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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을 닦기에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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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6.08.02 조회34,619회 댓글0건본문
신명은 탐내어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의 덜미를 쳐서 물리치나니라. 자리를 탐내지 말며 편벽된 처사를 삼가하고 덕을 닦기에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라. 신명들이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히리라. (교법 1장 29절)
우리 도(道)는 신도(神道)이다. 도전님께서 “우리 도(道)는 신도(神道)임을 누차 말하였으나 깨닫지 못함은 신도와 인위적(人爲的)인 사도(邪道)를 구별하지 못한 까닭이다.”라고 하시며, “도인들은 항상 어디서나 신명의 수찰이 있음을 명심하고 속임과 거짓이 없이 도인의 본분을 바로 지켜야 한다.” 하셨다. 이런 신도를 수행하는 데서 명심하여야 할 사항이 있다.
신명은 자리를 탐하여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이 덜미를 쳐서 물리친다. 따라서 자리를 탐내지 말아야 하고, 편벽된 처사를 삼가야 하며, 덕을 닦기에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이런 사람은 신명들이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힐 것이기 때문이다.
자리를 탐내지 말라
인간의 마음에는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이 있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다. 이 사심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는데, 탐음진치(貪淫嗔癡), 즉 탐심(貪心)과 음심(淫心), 진심(嗔心), 치심(癡心)이 그것이다. 이 중에는 탐심이 양심을 밝히는 데서 가장 큰 적이다. 인간은 오직 탐심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탐심 중에도 신도를 닦는 입장에서 자리를 탐내는 일은 극력 삼가야 한다. 대대세세(大大細細)를 천지귀신이 수찰하고 있는데, 자기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탐하는 것은 바르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자를 신명이 가만히 두지 않고 덜미를 쳐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상제님께서 “못 앉을 자리에 앉은 자는 신명들이 그 목을 끌어 내리라.”(교법 3장 44절) 하셨다.
도전님께서 “도인들은 자신들의 기량에 따라 응분의 직분이 주어졌으니 맡은 바를 밝게 행하여야 한다.” 하시며, “하극상(下剋上)은 배사율에 걸리고 상기하(上棄下)는 자멸을 가져오리니, 모두들 제자리를 제가 지켜서 질서를 유지하기에 힘을 모으기 바란다.”고 하셨다. 우리의 현재 자리는 자신의 기량에 따라 주어진 응분의 직분이다. 위를 극하거나 아래를 버리는 일이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체계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체계질서는 도심(道心)으로써 바로 확립되고 도심은 위아래 도인들이 서로 믿으며 변하지 않고 신뢰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각과 후각, 임원과 수반이 서로 믿고 신뢰하는 곳에 자리를 탐하는 마음이 붙을 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도심(道心)이 부족하고 사심에 물들어 자리를 탐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탐심을 거두지 않고 야망을 품으면 필히 머지않은 장래에 피치 못할 과보가 목전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도인은 늘 안심(安心)ㆍ안신(安身)을 이루고 자리를 탐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편벽된 처사를 삼가라
수도는 인륜을 바로 행하고 도덕을 밝혀나가는 것이다. 도덕을 밝혀나가는 데서 편벽됨이 없고 공명정대하게 처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도전님께서 “도(道)란 부단불식(不斷不息)하여 무형무적(無形無跡)하고, 무성무취(無聲無臭)하지만 공명정대하여 무위무가(無僞無假)하며, 무편무사하여 두과지리(豆瓜之理)와 같다.” 하시며, “모든 도인들은 처사에서 무편무사(無偏無私)하고 공명정대하여 욕됨이 없게 하라.” 하셨다.
특히 남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는 임원들은 절대 편벽(偏僻)된 처사가 없도록 모든 일을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망(人望)을 얻고 신임(信任)을 받게 되는 것이다. 공명정대하지 못한 데서 모든 어려운 문제가 일어나며 다른 사람에게서 불신임을 당하게 되고, 떳떳하지 못하게 된다.
편벽(偏僻)된 처사란 일 처리를 한 쪽에 치우치게 하여 중정(中正)치 못한 것을 뜻한다. 임원은 도의 일을 보거나, 수반 도인들을 살펴 나갈 때 편벽된 처사를 하거나 사심에 물들어 일 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 편벽된 처사는 편벽된 마음에서 나오고 편벽된 마음이 곧 사심이다. 편벽된 처사를 하게 되면 한 쪽에서 불평을 하게 되고, 불평이 일어나면 화합을 해쳐 분열을 초래하고 불미스러운 일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임원은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행해야 한다.
