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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眞儒)와 부유(腐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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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5.13 조회2,6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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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께서 임인년 4월에 정남기를 따르게 하시고 금구군 수류면 원평에 있는 김성보(金聖甫)의 집에 가셔서 종도들과 함께 지내셨도다. 이때 김형렬과 김보경이 찾아왔도다. 상제께서 보경에게 유 불 선(儒佛仙) 세 글자를 쓰게 하고 정좌하여 눈을 감고 글자 하나를 짚게 하시니 보경이 불 자를 짚자 상제께서 기쁜 빛을 나타내시고 유 자를 짚은 종도에게 유는 부유라고 일러주셨도다. (교운 1장 6절) 

 

  위 성구에 따르면 상제님께서는 1902(임인)년에 종도들에게 눈을 감고 유·불·선 세 글자 중 하나를 짚게 하셨다. 종도 김보경이 불(佛) 자를 짚자 기쁜 빛을 나타내시고 유(儒) 자를 짚은 종도에게 ‘유’는 ‘부유’라고 말씀하셨다. 상제님께서 불(佛)에 대해 기쁜 빛을 나타내신 의미를 정확히 헤아리기는 쉽지 않으나 불(佛)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신 것으로 보인다. ‘유’와 관련하여서는 ‘부유’의 정확한 한자를 알기 어려우나 ‘부유(腐儒)’라고 하신 것이라면, ‘유’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부유(腐儒)’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사고방식이 아주 완고하여 쓸모없는 유생(儒生)01 을 뜻한다. 조선 유가 전통에서도 ‘부유’라는 말은 자주 쓰여 유교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인간상인 참된 선비[眞儒: 진유]에 대립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 ‘부유’ 개념이 조선 유교 전통에서 어떻게 쓰였는지 ‘진유’ 개념과 대비하여 살펴보면서 ‘유는 부유’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부유’라는 개념은 조선 초기보다 중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지식인 집단 사이에서 ‘진유(眞儒)’와 대립하는 개념 중의 하나로 쓰였다. 조선은 유학의 왕조였고 이 시기를 주도한 인물은 유학자 또는 유학 출신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줄곧 유교 이념을 바르게 구현할 참다운 선비, 곧 진유 또는 군자유(君子儒)02 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 자기들의 정체성에 갈등이 있었다. 즉 유학자들은 유교 이념을 바르게 구현하지 못하는 자들을 소인, 향원(鄕愿)03, 속유(俗儒)04, 벽유(癖儒)05, 부유 등으로 규정하며 자기들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추구해나갔다. 

  조선 초로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지식인 집단 사이의 갈등에는 거의 언제나 이들 용어가 등장하여 상대를 비방하고 자기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다.06  

  조선 개국 초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 말 유자(儒者)들의 특성을 비판하면서 참된 선비, 곧 ‘진유(眞儒)’를 강조하였다. 그는 ‘유(儒)와 리(吏: 벼슬아치, 관리)’ 또는 ‘도덕과 교화’가 통합된 사람을 진유(眞儒)로 인식하였다. 그는 진유를 “묘당(廟堂) 위에서 경세제민(經世濟民)하고 천 리 밖에서 적의 예봉을 꺾어 사직과 민생의 의지가 되는 자(經濟廟堂之上, 折衝千里之外, 以爲社稷民生之賴者)”07 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다양한 학문적 기반에서 민생과 국방을 위한 정책의 수립과 실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관중(管仲, ?~기원전 645)과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진유 모델로 보았다.08  

  그러나 그 후 실권을 잡은 사림들은 민생과 국방보다는 도덕적 처신과 의리를 중시하는 백이(伯夷)형 진유 모델로 전환한다. 그래서 정도전을 비판하고 고려조에 목숨을 바쳐 충성한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진유(眞儒)로 보았다. 이로써 조선조 사림 정치사상의 핵심은 국가와 백성이라는 정치 현실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도덕 문제를 강조하게 된다.09 

  조선 중기인 16세기에는 잇달은 사화(士禍)의 후유증으로 뜻있는 선비들이 재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고 출사(出仕)를 꺼리는 경향이 심했다. 이때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그런 소극성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정치 현실에 참여하여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으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그는 유학의 본래 목적인 수기치인(修己治人)과 내성외왕(內聖外王)10을 추구하는 자를 진유(眞儒)라고 하였다.11 

 

이른바 진유라는 것은 나아가면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한없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물러나면 만세에 가르침을 전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합니다.12

 

  16세기 율곡이 표방한 진유론(眞儒論)은 지식인이 현실에 대한 책무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시각에서 제기된 것으로 이 또한 사림파에 대한 유학자의 비판적 성격을 갖는다.13 

  이처럼 진유가 되기 위해서는 수기(修己)를 통한 덕성 함양에 힘써야 하고, 치인(治人)을 위해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뜻을 두어야 했다. 또한, 율곡은 실심(實心)·실용(實用)의 실학이 겸비된 것을 도학(道學)이라 불렀고 그 도학을 실천하는 자를 진유(眞儒)라고 했다.14 그리고 율곡은 당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여러 가지의 대책을 담은 경장(更張)15을 논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진유들은 은둔하고 부유들이 득세하게 된다.

