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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체계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 도를 닦는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상제님께서 이 세상을 “망기부자무도(忘其父者無道), 망기군자무도(忘其君者無道), 망기사자무도(忘其師者無道), 세무충(世無忠) 세무효(世無孝) 세무열(世無烈) 시고천하개병(是故天下皆病)” 1)이라고 진단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도전님께서는 “세상에 삼강오륜이 없어짐으로 인해 천하가 다 병들었다 하셨고, 이 병을 고치시려고 상제님께서 오셨으며, 이 병을 고침으로써 도통(道通)도 있고 우리의 대운(大運)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2)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천하개병의 세상을 고칠 수 있는 진리가 바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의 해원상생(解冤相生) 대도(大道)입니다. 이 해원상생 대도는 천ㆍ지ㆍ인 삼계(三界)를 화평하고 평화롭게 하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진리입니다. 이 대도로 상통천문(上通天文)과 하달지리(下達地理) 뿐만 아니라 중찰인사(中察人事)까지 하여 천ㆍ지ㆍ인이 하나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천에는 상통천문 하달지리하기 위하여 길성(吉星)이 비치는 장소나 명당을 찾아서 심산유곡에서 수도하였지만, 우리 대도는 중찰인사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산속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사회적 인간관계 속에서 인사도리를 하며 도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인(人) 중(中) 수도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정생활, 사회생활이 있고, 수도인에게는 여기에 수도생활이 더 들어갑니다. 그리고 수도인에게 있어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은 수도생활의 연장이지 서로 분리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생활은 인륜을 근본으로 이루어지나, 우리의 수도생활은 일정한 조직체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대순진리회의 연원(淵源)과 연운(緣運)에 근거한 조직체계입니다. 대순진리회는 구천상제님ㆍ도주님ㆍ도전님의 세 분을 연원이라고 합니다. 이 연원을 따라 형성된 인간 간의 관계를 연운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연운의 체계는 조직체제로서 포덕한 업적에 따라 형성됩니다. 이 체계는 상급임원인 선감ㆍ교감ㆍ보정, 중간임원인 차선감ㆍ교령ㆍ정무, 선사ㆍ교정ㆍ정리, 선무ㆍ교무 및 일반 도인으로 구성됩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포정원(布政院)에는 선정부(宣正部)ㆍ교정부(敎正部)가 있어, 선정부에는 선감ㆍ차선감ㆍ선사ㆍ선무가 있고 교정부에 교감ㆍ교령ㆍ교정ㆍ교무가 있습니다. 또, 정원(正院)에는 보정ㆍ정무ㆍ정리가 있습니다. 각 부서에서 하는 일을 보면 선정부는 포덕 업무를 관장하고, 교정부는 선정부가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보좌하고 지도감독하며 교화를 관장하고, 정원은 모든 도인이 도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르게 지도육성(指導育成)하는 것입니다. 각 부처가 하는 일이 다르다 해도 포덕하여 올바른 도인으로 육성하기 위한 목적은 동일합니다. 이 목적이 같기 때문에 각 부서는 서로 합심하여 한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임원 상호 간의 융화(融和)는 물론이고, 모든 도인이 한마음 한뜻이 됨이 그 요체이자 핵심입니다.
우리 대순진리회는 해원상생의 진리에 의한 종교적 법리가 포덕ㆍ교화ㆍ수도 공부로 이를 기본사업(基本事業)이라고 합니다. 이 사업을 통해 모든 인류를 정신개벽(精神開闢)ㆍ인간개조(人間改造)하여 이 세상에 인륜과 도덕을 바로 세우고, 동시에 ‘완전한 인격’의 소유자로 가르쳐 나가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인간이 누구나 소원하는 인도가 있다. 임금이 되기를 원하나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없고, 어버이가 되기를 원하나 누구나 어버이가 될 수 없고, 스승이 되기를 원하나 누구나 스승이 될 수는 없다.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으면 그 임금이 어디에 설 것이며, 아버지는 있으나 자식이 없으면 그 아버지가 설 곳이 어디 있으며, 스승은 있으나 배울 제자가 없으면 그 스승이 설 곳이 어디 있으리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천지의 귀와 신이 굽어 살피고 있다(所願人道 願君不君 願父不父 願師不師 有君無臣其君何立 有父無子其不何立 有師無學其師何立 大大細細天地鬼神垂察).” 3) 라고 하셨습니다. 이 상하ㆍ상호 간의 체계질서로 서로 인륜과 도덕을 배우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정이나 직장 등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도의 수칙(守則)에는 “삼강오륜은 음양합덕 만유조화 차제도덕의 근원이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부부 화목하여 평화로운 가정을 이룰 것이며 존장을 경례로써 섬기고 수하를 애휼(愛恤) 지도(指導)하고 친우 간에 신의로써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체계질서에서 상하ㆍ상호 간에 막힘과 걸림이 없어야 하고 그 관계는 자모지정(慈母之情)이어야 합니다. 이 체계질서로 인해 우리 종단이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체계는 사심(私心)이 아닌 도심(道心)으로써 바로 확립되어야 하고 도심은 위ㆍ아래의 도인들이 서로 믿으며 변하지 않고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체계 확립의 요체는 믿음으로 만약에 서로 간에 불신과 의심이 있다면 대화로써 풀고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서로가 자모지정(慈母之情)과 은사지의(恩師之義)의 심정으로 마음이 통하고 인정과 관용심으로 융화단결하고 자기의 직분을 바르고 성실하게 하여 체계질서를 바르게 세우는 데서 완전한 도인이 되어 갑니다. 상하ㆍ상호 간에 서로 고마워하고 아낀다면 설령 누가 끼어들어 체계질서를 깨뜨리려고 해도 깰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은의를 망각하고 혈기의 충동으로 대립하면 이는 상극을 자초(自招)하는 것으로 상제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됩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어찌 운수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체계질서를 통하여 운수도 받고 도통도 하는 것이므로 체계질서를 잘 지켜나가는 것이 바로 도를 잘 닦는 것입니다.
