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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부역조와 혈통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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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1.11.01 조회19,6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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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반본하는 때라 혈통줄이 바로잡혀 환부역조와 환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교법 3장 42절)

 

  환부역조(換父易祖)는 조선 후기 족보를 위조하여 조상을 바꾸는 행태를 가리키며, 환골(換骨)은 뼈를 바꾼다는 뜻으로 원래는 환골탈태의 긍정적 의미로 쓰이나 여기서는 환부역조처럼 자신의 근본을 바꾼다는 부정적 의미가 있다. 당시 족보 위조는 불법 행위로 간주하여 위조하다가 적발된 자는 처벌을 받았다. 상제님께서는 환부역조와 환골에 대해 ‘죽게 되는 일’이라고까지 말씀하시고, 이것은 원시반본하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혈통줄이 바로 잡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당시 환부역조는 무슨 이유로, 그리고 어떻게 행해졌을까. 이 글에서는 환부역조가 일어난 역사적 배경과 그것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우리 수도인은 이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조선 후기의 환부역조
  환부역조란 말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꾼다’는 뜻으로 18~20세기 초에 다른 가문의 족보에 자기 집안 계보를 끼워 넣거나 성(性)이나 본관(本貫)을 바꾸는 행위, 또는 족보상 조상 계보를 조작하는 행위를 말한다. 조상이 물려준 피와 성을 지키는 일을 목숨보다 소중히 했던 한국 전통 사회에서 이것은 패륜적 행위였다. 당시 유학자들의 많은 비판과 상소에도 불구하고 족보 위조와 매매가 전국적으로 암암리에 성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조선 후기 신분제가 약해지고 신분 간 변동이 빈번하던 때 족보가 양반 신분을 확인하는 문서로 사용된 것과 관련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족보는 조상 숭배와 종족 단결의 의미 외에도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연대를 확인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족보는 원래 지배층을 중심으로 양반 문중의 지위나 양반 간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공적 문서로 발행되고 관리되었다. 이러한 족보가 양반 신분을 확인하는 문서로 기능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신분 질서가 동요하면서부터이다. 신분제가 완화된 배경에는 조정이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악화를 복구하기 위해 납속책과 공명첩01 등 소위 ‘양반 신분을 파는’ 정책을 시행한 것이 주요한 제도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정치적으로 붕당 정치의 변질과 당쟁으로 다수의 양반이 향반이나 잔반02으로 밀려나 상민과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가난으로 양반 가문이 몰락하기도 하고 재력을 얻은 천민이 양반이 되기도 하는 상황에서 족보는 양반 체면을 유지하고, 사족(士族)으로서 군역을 면제받는 증명서로 활용되었고 이에 따라 족보 위조 행위가 성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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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보 위조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불확실한 사료에 근거하여 현조(顯祖: 이름이 높이 드러난 조상)를 기입하거나 관직이나 과거 시험 급제 등의 내용을 거짓으로 기록하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평민이 군역을 면제받고 양반의 지위를 얻기 위해 몰락 양반의 족보를 사거나 현조 집안의 족보에 별지 형식으로 자기 가문의 계보를 끼워 넣는 일이었다. 이것은 특히 영·정조 때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영조 때 실록에 의하면, 김경희란 사람이 양반들과의 족보 거래를 주선하고 인쇄 시설을 따로 차려 족보를 만들어 팔다가 적발되어 처벌받았고,03 정조 때에도 족보 위조 행위를 고발하는 상소문이 여러 건 있었다.04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족보가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족보 위조를 통해 양반을 사고파는 사회적 문제는 박지원의 『양반전』 등에서 풍자적으로 다뤄지기도 하였다. 이 소설처럼 당시 족보를 위조하는 평민이나 천민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신흥세력으로서 기존 양반이 누리던 특권을 행세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세력이 약해진 기존의 양반들을 법적으로 공격하고 심지어 모욕하고 구타하기도 할 만큼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05 즉 조선 후기의 양반 중 다수는 유학을 공부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족 계층이라기보다는 돈으로 양반을 산 자들로서 물질적 부와 권력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이유로 당시 양반에 대한 풍자 문화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 일어난 환부역조에 대해 상제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의 근본을 알고 이를 삶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시 환부역조에 대해서는 정약용 같은 학자들도 패륜적인 행위라며 비난하였다.06 그러나 갑오개혁(1894~1896) 이후 신분제가 철폐되고 너나없이 양반임을 주장하면서 족보 위조와 매매는 더욱 성행하였다. 환부역조를 하면서까지 양반 행세를 하려던 자들의 행태는 조상을 부정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반상의 구별 없이 모두가 귀한 인존시대를 지향하는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방향과도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환부역조의 문제
  상제님께서는 원시반본이라는 우주적 차원의 흐름에 따라 보다 근원적인 측면에서 환부역조의 문제를 지적하셨다. 원시반본은 처음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이것은 시공간적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상제님께서 인세에 오셔서 행하신 천지공사에 의해 모든 일이 근본을 찾아 새로운 차원으로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07 여기서 근본은 만물이 시작된 뿌리로서 인간 혈통줄과 관련해서는 조상이 그 뿌리가 된다.
  나무가 그 뿌리에서 영양분을 받아 살아가듯이 인간은 부모와 조상으로 이어진 뿌리에서 피와 살을 물려받고 그 맥을 통해 살아간다. 그리고 그 조상의 혈통은 가깝게는 부모부터 멀게는 고대의 시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한 혈통적 계보는 지금 내가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옛 선조들은 조상을 기리는 제사 의식을 중요시하였고, 족보라는 각 성씨의 혈연 계보 기록을 남겨서 조상을 존숭(尊崇)하는 의식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족보 위조와 같이 조상의 계보를 바꾸는 일은 자기 근본을 부정하는 ‘환골’ 행위가 될 수 있다.
  또한, 『전경』에 보면 이 세상은 신계와 인간계가 연결되어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는 구조로 되어있다. 상제님께서는 사람들 간의 싸움은 선령신들 사이의 싸움을 일으킨다고 하셨고(교법 1장 54절), 교중(敎中)이나 가중(家中)에 분쟁이 일어나면 신정(神政)이 문란해지고 이것이 세상에 큰 재앙을 일으킨다고 하시며 장효순의 난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고초를 겪기도 하셨다.(행록 3장 8절) 족보 발행은 가문의 일이며 신계의 조상들을 기록하는 일로서 이는 단순히 인간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족보상의 혈연관계를 거짓으로 바꾸는 일은 조상들 간에 혼란을 일으키고 이것은 다시 세상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더 나아가 조상 선령신은 선자선손을 내려고 공에 공을 들이고(교법 2장 36절), 그렇게 타낸 자손을 척신으로부터 보호하며(교법 2장 14절), 각 성의 선령신이 한 명씩 천상 공정에 참여하여 도통을 기다린다(교운 1장 33절)고 하셨다. 이를 통해 우리의 생이 조상의 정성으로 주어졌으며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조상이 함께하며 살펴주실 뿐만 아니라 상제님 천지공사로 도래할 도통을 위해 자손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상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자기의 존재적 근원을 저버리는 일과 같을 것이다.

