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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일에 비유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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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2.10.13 조회11,6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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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상제께서 자신이 하시는 일을 탕자의 일에 비유하시니라. “옛날에 어떤 탕자가 있었느니라. 그는 자신이 방탕하여 보낸 허송세월을 회과자책하여 내 일생을 이렇게 헛되게 보내어 후세에 남김이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하리요, 지금부터라도 신선을 만나서 선학을 배우겠노라고 개심하니라. 그러던 차에 갑자기 심신이 상쾌하여지더니 돌연히 하늘에 올라가 신선 한 분을 만나니라. 그 신선이 네가 이제 뉘우쳐 선학을 뜻하니 심히 가상하도다. 내가 너에게 선학을 가르치리니 정결한 곳에 도장을 짓고 여러 동지를 모으라고 이르니라. 방탕자는 그 신선의 말대로 정신을 차리고 동지를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방탕을 알고 따르지 않는지라. 겨우 몇 사람만의 응낙을 받고 이들과 함께 도장을 차렸던바 갑자기 천상으로부터 채운이 찬란하고 선악소리가 들리더니 그 신선이 나타나서 선학을 가르쳤도다.” (교법 3장 16절)

 

  『전경』에는 상제님께서 비유와 이야기 등을 통해 가르침을 전하시는 구절이 많다. 위 구절은 ‘탕자의 일’에 대한 비유로써 상제님의 일을 설명하신 내용이다. 상제님의 일은 천지공사를 통해 천지인 삼계가 조화로운 지상천국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의 역할은 이러한 상제님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탕자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는 것일까. 탕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탕자가 어떻게 신선이 되는 선학(仙學)을 배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면서 위 구절에 나타난 상제님의 뜻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탕자 이야기
  탕자의 이야기는 방탕하게 살던 삶을 뉘우친다는 서사를 기본으로 한다. 이런 탕자 이야기가 여러 종교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종교적 가르침이 기본적으로 반성과 성품의 변화를 통해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탕자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인간의 변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기독교 『성경』 「누가복음」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예수가 전한 많은 비유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한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 먼 지방으로 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다. 궁핍하게 되어 돼지를 치다가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아들은 뉘우치며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한다. 하지만 큰아들은 재산을 탕진한 아들을 위해 잔치를 하는 것에 항의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큰아들을 달랜다. 이 돌아온 탕자 비유의 핵심은 회개와 용서이다. 작은아들은 지난날의 방탕을 회개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기뻐하여 맞이한다. 그런데 큰아들은 죄를 지은 아우를 용서하지 못하는데, 이 또한 회개해야 할 자세이므로 아버지는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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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도필 파상군선도」, 국립중앙박물관

 


  또한, 불교의 ‘궁자(窮子)의 비유’는 대표적인 대승 경전으로 알려진 『법화경』 「신해품」에 실린 이야기로 돌아온 탕자와 비슷한 서사 구조를 보여준다. 한 아버지(장자)와 아들(궁자)이 있었는데 아들은 일찍이 가출했다. 아버지는 오랜 세월 아들을 찾아다니다 정착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어느 날 집 앞에서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는 아들을 데려오려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풍파를 겪으며 곤궁한 처지가 된 궁자는 부자인 장자가 감히 자기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도망간다. 아버지는 아들이 놀라지 않도록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을 시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게 하고, 자신도 허름한 옷을 입고 아들을 친하게 대하면서 자기가 장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죽을 때가 된 장자는 궁자가 자기 친아들임을 밝히고 재산을 남긴다. 그제야 궁자는 자기의 정체를 받아들이고 기뻐한다. 이 궁자 이야기는 ‘자기의 본향을 찾는 과정’에 대해 말한다. 궁자가 부자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은 누구나 부처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깨닫기까지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01을 말해준다.
  도교에서는 기독교와 불교에서처럼 방탕한 아들과 아버지를 소재로 한 탕자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도교의 팔선(八仙) 중 여동빈이 신선이 되는 이야기를 보면 인생의 허망함을 깨닫고 신선이 되기로 하는 과정이 나온다. 여동빈은 64세가 될 때까지 과거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였다. 실의에 빠져 강호를 유랑하다가 그의 스승이 되는 종리권을 만난다.02 종리권은 여동빈에게 속세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자각하고 신선이 되는 수행을 결심하도록 도와준다.03 그는 64세가 되도록 과거시험에만 매달려 인생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 집착을 버리고 신선이 되는 수행의 길을 택한 것은 기존의 헛된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이 또한 탕자 이야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전경』에 나타난 탕자의 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이야기는 신선이 되는 일을 다룬다는 점에서 도교의 신선이 되는 이야기와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전경』에서는 주인공을 ‘탕자’라고 일컫는 점이 다르고, 선학을 배우는 과정은 동지를 모아 도장을 짓는 등의 일을 수반하는데 이는 도교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탕자의 일 이야기는 탕자의 개심, 신선과 선학, 동지를 모으는 일 등 세 가지 구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탕자의 개심
  탕자(蕩子)는 방탕한 사람을 말한다. ‘방탕’은 사전에서 “주색잡기에 빠져 행실이 좋지 못하다”라는 뜻 외에도 “마음이 들떠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라는 뜻이 있다.04 사람이 술과 쾌락에 빠져 바르게 살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삶의 목적을 상실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탕자는 삶의 목적이나 자신의 본연의 역할을 찾지 못해 술과 쾌락 같은 헛된 일에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전경』의 탕자는 방탕의 구체적 내용이 없이 “내 일생을 이렇게 헛되게 보낸 것”을 반성한다는 점에서 인생의 목적을 몰라 방황하는 상태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살다 보면 방황을 하기 마련이다. 「심우도(尋牛圖)」의 첫 번째 그림 심심유오(深深有悟) 단계의 동자가 그렇듯이 말이다. 아마도 수도인 중 다수가 상제님의 도를 배우겠다고 입도(入道)하기까지 그런 시기를 겪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 한때 탕자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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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도」 심심유오, 여주본부도장

