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의 원(冤)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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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6.08.02 조회25,592회 댓글0건본문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그도 덕이 되어서 복을 이루게 되나니라.” (교법 1장 56절)
우리 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데, 그것은 과연 우리 도의 가르침에 사랑이라는 덕목이 없어서일까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용어는 『전경』을 비롯하여 『대순지침』, 『대순진리회요람』, 「도전님 훈시」등 도처에서 보입니다.
사랑이란 용어가 나오는 우리 경전 상의 용례는 『전경』에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그도 덕이 되어서 복을 이루게 되나니라.”(교법 1장 56절), 『대순지침』에 “인류의 평화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이해하라.”, “모든 사람들을 가족과 같이 사랑하고 아껴서 마음으로 따르도록 하여 포덕하라.”, 『대순진리회요람』에 “항상(恒常) 남을 사랑하고 어진 마음을 가져 온공(溫恭) 양순(良順) 겸손(謙遜) 사양(辭讓)의 덕(德)으로써 남을 대할 때에 척(慼)을 짓지 않도록 하라.”는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포덕교화기본원리(1)』에는 “인류가 무편무사(無偏無私)하고 정직과 진실로써 상호 이해하고 사랑하며 상부상조의 도덕심이 생활화된다면 이것이 화평이며 해원상생(解冤相生)이다.”, “구천상제께서는 어느 족속의 인류이건 간에 밉고 고움의 차별 없이 한결같이 다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인류는 상제님의 손(孫)으로 한 동기(同氣) 형제를 이루었으니 서로가 존중하고 사랑하며 화평(和平)하여야 한다.”, “우리는 조국인 우리의 국가를 아끼고 혈통을 같이한 우리 형제자매들은 서로가 사랑하며 화합하고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 “충성이란 국민으로서 국법을 준수하고 사회 윤리도덕을 준행하며 맡은 바의 임무에 충실하고 상호 이해로써 융화 단결하여 조국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다.”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도전님 훈시」에는 “어린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식과 같이 생각하고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잘못이란 사랑으로 이어지는 인도(人道)의 본래 정신을 저버리는 웅패(雄覇)의 인습(因習) 때문이니, 『전경』에도 묵은 기운이 채워있는 곳에는 새 운수를 감당키 어렵다 하셨다.”, “이웃의 윗사람은 존경하고, 같은 또래에게는 믿음을 주고, 아랫사람은 사랑하고, 이것을 바로 알아 지킬 일을 지키는 것이 이웃화합이다.”, “후각은 선각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배워야겠다고 하고, 선각도 후각을 애지중지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해원상생이란 사랑인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쉽게 말해 아무 원망이 없고 미운 게 없는 그것이 해원상생이다.”, “세계 모두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데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가지고는 안 된다. 우리의 해원상생이 아니면 평화를 이룰 수가 없다. 남을 원망하지 않고 서로 없으면 못 산다는 것이 해원상생의 원리이다. 이것을 말로만 하면 안 되고 실천해야 된다.”, “망기가(忘其家)란… 도를 믿는데,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믿으라는 그런 뜻이다. 충효열이 세상의 강령이다. 열(烈)이란 여자는 남자를 하늘과 같이 존경하라는 것이고, 남자는 여자를 땅같이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기독교 최고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에 대하여 하느님께 “하느님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라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하지만, 우리 도(道)에서는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사랑과 대순진리회의 사랑은 어떠한 차이가 있겠습니까?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원수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이 어떻게 실천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것은 우리 도에서 가르치고 있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해원(解冤)이 되지 않고 상생(相生)을 이룰 수 없으며, 상생하지 않고 해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원수의 원(冤)을 풀지 않고 그를 사랑할 수 없으며, 원수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지 않고서는 원수의 원을 풀 수 없는 것입니다.
해원상생은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상극으로 점철된 선천의 역사에 대한 이해 없이 해원상생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선천의 역사를 관통하고 인간 삶의 원리를 통찰하신 상제님의 성훈(聖訓)을 우리가 배우지 않고서는 해원상생의 진정한 의미를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측량키 어렵습니다.
『전경』을 바탕으로 해원상생의 개념을 이해해보겠습니다. 어떻게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지, 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 자신이 화(禍)를 당하는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법 3장 12절의 박공우같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화를 당하는 경우, 교법 2장 28절의 김형렬같이 나 자신의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화를 당하는 경우, 교법 3장 15절의 차경석같이 나 자신의 잘못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경우입니다. 세 번째 경우 보통, 인간은 복수를 생각하거나 도모하게 됩니다.