 

 

환부역조와 혈통줄에 담긴 의미
  오늘날 환부역조는 비유적으로 종교적 맥이나 근원을 부정하는 일, 또는 조상의 존재를 잊거나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전통을 저버리는 일, 역사를 왜곡하는 일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예를 들어, 유교나 불교에서 진리 수행의 법이 내려오는 도통의 맥이나 법맥을 거역하는 것을 환부역조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08 또한, 역사 교과서에서 잘못된 역사를 기입하는 일09이나 근대 서양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유럽의 백인 문화를 추종하여 자기 전통을 저버리는 사람들을 가리켜 환부역조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우리 수도인에게도 환부역조의 문제는 조상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는 상제님과 상제님의 가르침이 내려오는 종통의 맥에 대한 것과 관련이 있다. 도전님께서는 “연원(淵源)의 종통이 정립되어야 연운이 생동하므로, 『전경』에 ‘연원(淵源)을 바로 하라’ 하시고, 또 ‘환골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공사(公事)로 정하셨으니, 종맥(宗脈)이 바로 서야 신앙심이 건실(健實)해져 파쟁(派爭)이 일어날 수 없으며,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미혹(迷惑)이나 남의 유혹에 말려들지 않게 되어 오직 자기 수도를 위한 일심(一心)의 소망을 정성으로써 관철할 지조를 가진 신앙자가 될 것이다.”(「도전님 훈시」, 1985. 7. 3)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신 환골은 환부역조의 비유적 의미처럼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을 말한다. 대순진리회 수도인들에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연원이므로 이를 바꾼다는 것은 환부역조와 같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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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원에 대해 도전님께서는 “본 종단의 맥은 상제께서 강세하셔서 교운을 펴신 데에 그 시원(始元)을 두고 있습니다. 상제께서 화천하시고 난 후 상제님의 계시로 득도하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 연원의 맥이 이어지고 도주님 화천 당시 유명으로 또 연원의 맥이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 이러한 천부적인 연속성을 종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10 이러한 연원과 종통에 따라 도인들의 연운 체계가 확립되어 수도를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연원과 종통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 근거가 없어지며,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수도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특히 상제님께서는 “속담에 ‘맥 떨어지면 죽는다’ 하나니 연원(淵源)을 바르게 잘하라”(교법 2장 43절)고 하셨으므로 연원은 생명력을 유지하는 맥이라고 할 수 있다. 상제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서 세상이 진멸할 지경에 닥쳤을 때 한국 땅에 강세하시어 천지공사를 행하셨다. 상제님의 천지공사는 원시반본의 이치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개벽공사이다. 천지공사를 받드는 수도 법방이 연원 체계에서 이루어지므로 이 연원과 종통에 어긋난다면 도의 맥에서 떨어지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물론이고 나와 함께 하는 조상도 우주적 도의 흐름에서 그 뿌리를 잃어 생명력을 상실하게 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환부역조의 문제는 연원을 바로하는 것 또는 상제님을 아는 일과 관련될 수 있다. 상제님과 상제님의 진리가 펼쳐지는 맥을 알고, 우리의 피와 살을 주신 부모와 조상의 존재를 존중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일, 더 나아가 선조로부터 이어진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우리의 근본을 찾는 일이다. 세계적이라는 것이 각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근본을 찾고 지키는 것은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림으로써 더욱 많은 가지를 넓게 뻗어나갈 수 있는 것과 같다.
  환부역조하지 않고 혈통줄을 바로 아는 길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수도인으로서 우리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원과 종통에 의한 체계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수도 법방을 행해나가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정기적으로 행하는 공부와 기도, 치성 등 각종 의례는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받드는 일이며, 상제님, 천지신명과 함께 우리의 선조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또한, 평상시에도 훈회와 수칙의 가르침에 따라 부모의 은혜와 천지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우리에게 삶을 주신 모든 근원적 존재를 기억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사회와 세계로 상제님의 가르침을 펴는 일이 될 것이다.

