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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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작성일2019.12.13 조회1,762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서 어느 날 종도들에게 “중천신은 후사를 못 둔 신명이니라. 그러므로 중천신은 의탁할 곳을 두지 못하여 황천신으로부터 물과 밥을 얻어먹고 왔기에 원한을 품고 있었느니라. 이제 그 신이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이로부터는 중천신에게 복을 주어 원한을 없게 하려 하노라”는 말씀을 하셨도다.(공사 1장 29절)
위의 전경 구절은 중천신의 해원과 관련된 구절이다. 여기에서 명확히 대비되는 개념은 중천신과 황천신이다. 두 종류의 신들은 삶을 마감한 후에 후사(後嗣)의 유무에 따라서 그 특징이 갈린다. 즉 자손이 있어 제사(祭祀)를 받는 황천신과는 달리 자손이 없어 죽은 후에 제사를 받지 못하는 중천신은 제사를 받는 다른 신들에게 의지해야 하는 처지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여기에서 황천신은 ‘황천(黃泉)의 신’ 또는 ‘황천에 있는 신’으로, 중천신은 ‘중천의 신’ 또는 ‘중천에 있는 신’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에서는 황천·황천신, 중천·중천신의 개념에 대해서 간단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특히 황천은 ‘黃泉’으로서 일반적으로 죽은 자가 가는 곳이라는 ‘저승’과 거의 같은 의미로 통용되어 왔으므로 그 개념이 비교적 많이 알려졌으나, 중천과 중천신은 그 의미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주로 중천신의 의미를 보다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황천(黃泉)·황천신(黃泉神)
고대 중국에서 황천(黃泉)은 주로 ‘땅 밑에 있는 샘, 땅속의 흙탕물’을 뜻하거나,01 ‘땅속 깊은 곳’,02 또는 ‘깊은 물’을 의미하였다.03 황천이 이러한 의미 이외에 죽은 자가 가는 ‘저승’을 뜻하는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한(漢)대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대체로 ‘땅속’, ‘깊은 물’, ‘저승’의 의미가 통합된 중의(重義)적 형태로 사용되었다.04 대표적인 사례가 전국시대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이야기에 나타난다. 정 장공은 그의 동생을 편애하여 반역을 시도했던 어머니를 “황천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不至黃泉 毋相見也)”라고 선언한 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후회하던 중 영고숙(潁考叔)이라는 자의 계책으로 땅굴[황천]을 파서 만남으로써[穿地至黄泉, 則相見矣] ‘황천에 가서야 만나겠다’라는, 즉 자신이 죽기 전에는 모친을 만나지 않겠다는 자신의 맹세를 어기지 않으면서 모친을 만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05 여기에는 황천이 저승이라는 의미와 땅속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후 황천의 가장 대표적 의미는 저승이 되었고, 이와 관련된 개념이 추가되었다.06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황천(黃川)’07이 저승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어서 이미 오래전부터 저승을 의미하는 뜻으로 황천이 쓰인 것으로 보이며, 무속(巫俗)과 민간에서 저승을 뜻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됐다.
이렇듯 황천의 일반적 의미는 삶이 영위되고 있는 이승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저승과 같다. 따라서 황천신을 황천에 있는 신이라고 할 때 저승에 있는 조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조상이 황천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 표현은 『고운집(孤雲集)』08·『성호전집(星湖全集)』09·『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10·『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기록들에서는 황천에서 선친(先親)이나 친족(親族)을 만난다는 내용이나11 황천에 있는 선친이나 선배들이 한(恨)이나 원(冤)을 품고 있다는 내용이12 다수를 이룬다.