도전님께서는 체계질서의 확립에 대해 체계질서는 상하의 은의(恩義)로써 세우고, 예(禮)로써 지키며, 덕화(德化)로써 유지하고, 대순진리를 바르게 알고 가르쳐 정립(定立)해 나가라고 하셨습니다.4)
임원들은 아래 도인들이 잘 따라주는 것이 고맙고, 아래 도인들은 임원이 잘 가르쳐 주는 것을 고맙게 여기면 이것이 바로 해원상생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될 때 모두가 화합단결하여 일심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특히 선감ㆍ교감ㆍ보정의 상급 임원은 화합해야만 아래 도인들을 완전한 도인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불화가 있다면 이는 해원상생에 어긋나고 완전한 도인으로 만들지 못 할 것입니다.
화합은 해원상생ㆍ보은상생 대도의 이치를 깊이 깨닫고 힘써 실천할 때 가능합니다. 모든 수도인이 공감하는 바와 같이 실제로 화합을 이루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화합단결의 소중함을 명심하고 실천하여, 몸과 마음에 배게 하여야 합니다. 이 화합단결은 반드시 체계질서 속에서 이루어져 밀가루 반죽처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해원상생의 진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대순(大巡)은 막힘이 없고 걸림도 없이 둥근 것입니다. 둥글다는 것은 무극이고 근본자리요 걸릴 것 없이 통하는 것입니다. 서로 상통하고 화합하여 하나로 뭉쳐 올바른 사람, 완전한 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완전한 도인이 되면 원래의 천성과 본성으로 돌아가 인간의 양심을 찾게 됩니다. 여기에는 욕심도 사심도 없으며 유리알같이 깨끗하고 맑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이는 체계질서를 바르게 세워 수도해야만 이룰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1) 행록 5장 38절.
2)《대순회보》12호, ⌜도전님 훈시」.
3) 공사 1장 40절.
4)『대순지침』, p.65~7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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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언덕을 잘 가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언덕을 잘 가져야 한다는 데 대해 『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말은 마음의 소리요 덕(德)은 도심(道心)의 자취라. 나의 선악(善惡)은 말에 의하여 남에게 표현되는 것이니, 남에게 말을 선(善)하게 하면 남 잘 되는 여음(餘蔭)이 밀려서 점점 큰 복(福)이 되어 내 몸에 이르고, 말을 악(惡)하게 하면 남 해치는 여앙(餘殃)이 밀려 점점 큰 재앙이 되어 내 몸에 이른다. 화(禍)와 복(福)은 언제나 언덕(言德)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니 언덕(言德)을 특별히 삼가하라.” 1)
언덕(言德)이란 ‘말의 덕’이라는 뜻으로, 구체적으로는 상제님께서 “악장제거 무비초 호취간래 총시화(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 2)
라. 말은 마음의 외침이고 행실은 마음의 자취로다. 남을 잘 말하면 덕이 되어 잘 되고 그 남은 덕이 밀려서 점점 큰 복이 되어 내 몸에 이르나 남을 헐뜯는 말은 그에게 해가 되고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라.”(교법 1장 11절), “뱀도 인망(人望)을 얻어야 용이 되나니 남에게 말을 좋게 하면 덕이 되나니라.”(교법 1장 26절), “어디서 무슨 부족한 일을 보고 당하여도 큰일에 낭패될 일만 아니면 항상 남을 좋게 말하기를 힘쓰라.”(권지 2장 24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남을 좋게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남이 잘 되도록 말로써 덕을 베풀어주라는 말의 분명한 사용 목적을 포함하고 있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제님께서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 육장금신(六丈金神)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되 나는 입에 물었노라”(행록 2장 16절)고 하셨습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천지조화를 부리듯이 사람에게 있어서 말은 곧 여의주(如意呪)입니다.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 하였듯이 뿌려진 말씨는 반드시 자라서 그 결실을 맺습니다. 말씨는 인격의 꽃입니다. “길화개길실(吉花開吉實)하고 흉화개흉실(凶花開凶實)”(행록 5장 38절)이라 하셨듯, 상서로운 꽃은 좋은 열매를 맺고 흉한 꽃은 그 열매도 흉한 법입니다. 가령 덕 있는 말은 서로가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게 하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사람들에게 언제나 활력 있는 생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합니다. 거친 말은 반항과 좌절을 부르고, 부주의한 말은 시비(是非)를 유발하며, 잔인한 말은 일생을 망치게 하고, 모진 말은 미움을 유발하며, 폭언은 폭행을 부릅니다.