박공우는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가 큰 돌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완쾌된 후에는 가해자를 찾아가 죽이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상제님께서 이를 아시고 그것은 전에 박공우가 상해한 자가 상해를 입힌 측에 붙어 갚는 것이라 하시며, 그만하기를 다행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스스로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면 곧 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박공우가 크게 감복하여 가해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풀고 후일에 만나면 반드시 잘 대접할 것을 생각하니 수일 후에 예수교회에 열두 고을 목사가 모여서 대전도회를 열었고, 상제님께서 “네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하여 열두 고을 목사가 움직였노라.” 하셨습니다. 그 후에 박공우의 상처는 완전히 나았습니다. 왜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박공우의 경우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던 잘못이 있었던 경우이고 김형렬은 자신이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김형렬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예수교 신자 김중구에게 혹독하게 능욕을 당하였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이 사실을 들으시고 “청수를 떠 놓고 네 허물을 살펴 뉘우치라.” 하시니, 김형렬은 명하신 대로 시행하였습니다. 그 후 김중구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었다고 합니다. 상제님께서 다시 충고하시기를, “금후에 그런 일이 있거든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먼저 네 몸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만일 허물이 네게 있을 때에는 그 허물이 다 풀릴 것이요 허물이 네게 없을 때에는 그 독기가 본처로 돌아 가리라.” 하셨습니다. 해원상생은 어떤 경우에도 남을 원망하기에 앞서 일상 자신을 반성하여 과부족이 없는가를 살펴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내 마음에 원망이 없으면 상대방에 대해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차경석의 경우는 잘못은 없지만, 일방적으로 해를 입은 경우입니다. 동학에 가담했던 차경석의 부친이 모해자의 밀고로 해를 입었고 차경석은 형제들과 음해자에게 복수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너의 형제가 음해자에게 복수코자 함은 사람의 정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너의 부친은 이것을 크게 근심하여 나에게 고하니 너희는 마음을 돌리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가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니 나를 쫓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상제님의 천지공사(天地公事)로 인하여 앞으로 지구상에는 후천 5만 년의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게 됩니다. 여기에 참례키 위해서는 누구나 마음을 닦아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인 양심(良心)을 회복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상제님께서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요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속이지 않고, 언덕(言德)을 잘 가지며, 척(慼)을 짓지 않고,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며, 남을 잘 되게 하는 해원상생 대도를 실천하고, 남이 뺨을 때리면 그 손을 어루만져주며, 남이 돌로 치면 나는 떡으로 대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원수의 원을 푸는 것이 해원(解冤)이고 원수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상생(相生)입니다. 해원상생은 삶의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 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원과 한을 풀고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로 남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항상 남을 사랑하고 어진 마음을 가져 따뜻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착하며, 겸손하고 양보하는 미덕으로 남을 대할 때 척을 짓지 말아야 하며, 모든 상황과 기회를 통하여 남을 잘 되게 하여야 합니다. 해원상생이야말로 인류 화평의 사상이요 인존(人尊)사상이며, 구제창생의 복음(福音)입니다.
우리 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데, 그것은 과연 우리 도의 가르침에 사랑이라는 덕목이 없어서일까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용어는 『전경』을 비롯하여 『대순지침』, 『대순진리회요람』, 「도전님 훈시」등 도처에서 보입니다.
사랑이란 용어가 나오는 우리 경전 상의 용례는 『전경』에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그도 덕이 되어서 복을 이루게 되나니라.”(교법 1장 56절), 『대순지침』에 “인류의 평화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이해하라.”, “모든 사람들을 가족과 같이 사랑하고 아껴서 마음으로 따르도록 하여 포덕하라.”, 『대순진리회요람』에 “항상(恒常) 남을 사랑하고 어진 마음을 가져 온공(溫恭) 양순(良順) 겸손(謙遜) 사양(辭讓)의 덕(德)으로써 남을 대할 때에 척(慼)을 짓지 않도록 하라.”는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포덕교화기본원리(1)』에는 “인류가 무편무사(無偏無私)하고 정직과 진실로써 상호 이해하고 사랑하며 상부상조의 도덕심이 생활화된다면 이것이 화평이며 해원상생(解冤相生)이다.”, “구천상제께서는 어느 족속의 인류이건 간에 밉고 고움의 차별 없이 한결같이 다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인류는 상제님의 손(孫)으로 한 동기(同氣) 형제를 이루었으니 서로가 존중하고 사랑하며 화평(和平)하여야 한다.”, “우리는 조국인 우리의 국가를 아끼고 혈통을 같이한 우리 형제자매들은 서로가 사랑하며 화합하고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 “충성이란 국민으로서 국법을 준수하고 사회 윤리도덕을 준행하며 맡은 바의 임무에 충실하고 상호 이해로써 융화 단결하여 조국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다.”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도전님 훈시」에는 “어린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식과 같이 생각하고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잘못이란 사랑으로 이어지는 인도(人道)의 본래 정신을 저버리는 웅패(雄覇)의 인습(因習) 때문이니, 『전경』에도 묵은 기운이 채워있는 곳에는 새 운수를 감당키 어렵다 하셨다.”, “이웃의 윗사람은 존경하고, 같은 또래에게는 믿음을 주고, 아랫사람은 사랑하고, 이것을 바로 알아 지킬 일을 지키는 것이 이웃화합이다.”, “후각은 선각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배워야겠다고 하고, 선각도 후각을 애지중지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해원상생이란 사랑인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쉽게 말해 아무 원망이 없고 미운 게 없는 그것이 해원상생이다.”, “세계 모두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데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가지고는 안 된다. 우리의 해원상생이 아니면 평화를 이룰 수가 없다. 남을 원망하지 않고 서로 없으면 못 산다는 것이 해원상생의 원리이다. 이것을 말로만 하면 안 되고 실천해야 된다.”, “망기가(忘其家)란… 도를 믿는데,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믿으라는 그런 뜻이다. 충효열이 세상의 강령이다. 열(烈)이란 여자는 남자를 하늘과 같이 존경하라는 것이고, 남자는 여자를 땅같이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기독교 최고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에 대하여 하느님께 “하느님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라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하지만, 우리 도(道)에서는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사랑과 대순진리회의 사랑은 어떠한 차이가 있겠습니까?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원수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이 어떻게 실천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것은 우리 도에서 가르치고 있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해원(解冤)이 되지 않고 상생(相生)을 이룰 수 없으며, 상생하지 않고 해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원수의 원(冤)을 풀지 않고 그를 사랑할 수 없으며, 원수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지 않고서는 원수의 원을 풀 수 없는 것입니다.