중천(中天)
중천신은 위의 황천신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보면 ‘중천의 신’, 또는 ‘중천에 있는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천은 한글로 기록되어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에 해당하는 한자어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저승과 관련이 있은 한자어로서의 중천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천(重泉)’이다. 중천은 본래 물이 깊은 곳13 등을 의미하다가 후에 황천과 혼용되는 여러 단어14와 같이 저승을 뜻하게 되었다.15 예컨대 조선 시대의 왕조실록에서 저승을 뜻하는 말로 황천보다 중천이 더 많이 사용되었을 정도이다.16 따라서 중천은 황천과 같은 의미로서 전경에서 황천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중천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또 다른 한자어로서는 ‘중천(中天)’이 있다. 앞의 전경 구절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여러 다른 서적들에서는17 대부분 중천(中天)으로 적고 있다. 중천(中天)의 사전적 의미는 ‘① 하늘 가운데 ②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솟음 ③ 하늘 위 신선(神仙)의 세상 ④ 성세(盛世)를 이르는 말 ⑤ 구천(九天)의 하나 ⑥ 신농(神農)의 역(易)’ 등이다.18 이 중 ①·②·④는 이승에 대한 수식(修飾)이라서 사자(死者)와는 관련이 없고, ⑥은 복희(伏羲)의 역을 선천(先天), 황제(黃帝)의 역을 후천(後天)이라 부른 것에 대해, 그 중간 시기에 있었던 신농의 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③은 중천에 있는 존재가 신선이므로 옷과 밥을 얻어먹었다는 중천신에 관한 수식과는 거리가 먼 종교적 이상세계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전경』의 내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⑤번이다. ⑤에서 말하는 구천은 동양 전통에서 하늘을 아홉 단계, 혹은 아홉 분야로 구성되어 있다고 사유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구천설(九天說)은 『손자(孫子)』 『천문(天門)』·『이소(離騷)』,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 『태현경(太玄經)』 등에 언급되어 있는데, 아홉 하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은 『여씨춘추(呂氏春秋)』와 『태현경(太玄經)『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하늘을 분야(分野)19에 따라 나누어 ‘구야(九野)’를 말하고 있는데, 중앙은 균천(鈞天)·동쪽은 창천(蒼天)·동북쪽은 변천(變天)·북쪽은 현천(玄天)·서북쪽은 유천(幽天)·서쪽은 호천(顥天)·서남쪽은 주천(朱天)·남쪽은 염천(炎天)·동남쪽은 양천(陽天)이라고 명명하였다.20
이와는 달리 『태현경(太玄經)』의 <태현수(太玄數)>21에서는 천·지·인(天地人)을 각각 9단계로 나누어 구분한 내용 중 하늘에 대한 설명에서 중천(中天), 이천(羡天), 종천(從天), 경천(更天), 수천(睟天), 곽천(廓天), 감천(減天), 침천(沈天), 성천(成天)의 아홉 하늘이 구천(九天)의 명칭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낮은 첫 번째 하늘이 중천이다.22 ‘낮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태현경』에서는 방위에 따라 하늘을 나누고 있는 『여씨춘추』와는 달리 구중천(九重天)23이라고 하여 하늘을 층위에 의해서 구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저승과 이승에 대한 관념이 고대에 강이나 바다 건너 저승이 있다는 식의 수평적 관계에 있다는 인식에서 점점 깊어져서 ‘천상계 - 이승 - 지하계’의 기본 틀을 갖추고 구체적으로 정립되는 과정에서 저승인 천상계와 지하계 모두 중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이 형성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24 이러한 측면에서 『태현경』의 중천은 이승과 가장 가까운 저승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25 이 중천(中天) 개념이 전경의 중천 개념과 같은지는 확정할 수 없으나 황천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중천(重泉)보다는 가까운 개념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중천에 거하는 신인 중천신(中天神)은 구체적인 어떠한 신인가.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 첫 번째 하늘에 어떠한 존재가 있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고·중대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26 ‘中天神’의 용례도 거의 없어 보인다. 이렇게 중국의 문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중천신이 지칭하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우리나라에서의 용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중천멕이
앞에서 『전경』의 중천의 개념이 어떠한 것인지 두 가지 한자어를 검토해보았다. 그러나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또한, 한국의 한자 문헌에서도 거의 그 용례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전경 내용의 맥락에 더욱 가까운 의미를 가진 용례를 찾기 위해서 한국의 무속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전라북도 전주(全州)·정읍(井邑)·부안(扶安) 일대와 전라남도 진도(珍島)27 지방에는 ‘중천멕이’, 또는 ‘중천맥’이라는 굿이 있다.28 무당(巫堂)이 주관하는 ‘굿’은 대체로 부정(不淨)한 것을 물리고, 신(神)을 청배(請陪)해서 절차에 따라서 제신(諸神)들을 모셔와서 즐겁게 대접하면서, 인간이 기원하는 바를 물어서 그에 상응하는 답을 얻고, 청했던 신을 보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29 이러한 굿의 진행절차를 보통 청신(請神)·오신(娛神)·송신(送神)의 과정으로 이해한다.30 이러한 형식은 전체 굿을 구성하는 각 굿거리마다 반복하여 이루어진다.31 이 과정이 ‘본 굿’으로서 끝나면, 이때까지 초대받지 못한 신들을 청하여 풀어 먹이는 굿거리가 마지막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전북지역에서는 중천멕이라고 한다.