  부유(腐儒)들은 참된 선비가 아닌 낡고 완고한 선비로서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머무르지 않고 제 학식과 관직을 이용해서 백성에게 고통을 가했다. 그래서 그들은 실천이 결여된 구이지학(口耳之學), 곧 남에게 들은 것을 그대로 남에게 전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천박한 학문만 앞세웠다. 율곡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실공(實功)이 없는 위선자(僞善者)나 위정자(爲政者)를 부유들이라고 하였다.16 부유들은 율곡의 말처럼 무사안일주의로 국록을 축내거나, 더 적극적으로는 부정부패에 뛰어들 뿐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자,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부유, 곧 부패한 선비들의 악폐가 심각하였다. 그 악폐는 18세기부터 극심해진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치유불능으로 되다가 19세기 순조 즉위 후에 극에 달한다. 특히 18세기 외척의 위치를 이용한 독점적 세력층의 전횡은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삼정(三政)의 문란’이었다. 삼정의 문란이란 전정(田政)17·군정(軍政)18·환곡(還穀)19 의 폐단을 말한다.

  이에 19세기 전후에 이르면 대부분의 중소농민은 파산과 기아의 상태에 빠졌다. 아사자들이 각 지방에서 속출하였고, 화전민(火田民)과 유민(流民) 및 각종 도적(盜賊)이 적지 않게 생겼다. 이러한 혼란상의 가장 큰 원인은 관직은 유한한데, 관직만 차지하려한 양반층이 날로 크게 팽창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들은 병역을 면제받고, 노동을 수치로 여기며 놀고먹는 것이 당연한 듯이 통념화되었다. 또한, 그들은 형식적인 외면치레나 하면서 양민 위에 군림하여, 양민에게서 수탈이나 일삼았다.20   

  조선 후기 양반, 곧 부유에 대한 고발이나 개혁의 의지는 당시의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양반전』과 『호질(虎叱)』이라는 소설에서 가장 신랄하고 냉소적으로 다루고 있다. 『양반전』에서는 양반의 가식적인 행동 규범과 지배계층으로서의 탐학 상에 대해 열거하여 조소적으로 비판하였다. 특히 ‘무고한 양민의 재물 약취’가 당시 대부분 양반이 살아가던 방법이었음을 고발하였다. 또한, 『호질』에서도 위선적인 도학자인 주인공을 호랑이의 입을 빌려서 질책하면서 “선비[儒: 유]는 아첨하는 자이다.”21 라고 하였다. 이는 개혁을 외면하던 양반지배층에 대한 질타와 힐난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양반은 호랑이라는 짐승에게마저 꾸짖음을 당해야 하는 최악의 존재, 곧 짐승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이 연암의 견해였다. 

  동학란이 끝난 19세기 말, 유생들의 무사안일주의는 『전경』의 상제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갑오년(1894) 동학군이 관군에 의해 패멸된 후 그다음 해 봄에 고부 지방의 유생들이 세상의 평정을 축하하는 뜻으로 두승산(斗升山)에서 시회(詩會)를 열었다.22  상제님께서는 유생들이 조선의 위기를 인지하지 못하고 세상의 평온을 낙관할 때 광구천하의 뜻을 두셨다.23  당시의 시류(時流)를 읽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탄에 빠진 민중을 돌보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유생들의 모습은 광구천하하신 상제님의 뜻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부유’는 참된 이상을 구현하는 ‘진유’와 대비되어 부패하고 백성에게 해악만을 끼치는 유자들을 일컫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참된 유학자들은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진유’를 지향하는 정신이 있었으며 그러한 이상을 어지럽히는 ‘부유’를 경계하였다. 유학자들의 사유에서 사문(斯文)24 으로서의 유(儒)는 절대적인 가치였으나 일부 썩은 무리, 즉 ‘부유’들은 이러한 유교적 가치를 올바르게 구현하지 못하였다. 즉 전통적 사유에서 ‘부유’는 유교적 이상을 어지럽히는 일부 ‘부패한 유생’들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부유’는 ‘부패한 유생’만의 의미로 한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교운 1장 6절에서 유·불·선 가운데 ‘유’를 말씀하셨고 이때 ‘유’는 ‘불’ 또는 ‘선’과 대비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불’ 자가 승려만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 불교의 사상, 문화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때 ‘유’ 자도 유생뿐만 아니라 유교의 사상, 문화 등을 아우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유’는 ‘부패한 유생’을 포함하여 유교의 모순과 문제점인 ‘부패한 유교 문화’를 전반적으로 지칭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상제님께서 ‘유교의 폐습과 전헌’을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유교의 폐습(弊習)과 전헌(典憲: 법 또는 규범)은 변혁의 시대에 뒤처진 채 정체되어 동양 문명의 획기적인 도약을 무산시켰다.25 16세기 이마두가 동양에 지상천국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유교의 폐습을 넘지 못해 실패하고 오히려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넘어가 버렸다.26 진묵도 천상의 묘법을 배워 내려서 세상에 베풀려 하였으나 김봉곡(金鳳谷, 1573~1661)의 시기심으로 동양의 모든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가 서양의 문화 계발에만 역사하였다.27  또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인 19세기, 최제우(崔濟愚)도 유교의 전헌이라는 큰 장벽을 넘지 못해 상제님께서 주신 대도(大道)를 밝히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28

