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으로 만든 계룡(鷄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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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9.14 조회25,387회 댓글0건본문
속담에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이라고 하는데 세상 사람은 올바로 일러 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
(예시 65절)
앞 성구에서 상제님께서는 “짚으로 만든 계룡(鷄龍)”이라는 속담을 말씀하시면서 이 속담이 올바르게 알려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짚으로 만든 계룡”이라는 속담은 어떤 의미를 지니며, 세상 사람들은 이 속담에서 무엇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이신가?
근래 편찬된 속담관련 사전에는 “짚으로 만든 계룡”이라는 속담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짚’ 관련 속담을 살펴보면, ‘짚’은 ‘보잘것없는 것’, ‘하찮은 것’, ‘변변치 않은 것’의 의미로 쓰였다. 예를 들어, “짚신에 국화 그리기”는 격에 맞지 않게 멋없이 치장함을 이르며, “볏짚에도 속이 있다”라는 말은 변변치 않은 볏짚에도 속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속이 없겠냐는 뜻이고, “헌 짚신도 짝이 있다”는 속담은 보잘것없는 헌 짚신조차 제 짝이 있다는 뜻으로 사람은 누구나 부부로 짝을 맺고 산다는 의미이다. 즉 속담에서 ‘짚’은 가치와 의미가 별로 없는 물건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면 ‘계룡’은 어떤 의미인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알영이라는 연못에서 닭 모양의 용인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고 이 아이가 박혁거세의 부인이 되었다고 한다. ‘계룡’이 이처럼 신성한 닭 모습의 용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계룡산’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전경』의 다른 구절을 통해서 볼 때도 성구에서의 ‘계룡’은 계룡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이 상제님께 계룡산(鷄龍山)에 정씨가 도읍하는 비결을 여쭈자 상제님께서는 “일본인이 산속만이 아니라 깊숙한 섬 속까지 샅샅이 뒤졌고 또 바다 속까지 측량하였느니라. 정씨(鄭氏)가 몸을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01고 말씀하셨다. 또 어떤 사람이 계룡산 건국의 비결을 물으니 “동서양이 통일하게 될 터인데 계룡산에 건국하여 무슨 일을 하리오.”02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구절의 내용에서 어떤 사람들이 상제님께 정씨가 계룡산에 건국한다는 비결에 대해 여쭈자 상제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 ‘계룡산에 건국하여 무슨 일을 하리오.’라고 하시며 계룡산 건국설은 허망하고 무가치한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짚으로 만든 계룡’은 가치가 없고 보잘것없는 재료인 짚으로 만든 계룡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계룡산 건국설의 허상·무의미함과 함께 계룡산의 가치 결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계룡산 건국설의 허망함을 일깨워 주셨으나 상제님 재세 당시 그리고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많은 민중은 종교적 이상과 희망을 품고 계룡산에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계룡산에 모여들었으며, 과연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었을까?
정감록과 계룡산
상제님 재세 시와 가까운 시기에 조선에 입국하여 천주교 신부로 활동하였던 프랑스인 뿌르띠에(Pourthie, 1830~1866)는 1862년 임술민란의 원인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조선의 예언서는 현 왕조를 물러나게 할 사람은 정(鄭)이라는 사람일 것이라 예언합니다. … 그 유명한 예언서의 불길한 설명이 사방에 돌며 서울의 화재와 양반들의 학살을 예고했습니다. 조정은 벌벌 떨었습니다.03
이 기록에서 19세기 중후반 ‘정씨 왕조’의 출현에 관한 예언04이 조선 사회에 널리 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민중들 사이에서 ‘정씨 왕조의 출현’에 관한 예언이 널리 유행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지를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연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언은 16세기 말 ‘정여립 모반’ 사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정여립 사건 발생 100여 년 전부터 이미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일어난다”는 ‘목자망 전읍흥(木子亡 奠邑興)’의 예언이 조선 사회에 유포되어 있었다고 한다.05 이 예언을 ‘정감(鄭鑑)’이라고 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39년(영조 15년) 음력 8월 6일 기사이다. 그 기사에서 “서북 변방의 사람들이 ‘정감(鄭鑑)의 참위(讖緯)의 글’을 파다하게 서로 전하여 이야기하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불살라 금하기를 청하고…”06라고 하였다.07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역모 및 반란 사건에서 이 ‘정감’의 이야기 및 내용이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등 ‘정감’의 예언은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상제님께서 강세하실 즈음 조선은 정치적·사회적 도탄기에 빠져 있었고, 당시에 괴질로 불린 콜레라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등 민중들은 의지처를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한 민중의 불안 심리에 편승하여 ‘정감’의 예언은 더욱 기승을 부렸던 것이다. 『전경』 말씀에서도 상제님께 계룡산 건국에 대해 여쭈는 사람들이 있었던 점에서, 상제님을 뵈었던 이들 또한 ‘정감’의 예언에 관심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한일병합이 되어 나라를 잃은 민중들은 더욱 ‘정감록’의 예언을 신봉하였다. 종도 차경석이 보천교를 창설한 후 보천교에 가입한 많은 민중 가운데는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와 해원상생 대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정감록의 예언을 바탕으로 차경석이 장차 천자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 믿는 이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보천교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판결문을 보면 상제님을 알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차경석과 계룡산 도읍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김철진: 훔치교에 가입할 경우에는 대정13년 (1924) 갑자년에는 우리 교도가 다 함께 궐기하고 조선을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 나라를 만들고, 교주 차경석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제위에 오른다. 교도는 각 자격에 따라 관리 기타 등 타당한 대우를 받는다.08