이렇게 굿의 마지막 절차로서 소위 ‘잡신’으로 불리면서 의례에 정식으로 청해지지 못하는 여러 신을 불러 대접하여 보내는 절차는 주로 ‘큰 굿’32에서 행해진다. 왜냐하면, 이 절차는 연희(演戲)적 성격이 강하여 무당과 더불어 여러 명의 악사가 참여하며, 본굿의 경우보다는 간소하지만, 따로 음식을 마련하고 극(劇)에 필요한 여러 도구도 준비해야 하는 등 비용과 시간이 의외로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33
굿의 마지막 절차이며 송신(送神)을 주로 하는 이 굿은 전국 여러 지역에서 시행되어왔다. 이를 서울·경기지역에서는 ‘뒷전’, 황해도는 ‘마당굿’, 동해안 지역에서는 ‘거리굿’, 전라남도 순천 지역에서는 ‘설양굿34·삼설양굿’이라고 부른다. 뒷전은 주된 신들에 대한 각 굿거리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앞전’에 대비되는 말로서 건물 앞이 아니라 뒤에서 따로 이루어진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 신들의 낮은 지위와 연고 없음이 드러나는 용어이다. 마당굿도 정식으로 초빙되는 자신의 거리가 없는 신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마당에서 풀어먹인다는 의미이고, 거리굿은 연고 없이 길거리에 떠도는 신들을 주로 대접하는 굿이므로 대문 밖 길거리나 바닷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설양굿의 경우 ‘設禳’을 그 어원으로 본다면 ‘양(禳)’은 신에게 제사하여 재앙을 물리친다는 의미이므로 잡귀로 인한 재앙을 물리치는 굿을 베푼다는 뜻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35 이런 의미에서 ‘중천맥’과 같은 의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신들이 사람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굿들은 무당이 주도하는 종교의례이면서 동시에 전통연희적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무당굿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굿거리에서 초빙되는 신들은 정식으로 초빙되는 신들을 대접하는 굿에 의지하여 음식을 얻어먹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전경의 중천신에 대한 묘사에 나타나는 ‘얻어먹음’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상제께서 강세하시고 주로 활동하신 지역인 정읍·전주·부안 지역에서 이 굿을 ‘중천멕이’라고 부르는 것도 중천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중천신
앞서 언급한 일련의 송신굿들에 청해지는 신들은 각 굿거리에 정식으로 청배되는 신들의 수하들인 ‘수배(隨陪)’36들이거나, 이승에 남은 원한 때문에 저승에 가지 못하고 연고 없이 떠도는 잡귀 잡신들로 인식되어 있다. 특히 잡귀 잡신이라 인식된 신들을 중천멕이에서는 ‘중천’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대부분 살아생전에 사회적 약자로서 소외되어 불우한 삶을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신들로서 원한을 품고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예컨대 아이를 낳다 죽은 ‘해산 중천’, 맹인으로 놀림을 받으며 살다 간 ‘봉사 중천’, 다리의 장애를 안고 살았던 ‘전둥발이 중천’, 척추 장애로 불편하게 살았던 ‘곱사 중천’, 가난하여 아사한 ‘굶주린 중천’, 남사당패 등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객사한 ‘광대 중천’ 등이 그들이다.37 이들 대부분은 신체적 장애나 질병 또는 사회적 편견 등으로 인하여 혼인을 못 했거나 혼인하였더라도 자식이 없었던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에게는 제사를 지내줄 자손이 없으며, 그로 인해서 자식이 있는 신을 따라가서 얻어먹거나 이러한 송신굿을 통해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인식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살아서도 불우한 삶을 살았지만, 그러한 불우함이 죽어서도 해소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원이 많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원한 때문에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에 남아 떠도는 잡귀 잡신이 곧 ‘중천’이라는 것이다.38
이들 중 ‘해산 중천’과 ‘봉사 중천’ 등은 거의 모든 송신굿에 등장하는데, 굿의 연희에서 ‘해산 중천’은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 아이를 잉태한 것이 아니라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에 의한 희생자로 나타나며, 동해안 거리굿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 전통적 전승이다. 그리고 여인은 이 아이를 낳다가 사고로 인해 아이도 죽고 자신도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와 유사한 여성신들은 뒷전에 등장하는 ‘지신할머니·골매기할멈·며느리’ 등이 있다.39