각 방면에서 임원을 내는 일도 『도헌(道憲)』에 명시된 기준 호수를 잘 지키고, 교화 실력이나 도의 공적을 잘 살펴서 공정하게 해야 한다. 일을 맡기는 데서도 믿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바로 꾸짖고, 그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기게 되지만, 서로 믿지 못하는 경우에 꾸짖게 되면 오히려 오해가 생겨 관계가 악화될 수 있는 것이니, 이점도 잘 고려하여 처사하여야 한다. 또한,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르는 사람은 잘못을 해도 눈감아주고, 잘못 보인 사람에게는 잘못을 바로 지적하는 식의 처세를 해서도 안 된다. 이런 것을 다 편벽된 처사라 하는 것이다. 매사에 편벽과 사사로움 없이 도의 법규를 잘 지켜 공정을 기하여 처리해 나가야 한다.
덕을 닦기에 힘쓰라
도(道)가 체(體)라면 덕(德)은 용(用)이다. 도는 우주 만상의 시원이며, 생성ㆍ변화의 법칙이다. 덕은 이러한 도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덕은 도를 닦는 근본이 된다. 이에 도전님께서 “도는 우주 만상의 시원(始原)이며 생성(生成) 변화의 법칙이고, 덕은 곧 인성(人性)의 신맥(新脈)이며, 신맥은 정신의 원동력이므로 이 원동력은 윤리도덕만이 새로운 맥이 될 것이다.” 하시며, “덕은 도를 닦는 근본이며 재물은 말단이라 하는데, 근본의 덕을 외면하고 말단의 재물에 마음을 쏟으면 시비와 쟁탈만이 조장될 뿐이다.” 하셨다.
도전님께서 “명덕(明德)을 수행하고 재덕(才德)을 계발하여 지선(至善)에 이르도록 힘써나가야 한다.” 하셨으니, 심령(心靈)을 통일하여 내면의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을 근본으로 하면서 재덕(才德)을 계발하여 정직하고 진실한 인성(人性)의 본질에 합당한 지극한 선(善)에 이르도록 힘써나가야 한다.
덕을 닦아나가는 데는 네 가지 영역이 있으니, 심덕(心德)과 언덕(言德), 덕행(德行), 음덕(陰德)이 그것이다. 덕을 닦는 데는 우선, 심덕을 길러야 한다. 마음으로 닦은 덕의 공이 큰 것이다. 상제님께서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교법 1장 2절) 하셨고, “너희는 시장판에나 집회에 가서 내 말을 믿으면 살 길이 열릴 터인데 하고 생각만 가져도 그들은 모르나 그들의 신명은 알 것이니 덕은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예시 43절)라고 하시어 심덕이 크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도전님께서도 “임원과 도인은 심정을 서로 통하여 혼연일체가 되라. 심정으로 닦은 덕(德)의 공(功)이 크니라.” 하셨다.
덕을 닦는 데는 다음으로, 언덕(言德)을 잘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도전님께서 “말은 마음의 소리다. 말을 좋게 하여 덕이 되게 하여야 한다.” 하시며, “서로가 언덕(言德)에 힘쓸지어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 되생각하고 말하라.” 하셨다. 인간사 화(禍)와 복(福)은 언제나 언덕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니 언덕을 특별히 삼가야 한다.
덕을 닦는 데는 다음으로, 덕행(德行)에 힘써야 한다. 덕행은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이다. 덕행은 마음과 말보다 행동으로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이다. 대순진리를 마음으로 닦고 남을 사랑하는 어진 덕을 실천하여야 한다. 이에 도전님께서 “대순진리를 심수덕행(心修德行)하고 정심입의(正心立義)하여 문달(聞達)을 마음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하셨다. 남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일의 성공은 언제나 타인과의 협력으로 이루어야 하므로 남을 잘 되게 하는 덕행으로 공덕을 이루어야 한다.