이렇듯 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단한 힘을 가진 도구이자, 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일상생활에서 언제나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말할 때는 말에 덕을 붙여 사용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값없이 하는 말이라고 험악하게 하지 말고 언덕을 잘 가질 때 서로에게 복(福)이 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말의 힘을 보여주는 만고의 진리입니다.
좋은 말에는 좋은 파장이 나오고 나쁜 말에서는 좋지 않은 파장이 나옵니다. 현대 물리학이 밝힌 바와 같이 모든 만물은 본질에 있어서 파동입니다. 사람의 말은 강력한 파장을 일으키며 사람과 물질에 작용합니다. 여기 사람의 말에 따라 사물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데 대한 좋은 실례가 있습니다.
일본의 과학자 에모토 마사루(江本勝, 1943~2014)박사는 사람의 말과 생각, 문자, 음악에 반응하는 물의 결정사진을 찍어 세상에 발표함으로써 인류의 영적 의식 성장에 큰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그의 저서에서 물의 결정구조가 사람들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과 언어에 특정하게 반응함으로써 물이 의식을 가진 존재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긍정적인 기운을 받은 물은 아름다운 결정모양을 나타내고 부정적인 기운을 받은 물은 결정구조가 깨지고 흉한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는 말과 생각이 주변 사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데 대한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존재하는 만큼, 이 세상 만물은 인간의 생각과 말의 파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특히 사람의 인체는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물이 언어와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언어습관과 생각의 패턴을 긍정적으로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사람이 생각을 발하고 말을 하는 순간 그 사람의 신체를 이루는 물의 결정구조는 정확히 그것을 반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을 먼저 좋게 하지 않고서는 남을 좋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먼저 해치지 않고서는 남을 해치지 못합니다. 말하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몸의 물이 먼저 반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링컨이 말한 “사람이 40세 이후의 관상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의 의미가 이 뜻입니다. 몸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수의 모델을 찾아다닌 끝에 결혼을 앞두고 기쁨과 사랑에 빠진 한 청년을 발견하고 그를 예수의 모델로 선정하여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배신자 유다의 초상을 그리기 위하여 일그러진 자화상의 어둡고 암울한 모습의 모델을 발견하고 그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로부터 뜻밖의 사실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그 옛날 예수의 모델을 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이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이 육체의 형상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청년에서 일그러진 배신자의 모습으로 변한 그는 자신의 내면의 신성(神性)을 배신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항상 맑고 밝은 긍정적인 사고와 언어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주변 환경은 정확히 자기 자신의 의식수준을 반영하는 법입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말은 마음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덕을 잘 가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훈회’에서 언덕을 잘 가지기에 앞서 먼저 첫 번째로 ‘마음을 속이지 말라’, 즉 인간 본연의 순수한 양심을 회복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말을 함에 있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부터 우러나온 말은 힘이 있지만 거짓된 말은 모래 위에서 누각을 쌓는 것과 같아서 힘이 없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있는 말로 일을 꾸미면 천하가 부수려 해도 못 부술 것이요, 없는 말로 일을 꾸미면 부서질 때는 여지가 없나니라.’ 하셨으니 무자기(無自欺)를 뜻하심이다” 3)
라고 하셨습니다. 거짓말로 일을 도모하면 일시적으로 성공이 있는 듯이 보여도 이내 무너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상제님께서 “말함에 있어서 언제나 더듬거리기를 바라라.”(행록 3장 49절)고 하셨듯이 말할 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되 말을 하기에 앞서 한 번 더 생각하여 신중을 기하여야 합니다. 말은 한번 뱉으면 엎질러진 물과 같아서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인세를 살아가면서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덕 중에 큰 것이 언덕을 잘 가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를 잘 실천하면 말을 통해서 남을 잘 되게 하고자 하는 덕이 넘치는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곧 사회 사람들에게 처음 만난 사이라도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면서도 진실하게 한 마디 한 마디의 덕을 갖춘 말로써 대한다면 우리와 그들과의 관계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수도인은 인간 세상의 처세에서 부드러움을 귀히 여기고 부디 언덕을 잘 가져야 하겠습니다.