해원상생은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상극으로 점철된 선천의 역사에 대한 이해 없이 해원상생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선천의 역사를 관통하고 인간 삶의 원리를 통찰하신 상제님의 성훈(聖訓)을 우리가 배우지 않고서는 해원상생의 진정한 의미를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측량키 어렵습니다.
『전경』을 바탕으로 해원상생의 개념을 이해해보겠습니다. 어떻게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지, 뿐만 아니라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원수의 원을 풀고 그를 은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 자신이 화(禍)를 당하는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법 3장 12절의 박공우같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화를 당하는 경우, 교법 2장 28절의 김형렬같이 나 자신의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화를 당하는 경우, 교법 3장 15절의 차경석같이 나 자신의 잘못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경우입니다. 세 번째 경우 보통, 인간은 복수를 생각하거나 도모하게 됩니다.
박공우는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가 큰 돌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완쾌된 후에는 가해자를 찾아가 죽이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상제님께서 이를 아시고 그것은 전에 박공우가 상해한 자가 상해를 입힌 측에 붙어 갚는 것이라 하시며, 그만하기를 다행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스스로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면 곧 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박공우가 크게 감복하여 가해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풀고 후일에 만나면 반드시 잘 대접할 것을 생각하니 수일 후에 예수교회에 열두 고을 목사가 모여서 대전도회를 열었고, 상제님께서 “네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하여 열두 고을 목사가 움직였노라.” 하셨습니다. 그 후에 박공우의 상처는 완전히 나았습니다. 왜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박공우의 경우는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던 잘못이 있었던 경우이고 김형렬은 자신이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김형렬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예수교 신자 김중구에게 혹독하게 능욕을 당하였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이 사실을 들으시고 “청수를 떠 놓고 네 허물을 살펴 뉘우치라.” 하시니, 김형렬은 명하신 대로 시행하였습니다. 그 후 김중구는 병으로 사경을 헤매었다고 합니다. 상제님께서 다시 충고하시기를, “금후에 그런 일이 있거든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먼저 네 몸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만일 허물이 네게 있을 때에는 그 허물이 다 풀릴 것이요 허물이 네게 없을 때에는 그 독기가 본처로 돌아 가리라.” 하셨습니다. 해원상생은 어떤 경우에도 남을 원망하기에 앞서 일상 자신을 반성하여 과부족이 없는가를 살펴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내 마음에 원망이 없으면 상대방에 대해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차경석의 경우는 잘못은 없지만, 일방적으로 해를 입은 경우입니다. 동학에 가담했던 차경석의 부친이 모해자의 밀고로 해를 입었고 차경석은 형제들과 음해자에게 복수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너의 형제가 음해자에게 복수코자 함은 사람의 정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너의 부친은 이것을 크게 근심하여 나에게 고하니 너희는 마음을 돌리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가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니 나를 쫓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상제님의 천지공사(天地公事)로 인하여 앞으로 지구상에는 후천 5만 년의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게 됩니다. 여기에 참례키 위해서는 누구나 마음을 닦아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인 양심(良心)을 회복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상제님께서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요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속이지 않고, 언덕(言德)을 잘 가지며, 척(慼)을 짓지 않고,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며, 남을 잘 되게 하는 해원상생 대도를 실천하고, 남이 뺨을 때리면 그 손을 어루만져주며, 남이 돌로 치면 나는 떡으로 대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원수의 원을 푸는 것이 해원(解冤)이고 원수를 은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상생(相生)입니다. 해원상생은 삶의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 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원과 한을 풀고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로 남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항상 남을 사랑하고 어진 마음을 가져 따뜻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착하며, 겸손하고 양보하는 미덕으로 남을 대할 때 척을 짓지 말아야 하며, 모든 상황과 기회를 통하여 남을 잘 되게 하여야 합니다. 해원상생이야말로 인류 화평의 사상이요 인존(人尊)사상이며, 구제창생의 복음(福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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