‘봉사 중천’은 주로 태생적 장애가 있는 맹인으로 등장하는데, 대체로 심청전의 심 봉사와 유사한 인물로 묘사된다. 강을 건너다 어려움을 겪고 이로 인해 세인들의 비웃음을 사는 모습이 많이 연행되며, 신체적 소수자로서 어린아이들에게도 놀림거리가 되기도 한다. 또한, 눈이 보이지 않아 생산직에 종사할 수 없으므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얻어먹는 모습이다.40 이렇게 장애가 있는 신들은 이 외에도 ‘외팔이 중천·‘벙어리신’·‘용창귀신(매독으로 인해 코가 없는 귀신)’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중천멕이에서는 ‘남사당패 중천’·‘농부 중천’41·‘주모 중천’ 등이 등장하고, 동해안 거리굿과 바다에 접한 남서지역에서는 해녀 등 물에 빠져 죽은 신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42 황해도의 마당굿에서는 전쟁에서 죽은 온갖 신들이 청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듯 이들은 사회적 소수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약자로서 한이 많은 신이라 할 수 있다. 중천멕이에서는 이들을 청배하여 약소하나마 대접을 하는데,43 그 과정에서 이들의 원한을 위로하고자 하는 연희가 이루어진다. 각 중천신에 따라 각각 특색에 맞게 그들을 위로하는 토막극이 연출된다.44
그 극의 내용을 보면 연기자가 각 중천들이 가진 장애의 특징적인 모습을 하고 그들을 연기하면서 치유·위로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비참한 삶과 죽음으로 인해 원한을 가진 존재들을 등장시켜 연희를 행함으로써 단지 음식을 대접받고 놀다 가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생전에 맺혀있었던 한을 위로받고 떠나게 한다. 즉 연희에서 아이를 낳다 죽은 여인은 해산을 하게 하여 미역국도 먹여주고, 장님에게는 눈을 뜨게 하고, 등이 굽은 장애가 있던 사람은 등을 쫙 펴게 해주며, 굶주렸던 자는 마음껏 먹게 하여 맺혔던 응어리를 일부 풀 수 있도록 한다. 또 중천멕이 놀이에서는 개방된 열린 판에서 무당이 청중과 직접 소통하면서 해학적인 몸짓으로 무극(巫劇)을 펼쳐나간다. 여기에서 관중들은 위대하고 비장한 죽음이 아닌 힘들게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중천신에 공감하게 되고, 이를 통해 힘들게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받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45
이상의 내용을 볼 때 중천멕이의 중천은 보통 자손이 없으며, 따라서 제사를 받지 못하고 다른 신을 모시는 의례에서 얻어먹는다는 측면에서 상제께서 말씀하신 중천신의 개념에 가까워 보인다. 특히 이 중천이라는 호칭이 주로 전라북도 정읍·전주·부안 지역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보다 신빙성 있게 한다.
이렇게 우리 민족들은 불우하게 살다 간 중천신들의 원을 위로하는 의례를 예부터 시행하여 왔다. 중천멕이 등의 종교 의례를 통하여 대접받고 위로받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는 명확하여 또다시 그들은 자손 있는 신들을 따라가서 제삿밥을 얻어먹거나, 굿을 찾아다니며 위로받은 상황을 반복하여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들의 원이 개인적인 것에만 기인하지 않고 사회적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육신을 잃은 상태에서 그 원을 해소할 수 없었으며 무당들도 그들을 위로만 할 뿐 완전한 해원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46 때문에 상제께서는 이렇게 불우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중천신들의 원을 해소하게 하는 공사를 직접 처결하셨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박복(薄福)한 상태에서 원을 품어온 이들에 대하여 복을 주어서 해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47
우리는 모두 사회적 소수자가 될 수 있다. 거창한 사유가 아니더라도 특정 음식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이 소수자일 수 있으며, 일반적이지 않은 독특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도 사회적 소수자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대다수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편견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은 지양하여야 할 일이다. 이는 차별로 인한 원을 낳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제께서 중천신의 원한을 풀어주신 일을 통하여 이 사회에서 해원 상생을 실천하는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볼 일이다.