덕을 닦는 데는 또한, 음덕(陰德)에 힘써야 한다. 덕(德)에는 음덕(陰德)과 양덕(陽德)이 있다. 음덕은 남모르게 쌓는 덕행이요, 양덕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베푸는 덕행이다. 상제님께서는 “모든 일에 외면수습을 버리고 음덕에 힘쓰라. 덕은 음덕이 크니라.”(교법 2장 18절) 하시고, 김형렬이 상제님께 자식을 태어주시고도 그 부모에게 알리지 않으시니 무슨 까닭이신가 하는 질문에 “내가 할 일을 할 뿐이고 타인이 알아주는 것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니라.”(교법 3장 11절)라고 하셨다. 수도인은 음덕의 소귀(所貴)함을 깨달아 일체의 자부 자찬의 마음을 버리고 남이 몰라주는 것에 개의치 말고 숨은 덕행을 쌓아나가야 하겠다.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라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나 어느 곳에 자리를 정하시고 머무르실 때는 반드시 종도들에게 정심(正心)을 명하시고 혹 방심(放心)하는 자가 있을 때는 보신 듯이 마음을 거두라고 명하셨고, 주무시는 중에도 방심하는 자에게는 마음을 통찰하신 듯이 깨우쳐 주시고 방심을 거두게 하셨다.
마음 닦는 본질이 정심을 간직하는 데 있다. 덕(德)을 파자하면 걸을 척(彳)에 곧을 직(直), 마음 심(心)으로 곧은 마음, 즉 정심(正心)을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심(正心)이 아니면 덕(德)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심수덕행(心修德行)의 근본은 정심(正心)에 있다. 이에 도전님께서는 “지성으로 정심수신(正心修身)하라.” 하시며, 성현(聖賢)은 성(誠)을 일생동안 값진 보배로 삼아 지성으로 진리를 수행한 분들이라고 일깨워주시고, 성(誠)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誠)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므로 지성(至誠)으로 바르게 도 닦기를 힘써야 한다고 하셨다. 정심(正心)은 외부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심정(心定)한 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대세세(大大細細) 천지귀신의 수찰 아래 마음을 속일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상제님의 신도(神道)를 닦는 우리 도인은 자리를 탐내지 말고, 편벽된 처사를 삼가며, 덕 닦기에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신명은 탐내어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은 그 목덜미를 쳐서 물리치고, 공명정대하고 정심입의(正心立義)한 사람은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도(道)는 신도(神道)이다. 도전님께서 “우리 도(道)는 신도(神道)임을 누차 말하였으나 깨닫지 못함은 신도와 인위적(人爲的)인 사도(邪道)를 구별하지 못한 까닭이다.”라고 하시며, “도인들은 항상 어디서나 신명의 수찰이 있음을 명심하고 속임과 거짓이 없이 도인의 본분을 바로 지켜야 한다.” 하셨다. 이런 신도를 수행하는 데서 명심하여야 할 사항이 있다.
신명은 자리를 탐하여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이 덜미를 쳐서 물리친다. 따라서 자리를 탐내지 말아야 하고, 편벽된 처사를 삼가야 하며, 덕을 닦기에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이런 사람은 신명들이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힐 것이기 때문이다.
자리를 탐내지 말라
인간의 마음에는 양심(良心)과 사심(私心)이 있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다. 이 사심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는데, 탐음진치(貪淫嗔癡), 즉 탐심(貪心)과 음심(淫心), 진심(嗔心), 치심(癡心)이 그것이다. 이 중에는 탐심이 양심을 밝히는 데서 가장 큰 적이다. 인간은 오직 탐심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탐심 중에도 신도를 닦는 입장에서 자리를 탐내는 일은 극력 삼가야 한다. 대대세세(大大細細)를 천지귀신이 수찰하고 있는데, 자기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탐하는 것은 바르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자를 신명이 가만히 두지 않고 덜미를 쳐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상제님께서 “못 앉을 자리에 앉은 자는 신명들이 그 목을 끌어 내리라.”(교법 3장 44절) 하셨다.
