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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에 있는 청루의 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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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22 조회3,3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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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는 어떤 대신이 어명을 받고 그 첫 정사(政事)로서 장안(長安)에 있는 청루(靑樓)의 물정(物情)을 물었던 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전경』, 공사 3장 26절) 상제님의 말씀은 장안 청루의 형편을 살펴보는 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을 확인하는 중요한 방편이었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장안의 청루를 설명하는 자료들을 모아 정리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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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시절, 판소리꾼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은 전라도 명창으로 유명했다. 임방울은 판소리를 시작하기 전에 목을 풀기 위해 중모리 장단의 짧은 단가(短歌)를 부르곤 했는데, 그 단가는 ‘편시춘(片時春)’이라는 것이었다. ‘편시(片時)’란 ‘잠깐’이라는 뜻으로, ‘편시춘’이란 금방 지나가는 봄을 말한다. 봄이 금방 가버리듯 흐르는 청춘도 금방 끝나버릴 것이니, 더 늦기 전에 할 일도 열심히 하면서 놀기도 열심히 놀자는 것이 이 노래의 골자이다. 편시춘의 애절한 노랫가락은 한국인들의 심성과 잘 들어맞아 당시에는 꽤나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편시춘 노랫말 중간에는 ‘장안 청루 소년들은 너의 흥을 자랑 마라’는 구절이 보인다. 청루(靑樓)는 기녀들이 춤과 노래, 술을 파는 곳이다. 편시춘에서 젊은이들이 흥을 돋웠다고 얘기되고 있는 청루는 장안(長安)에 있는 청루이다. 사실 20세기 초엽까지도 장안의 청루는 유명한 환락가를 상징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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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장안이라고 하면 서울을 뜻하지만, 원래는 중국 당나라(618∼907)의 수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현재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인 서안(西安)이 옛날의 장안이었다. 그때의 장안은 실크로드의 동쪽 끝으로서, 많은 외국인들이 오가는 국제도시였다. 인구가 100만 명을 넘을 정도였는데, 1200년 전의 수준으로 보면 매우 거대한 도시였다. 당나라가 중기 이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며 거대 제국으로 도약함에 따라, 장안에는 많은 놀이와 연희 문화가 넘쳐났다. 황제는 궁중에서 화려한 연회를 종종 열었고 벼슬아치들도 만찬을 거의 매일같이 즐겼다. 사회에는 사치스러운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고, 자연히 관기(官妓)와 청루, 기녀의 숫자도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화려한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술과 노래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던 청루는 그 이전 시대에는 쉽사리 볼 수 없었던 것이었고, 이때부터 장안의 청루라고 하면 환락가와 유흥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장안의 청루가 밖에서 보이는 것처럼 술과 노래로 흥청거리기만 했던 곳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장안의 청루와 그곳에서 벌어지는 연회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중요한 사실들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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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장안의 청루가 민심과 정치적인 기류를 알려주는 장소였다는 점이다. 장안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청루는 장안 전역에 산재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궁궐 바로 앞에 집중되어 있었다. 장안은 바둑판처럼 철저하게 구획지어진 계획 도시였고, 그 안에는 모두 110개의 방(坊)이 존재했다. 청루는 평강방(平康坊)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궁궐과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곳은 벼슬아치들이 퇴근길에 들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따르면, 벼슬아치들과의 교유를 통해 사회에 진출하기를 노리는 많은 선비들, 즉 과거에 갓 급제한 진사(進士)들과 과거 수험생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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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 중기 이후, 최고 권력기관인 상서성(尙書省)에 오르려면 먼저 지방의 향시에 합격하여 향공(鄕貢)이 되고 나서, 다시 장안에서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해야 했다. 매년 만 명 이상의 향공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장안으로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과거 시험을 치르고도 발표가 나기까지 최소한 넉 달을 기다려야 했다. 또 낙방한 수험생들은 계속 장안에 남아 과거 준비에 열중하였다. 장안에서 수험생들이 묵었던 장소는 대개가 시험장소인 궁궐에서 가까운 숭인방(崇仁坊)이었다. 숭인방 바로 밑에는 평강방의 청루가 집중되어 있어 수험생들은 공부에 지친 심신을 풀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더구나 그곳에는 관리들이 종종 들렀으므로, 수험생들은 당시의 관행이던 행권(行券)을 얻기 위해 평강방의 청루에 무조건 가야만 했다. 행권이란 과거를 앞둔 수험생들이 청루의 연회에서 관리들에게 자기가 지은 시문(詩文)을 보여주면 관리들은 마음에 드는 수험생들을 시험관들에게 추천하는 것을 말한다. 청루의 연회는 행권을 매개로 하여 벼슬길에 진출할 젊은 선비들과 유력 관리들이 서로 만나는 장이었고, 아울러 정치적 동지 의식을 다지는 결속의 장으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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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험생들 가운데는 미색에 빠져서 청루에 가는 경우도 물론 있었지만, 청루에서 벌어지는 연회의 주목적은 대부분이 ‘정치적 교유(交遊)’였다. 전국에서 모인 선비들이 참석한 이런 연회에서 오고가는 대화에는, 황제가 사는 황궁의 비밀스러운 일부터 지방의 세세한 사정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장안의 청루는 당시의 민심과 정치 동향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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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는 장안 청루에서 벌어지는 연회의 규모를 통해 경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장안 청루에서 선비들은 주령(酒令)이라는 유희를 즐겼다. 주령은 특정한 제목 또는 운율이 주어지면 그에 따라 시를 짓는 놀이로, 팀을 짜서 진행하여 승패를 결정하였다. 연회에서 주령을 이끌었던 도우미는 기녀(妓女)들이었다. 기녀들은 어릴 때부터 선비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시문(詩文)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기녀들은 용모가 뛰어나지 않더라도 시를 잘 짓고 말을 잘 하면 인기가 올라갔기에 몸값도 높일 수 있었다. 연회에는 기녀들이 참석하는 것이 상례였고, 선비들은 기녀까지 낀 연회에 엉덩이라도 붙이고 앉아보려면 많은 비용을 물어야 했다.