1)『대순진리회요람』, p.19.
2) 나쁘게 생각하여 장차 제거하고자 하면 풀이 아닌 것이 없고 좋게 생각하여 취하고자 하면 모두가 꽃이니라.
3)『대순지침』,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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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심(一心)을 가지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심(一心)을 가지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기에 앞서 수도인은 왜 일심을 가져야 할까요? 『대순진리회요람』에는 신(信)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한 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辟)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差異)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期約)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限度)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신(信)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하고 또 정성하여 기대한 바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이며 이는 일심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상제님의 대순(大巡)하신 진리를 믿고 따르기로 했다면 그 마음에 흔들림이나 변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상제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다면 이해타산이나 의심에 의해 마음이 동요되어서는 안 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진리를 지키려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전경』 교법 3장 17절의 최풍헌의 고사에서 최풍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끝까지 그를 믿은 류훈장과 같은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경』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길 “이것이 남조선 뱃길이니라. 혈식 천추 도덕 군자가 배를 몰고 전 명숙(全明淑)이 도사공이 되니라. 그 군자신(君子神)이 천추 혈식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음은 모두 일심에 있나니라. 그러므로 일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예시 50절)고 하셨듯이 일심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인 도통을 이루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조건입니다.
그러면 일심을 가지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의 흔들림이나 변심은 확고한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도에 대한 믿음은 대순진리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리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공부ㆍ기도/수련ㆍ교화ㆍ포덕ㆍ종단의 행사 및 공사 등을 받드는 일에 성ㆍ경ㆍ신을 다하여야 하며, 이런 과정에서 일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수도의 목적인 도통(道通)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추진하는 일의 성공을 위해서 일심을 가져야 하지만 일심을 간직하는 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상제님께서도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교법 2장 6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심을 간직하기가 죽기보다도 어렵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일심을 갖기가 어려운 것이므로 우리는 마음을 닦는 수도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수심(修心)이 되고 연성(煉性)이 되어진 만큼 일심을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은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수도생활입니다.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기도ㆍ수련입니다. 『전경』에 “오는 잠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외우라.”(교운 1장 60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공부는 잠 안자는 공부입니다. 오는 잠을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면 정혼이 굳게 뭉치게 되므로 태을주의 주력(呪力)이 쌓이면 예전보다는 훨씬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마음의 힘을 얻기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ㆍ수련의 본질은 늘 상제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영시(永侍)의 정신을 모아 단전에 연마하여 자나 깨나 잊지 않고 상제님께 정성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상제님을 성ㆍ경ㆍ신으로 받드는 일심입니다. 상제님을 모시는 정신을 기도ㆍ수련을 할 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 속에서 움직일 때나, 정지할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起居動靜坐臥]에 늘 잊지 않고 생활하는 것이 기도를 모시는 올바른 정신입니다.
우리 도에서 외수들은 도에서 하는 작업이 공부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외수들은 작업을 통하여 일심에 이르는 정신력을 배양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일에서부터 망치로 못을 하나 박는 일에도 정신이 집중되어 심신(心身)의 일체를 이루지 못하면 능숙하게 일을 하지 못합니다. 작업을 오래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서툴지만 차츰 일에 익숙해지고 일에 익숙해지는 만큼 마음의 힘도 크게 길러지는 것입니다.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은 포덕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포덕에 대하여 도전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훈시하셨습니다. “우리의 수도는 포덕에서 시작됩니다. 포덕을 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형태의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겪는 고통(苦痛)과 인내(忍耐)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연성(煉性)이 되는 것입니다. 주문만을 많이 읽고 마음만을 닦는다고 소원(所願)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포덕을 통해 나 자신이 연성(煉性) 되고 연질(煉質)이 되어야 운수를 받게 되며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1)
“그리고 포덕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통일(精神通一)이 되어 영(靈)이 맑아져야 합니다. 자나 깨나 항상 한 마음 한뜻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인의 포덕하는 정신입니다.” 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포덕을 하기 위해서는 정신통일이 되어야 하므로 포덕하는 과정 역시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되는 것입니다.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교화 역시 중요합니다. 모든 기회를 통하여 교화를 듣고 대순진리에 대한 자각을 높이는 것이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그리고 수도를 통하여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교화하는 것 또한 나의 일심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수도에 힘쓰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교화에 힘쓰는 과정이 곧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이 될 것입니다.