도전님께서 “도인들은 자신들의 기량에 따라 응분의 직분이 주어졌으니 맡은 바를 밝게 행하여야 한다.” 하시며, “하극상(下剋上)은 배사율에 걸리고 상기하(上棄下)는 자멸을 가져오리니, 모두들 제자리를 제가 지켜서 질서를 유지하기에 힘을 모으기 바란다.”고 하셨다. 우리의 현재 자리는 자신의 기량에 따라 주어진 응분의 직분이다. 위를 극하거나 아래를 버리는 일이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도리를 다함으로써 체계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체계질서는 도심(道心)으로써 바로 확립되고 도심은 위아래 도인들이 서로 믿으며 변하지 않고 신뢰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각과 후각, 임원과 수반이 서로 믿고 신뢰하는 곳에 자리를 탐하는 마음이 붙을 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도심(道心)이 부족하고 사심에 물들어 자리를 탐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탐심을 거두지 않고 야망을 품으면 필히 머지않은 장래에 피치 못할 과보가 목전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도인은 늘 안심(安心)ㆍ안신(安身)을 이루고 자리를 탐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편벽된 처사를 삼가라
수도는 인륜을 바로 행하고 도덕을 밝혀나가는 것이다. 도덕을 밝혀나가는 데서 편벽됨이 없고 공명정대하게 처사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도전님께서 “도(道)란 부단불식(不斷不息)하여 무형무적(無形無跡)하고, 무성무취(無聲無臭)하지만 공명정대하여 무위무가(無僞無假)하며, 무편무사하여 두과지리(豆瓜之理)와 같다.” 하시며, “모든 도인들은 처사에서 무편무사(無偏無私)하고 공명정대하여 욕됨이 없게 하라.” 하셨다.
특히 남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는 임원들은 절대 편벽(偏僻)된 처사가 없도록 모든 일을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망(人望)을 얻고 신임(信任)을 받게 되는 것이다. 공명정대하지 못한 데서 모든 어려운 문제가 일어나며 다른 사람에게서 불신임을 당하게 되고, 떳떳하지 못하게 된다.
편벽(偏僻)된 처사란 일 처리를 한 쪽에 치우치게 하여 중정(中正)치 못한 것을 뜻한다. 임원은 도의 일을 보거나, 수반 도인들을 살펴 나갈 때 편벽된 처사를 하거나 사심에 물들어 일 처리를 해서는 안 된다. 편벽된 처사는 편벽된 마음에서 나오고 편벽된 마음이 곧 사심이다. 편벽된 처사를 하게 되면 한 쪽에서 불평을 하게 되고, 불평이 일어나면 화합을 해쳐 분열을 초래하고 불미스러운 일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임원은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행해야 한다.
각 방면에서 임원을 내는 일도 『도헌(道憲)』에 명시된 기준 호수를 잘 지키고, 교화 실력이나 도의 공적을 잘 살펴서 공정하게 해야 한다. 일을 맡기는 데서도 믿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바로 꾸짖고, 그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기게 되지만, 서로 믿지 못하는 경우에 꾸짖게 되면 오히려 오해가 생겨 관계가 악화될 수 있는 것이니, 이점도 잘 고려하여 처사하여야 한다. 또한,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르는 사람은 잘못을 해도 눈감아주고, 잘못 보인 사람에게는 잘못을 바로 지적하는 식의 처세를 해서도 안 된다. 이런 것을 다 편벽된 처사라 하는 것이다. 매사에 편벽과 사사로움 없이 도의 법규를 잘 지켜 공정을 기하여 처리해 나가야 한다.
덕을 닦기에 힘쓰라
도(道)가 체(體)라면 덕(德)은 용(用)이다. 도는 우주 만상의 시원이며, 생성ㆍ변화의 법칙이다. 덕은 이러한 도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덕은 도를 닦는 근본이 된다. 이에 도전님께서 “도는 우주 만상의 시원(始原)이며 생성(生成) 변화의 법칙이고, 덕은 곧 인성(人性)의 신맥(新脈)이며, 신맥은 정신의 원동력이므로 이 원동력은 윤리도덕만이 새로운 맥이 될 것이다.” 하시며, “덕은 도를 닦는 근본이며 재물은 말단이라 하는데, 근본의 덕을 외면하고 말단의 재물에 마음을 쏟으면 시비와 쟁탈만이 조장될 뿐이다.” 하셨다.
도전님께서 “명덕(明德)을 수행하고 재덕(才德)을 계발하여 지선(至善)에 이르도록 힘써나가야 한다.” 하셨으니, 심령(心靈)을 통일하여 내면의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을 근본으로 하면서 재덕(才德)을 계발하여 정직하고 진실한 인성(人性)의 본질에 합당한 지극한 선(善)에 이르도록 힘써나가야 한다.