01 “무릇 지렁이는 위로는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는 황천을 마시니(夫蚓上食槁壤下飮黃泉)”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
02 “그러나 발의 크기를 측량하여 그곳만 제외하고 나머지 땅을 깊이 파서 황천까지 이르게 한다면 사람에게 쓸모가 있겠는가? (然則廁足而墊之 致黃泉 人尙有用乎) 『장자(莊子)』「외물(外物)」.
03 “무릇 지인(至人)은 위로는 푸른 하늘을 엿보고, 아래로는 황천 속에 잠기며, 우주의 팔방 끝까지 자유로이 날면서도 신기가 조금도 변치 않는데(夫至人者는 上闚靑天 下潛黃泉 揮斥八極 神氣不變” (『장자(莊子)』「전자방(田子方)」.
04 황천이 왜 저승을 뜻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고대의 인류가 죽은 자가 가는 곳이 땅속이거나 물(우물·강·바다)을 지나서 있다고 믿은 데서 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시신을 땅에 묻는 관습이나 물에 띄워 보내는 장례의식과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저승관의 원형은 우리나라의 바리데기 신화나 수메르의 길가메시(Gilgamesh) 신화 등에서 볼 수 있다.(김헌선, 「서울지역 바리공주와 감로정의 구조적 비교」, 『구비문학연구』23, (2006), p.331. 참조.
05 『사기(史記)』「세가(世家), 장공(莊公)」 참조.
06 무덤에 해당하는 음택(陰宅), 또는 음기(陰氣)가 지극하여 양기(陽氣)가 태동하는 상태를 뜻하게 된 것 등이다. “微陽動于黃泉” (『일주서(逸周書)』 「주월(周月)」)
07 “황천에서도 역시 은혜로울 것입니다.(則黃川(泉)亦恩)” 『삼국유사(三國遺事)』 「선율환생(善律還生)」 ‘천(川)’과 ‘천(泉)’이 혼용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병국, 「저승 관념에 관한 비교문학적 고찰」, 『한국사상과 문화』 26, (2004), p.330. 참조.
08 “온 나라 사람들이 더욱 감격하고 황천에 있는 선조들도 소식을 듣고 기뻐하실 것입니다.(擧瀛區而增感 告泉隧而倘聞)” 『고운집(孤雲集) 제1권』 「사은표(謝恩表)」. 여기의 ‘천수(泉隧)’는 황천(黃泉)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09 “옛날에 알던 친지들은 모두 황천으로 갔습니다(舊識朋親悉皆黃泉).” 『성호전집(星湖全集) 제26권』 「答安百順 丁丑」.
10 “생각건대 황천에 가서 혈육들을 서로 만나면(臥想黃泉團骨肉)”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독좌음(獨坐吟)」.
11 “더구나 신이 비록 불초한 자식이라 하더라도 망부(亡父)의 대상날에 조석의 전(奠)드리는 것을 파하고 모시던 무덤 곁을 떠나며, 길이 황천(黃泉)에서 상견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況臣雖不肖之子, 於亡父大祥之日, 罷朝夕奠, 離侍墳側, 永作黃泉相見之期)” (『조선왕조실록』 「세조 45권」) 등 다수.
12 “선조(先朝) 때 어수(魚水)같던 관계의 신하들이 혹은 흰 머리의 노령으로 옥에 갇히기도 하고 혹은 황천(黃泉)에서 원통함을 풀지 못하고 있으며(先朝魚水之臣 或白首牢囚, 或黃泉抱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4권」) 등 다수.
13 “물이 많이 고인 중천은 자라와 악어가 편이하는 곳이다(積水重泉, 黿鼉之所便也).” 『회남자(淮南子)』 「제속훈(齊俗訓)」.
14 黃壤·黃壚·黃泥·黃塵黃泥·窮塵·深淵·九原·九地·九泉·淵泉·重泉·奄奄泉·泉下·厚壤深泉·泉壤
·泉隧·三泉·三重泉 등이다.