도전님께서는 “포덕ㆍ교화ㆍ수도 및 모든 일이 성ㆍ경ㆍ신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시며, “성ㆍ경ㆍ신으로 해원상생을 이루며 생사판단도 결정되는 것이다.” 3) 라고 하셨습니다.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 역시 성ㆍ경ㆍ신을 떠나서 달리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어떤 일을 대하든 진심으로 성ㆍ경ㆍ신을 지극히 하는 것이 일심을 간직하기 위한 일상의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1)《대순회보》, 45호, 「도전님 훈시」
2) 상동.
3)『대순지침』,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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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ㆍ경ㆍ신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세요.
우리 도(道)의 교리체계는 종지(宗旨), 신조(信條), 목적(目的)으로 구성됩니다. 그 중 신조는 신앙에 관한 진리를 실천적 방법으로 다루고 있으며 사강령(四綱領)과 삼요체(三要諦)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삼요체인 성(誠)․경(敬)․신(信)은 수도인의 생활에서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지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성은 자신의 양심을 속임[欺心]이 없어야 하고 경은 예절을 바르게 행하는 것이며 신은 의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고, 성․경․신으로 해원상생을 이루며 생사판단도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이처럼 삼요체는 수행에서 반드시 이해하여야 하는 세 가지의 핵심 요결입니다.
‘성(誠)’이란 정성을 뜻합니다. 마음은 자신의 몸을 주관하며 전체를 통솔(統率) 이용하여서 몸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은 오직 마음에 있습니다. 성은 항상 끊임없이 조밀하고 틈과 쉼이 없이 오직 부족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2) 도전님께서 “참된 정성이 있는 곳에 상제님의 하감(下鑑)하심이 있는 것이며, 천지신명의 보살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라고 하셨듯이 수도 생활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대순지침』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4)
(가) 성(誠)은 사람의 정․기․신(精․氣․神)의 합일의 진성(眞誠)이다.
(나) 천도의 운행이 차착(差錯)이 없으므로 남이 모름에 괘의치 말아야 한다.
(다) 불일이이(不一以二)의 본심인 인선(仁善)의 자성(自誠)이 도성(道誠)의 정석(定石)이 되므로 성이 아니면 만물도 존재하지 못한다.
(라) 전경에 “성을 지극히 하라”하셨으니 성의 소귀(所貴)함을 깨달아 봉행하여야 한다.
(마) 성은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이 한결같이 상제님을 받드는 일이다.
이를 통해 성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성은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이 한결같이 상제님을 받드는 일입니다. 이는 성의 보배로운 소중함을 깨달아 상제님을 지극히 받든다는 뜻입니다. 둘째, 성은 남이 모르는 곳에서도 극진하게 행하는 참된 정성입니다. 천도의 운행은 어그러져서 순서가 틀리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정성은 만물을 존재하게 합니다. 특히 참된 정성은 상대방의 간여도 증감도 견제도 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의 심정(心定)한 바에 따라 이루어지며, 정성으로 이루어 놓은 자신의 성탑(誠塔)은 상대방이 무너뜨린다 해서 무너지지 않고 신명 또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5)
셋째, 성은 사람의 정․기․신(精․氣․神)의 합일의 진성(眞誠)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 몸, 정신이 합일된 참된 정성을 뜻합니다. 수도 생활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정성이 중요하며 가면 가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성이란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가식이 없는 참된 정성으로써 자신과 상대방에게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경(敬)’이란 공경을 뜻합니다. 경은 심신(心身)의 움직임을 받아 일신상(一身上) 예의에 알맞게 행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6)
여기서 경의 의미는 예의에 입각한 몸가짐을 가리킵니다. 곧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신명과 인간에게 예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대순지침』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
(가) 모든 일이 내심의 소정(所定)에 따라 몸으로 표현되는 법이다.
(나)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먹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데, 옳은 일도 마음에 두지 않으면 바로 행하지 못한다(有其心 則有之 無其心 則無之).” 하였으니, 도인들은 대월상제(對越上帝)의 영시(永侍)의 정신을 권권복응(拳拳服膺)하여야 한다.
(다) 지성봉축(至誠奉祝)에 변함이 없고 양면이 없어야 경이라 하는 것이다.
(라) 경은 예의범절을 갖추어 처신 처세하는 것이다.