덕을 닦아나가는 데는 네 가지 영역이 있으니, 심덕(心德)과 언덕(言德), 덕행(德行), 음덕(陰德)이 그것이다. 덕을 닦는 데는 우선, 심덕을 길러야 한다. 마음으로 닦은 덕의 공이 큰 것이다. 상제님께서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교법 1장 2절) 하셨고, “너희는 시장판에나 집회에 가서 내 말을 믿으면 살 길이 열릴 터인데 하고 생각만 가져도 그들은 모르나 그들의 신명은 알 것이니 덕은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예시 43절)라고 하시어 심덕이 크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도전님께서도 “임원과 도인은 심정을 서로 통하여 혼연일체가 되라. 심정으로 닦은 덕(德)의 공(功)이 크니라.” 하셨다.
덕을 닦는 데는 다음으로, 언덕(言德)을 잘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도전님께서 “말은 마음의 소리다. 말을 좋게 하여 덕이 되게 하여야 한다.” 하시며, “서로가 언덕(言德)에 힘쓸지어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 되생각하고 말하라.” 하셨다. 인간사 화(禍)와 복(福)은 언제나 언덕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니 언덕을 특별히 삼가야 한다.
덕을 닦는 데는 다음으로, 덕행(德行)에 힘써야 한다. 덕행은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이다. 덕행은 마음과 말보다 행동으로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이다. 대순진리를 마음으로 닦고 남을 사랑하는 어진 덕을 실천하여야 한다. 이에 도전님께서 “대순진리를 심수덕행(心修德行)하고 정심입의(正心立義)하여 문달(聞達)을 마음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하셨다. 남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일의 성공은 언제나 타인과의 협력으로 이루어야 하므로 남을 잘 되게 하는 덕행으로 공덕을 이루어야 한다.
덕을 닦는 데는 또한, 음덕(陰德)에 힘써야 한다. 덕(德)에는 음덕(陰德)과 양덕(陽德)이 있다. 음덕은 남모르게 쌓는 덕행이요, 양덕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베푸는 덕행이다. 상제님께서는 “모든 일에 외면수습을 버리고 음덕에 힘쓰라. 덕은 음덕이 크니라.”(교법 2장 18절) 하시고, 김형렬이 상제님께 자식을 태어주시고도 그 부모에게 알리지 않으시니 무슨 까닭이신가 하는 질문에 “내가 할 일을 할 뿐이고 타인이 알아주는 것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니라.”(교법 3장 11절)라고 하셨다. 수도인은 음덕의 소귀(所貴)함을 깨달아 일체의 자부 자찬의 마음을 버리고 남이 몰라주는 것에 개의치 말고 숨은 덕행을 쌓아나가야 하겠다.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라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나 어느 곳에 자리를 정하시고 머무르실 때는 반드시 종도들에게 정심(正心)을 명하시고 혹 방심(放心)하는 자가 있을 때는 보신 듯이 마음을 거두라고 명하셨고, 주무시는 중에도 방심하는 자에게는 마음을 통찰하신 듯이 깨우쳐 주시고 방심을 거두게 하셨다.
마음 닦는 본질이 정심을 간직하는 데 있다. 덕(德)을 파자하면 걸을 척(彳)에 곧을 직(直), 마음 심(心)으로 곧은 마음, 즉 정심(正心)을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심(正心)이 아니면 덕(德)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심수덕행(心修德行)의 근본은 정심(正心)에 있다. 이에 도전님께서는 “지성으로 정심수신(正心修身)하라.” 하시며, 성현(聖賢)은 성(誠)을 일생동안 값진 보배로 삼아 지성으로 진리를 수행한 분들이라고 일깨워주시고, 성(誠)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誠)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므로 지성(至誠)으로 바르게 도 닦기를 힘써야 한다고 하셨다. 정심(正心)은 외부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심정(心定)한 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대세세(大大細細) 천지귀신의 수찰 아래 마음을 속일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상제님의 신도(神道)를 닦는 우리 도인은 자리를 탐내지 말고, 편벽된 처사를 삼가며, 덕 닦기에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 신명은 탐내어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은 그 목덜미를 쳐서 물리치고, 공명정대하고 정심입의(正心立義)한 사람은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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