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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심심화(心深化)와 외형화(外形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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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3.22 조회3,1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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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호 대원종 : 신앙의 심심화(心深化)와 외형화(外形化)
신앙의 심심화(心深化)와 외형화(外形化)
 
   

  대순진리회 신앙의 대상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님이시다. 대순진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절차가 입도(入道)식으로 이의 첫 의례는 성령지(聖靈紙)를 봉안(奉安)함으로 시작된다. 이는 구천상제님을 믿고 받들겠다는 엄숙하고 경건한 치성(致誠) 의례로 입도자는 자신의 녹명지(祿銘紙)를 올리게 된다. 이 의식을 한 연후에 비로소 입도자는 구천상제님의 존귀한 도문소자(道門小子)가 된다.
  대순진리회의 특징은 신앙의 대상에 있는데, 이는 세상 사람들이 막연히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분이 아닌 직접 인간으로 강세하셨다가 화천하신 분이다. 봉축주(奉祝呪)인 ‘무극신(无極神)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도문소자 소원성취케 하옵소서.’는 시학·시법공부를 비롯하여 기도·수련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주문으로 여기서 무극신은 바로 구천상제님을 뜻한다.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은 고래로 우주의 근본법칙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개념이다. 여주본부도장의 포정문 옆에 있는 ‘대순진리회’라는 글을 보면,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 했다. 이 우주가 우주된 본연의 법칙이 바로 태극에 있고, 태극은 외차무극(外此無極)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리라고 하였다. 태극이 곧 무극이고 무극보다 더 근원의 시초를 생각할 수 없듯이, 우주지간에 무극신(无極神)보다 더 근원의 신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 신앙의 대상이신 구천상제님은 무극신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다.
  우리 도(道)에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구천상제님으로 신앙하는데, 이 의미는 『대순진리회요람』에 자세히 나와 있다. ‘구천(九天)’이라 함은 전 우주를 총할하시는 가장 높은 위를 뜻하고, ‘응원(應元)’이라 함은 우주의 삼라만상이 하느님의 명에 의하여 생성됨을 뜻하며, ‘뇌성(雷聲)’이라 함은 음양이기(陰陽二氣)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뇌(雷)로 만물을 생장·변화·자양하게 함을 뜻하고, ‘보화(普化)’라 함은 만상 만유(萬象萬有)가 하느님의 덕화로 화성(化成)됨을 뜻하며, ‘천존(天尊)’이라 함은 군생만물을 보화만방(普化萬方)하시는 삼계(三界)의 지존(至尊)임을 뜻하고, ‘강성상제(姜聖上帝)’라 함은 우주 삼라만상을 삼계대권(三界大權)으로 주재 관령(主宰管領)하시며 관감만천(觀鑑萬天)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존칭임을 뜻한다.01
 

 