 


  탕자는 “내 일생을 이렇게 헛되게 보내어 후세에 남김이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하리요”라고 한탄한다. 여기서 헛되게 보낸 인생의 결말이 후세에 남김이 없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의미가 있으려면 후세에 남김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후세에 남긴다는 것은 나의 인생이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쓰임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대순사상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존재 의미와 관련이 있다. 교법 3장 47절에서 “사람이 없으면 천지가 없다. 그러므로 천지가 사람을 낳고 쓴다. 사람으로 태어나 천지가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참여하지 못하면 어찌 사람의 삶이라 하리오.”05라고 하였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 목적은 천지의 이치를 알고 천지에 쓰임이 되는 것인데, 천지에 쓰인다는 것은 곧 이 세상과 창생을 이롭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생의 의미를 모른 채 헛된 일에 빠져있던 탕자가 과거를 뉘우치고 후세에 남길 일을 하겠다며 신선을 만나 선학을 배우겠다고 결심한다. 그러자 탕자는 갑자기 심신이 상쾌해지고 하늘에 올라가 신선을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신선은 “네가 이제 뉘우쳐 선학을 뜻하니 심히 가상하다”라고 칭찬하며 선학을 가르쳐줄 뜻을 전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고쳐먹는 개심(改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전경』에 마음은 신(神)이 작용하고 드나드는 통로이며 그 신 중에는 악한 것도 있고 선한 것도 있다고 하였다.06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것은 선한 것을 따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심은 곧 그에 상응하는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선학을 배우리라”라고 개심하는 마음 상태가 되자 선학을 가르쳐줄 신선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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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우도」 봉득신교, 여주본부도장

 


  또한, 개심은 신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심우도」의 봉득신교(奉得神敎) 단계에서 볼 수 있다. 심심유오를 하던 동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새롭게 살기로 했지만 험준한 산에서 동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이때 소 발자국이 이정표가 되어 동자를 이끌어주듯 우리는 선각의 안내와 조상의 도움으로 상제님의 가르침을 배우며 새로운 사람으로 점차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개심의 효과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다. 탕자가 개심하자 신선이 나타나듯 우리가 반성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은 그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나거나 신명의 도움을 받는 등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2) 신선(神仙)과 선학(仙學)
  탕자는 후세에 남김이 있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자 선학을 배우기로 한다. 왜 선학일까? 신선이 되는 법을 배우는 선학은 우리의 수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대순진리회의 목적 중 하나는 지상신선(地上神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종단에서는 신선이라고 하지 않고 지상신선이라고 하므로 기존의 신선과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대 단군신화에서 신선은 천계에서 내려와 지상을 다스리는 존재였으며, 도교의 신선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킨다. 유교 중심의 사회에서 신선의 의미는 점차 퇴색하였는데 주로 세속을 벗어나 자연과 벗하는 삶을 추구하며 질병과 죽음을 초월하고, 현실의 문제를 신비한 술법 같은 방법으로 해결하는 존재07로 인식되었다.
  대순진리회의 지상신선은 육체적 한계를 초월하여 불로불사에 이를 뿐만 아니라 신명과 통하여 만물과 하나가 되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성품을 가지고08 “만국이 화평하여 시기 질투와 전쟁이 끊어지는” 지상선경을 실현하는 존재09이다. 질투와 전쟁이 없는 세상은 인간의 도덕적 완성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지상신선이 되는 수행의 근본은 윤리도덕이다. 이는 『대순진리회요람』에서 도통에 이르는 법에 대해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근본으로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국법을 준수하여 사회도덕을 준행하고…”라고 하여 가정과 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윤리도덕을 근본으로 마음과 기질을 닦는 수도가 기본10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수도를 통해 되고자 하는 지상신선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체득하는 것 외에도 그 이치를 인간계의 윤리도덕으로 실현하여 모두가 평화롭고 화합하는 지상천국을 이루는 사람이다. 지상신선이 되어 인류가 오랫동안 추구했던 평화와 화합의 지상천국을 실현하는 일이야말로 후세에 남김이 있는 의미 있는 인생이라고 할 것이다.

