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다 ‘존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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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8.19 조회23,672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서 비천한 사람에게도 반드시 존댓말을 쓰셨도다. 김 형렬은 자기 머슴 지 남식을 대하실 때마다 존댓말을 쓰시는 상제를 대하기에 매우 민망스러워 “이 사람은 저의 머슴이오니 말씀을 낮추시옵소서” 하고 청하니라. 이에 상제께서 “그 사람은 그대의 머슴이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나뇨. 이 시골에서는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 말을 고치기 어려울 것이로되 다른 고을에 가서는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다 존경하라. 이후로는 적서의 명분과 반상의 구별이 없느니라.” 일러 주셨도다. (교법 1장 10절)
위 성구에서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의 집에 가실 때마다 그의 머슴 지남식에게 존댓말을 쓰셨다. 이에 김형렬은 자신의 머슴에게 존댓말을 쓰시는 상제님을 보기에 민망하여 말씀을 낮추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 상제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기를 앞뒤의 구절을 검토하여 살펴보면 1902년경으로 짐작된다. 이때는 1894년 갑오개혁이 시행되고 조선사회의 근간이었던 신분제도가 폐지된 지 8년여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하지만 갑오개혁으로 반상의 신분제도가 폐지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주종이나 반상의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주인이 부리는 머슴에게 하대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제님께서는 머슴 지남식을 볼 때마다 그에게 반드시 존댓말을 쓰셨다. 이에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상제님 말씀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일본의 개입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 정부는 그 개혁의 요구를 수용하여 1894년 7월 27일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갑오개혁은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 사이에 추진되었던 개혁 운동이다. 개화파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갑오개혁은 3차에 걸쳐 추진되었다. 개화파 정부는 동학농민혁명을 통해 드러난 농민들의 불만을 수용하여 전통적인 통치체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갑오개혁에서 양반과 상인(常人)을 구분하는 조선의 신분제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신분제도의 폐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첫째로 동학농민혁명이 농민군의 패배로 끝남으로써 신분제 폐지를 현실화 할 세력이 약화된 점, 둘째로 농민군 진압에 공훈을 세운 양반층의 영향력이 증대되어 이들이 신분제 유지를 요구하면서 압력을 가했던 점, 셋째로 대부분 양반 신분인 개화파 관료들이 개혁법령의 과감하고도 혁명적 집행을 회피함으로써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점 등이 신분제 폐지가 실질적으로 확대되지 못했던 요인이었다. 특히 개혁법령이 시행되면 타격을 입게 될 양반층은 개화파 정권과의 정면 대결을 선언하고 반대에 나섰다. 양반 지배층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자 개화파 정부는 노비제의 잔존을 인정하고 신분제 개혁의 내용을 상당한 정도로 후퇴시키고 말았다.01
구한말의 개혁정치 중 양반층의 저항으로 그 시행이 순조롭지 못했던 제도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을미개혁에서 시행된 단발령은 성균관 유생들을 비롯하여 양반들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는데 최익현은 상소에서 “머리를 베어도 머리카락은 벨 수 없다”02라고 하였다. 당시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단발령의 강요는 개화 그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로 번져 대중적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갑오개혁이 추진력을 잃으면서 반상 제도가 즉각 철폐되지 못함에 따라 여전히 조선사회의 중요한 기틀로 남아 있었다. 이후 신분제 폐지에 관한 개혁법령은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됨으로써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관습상의 신분제도가 강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03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관습으로 굳어진 반상의 신분제도가 혁명적 개혁에 의해 단기간에 사라지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이유로 반상의 제도는 갑오개혁에 의해 형식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함으로써 갑오개혁이 선언적인 의미에 그치고 말았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 해방은 형식적인 법으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신분제를 통해 구조적으로 형성된 경제적 불평등은 그대로 남았고, 노비들이 자유민으로 살아갈 경제적 기반은 여전히 지주들의 손에 있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지주-소작(小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농민)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자신들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었다.04
더욱이 노비 문서가 쓸모없는 종이조각으로 변했다 하더라도 노비들은 양반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비들은 노비였던 시절과 별로 다름없이 주인의 각종 집안일을 하고 주인 소유의 토지를 경작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제적인 기반을 가질 때까지 주인집에 거주하거나, 주인집을 빌려 살 수밖에 없었다.05 즉 ‘노비’에서 ‘머슴’(품삯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업임금노동자)으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노비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 했다.
이처럼 지남식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은 신분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형성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여전히 천대받으며 무력감이나 수치심, 모멸감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차별대우가 잔존하는 사회질서는 인간의 원(冤)이 쌓이는 중대한 이유 중 하나였다. 상제님께서는 이와 같이 인간을 차별하는 것을 비롯하여 모든 상극적인 요소를 없애고 상생으로 영원한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천지공사를 행하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의 집에 가실 때마다 반드시 지남식에게 존댓말을 쓰셨고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다 존경하라”고 하신듯하다. 이것은 당시 상대적으로 천한 신분에 있던 사람들, 즉 구조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천대받으며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원을 풀어주시고 그들도 존경받으며 살아가는 ‘인존시대’를 실현하기 위해 말씀으로 행하신 공사의 하나로 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대순회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4,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0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0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4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00), pp.330-331.
0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1996), p.85.
0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4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2000), p.332.
04 앞의 책, pp.351-352.
05 앞의 책,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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