 『북리지(北里志)』와 『당척언(唐?言)』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장안의 청루에서 벌어지는 낮 연회에 참가하는 금액은 1인당 4환(?)이었다. 1환은 금전 100문에 해당하고 당시 쌀 8㎏이 40문이었으니, 현재 쌀 시세를 20㎏에 45,000원으로 단순 계산하면 4환은 지금의 18만원에 해당하는 고액이었다. 야간에 벌어지는 연회는 가격이 두 배로 뛰어올라 무려 36만 원이나 내어야 연회에 참석이 가능하였다. 더구나 진사 시험 결과가 발표된 뒤 열리는 연회라면, 낮 연회는 1인당 45만 원, 밤 연회는 90만 원으로 가격이 치솟았고, 장원급제자가 벌이는 연회에 얼굴이라도 내밀어 볼 요량이라면 낮 연회에 90만 원, 밤 연회에는 180만 원을 내어야 했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실제 연회 참가비용은 이보다 서너 배는 더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나라 때의 쌀은 현재보다 귀했으므로 그 가치가 훨씬 높았다. 또한 물물교환이 완전히 사라진 오늘날과 비교해보면, 그 당시의 화폐가 지니는 실질 구매력은 오늘날보다 현저하게 뛰어났다. 그 당시의 현금과 쌀 가치를 오늘날의 그것들과 단순 비교하는 것이 무리가 있음을 감안하면, 당나라 시절 연회 참가자들은 오늘날 단순 수치로 환산한 비용보다 족히 서너 배 이상이 되는 비용을 물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불문율은 장안의 청루에 가면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하고, 또 호탕하게 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안의 청루가 불야성을 이루고 연회가 끊이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많은 재물의 소모가 일어날 터이고, 이런 풍경은 불경기에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장안 청루 연회의 규모는 당시 사회의 경제 형편을 짐작할 수 있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었다.

 

  장안의 청루는 단순히 술을 마시고 즐기는 유희의 장소에 그치지 않았다. 주색에 빠져 헤매는 일부 선비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장안의 청루는 선비들과 유력 벼슬아치들의 정치 교유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장안 청루의 물정을 살피는 일은 곧 민심과 속정, 정치 동향을 확인하고 아울러 경제 형편까지 파악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마 요즘으로 치면, 정치와 경제 상황에 대한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택시 기사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들어본다든가, 혹은 인터넷 토론방에 들어가 의견과 댓글을 확인해 보는 것과 유사한 일은 아니었을까? 상제님께서 어떤 대신이 어명을 받고 그 첫 정사로서 장안에 있는 청루의 물정을 물었던 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말씀하셨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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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순회보 127호>  

 

참고문헌

이민주, 「조선후기의 패션리더-기생」, 『한국민속학』 39, 한국민속학회, 2004.

최재영, 「唐 후기 장안의 진사층과 기관 형성」, 『중국학보』 45, 한국중국학회, 2002.

최진아, 「唐代 士人의 기루 경험담: 손계의 『북리지』」, 『중어중문학』 44, 한국중어중문학회, 2009.

황충호, 『제왕 중의 제왕, 당태종 이세민』, 도서출판 아이필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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