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사제지간의 예를 폐지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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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7.11 조회23,610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서 고래의 사제지간의 예를 폐지하시고 종도들에게 평좌와 흡연을 허락하셨도다.
(행록 5장 16절)
전통사회에서 스승은 부모나 임금과 같은 반열에 있는 존재이며 한결같이 섬겨야 할 대상이었다.01 조선 시대의 사람들 또한 이러한 믿음을 견지했는데, 그들에게 스승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로 이해되었다. 곧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한 몸이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사제(師弟: 스승과 제자) 간의 예(禮)를 폐지하신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예의 내용은 무엇이며, 또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허락하셨던 평좌(平坐)와 흡연(吸煙)은 어떤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을까?
오래전부터 스승은 특별한 위상을 가진 존재였다. 당(唐)나라의 한유(韓愈, 768~824)는 「사설(師說)」에서 “스승이란 도(道)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쳐 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이다”02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에서 스승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가치 또는 진리인 도를 제자에게 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누구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한 개인에 있어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은 스승의 선택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03 다시 말해 제자로부터 선택받은 스승은 ‘이러이러한 분’이라는 평가로 이미 검증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전통문화에서 도를 담은 스승은 이미 그 자체로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제자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부여받았다.
유교의 이념을 국시로 개국한 조선(朝鮮)은 이러한 사도(師道)의 문화를 더욱 존숭하게 된다. 이는 전왕조인 고려의 불교식 예속을 일소하기 위해 예치(禮治)로 기본질서를 구축하려 했던 국가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유교의 통치 원리는 법에 의한 지배 곧 법치(法治)가 아니라 예에 의한 교화 곧 예치(禮治)로 규정된다.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 시대 역시 법보다 예가 사회에서 통합과 조정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조선 사회는 예를 중시하는 유교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공고한 사회질서가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이전 사회와 다르게 운영되었다.
조선에서 예치의 확립은 『주자가례(朱子家禮)』·『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소학(小學)』의 보급과 확산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주자가례』는 종법(宗法)에 기반한 관혼상제 의례를 담고 있으며, 『삼강행실도』는 삼강(三剛)의 윤리를 실천한 모범사례를, 『소학』은 오륜(五倫)의 윤리에 기반한 어린이의 훈육을 담고 있다. 즉 교화의 주된 내용은 종법과 삼강오륜이었다. 종법은 장자(長子)가 제사(祭祀)와 가계(家系)를 계승하는 제도로서 친가 적장자 상속이 핵심이다. 삼강오륜은 이러한 종법의 기반 위에서 작동하는 인간관계 윤리인데, 삼강은 수직적 관계 윤리로 오륜은 수평적 관계 윤리로 설정되었다.04 조선조는 이러한 규범서(規範書)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적 사회질서와 실천윤리를 구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 이후 사회 혼란과 함께 향촌 사회에서 지배력이 약화된 사대부(士大夫)들은 예적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주자가례』와 『소학』의 실천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05 이로 인해 조선 사회에서는 종가를 중심으로 한 친족의 질서와 구별은 매우 엄격해 졌고, 쌍방적 수평 윤리인 오륜은 실제 적용과정에서 상하(上下)의 수직적 윤리로 작동하게 되었다. 즉 장유(長幼), 남녀(男女), 적서(嫡庶) 등 신분 간의 차별적 질서가 더욱 공고해졌다. 그 결과 조선 후기사회는 예의 적용을 둘러싼 ‘예송(禮訟)’의 논쟁에서 보듯이 의례가 과도하게 형식화되었다. 결국, 형식에 경도된 예는 사회 전반에서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대변하고, 이들 사이를 강제하는 윤리의 규범으로 표현되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유년 시절부터 『소학』을 통해 스승을 존경하고 그 스승 섬김의 도리를 다하기를 배운다.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평좌와 흡연을 허락하셨는데, 이는 제자가 스승을 섬길 때 평좌와 흡연을 할 수 없다는 당시의 문화적 현상이 반영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격식을 차리지 않고 편하게 앉는 것을 ‘평좌’라고 한다. 