가 토벌대로 동원된다. 당시 일본군 수비대는 한반도의 현지사정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특히 경무청 소속 말단 직제인 현지 순검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이들의 활동은 밀정을 활용한 의병정찰 및 토벌과 체포, 회유, 고문 심지어 불법적인 살해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었다.05 반면 이들의 활동 또한 적지 않는 희생이 따랐다. 일진회원과 더불어 순검은 ‘친일매국노’로서 의병의 주요 처단대상의 하나였기 때문이다.06
  당시 언론에서는 의병의 항일투쟁을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보았다.07 그러나 군사력이 우세했던 일본 군경과 조선인 일제 협력자로 구성된 토벌대의 의병 진압과정은 무차별적인 학살로 이어졌다. 여기에 민생을 괴롭히는 비도(匪徒)의 무리 또한 의병을 가장하여 약탈과 살인을 감행하는 경우가 속출했기 때문에 누구라도 의병혐의로 경무청에 체포되면 총살을 면치 못했다.08 이러한 정황에서 일제에 항거한 의병과 그들의 진압에 동참했던 친일 협력자, 그리고 혼란을 틈탄 도적들 사이의 증오와 적대감은 한반도 곳곳을 삽시간에 살육과 약탈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송두리째 무너진 처참한 결과는 기층민과 더불어 공권력에 만연했던 생명경시의 참상이 어떠했는가를 쉽게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러한 정 순검의 방약무인 또한 그 참혹한 실상과 세태를 고스란히 반영해 주는 것과 같다.
  방약무인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기기만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자기합리화의 심리적 경향을 수반한다. 상제님께서 “크고 작은 일을 천지의 귀와 신이 살피시니라(大大細細 天地鬼神垂察).”고 하신 뜻을 미루어 볼 때, 방약무인의 태도 또한 신명의 수찰(垂察) 대상이 됨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금도 주어진 상황과 형태만 다를 뿐 정 순검처럼 직분을 망각한 방약무인이 도처에서 횡행하고 있지는 않을까? 먼저 자신의 일상에서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주시하고 과부족을 살피는 성찰이 요구된다.

 

 

 <대순회보 215호>

 


01 행록 3장 55절.
02 행록 3장 58절.
03 행록 3장 64절.
04 경무청은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 때 좌·우포도청을 합하여 신설되었는데, 1905년 일제의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가 설치된 이후로는 사실상 일본의 경찰기구(고문경찰조직)에 지배되었다.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친일세력의 역할」, 『역사교육논집』 58(2016), pp.239-241]
05 조재곤, 「러일전쟁 이후 의병탄압과 협력자들」, 『한국학논총』 37(2012), p.434.
06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친일세력의 역할」, 『역사교육논집』 58 (2016), p.256.
07 「한국 안에 전쟁」, 《대한매일신보》, 1907. 9. 5.
08 행록 3장 5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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