15 중천(重泉)이 저승을 의미하게 된 과정은 정확하지 않으나, 하늘이 여러 층[重天]으로 되어 있다는 구천설(九天說)이 유행하면서 하늘에 대비되는 땅도 중(重)층으로 되어 있다는 관념이 생긴 것으로 보이며, 천(泉) 역시 황천의 천(泉)이 저승 개념과 관련을 맺는 것과 같은 과정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구천설에 대비되는 단어로서 ‘구지(九地)·구천(九泉)’ 등도 중천과 함께 사용되었다.
16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황천(黃泉)은 약 8개의 문서에, 중천(重泉)은 32개의 문서에 나타난다.
17 『대순전경』 초판, 3판. 『동곡비서』 등.
1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편, 『한한대사전』 제1권, (단국대학교출판부, 1999), pp.451~452.
19 말 그대로 땅[野]을 나누듯이[分] 하늘도 방향과 위치에 따라 나누어 구분하는 것을 의미한다.
20 “天有九野 謂中央與四正四隅 中央曰鈞天 東方曰蒼天 東北方曰變天 北方曰玄天 西北方曰幽天 西方曰顥天 西南方曰朱天 南方曰炎天 東南方曰陽天”(呂不韋, 『呂氏春秋』<有始>)
21 한(漢)나라 때의 사상가인 양웅(揚雄, BCE 53~CE 18)이 지은 책으로서 세상이 변화하는 이치를 도가(道家)적 관점에서 『주역(周易)』의 형식을 빌려 설명하였다.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태현수(太玄數)>는 여섯 번째 권이다.
22 “九天 一為中天 二為羡天 三為從天 四為更天 五為睟天 六為廓天 七為減天 八為沈天 九為成天”(揚雄, 『太玄經』 <太玄數>)
23 하늘이 아홉 개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구천설(九天說)은 도교(道敎)·불교(佛敎)적 세계관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구천(九天)’은 당송(唐宋)대로 넘어오면서 ‘구소(九霄)’라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어졌는데, 구소의 명칭에 대한 구체적 언급들이 있어왔다. 청(淸)대에 넘어오면 서양과학의 영향으로 고대의 천관이 비판되거나, 기독교의 영향으로 유대전통의 구천관(九天觀)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24 김헌선, 앞의 글, pp.330-335. 참조.
25 『태현경』에서 땅도 아홉 층으고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사니(沙泥)’로서 같은 논리로 볼 때 중천(中天)과 같이 이승에 가장 가까운 저승이라고 할 수 있다. (九地 一為沙泥 二為澤池 三為沚崖 四為下田 五為中田 六為上田 七為下山 八為中山 九為上山) ????太玄經???? <太玄數>
26 다만 명·청대로 넘어오면 기독교의 영향으로 가장 낮은 하늘로 천국에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영혼이 있는 고성소(古聖所, limbus)를 첫 번째 하늘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단테(A. Durante)가 지은 소설 『신곡(神曲)』의 한문 번역본 등이 그 예이다.
27 진도에서는 이 굿을 ‘중천’ 또는 ‘중천풀이’라고 부른다.(이경엽, 「호남지역 무당굿놀이의 연행양상과 의미」, 『한국무속학』 21, (2010) p.191.
28 ‘맥이’와 ‘멕이’는 의미가 다르므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액이나 살은 막는 것이므로 ‘맥이’지만, 중천(잡귀)은 풀어서 먹이므로 ‘멕이’라고 하는 게 적절하다. ‘중천’이란 말은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는데, 예컨대 진도에서도 큰굿의 마지막 절차를 중천 또는 중천풀이라고 한다. 잡귀를 위로하고 달래 주는 굿거리는 모든 굿의 막바지에 반드시 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 ‘말로 주워섬기기’도 하고, 굿놀이 방식으로 하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무녀가 징을 치면서 말로서 혼신들을 달래는 데 비해, 굿놀이는 각 혼신을 연극적으로 꾸며 놀린다는 점에서 구별된다.(이경엽,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중천멕이』, 국립민속박물관 (2019 갱신),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1414)
29 김은희, 「서울굿 뒷전의 연희적 성격 연구」, 『한국음악사학보』33 (2004), p. 237.
30 조흥윤, 『한국巫의 세계』, (서울: 민족사, 1997), p.222 참조.
31하나의 굿은 그 안에 적게는 5-6개 많게는 30여 개의 여러 작은 굿들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작은 굿을 ‘거리’라고 한다. 10여 개의 거리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보통이다.