위 내용에서 김철진이라는 보천교 간부는 1924년 갑자년이 되면 차경석이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제위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때 보천교는 그 교세에 있어 천도교를 넘을 정도의 대교단으로 성장하였지만,09 1936년 차경석의 죽음과 함께 일제의 유사종교단체해산령에 의해 교단이 강제로 해체되기에 이르자 수많은 보천교인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보천교는 교리적으로 계룡산을 언급한 적이 없으며, 실질적으로도 계룡산에 성전을 건축하거나 신도들을 이주시킨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민중은 『정감록』의 영향 아래 차경석을 정도령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계룡산 신도안[新都內]에 본부를 세우고 대규모 신앙촌을 세운 종교가 있으니 바로 상제교(上帝敎)이다. 상제교는 동학의 한 분파로 교주인 김연국은 1924년 서울에 있는 본부를 신도안으로 옮기면서 황해도·평안도 신도 약 2천여 명을 함께 이주시켰다. 원래 신도안에는 거주민이 거의 없었는데, 상제교가 계룡산 신도안을 개척하여 신앙촌을 이룬 것이다.10
그 후 여러 종교가 신도안으로 쇄도하여 신도안은 수많은 종교의 집성촌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많은 신종교가 모여들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1963년에 계룡산에 무려 50여 개의 종교단체가 있었다고 하며,11 ‘미신천지’라는 제명으로 비판 기사를 내기도 하였다.12 1975년 조사에서는 104개의 단체가 확인되었으며 총 10여만 명의 신도(남성 36,177명, 여성 65,653명)가 거주하고 있다고 하였다.13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교 집성지였던 계룡산 신도안은 1975년 정부의 국립공원화 정책과 1983년부터 실시한 충청남도 6.20 재개발사업14에 의해 그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1975년 정부는 지역 내의 정화라는 취지로 국립공원이 된 계룡산 일대의 종교단체를 정리할 법적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정부는 세부 계획을 세우고 제1단계로 정화대책위원회와 정화대책실무위원회를 구성하고, 제2단계로 1975년 10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이 지역의 신흥종교 단체 해체 권유 및 국립공원 구역 내 건물철거 작업을 시행하였다. 제3단계 계획은 1975년 1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시행되었는데, 자진철거에 불응한 이들에 대한 강제철거집행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기존 104개 단체는 93개로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1983년 8월 1일부터 이듬해 6월 30일까지 시행된 충청남도 6.20 재개발사업은 이 지역 내의 건물 및 주민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는 것이었다.15 이 사업으로 계룡산 신도안의 종교시설은 대부분 철거되고 1989년 7월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1993년에는 해군본부가 이전되어 육해공 3군의 통합기지인 계룡대가 마련되었다. 이후 계룡산에서의 종교 활동은 크게 쇠퇴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계룡 軍 문화축제
조선 중·후기부터 1983년까지 우리나라 계룡산은 많은 민중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그들이 종교적 이상을 이루기 위해 직접 찾아가 수행하는 성소(聖所)였다. 많은 이들은 계룡산을 이씨 왕조를 대체할 새 왕조의 도읍지로 또는 풍수의 명당으로 보고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에 크게 유행하여 수많은 보천교 민중들은 차경석을 정도령으로 보았고, 동학의 한 일파는 대규모로 이주하여 종교 마을을 건설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구원 및 도통의 꿈을 안고 계룡산에 쇄도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허망하게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며 후회와 실망만 남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계룡산 건국에 대해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고 말씀하시며 “짚으로 만든 계룡”이라는 속담을 통해 그것의 허망함과 무가치함을 일깨워 주셨다. 우리 수도인들은 “대인의 말은 구천에 이르나니 또 나의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니 잘 믿으라.”16라고 하신 것처럼 세상의 시세와 주변의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상제님의 말씀을 잘 믿으며 대순진리에 입각한 올바른 신앙에 힘써야 하겠다.
01 교법 3장 39절.
03 교법 3장 40절.
03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하, 안응렬 옮김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p.336.
04 이러한 예언은 오늘날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감록』은 일제강점기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1996-1934)가 조선의 예언서 35종을 모아 1923년 2월 동경에서 출판한 『정감록비결집록(鄭鑑錄秘訣輯錄)』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이후 같은 해 3월과 4월 조선인 김용주의 『정감록』과 현병주의 『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이 조선 경성에서 출판되었고, 이 두 책 모두 동경 판본을 가감한 것이다.
05 김신회, 「정감록 기억의 형성과 예언서 출현 - 1739년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문화』 84 (2018), p.219.
06 『영조실록』 50권, 영조 15년 8월 6일, “西北邊人以鄭鑑讖緯之書, 頗相傳說, 朝臣至請投火禁之…”
07 백승종, 『한국의 예언문화사』 (서울: 푸른역사, 2006), pp.78-79.
08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대정십년 형제158호, CJA0002172, 1921년 6월 2일, p.387.
09 일제는 3.1 운동 이후 천도교가 쇠퇴하였을 때 보천교는 교세를 확장하여 천도교를 능가하였으며 교세가 백만에 이른다고 기록하였다. 조선총독부경무국 편,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 昭和八年十三年』 (동경: 엄남당, 1966), p.115.
10 류병덕, 『한국신흥종교』 (이리: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2), pp.248-249.
11 「계룡산에 유사종교 50개」, 《동아일보》 1963. 8. 8.
12 「미신천지」, 《동아일보》 1963. 8. 8.
13 류병덕, 앞의 책, pp.281-282.
14 일명 ‘6.20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으며, 계룡산에 육해공 3군의 통합기지를 건설하려는 국책 사업이다.
15 류병덕, 앞의 책, pp.284-300.
16 교법 2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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