윗글에서 나타난 경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경은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수도인이 항상 상제님을 가까이 영원토록 모시는 정신을 마음에 깊이 새겨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둘째, 경은 신명과 인간에 대해 예의범절을 갖추어 처신 처세하는 것입니다. 예란 인간으로서 항상 정도를 넘는 일이 없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일입니다. 8)
여기서 예의 대상은 인간뿐만 아니라 신명까지도 포함합니다. 셋째, 경은 자신의 마음이 움직일 때 도리에 벗어나지 않도록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수도인이 언제나 몸가짐을 삼가고 조심해서 도리에 맞게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신명의 수찰이 있어서 속임과 거짓이 없이 도인의 본분을 바로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이란 상제님에 대한 공경을 중심으로 신명과 인간에게 적합한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신(信)’이란 믿음을 뜻합니다. 신은 한마음을 정한 바엔 이익과 손해로써 바꾸어 고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하여 정성하여 기대한 바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입니다. 9)
즉 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도전님께서는 “무릇 성(誠)이라 하는 것은 정성을 뜻하며, 경(敬)이라 하는 것은 공경을 말함이며, 신(信)이라 하는 것은 믿음을 말하는 것으로, 믿음이 없으면 정성과 공경도 있을 수 없으며 안심(安心)ㆍ안신(安身)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10) 라고 하시며 삼요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대순지침』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1)
(가) 자각이 없으면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 전경에 “농부가 곡식 종자를 갈무리하여 두는 것은 토지를 믿는 까닭이라” 하셨으니 가식(假飾)이 없는 신앙의 본의(本意)에 위배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 백성이 국가를 믿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않는다면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될 것이다.
(라) 수도자가 믿음이 부실하면 결과적으로 난법난도자가 된다.
(마) 일관성의 믿음을 사실화하여 삼계삼법(三界三法)의 성․경․신으로 자아대성(自我大成)을 위한 작업이 신(信)인 것이다.
(바) 믿음은 의심 없는 굳은 신념인 것이다.
위의 내용으로 신의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신은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하여 신앙의 참된 뜻을 굳게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신은 상제님의 크신 뜻을 자각하여 대순진리를 굳게 믿는 마음입니다. 수도인이 천하창생을 살리려는 상제님의 크신 뜻을 깨달아 많은 사람에게 대순진리를 바르게 알리는 것입니다. 셋째, 신은 일관성의 믿음을 사실화하여 자신을 크게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믿음이란 마음에 의심이 없는 굳은 신념을 말하며 의심이 없어야 막히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이 부실하면 난신적자와 난법난도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이란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확고히 하는 것을 기반으로 자기 일을 신망(信望), 신임(信任), 신의(信義)로써 해나가는 일입니다.
삼요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상제님에 대한 신앙이 전제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신은 상제님을 신앙하며 상제님의 말씀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대순지침』에서 확인했듯이 삼요체는 한결같이 상제님을 받드는 일이고 상제님을 가까이 모시는 영시의 정신을 마음에 새겨 예의에 알맞게 행하는 것이며 신앙의 본의(本意)에 어김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성․경․신의 대상이 상제님을 시작으로 해서 천지 만물에 퍼져 나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땅을 믿기 때문이며 가을이 올 줄 알기 때문인 것처럼 모든 일은 상제님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2) 따라서 수도인은 항상 상제님을 받들고 마음에 변함이 없고 가식이 없는 진실한 성․경․신을 행해야 합니다.
수도인의 복록(福祿)과 수명(壽命)은 삼요체에 달려있습니다. 성․경․신은 복록 수명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서 복록과 수명은 모두 성․경․신을 얼마나 잘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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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종단에서 모시는 치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의례(儀禮)는 의식과 예법으로 형식을 갖춘 예의(禮儀)입니다. 우리 도(道)의 의례는 신앙의 대상이신 상제님을 중심으로 천지신명께 행하는 종교의례입니다. 이러한 의례의 효시(嚆矢)는 상제님의 대순진리에 감오득도(感悟得道) 하시고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신 도주님께서 종단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고 정유(1957)년 11월에 수도인의 각종 수도방법과 의식행사 및 준칙 등을 설법 시행하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주님의 유명(遺命)에 의한 종통계승을 받으신 도전님께서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신 후에 의례 시행을 계승하시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1) 이 글에서는 의례 중 도장에서 모시는 치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도장 치성은 종단의 정기적인 주요 기념일을 기리기 위하여 구천상제님과 옥황상제님, 서가여래를 비롯한 영대(靈臺)의 모든 천지신명과 조상 선령신께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예를 갖추는 의식입니다. 도전님께서는 치성을 드리는 일에 정성의 예를 갖추어야 하므로 사념(邪念)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따라서 치성은 상제님과 천지신명께 정성을 다하여 예를 갖추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장 치성의 장소는 영대입니다. 영대는 상제님의 영(靈)을 모셔놓은 가장 신성한 성전(聖殿)입니다. 그리고 진법주(眞法呪)의 15신위(神位)를 봉안한 신성한 공간입니다. 영대의 신위를 보면, 원위(元位)는 구천상제님(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ㆍ옥황상제님(趙聖玉皇上帝)ㆍ서가여래(釋迦如來)이시며, 재위(再位)는 명부시왕(冥府十王)ㆍ오악산왕(五嶽山王)ㆍ사해용왕(四海龍王)ㆍ사시토왕(四時土王)이시고, 삼위(三位)는 관성제군(關聖帝君)ㆍ칠성대제(七星大帝)ㆍ직선조(直先祖)ㆍ외선조(外先祖)이시며, 사위(四位)는 칠성사자(七星使者)ㆍ우직사자(右直使者)ㆍ좌직사자(左直使者)ㆍ명부사자(冥府使者)이십니다. 또한 48장의 신명을 모시고 있습니다. 특히 여주본부도장의 영대는 종단의 모든 치성 의식과 제반 행사 및 공부가 봉행되는 성전입니다.