32 굿의 종류는 규모나 목적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하는데, 의뢰자에 따라서는 ‘개인굿’과 ‘마을굿/대동굿’으로 구분한다. 규모에 따라서는 ‘큰 굿’과 ‘작은 굿’으로 구분할 수 있다. 큰 굿이란 5~6명의 무당과 무악 반주를 전문으로 하는 삼현육각의 악사가 동원되어 행하는 굿을 말한다. 큰 굿은 비용이 많이 들고 여러 날에 걸쳐서 행사되기 때문에 형편이 풍족한 재가집에서 주관하는 씻끔굿이나 마을에서 주관하는 수륙재·당산제·신굿 등에서 행해진다. 큰 굿에서는 무당이 서서 12거리 이상의 전통 무가를 가창하고 춤과 각종 연희를 풍성하게 곁들인다. ‘작은 굿은 한 두 명의 악사가 징·장구를 반주하고 한 명의 무당이 서서 굿을 공연하거나 한 명의 무당이 앉아서 직접 장구를 두드리며 무가를 가창하는 소규모의 굿을 말한다. (이영금, 「전북지역 무당굿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7), pp.48~49 참고.)
33 따라서 모든 굿에서 수행할 수 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상 작은 굿에서는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34 설양굿은 전통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치병굿으로 독립적 큰 굿의 이름이나, 배송의 절차로 이루어지는 굿거리의 명칭이기도 하다.(이경엽, 「설양굿의 연극적 구조와 기능」, 『남도민속연구』 4 (1997), p.29.
35 이경엽, 위의 글, p.30.
36 ‘수비’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각 거리에서 청배되는 주신(主神)들의 종신(從神)들로서 주신들이 의례에서 대접받을 때 함께 받지 못하고 따로 마지막 거리에서 청배되어진다.
37 황루시, 「무속의 관점에서 보는 사회적 약자의 존재성」, 『구비문학연구』 51, (2018), p.13.
38 이경엽, 「중천멕이」, 『한국민속예술사전』,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1414)
39 황루시, 앞의 글, pp.20-22 참조.
40 봉사중천과 같은 맹인신의 경우 송신굿(뒷전류) 뿐 아니라 굿의 다른 거리에서도 등장하는데, 생산신(生産神)·점복자(占卜者)·독경인(讀經人)적인 상징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생산신으로서는 주로 북부지방에 보이며 중부지방에서는 주로 독경인으로 등장한다. 굿에 나타나는 맹인신의 상징적 의미는 (권민경, 「무당굿놀이에 등장하는 맹인의 성격과 의미」, 『한국무속학』 21, (2010)) 참조.
41 주로 16~19세 정도의 소동패로서 농사일을 하다가 죽은 신을 지칭한다.
42 거리굿에서 청해지는 신들에 관해서는 (이균옥, 『동해안 별신굿』, (서울: 박이정, 1998), pp.219-414.) 참조.
43 각각의 굿거리에 정식으로 청배되는 신들에게 제공되는 상에는 밥·국·삼색나물·시루떡·탕·과일·술·포·돼지머리 등이 기본으로 올라가는데 중천손님 상에는 대개 오곡밥·무나물·두부·묵 등을 막걸리에 섞어 큰 그릇에 담아두었다가 풀어 먹이고, 대문 안쪽에도 들어오지 못한 신들을 위해 대문밖 거리에 나머지 음식들을 뿌린다. (이영금, 앞의 글, pp.84-95.)
44 이영금, 위의 글, pp.113-114쪽. 참조.
45 황루시, 「무속의 관점에서 보는 사회적 약자의 존재성」, 『구비문학연구』 51, (2018), pp.30-32 참조.
46 김영주, 「대순사상의 해원이념 연구」 (대진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pp.29-33. 참조.
47 일설에 중천신에게 복을 줄 수 있는 권한을 주어서 해원시켰다거나, 자손이 없으니 다른 자손들을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으므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해원하였다거나 하는 등의 설들이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문제가 있다. 복을 줄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해원한다는 것은 마치 차별로 인해 원을 품은 자를 차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해원하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논리이다. 구체적으로 맹인이 품은 원을 맹인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 해원하겠다는 것과 같아서 문제의 초점을 빗나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자손이 없어서 타인의 자손을 공정하게 심판할 수 있다는 논리도 근거가 매우 빈약한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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