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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지말(朝鮮之末)에 손병희가 꾸민 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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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02 조회3,1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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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는 “조선지말에 이란(吏亂)이 있으리라 하는데 그러하오리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손병희가 영웅이라. 장차 난리를 꾸미리니 그 일을 말함이나 그가 선진주(先眞主)라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의(擧義)하므로 성사치 못하리라.”고 하시며 조선 말기에 손병희가 꾸민 난리와 그 일의 성사여부까지 예견하셨다. 그렇다면 조선 말기에 손병희가 꾸민 난리는 무엇이며, 그 거사는 왜 성공치 못했던 것일까?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천도교 3대 교주로서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충북 청주(淸州)에서 태어나 22세(1882년)에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에 교주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4년에는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
당시 손병희는 북접(北接 : 충청도 지방의 동학 교단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 : 전라도 지방의 동학 교단 조직)의 우두머리인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官軍)을 격파하기도 하였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또 1897년에 이르러서는 교주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교세 확장에 힘쓰기도 했으나 1901년 동학의 지도급 인물 손천민이 관군(官軍)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김연국 또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지자 제자들과 상의하여 손병흠ㆍ이용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망명한 손병희는 이름을 이상헌이라 개명(改名)한 뒤 국내에서 국헌 문란 죄로 망명해 있던 권동진, 조희연, 박영효, 이진호 등과 교류하면서 동학(東學)의 재건을 위해 여러모로 고심하였다. 그는 장차 한국에서 개화와 혁신운동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재육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국내의 동학교도 자제들 중 뛰어난 인재 64명을 선발하여 유학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모두 젊은이들을 새로운 문명과 접촉시켜 세계적인 문명사조에 호응시킴으로써 부강한 독립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계획아래 추진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과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한창 제국주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시국이 이러하다보니 당시 두 나라에 비해 약소국이었던 조선은 러ㆍ일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꼼짝없이 승전국에 예속되어야만 했다. 손병희는 장차 조선이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을 세계정세를 통해 미리 예견하고 있었고, 이에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없었던 그로서는 발 빠르게 그에 따른 대비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생각 끝에 그는 러ㆍ일 양국 간의 지리적 조건과 정신자세ㆍ군사전략의 차이 등을 들면서 러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전국이 될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미리 승산이 있는 나라에 우의를 표하여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손병희 혼자만의 생각일 뿐 당시 친러파가 요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조선의 조정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만무한 상황이었다. 이에 손병희는 국가의 대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의 친러파 정권부터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내의 동학교도들을 결집시키는 한편 그의 계획에 일본군의 힘을 빌리고자 당시 일본군 참모장이던 다무라[田村]와 직접 대면하여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자 곧 다무라는 손병희의 계획에 동참하겠노라며 흔쾌히 승낙하였다. 손병희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기뻐하며 장차 자신의 계획이 잘 될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자신의 친 동생인 손병흠을 불러 일본군과의 합동 거사계획을 상세히 설명하고 국내에 결집된 동학교도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 계획은 동학교도들이 모두 상인으로 가장하여 우리나라의 각 항구에 대기하였다가 다무라가 지원하기로 한 일본군이 상륙하게 되면 이들과 함께 서울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하였으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거사를 목전에 두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고국에 건너가 자신의 거사계획을 전달하고자했던 동생 손병흠이 원인모를 이유로 급사(1903년 8월 3일)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든든한 동조자인 다무라마저 손병흠이 급사한 이틀 뒤 (1903년 8월 5일) 연이어 원인모를 이유로 사망하였다.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은 소식에 손병희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실망을 금치 못하였고, 결국 그가 꾸민 난리는 물거품이 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을 침식하려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더 이상 실의에만 빠져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국에 있는 법무대신 이윤용과 의정대신 윤용선을 시켜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전국 360여 군에 민회를 설치해야한다고 정부에 상소문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는 군권(君權)이 통치이념과 방법으로 절대시 되던 시기였던지라 민회(民會:=1903.3대동회→1904.7중립회→1904.9진보회)를 설치하여 민권과 민주이념을 고취시키는 것은 애초부터 수용되기 힘든 사안이었다. 하여 손병희는 스스로라도 강력한 정당조직을 결성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동학교단의 중진들을 일본에 오게 하여 개혁에 관한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민회를 조직하였다.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귀국한 중진들은 곧 그의 의사를 교인들에게 전달하고 개혁에 동참하고자하는 사람들은 그 표증으로 단발흑의(斷髮黑衣)차림을 할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에서는 민회가 동학의 잔당임을 알아차리고 탄압을 가해왔으므로 그는 같은 해 9월 진보회로 조직명을 개칭하고 자신은 여전히 일본에 머물면서 국내에 있는 이용구로 하여금 조직운영을 담당하게 하였다.
손병희의 지시를 받은 이용구는 지체 없이 동학교도들과 함께 전국적인 개화운동을 펼쳤지만 역시 관군의 탄압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찰나를 놓칠세라 친일파 송병준에 의해 설립된 일진회(一進會) 측은 진보회장 이용구에게 일진회와의 결탁할 것을 요구해 왔다. 당시 관군의 탄압을 벗어날 길이 없었던 그로서는 일진회와의 결탁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결국 동학교도들과 손병희를 배신하고 친일 매국행위를 일삼는 일진회와 손을 맞잡고 일진회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만다. 이로써 손병희가 몇 차례에 걸쳐 조직명을 개칭하면서까지 추진하고자 했던 혁신을 위한 모든 계획도 역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조선지말에 손병희가 난리를 꾸미지만 실패할 것이라는 상제님의 예견대로 일본군과 동학교도들의 힘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했던 손병희의 거의(擧義)는 시작도 못해보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이런 실패는 쿠데타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시도했던 일련의 개화운동에서도 똑같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실패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모든 일을 자신이 몸소 뛰어들어 실행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을 시켜 처리하려 한 그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쿠데타의 경우에서 보듯이 일국의 운명을 좌우할 거사를 진행함에 있어 현장에 가 보지도 않은 채 일을 도모하려 하였고, 진보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대리인을 내세웠으며 러일전쟁이 끝나 신변의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전경』 속에 기록된 상제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제님께서 손병희가 거사를 실행에 옮김에 있어서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거사를 하였기에 성공치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듯이 그는 이래라 저래라 지시만 할 뿐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무릅쓸 각오로 희생정신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물론 그의 지략적인 면모만을 보아서는 가히 영웅이라 보여지지만 이렇게 손병희에게는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던 듯하다. 

<대순회보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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