 

 

  3) 동지(同志)를 모으다
  그런데 탕자가 선학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정결한 곳에 도장을 짓고 여러 동지를 모으는 일이다. 하지만 탕자의 방탕한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잘 따르지 않는다. 그래도 탕자는 어떻게든 노력하여 몇 사람의 동지를 찾는다. 동지는 탕자와 함께 선학을 배워 의미 있는 인생의 족적을 남기고자 뜻을 함께하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런 동지를 찾는 일이 쉬울 수만은 없다. 방탕한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위해 피나는 수도가 필요하다.
  또한, 동지를 찾는 일은 우리의 기본사업 중 하나인 포덕사업을 연상케 한다. 포덕은 진심으로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해질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즉 동지는 그냥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제님의 일을 받드는 수도인으로서 정성을 다하는 자세로 다가갈 때 만나게 된다. 더 나아가 동지를 모은다는 것은 지상신선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 전쟁과 질투가 없는 지상선경은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전님께서 포덕천하가 되어야 광제창생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듯이11 지상선경을 만들고자 뜻을 함께할 동지를 많이 모으는 것은 곧 포덕이며, 이 포덕이 전 세계로 확대되어 많은 사람이 지상신선으로 화할 때 세상은 지상선경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장을 차렸다는 것은 동지들, 즉 수도인들의 화합으로 쌓은 정성이 결실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학을 배울 수도의 터전, 도장을 짓는 일은 동지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화합할 때 이룰 수 있다. 동지들을 모아 함께 도장을 차리자 천상에서 찬란한 채운 속에 선악을 울리며 신선이 내려온 것처럼 우리도 선ㆍ후각 간의 화합으로 정진할 때 신명의 음호로 포덕사업을 더 널리 펼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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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제님의 일을 탕자의 일에 비유하신 것은 우리에게 수도와 포덕의 의미를 되새기라는 말씀으로 보인다. 탕자 이야기는 방탕한 자가 올바른 인생의 길을 찾는 변화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는 인생의 의미를 몰라 방황하다가 선각을 만나 입도하여 수도를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가 다른 종교의 탕자 이야기와 다른 것은 선학을 배운다는 점과 이 과정을 여러 동지와 함께한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지상신선은 단순히 개인적인 득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화평한 지상선경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며, 그 조건이 인륜도덕을 근본으로 한 수도라는 점은 선학을 배운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동지를 모으는 일은 수도인으로서 정성을 다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하는 반성과 노력이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상제님께서 탕자의 일화를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런 탕자의 반성과 개심이 우리 수도인이 늘 잊지 말아야 할 초심의 자세임을 강조하신 것이 아닐까.

 

 

 

 


01 임시연, 「법화경 신해품의 장자ㆍ궁자 비유를 통해 고찰한 불교 상담사의 길」, 『불교문예연구』 16 (2020), pp.171-175.
02 여동빈이 스승 종리권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64세에 과거에 두 번 낙방하였다는 설과 시험에 합격해 잠시 작은 벼슬을 했으나 그만두었다는 설, 64세에 장안에서 노닐다가 종리권을 만났다는 설 등이 있다. 呂洞賓(여동빈), 劉體恕(유체서) 편저, 『呂祖全書(여조전서)』 (台北市: 眞善美出版社, 1980), p.9, p.11.
03 최창록, 『여동빈 이야기』 (서울: 살림, 1994), pp.20~21 참고.
04 「방탕」, 『표준국어대사전』.
05 然無人無天地 故天地生人 用人 以人生 不參於天地用人之時 何可曰人生乎.
06 행록 3장 44절, “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或有善或有惡.”
07 차선근, 「근대 한국의 신선 관념 변용」, 『종교연구』 62 (2011), p.150 참고.
08 고남식, 「최수운과 강증산의 도가적 요소 비교」, 『도교문화연구』 49 (2018), pp.165~172 참고.
09 김귀만, 「대순사상의 관왕론 연구」, 대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p.44 참고.
10 차선근, 앞의 글, pp.151-152.
11 『대순지침』,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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