 

 

 

 


01 납속책은 흉년이나 전란 때 국가에 곡식이나 돈을 바치는 자에게 특전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특전은 노비 신분을 해방시키는 납속면천, 양인에게 군역을 면제해주는 납속면역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공명첩은 수취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관직을 제수하거나 면역·면천을 허가한 문서이다. 납속책과 공명첩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정 유지를 위한 정책이었지만 점차 매관매직과 신분 상승의 기회로 이용되었다. 「납속책」, 「공명첩」, 『네이버지식백과』.
02 향반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양반이나 중앙 관직을 하다 지방 향촌에서 세력화한 양반을 가리킨다. 잔반은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었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을 말한다.
03 “…‘역관 김경희란 이가 사사로이 활자를 주조한 다음 다른 사람들의 보첩(譜牒: 족보)을 많이 모아 놓고 시골에서 군정을 면하려는 무리들을 꼬여다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책장을 바꾸어주는 것으로 생계를 삼고 있습니다. 법조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무겁게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40년(1764) 10. 19.(음); 백승종, 「위조 족보의 유행」, 『한국사 시민강좌』 24 (1999), p.74 재인용.
04 백승종, 같은 글, pp.77-79 참고.
05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사부(士夫, 선비)를 구타하고 모욕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관장(官長, 당시 지방관)을 모욕하는 것을 예사로운 일로 압니다.” 『정조실록』, 정조 12년(1788), 1.22.(음); 백승종, 같은 글 p.79 재인용.
06 “백성이 … 어떻게든 군역을 면하려고 유명(儒名)에 기대거나 노비에 기대거나…심지어 족보와 직첩을 위조하여 윤강을 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則亦不免良役. 故歲收粟十斛者, 舍其耒耜, 投托儒名, 寧捐田買人以應之, 不自役也. 僞族譜僞職牒, 紛然竝作, 換父易祖, 恬不知愧, 傷倫敗俗). 「응지논농정소(應旨論農政疏)」, 『다산시문집(茶山時文集』 9권; 백민정, 「정약용의 사족 인식과 그 의미」, 『민족문화연구』 81권 (2018), p.305 재인용.
07 차선근, 「종교언어로서의 ‘원시반본(原始反本)’개념 재검토」, 『대순사상논총』 29집 (2017), p.194, pp.198-200 참고.
08 “불교계는 ‘종조를 바꿈은 환부역조(換父易祖)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며 논쟁을 했다.” 법웅스님 불교사회정책연구소장, 「대처승도 일제 강점기 생긴 잔재」, 《불교신문》, 2021. 3. 9.
09 신명식, 「역사교과서 개편은 현대판 ‘환부역조’」, 《내일신문》, 2008. 10. 7.
10 《대순회보》 10호, 「도전님 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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