도장 치성의 시간과 복장 및 식순을 보면, 치성 시간은 각 도장에서 축시(丑時, 1시∼3시 사이)에 모시며 절후치성은 각 절후가 드는 시각에 맞추어 모십니다. 복장은 전원이 한복을 착용합니다. 의식을 진행하는 순서는 ① 진설(陳設), ② 정렬(整列)ㆍ취석면수(取席俛首) ③ 분향(焚香) ④ 봉헌관배례(奉獻官拜禮) ⑤ 초헌정저(初獻正箸) ⑥ 일동배례(一同拜禮) ⑦ 아헌정저(亞獻正箸), 개기(開器)ㆍ삽시(揷匙) ⑧ 봉헌관배례(奉獻官拜禮) ⑨ 삼헌정저(三獻正箸) ⑩ 일동배례(一同拜禮) ⑪ 일동부복(一同俯伏), 고유(告諭) ⑫ 일동흥(一同興), 일동법좌(一同法坐) ⑬ 태을주(太乙呪), 기도주(祈禱呪), 도통주(道通呪) 각 4독(讀) ⑭ 퇴갱(退羹)ㆍ반개(半蓋) ⑮ 유식(侑食) ⑯ 하시(下匙)ㆍ합개(合蓋) ⑰ 일동배례(一同拜禮) ⑱ 예필(禮畢)ㆍ국궁(鞠躬), 퇴(退) 순으로 진행됩니다.
도장 치성의 종류는 상제님의 강세와 화천치성, 도주님의 탄강과 화천치성, 도주님 봉천명치성, 도주님 감오득도치성, 영대봉안치성, 명절치성(원단, 대보름, 중추절), 중양절치성, 절후치성[四立二至: 입춘, 입하, 하지, 입추, 입동, 동지] 등이 있습니다. 치성 일자는 음력으로 정하여 거행하고 절후치성은 양력으로 행합니다. 또한 치성을 모시고 다음 치성이 5일 안에 들면 모시지 않습니다. 도장에서 모시는 치성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원단치성(元旦致誠): 음력 1월 1일
새해를 맞아 음력 정월 초하룻날 모시는 치성입니다. 원단(元旦)이란 설날 아침이란 뜻으로 이날은 일 년의 첫날 아침이자 사시(巳時)의 시작으로 신성시되었습니다. 도장에서 모시는 원단 치성은 상제님과 천지신명께 감사드리고 새해의 화평과 평안을 기원하며 모시는 치성입니다.
대보름치성: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에 한 해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며 모시는 치성입니다. 정월 대보름은 설날, 추석날과 더불어 우리 겨레가 즐겨온 큰 명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자로는 상원(上元), 상원절(上元節), 원소(元宵), 원소절(元宵節)이라고 하며, 줄여서 대보름 혹은 대보름날이라 합니다. 이날은 도주님께서 선돌부인(상제님의 누이동생)으로부터 상제님의 봉서(封書)를 받으신 날이기도 합니다.
도주님 감오득도치성(道主任 感悟得道致誠): 음력 2월 10일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대순진리에 감오득도(感悟得道)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한 치성입니다. 정사(1917: 23세 시)년 2월 10일에 입산 공부하시던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대순진리에 감오득도하시고 종통계승의 계시(啓示)를 받으셨습니다. 도주님께서 을미(1895)년 12월 4일에 탄강하시어 15세에 봉천명(奉天命)하시고, 23세에 상제님의 대순진리에 감오득도하시는 것은 천부적인 종통계승의 신성한 연속성입니다.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대도(大道)의 참뜻을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종지(宗旨)로 밝히셨고, 도전님께서는 이 종지를 대순진리로 명명하셨습니다. 대순진리의 대순에는 삼계대순 개벽공사의 의미가 담겨 있고 상제님의 대도의 참뜻이 구현되어 있습니다.