  이상으로 정리하면 조선 유교의 전통적 사유에서 ‘부유’는 유교가 지향하는 이상을 어지럽히는 ‘부패한 유생’들을 비난하는 이데올로기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부유’는 ‘부패한 유생’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유교의 모순과 문제점까지를 지적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 모순과 문제점이 바로 유교의 폐습이었던 반상구별, 적서차별, 남녀차별 등의 ‘부패한 유교의 문화’이었다. 따라서 상제님께서 ‘유를 부유’라 하신 것은 부패한 유생뿐만 아니라, ‘부패한 유교 문화’, 곧 ‘유교의 폐습과 전헌’까지를 함축한 말씀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전경』

《대순회보》

『논어』

『율곡전서』 권15.

『삼봉집(三峯集)』 권3.

곽신환, 『조선조 유학자의 지향과 갈등』, 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5.

김기동ㆍ전규태 저, 『양반전ㆍ호질ㆍ광문전ㆍ임호은전』, 서울: 서문당, 1984.

박병련, 「눌제 양성지의 정치행정 사상 연구: 경세적 ‘참 선비(진유)’ 모델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와 행정연구』

제20권 제1호, 2009. 

예문동양사상연구원ㆍ황의동 편저, 『한국의 사상가 10인-율곡 이이』, 서울: 예문서원, 2013.

윤사순, 『유학자의 성찰; 한국문화 속의 본원철학 탐색』, 경기 파주: 나남출판사, 2007.

임종욱, 『동양학 대사전 2』, 서울: 경인문화사, 2006.

 

 

 

 

01 임종욱, 『동양학 대사전 2』 (서울: 경인문화사, 2006), p.542. 

02 『논어』, 「옹야」, “공자께서 자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군자유가 되고 소인유가 되지 말아라.’”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여기서도 ‘유(儒)’는 유자(儒者), 곧 유학을 신봉하거나 배우는 사람, 학자, 선비의 뜻이다. 

03 고려·조선 시대 각 향리(鄕里)에서 겉으로는 덕이 있는 사람인 체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사람들을 속여 실속을 채우던 악덕 토호(土豪)를 말한다. 원래는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서 유래한 말임. 

04 지식이나 견문, 또는 식견 등이 변변치 못한 선비. 

05 견식(見識)이 좁고 간사한 선비. 

06 곽신환, 『조선조 유학자의 지향과 갈등』 (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5), p.23.

07 정도전, 『삼봉집(三峯集)』 권3, 序, 「送趙生赴擧序」.

08 박병련, 「눌제 양성지의 정치행정 사상 연구: 경세적 ‘참 선비(진유)’ 모델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와 행정연구』 제20권 제1호(2009), p.210;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 「속유론(俗儒論)」에서 “진유(眞儒)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고 문식(文識)과 무략(武略) 등을 갖추는 데 대해 필요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선비가 정치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09 박병련, 앞의 글, p.212.

10 안으로는 성인(聖人)이고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갖춘 사람, 곧 학식과 덕행을 겸비함을 이르는 말.

11 예문동양사상연구원ㆍ황의동 편저, 『한국의 사상가 10인-율곡 이이』 (서울: 예문서원, 2013), p.358.

12 『율곡전서』 권15, 「잡저2」, “夫所謂眞儒者 進則行道於一時 使斯民有熙皞之樂, 退則垂敎於萬世 使學者得大寐之醒.”

13 곽신환, 앞의 책, p.31.

14 예문동양사상연구원ㆍ황의동 편저, 앞의 책, p.376.

15 해이해진 정치·경제·사회·군사적 제도 등을 기존체제의 틀 속에서 다시 새롭게 개혁하는 것이다.

16 예문동양사상연구원·황의동 편저, 앞의 책, p.377.

17 조선 후기 토지에 부과되던 모든 조세를 일괄하여 수취하는 일종의 전결세(田結稅) 수취행정제도.

18 조선시대 군사(軍事)에 관한 군행정과 군재정의 총칭.

19 흉년이나 춘궁기(春窮期)에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이를 환수하던 진휼제도(賑恤制度).

20 윤사순, 『유학자의 성찰; 한국문화 속의 본원철학 탐색』 (경기 파주: 나남출판사, 2007), p.366.

21 김기동ㆍ전규태 저, 『양반전ㆍ호질ㆍ광문전ㆍ임호은전』 (서울: 서문당, 1984), p.23.

22 행록 1장 24절.

23 행록 1장 25절.

24 유교의 도의(道義)나 문화를 일컫는 말.

25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상제님을 따르게 된 김형렬」, 《대순회보》 91호 (2009), p.19.

26 교운 1장 9절.

27 공사 3장 15절.

28 교운 1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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