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것과 틀린 것 > 대원종

본문 바로가기

대원종
HOME   >  교화   >   교리   >   대원종  

대원종

다른 것과 틀린 것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22 조회3,139회 댓글0건

본문


제148호 대원종 : 다른 것과 틀린 것
다른 것과 틀린 것
 

  

  ‘다른 것’과 ‘틀린 것’은 비슷한 말 같지만 사실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무엇이고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다르다’의 사전적 정의에는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않다.’, ‘보통의 것보다 두드러진 데가 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가령 ‘사과와 배는 다르다’고 하지 틀리다고 하지 않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반면 ‘틀리다’는 ‘셈이나 사실, 이치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라는 옳고 그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다르다와 틀리다는 뜻과 쓰임이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이 차이를 명확히 분별하지 않고 다른 것을 ‘옳고 그름의 관점(흑백논리)’에서만 저울질하여 서로 간에 오해나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곧 나와 의견이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여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서로 생각하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림1>은 이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실례입니다. 이 그림에서 남자는 트럼펫을 들고 자신의 출중한 연주 실력을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아니 마를린 먼로를 닮은 미모의 여성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이시나요? 악기를 연주 중인 악사입니까? 아니면 아름다운 여성입니까? 정답은 없습니다. 이 그림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이를 악사라고 우기면 악사가 될 것이고, 여성이라고 우기면 여성이 될 것입니다. 둘 다 틀린 것도 맞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그림에 두 사람의 영상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일보다 이 그림처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에서 판단한 자기주장만을 내세워 그것과 대립하는 모든 것은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의식구조에서는 나와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는 곧 나와 생각이 다르면 옳지 않은 것으로 보는 독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아울러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만 저울질하는 독선자는 자기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 ‘당신 생각은 틀렸어!’라고 열을 올리거나 상대방을 비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입장에 따른 의견 대립이 심한 경우에는 욕설이나 싸움까지도 서슴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는 부부 관계에서부터 직장의 회의석상 및 친구 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 문제의 원인 중 대부분은 십중팔구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여 자신만의 잘못된 원칙과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하여 화근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만 따지는 ‘틀림의 잣대’는 우리를 수많은 갈등과 곤경에 빠져들게 합니다. 본의 아니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기도 하고, 사랑하는 배우자와 아이들을 서먹한 남처럼 변하게도 합니다. 또한, 직장에서는 회의 시간에 만족할 만한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생산성 없는 언쟁으로 목소리만 높여 갈등의 골만 더욱더 깊어지게 합니다.
  이는 비단 가정과 직장 내의 인간관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세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흑백논리와 획일주의 문화가 그것입니다. 이 문화는 개개인의 창의성과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정해진 틀 안에서의 획일화된 정답만을 요구합니다. 이를테면 과거 학교 교육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르다와 틀리다가 같은 등식(다르다=틀리다)임을 주입 당해 왔습니다. 하여 시험 때마다 다음 보기 중 틀린 것은? 이라는 질문에 다른 보기들과 성격이 다른 예제들은 모두 오답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실제로 최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이러한 세태를 풍자한 광고가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개구리 울음소리는 개굴개굴이 맞는 걸까요? 굴개 굴개는 틀린 걸까요? 단지 관점의 차이일 뿐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부모로서 다른 아이들과 끊임없이 비교해 남들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남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일탈행동으로 취급함으로써 다르다=틀리다의 공식을 더욱더 강화시켜 버립니다. 더욱이 선거철 정치인들의 토론자세는 상대방의 의견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독선과 아집을 넘어선 흑백논리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다르다’와 ‘틀리다’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해 버리는 문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는 획일주의와 흑백논리가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와 군부 독재를 거치면서 똑같은 사고와 행동을 요구받고 정형화된 행동과 사고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 사회적 억압과 고통을 가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01
  또한,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전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지구촌은 눈부시게 발전된 ‘첨단과학의 물질 문명시대’를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인류의 ‘정신문명’은 인종, 민족, 종교, 성별,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를 해(害)하는 고통 속에 멍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 또한 인류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한 것이 가져온 폐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류는 인보상조(隣保相助)하는 것이 아닌 서로를 배격하는 상극의 논리에 갇혀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세계의 모든 족속들은 각기 자기들의 생활 경험의 전승(傳承)에 따라 특수한 사상을 토대로 색다른 문화를 이룩하였으되 그것을 발휘하게 되자 마침내 큰 시비가 일어났도다.”02 라고 말씀하시고 그 해결책으로 각 민족들의 문화의 정수를 걷어 후천에 이룩할 문명의 기초를 정하시는 공사를 보셨습니다. 즉 상제님께서도 각 민족들의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시고 공사를 보신 것입니다.
  우리의 진리는 남을 잘 되게 하는 상생의 진리입니다. 남을 잘 되게 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 중의 하나는 나와 상대방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관용의 자세입니다. 관용이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존엄성과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존중해주는 태도, 즉 인종, 민족, 나이, 종교, 능력, 성별, 외모 등 어떤 것에도 편견 없이 개인을 공평하게 대하고 존중해주는 태도를 뜻합니다. 이런 관용은 다른 사람들의 신념이나 가치가 다르더라도 그 차이를 인정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를 뿐이라는 관용의 태도는 사람들의 증오와 폭력, 완고함을 줄이고 친절과 넓은 이해심으로 남을 잘되게 하는 덕목입니다.
 『논어』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하지만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군자는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지만 동류(同類)로서 휩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인은 사람들과 동류로서 휩쓸리기만 할 뿐 오히려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03라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심포니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심포니는 여러 악기가 저마다 제소리를 내되 다른 소리를 해치지 않고 어울림으로써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의 체계를 이룹니다. 반면 동이불화(同而不和)는 폭력조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거리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뭉치지만 코드가 다르면 숙청의 대상으로 적대시하여 조화를 이루어 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세태에 관해 도전님께서는 “내 경우만 옳고 남의 주장을 무시하는데서 반발을 일으켜 서로 미워하거나 마침내 원한을 품어 척을 맺는 법이다.”04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간에 틀린 것이 아닌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관용의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과 실천은 남을 잘 되게 하는 첫걸음이자 상생의 시대로 가는 또 다른 열쇠이기도 합니다. 한편, 도전님께서는 위 말씀과 더불어 “인류의 평화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이해하라.”05고도 훈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것과 틀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함께 다른 것을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는 바다와 같은 관용의 덕목을 갖추고 다가올 상생의 시대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01  민정숙, 정영수,「한국사회의 갈등과 평화교육의 방향」, 2006.
02 교법 3장 23절.
03 김용옥,『논어한글역주』, 통나무, 2011, p.368.
04 『대순지침』, p.27.
05 『대순지침』, p.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12616)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전화 : 031-887-9301 (교무부)     팩스 : 031-887-9345
Copyright ⓒ 2016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