  신앙(信仰)의 사전적 의미는 ‘믿고 받드는 일’이다. 신앙은 신적(神的) 대상에 대한 인간의 긍정적인 관계이며 신앙의 내용은 신앙의 대상을 통하여 규정된다.02 여기서 신앙의 대상이 어떤 분인가에 따라 신앙의 내용이 규정된다는 관점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신앙생활의 폭과 깊이를 좌우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업을 통하여 구현된다. 그러므로 포덕·교화·수도의 사업에서도 신앙은 근본이 된다. 물고기가 한시도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도문소자 역시 한순간도 상제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은 모든 행동에 조심하여 상제님 받드는 마음을 자나 깨나 잊지 말고 항상 상제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03 도전님께서는 이를 “도인들이 구천상제님의 대순진리의 봉교 신앙(奉敎信仰)에 사려(邪慮) 없는 경건일념(敬虔一念)을 다하는 마음이 경천이다.”04라고 하셨다.
  이렇게 신앙의 대상이 어떤 분이신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는 과정을 신앙의 심심화(心深化)라 한다면, 신앙의 대상에 대한 믿음이 깊어져 법례(法禮)에 합당하고 도리(道理)에 알맞게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신앙의 외형화(外形化)이다.
  신앙의 심심화는 상제님을 믿고 받드는 신앙심이 깊어져 가는 것을 뜻한다. 우리 도는 고불문(古不問) 금불문(今不問)이기에 믿고 닦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는 “모르고 가는 길에 잘 가면 행이요 잘못 가면 곤란이라.”(행록 5장 10절) 하셨다. 이 행(幸)과 곤란은 누가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으며, 이 행의 길에 핵심이 바로 신앙의 심심화에 있다고 여겨진다.  
  신앙의 심심화는 무엇보다 먼저 신앙의 대상, 구천상제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선지후각(先知後覺)의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다. 먼저 알고 행하다 보면 나중에 불연 듯 깨달음이 찾아온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의 요체는 『대순진리회요람』에 나오는 해설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긴요할 것이다. 이는  몇 줄 안되는 설명이지만 담긴 뜻은 아주 깊고 심오하다. 우리 도는 상제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진리의 근본이다. 이것은 마치 수원지로부터 내 논에 물이 들어오듯 내 마음에 봇돌을 파는 것과 같다. 이 봇돌을 얼마나 넓게 깊게 팔지는 오직 자기 뜻과 노력에 있다.
  이의 학습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매일 규칙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마음을 가다듬고 상제님의 신격에 대한 설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한 방법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글이 자연히 외워지고 음미가 되기 시작하며 궁금함과 의아함이 일어나게 된다. 이 궁금함과 의아함을 풀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참고할 만한 책을 보거나 깊이 생각함으로써 나도 모르게 앎이 쌓여 간다. 이것이 선지(先知)의 과정이다.
  후각(後覺)은 지극한 앎이 집중된 이후에 일어난다. 이 각(覺)이란 강세하신 상제님께서 바로 전 우주를 총할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는 생각이 자연히 일어남을 의미한다. 이런 자각(自覺)이 있어야 상제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진다. 이는 마치 볼록렌즈로 빛을 모아 집중하면 불이 붙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는 누구나 가능하고 이를 옛 성현들은 마음의 허령불매(虛靈不昧)05한 작용이라고 했다.
  선지후각의 과정은 한 번으로 끝이 아니라 반복되고 순환되어야 한다. 『중용(中庸)』에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한다(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는 구절은 새겨둘 만하다. 인간의 마음은 양파처럼 여러 겹의 구조라 아무리 심심화가 되어도 나의 깊숙한 내면에는 아직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다. 이는 마치 소금물에 배추를 절일 때 푹 담가두지 않으면 속이 덜 절여진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심심화는 한계가 없으며 깊어질수록 믿음이 확고해진다.
  신앙의 외형화(外形化)는 심심화의 발로로 언어·행동·처신 처사에 도인다운 품격(品格)으로 나타난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훈회와 수칙의 실천이며 아울러 모든 행동을 법례에 합당케 하며 도리에 알맞게 하고 의리와 예법에 맞지 않는 허영에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전경』에 “일신수습중천금(一身收拾重千金)”(교법 3장 47절)과 『대순지침』에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도리에 합당케 하여야 한다.”06라는 말씀도 이를 두고 이르시는 것이다.
  이 모든 행동에 조심하고 일거일동을 도리에 합당케 하는 것과 관련하여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구용(九容)과 구사(九思)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자기 몸을 단속하여 잠시도 방종하지 말라 했고, 게다가 글 읽는 자리 옆에 써 붙이고 수시로 보라고 했다. 구용은 “발동작은 진중히 하고, 손은 공손히 하며, 눈은 단정히 하고, 입은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며, 목소리는 안정되게 하고, 머리는 곧게 하며, 몸에서 풍기는 기상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이 있어야 하며, 얼굴빛은 엄정하게 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는 것이고, 구사는 “밝게 보기를 생각하고, 총명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하기를 생각하며, 말은 성실하기를 생각하고, 일에는 삼가 조심해서 하길 생각하며, 의심나는 것은 질문할 생각을 하고, 화가 날 때는 나중에 곤란해질 것을 생각하며, 이득을 보면 정당한가를 생각하라(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는 것이다. 이처럼 일거일동을 한다면 마땅히 타인을 존중하고 상대와 장소 및 때에 적중(適中)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자기 직분을 바르게 수행할 것이다.
  우리는 수도하면서 신앙의 심심화와 외형화를 놓고 매일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도주님께서는 “먼저 나의 마음을 참답게 함으로써 남의 마음을 참되게 하고 먼저 내 몸을 공경함으로써 남도 몸을 공경하게 되며 먼저 나의 일을 신의로써 하면 남들이 신의를 본받게 된다(先誠吾心 以誠他心 先敬吾身 以敬他身 先信吾事 以信他事).”07고 하셨고, 도전님께서는 “『전경』에 ‘농부가 곡식종자를 갈무리하여 두는 것은 토지를 믿는 까닭 이라.’ 하셨으니 가식(假飾)이 없는 신앙의 본의(本意)에 위배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08라고 하시며, “수도에 임하는 도인들은 성경신을 다하여 수도자의 자질을 한층 더 높여 가야 한다.”09고 하셨다.
  이상 신앙의 심심화와 외형화에 대해 간략하게 논해 보았다. 상제님께서 “부디 마음을 부지런히 닦고 나를 깊이 생각하라.”(교법 3장 25절)고 하셨다. 이의 기본은 『대순진리회요람』의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님에 대한 해설을 늘 가까이하여 이에 담긴 뜻을 끊임없이 자득(自得)해 가고 동시에 수도의 법방과 제 규정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 주변의 도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아 인망에 오르고 신망에 오르는 참된 도문소자가 되어야 하겠다.
 

 
01  『대순진리회요람』, pp.6~7 참조.
02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교육학용어사전』
03 『대순진리회요람』, p.15 참조.
04 『대순지침』, p.50.
05 텅 비어 있으나 신령하며 어둡지 않음.
06 『대순지침』, p.47.
07 『대순지침』, p.70.
08 『대순지침』, p.53.
09 『대순회보』 35호, 「도전님 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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