이를 볼 때 당시의 제자는 스승 앞에서 평좌가 아닌 ‘격식을 차리는 자세’를 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학』에서는 스승이 강의할 때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공손하게 들어야 한다’06는 교육만 있을 뿐 어떤 특정한 격식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서당의 풍경을 담은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풍속화와 조선말의 풍속 사진에서 평좌가 아닌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쓴 아동 규범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에는 ‘공수위좌(拱手危坐: 두 손을 모으고 무릎 꿇고 앉는 자세)’를 배우는 자의 기본적인 몸가짐으로 강조한 내용이 있다.07 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경(敬)의 정좌 공부로 ‘위좌(危坐: 무릎 꿇고 앉는 자세)’를 평생토록 선호했다고 전한다.08 이를 볼 때 조선의 교육적 전통은 자신의 수신과 타인의 공경이라는 측면에서 어릴 때부터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인 위좌로 몸가짐을 통제했다. 전통적인 스승의 참모습은 제자와 서로 마음을 통해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함께 성장함)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는 가부장제 신분질서의 영향으로 스승의 권위를 더욱 강조하면서 교학상장의 의미마저 퇴색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치는 스승은 마땅히 존경과 공경의 대상이었지만 엄격한 사제 간의 예절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로 그 존경과 공경을 판가름하게 되었고, 위좌는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에서 담배는 임진왜란 전후의 무렵에 도입되었다. 담배는 도입 되자마자 급속히 보급되었고 연다(煙茶)와 연주(煙酒)로 불리며 손님 대접에 흡연을 권하는 풍습이 성행했다.09 하멜(Hamel, 1630~1692)이 쓴 『하멜표류기』에 ‘조선 사람들이 4-5세 때부터 담배를 배우고, 남녀간에 피우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10는 기록을 볼 때, 당시의 담배는 남녀 노소와 상하귀천이 함께 즐기는 기호식품이었다. 흡연의 확대는 곧 담배 생산의 증가로 나타났다. 이에 흡연에 따른 경제적 비용과 담배경작에 따른 곡물 생산이 등한시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금지할 수 없었던 흡연은 신분 간에 구별을 엄격히 하는 사회 윤리적인 문제로 부각하게 되었다.11
흡연예절로 “어른 앞에서는 안된다.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나 할아버지 앞에서는 안된다. 제자가 스승 앞에서는 안된다. 천한 자가 귀한 자 앞에서는 안된다. 어린 자가 어른 앞에서는 안된다. 제사 때는 안된다.”12등을 정하였다. 흡연예절이 사회적 규율로 강요되면서 남녀차별에 따라 여성들의 흡연 또한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대부들은 신분의 차이를 담뱃대에도 반영한다. 양반들은 평민과 구별하기 위해 긴 담뱃대를 사용하는데, 심하게는 아주 길게 만들어 노비가 불을 붙이게 하였다. 또 담뱃대뿐만 아니라 담배통을 화려하게 금이나 은으로 치장하여 자신들의 권위와 신분을 강조하였다.13 이처럼 흡연에 대한 예절은 법률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에 수직적인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회적 규율 중의 하나였다.
조선 사회에서 성리학적 분수를 지킨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에 따라 분별있게 행동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무너진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방책으로 예학(禮學)이 강조되었고, 형식적으로 엄격해진 신분적 예 규범은 사회 전반에서 통제 수단으로 작동했다. 특히 평좌와 흡연에 대한 예는 개인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사제 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대표적인 신분질서의 문화였다. 이에 상제님께서 평좌와 흡연을 종도들에게 허락하신 것은 갈등과 차별로 점철된 신분질서에 대한 해소이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존귀하다는 ‘인존(人尊)’을 천명하신 그 뜻과 무관하지 않다. 유교 사회에서 권력 관계 형성은 문화적 상징인 예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 옛날부터 줄곧 전해온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를 폐하셨다는 것은 수직적 윤리가 적용되어 인간존중을 해치는 폐습의 철폐를 단행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 '서당'
01 『소학(小學)』, 「명륜(明倫)」, “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教之 君食之.” 이는 춘추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담긴 내용이다.
02 『고문진보(古文眞寶)』, 「사설(師說)」, “師者 所以傳道授業解惑也.”
03 한재훈, 「스승에 대한 동양의 전통적 이해」, 『맘울림』 25 (2009), p.129.
04 김언순, 「18세기 종법사회 형성과 사대부의 가정교화」, 『사회와 역사』 83 (2009), p.125~126.
05 김언순, 앞의 글, p.127.
06 『소학(小學)』, 「명륜(明倫)」, “坐必安…正爾容 聽必恭.”
07 『율곡전서(栗谷全書)』 27권, 「격몽요결(擊蒙要訣)·지신장(持身章) 제삼(第三)」, “容色必肅 拱手危坐”
08 강진석, 「퇴계 공부론의 실제 활용과 그 의의」, 『한국철학논집』 39 (2013), p.13.
09 이영학, 「조선후기 담배의 급속한 보급과 사회적 영향」, 『역사문화연구』 22 (2005), p.63.
10 헨드릭 하멜, 『하멜표류기』, 김태진 옮김 (서울: 서해문집, 2003), p. 133.
11 박희진, 「흡연예절의 형성과정」, 『민속역사학』 44 (2014), p.131.
12 이옥(李鈺, 1760~1812)이 쓴 『연경(烟經)』의 내용을 재인용했다.(이영학, 앞의 글, p.74. 참고)
13 이영학, 앞의 글,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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