도주님 화천치성(道主任 化天致誠): 음력 3월 6일
도주님께서 화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올리는 치성입니다. 상제님으로부터 천부적인 종통계승을 받으신 도주님께서는 50년 공부(工夫) 종필(終畢)의 과정을 마치신 무술(1958)년 음력 3월 6일(양력 4월 24일, 64세 시)에 도전님께 유명(遺命)으로 종통(宗統)을 전수하시고 화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도주님께서 50년 공부로 마련해 놓으신 진법(眞法)이 도전님께 이어지게 되었고, 도전님을 통하여 대순진리회가 창설된 것입니다. 도주님의 화천은 50년 공부를 통한 진법의 완성과 도전님께 종통이 계승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제님의 유지(遺志)가 도주님을 통하여 진법으로 완성되었고, 다시 도주님의 진법은 도전님을 통하여 유훈(遺訓)으로 수도인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도주님 봉천명치성(道主任 奉天命致誠): 음력 4월 28일
도주님께서 상제님으로부터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올리는 치성입니다. 기유(1909)년 음력 4월 28일은 창도주(創道主)이신 도주님께서 15세 시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 만주 봉천 지방으로 향하신 날입니다. 이날 도주님께서는 15진주(眞主)로서 상제님의 계시로 천명을 받들어 천부적인 종통을 계승하셨습니다. 그 후 9년간의 입산수도 중에 감오득도하시고 태을주로 본령합리(本領合理)를 이루어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셨습니다.
구천상제님 화천치성(九天上帝任 化天致誠): 음력 6월 24일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올리는 치성입니다. 기유(1909)년 음력 6월 24일은 인신(人身)으로 강세하신 상제님께서 40년간 순회 주환(巡回周環)하시며 천지공사(天地公事, 1901∼1909)를 마치시고 화천하신 날입니다. 상제님께서 행하신 천지공사로 인하여 이 세상은 수천 년간 쌓이고 맺힌 모든 원울이 풀리고 상극이 없는 도화낙원(道化樂園)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중추절치성(中秋節致誠): 음력 8월 15일
추석을 맞아 음력 8월 보름에 모시는 치성입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추석은 음력 8월 보름을 일컫는 것으로 중추절(仲秋節), 한가위, 가위, 혹은 가배(嘉俳)라고도 불렀습니다. 도장에서 모시는 중추절치성은 천지의 운행을 주관하시는 상제님과 천지신명께 감사드리며 한 해의 결실에 대해 조상님의 음덕에 감사함을 표시하는 치성입니다.
구천상제님 강세치성(九天上帝任 降世致誠): 음력 9월 19일
구천상제님께서 강세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올리는 치성입니다. 신미(1871)년 음력 9월 19일은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날입니다. 상제님께서는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으로서 삼계대권을 주재하시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상도를 잃은 천지도수를 정리하시고 후천의 무궁한 선경의 운로를 열어 지상천국을 건설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신(人身)으로 직접 내려오셨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금불에 임어하시어 30년간 머무르시면서 최제우(崔濟愚, 1824∼1864)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의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리셨으나 그가 유교의 전헌(典憲)을 넘어 대도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시고 신미(1871)년에 강세하셨습니다.
여주본부도장 영대봉안치성(驪州本部道場 靈臺奉安致誠): 음력 10월 25일
여주본부도장의 영대에 구천상제님의 진영을 봉안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올리는 치성입니다. 여주본부도장에서는 병인(1986)년 음력 10월 25일에 15진주(眞主)를 비롯한 천지신명을 영대에 봉안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치성을 모시고 있습니다. 영대는 도장에서 가장 신성한 성전으로, 종단의 모든 치성 의식과 제반 행사 및 공부가 봉행되는 곳입니다. 본전은 외부에서 볼 때는 3층이지만 내부적으로는 4층으로 된 한옥양식의 건물이며, 4층이 영대입니다. 도장에서 가장 안쪽에 있어 바로 앞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본전 내부에는 신선도, 사군자, 십장생, 춘하추동의 사계 등 선경세계의 모습을 담은 벽화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영대는 15신위와 48장의 신명을 모신 성전입니다.
도주님 탄강치성(道主任 誕降致誠): 음력 12월 4일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올리는 치성입니다. 을미(1895)년 음력 12월 4일은 상제님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날입니다. 도주님께서는 기유(1909)년 4월에 만주로 망명하시어 반일 구국운동에 활약하시다가 도력으로 구국제세 할 뜻을 정하시고 입산공부 중 상제님의 대순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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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자기가 도인의 옥조(玉條)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삼계대권을 주재하시는 상제님께서 천하를 대순하시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진멸지경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구제하여 영원한 화평(和平)이 있는 지상선경(地上仙境)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상선경을 마련하고자 하신 이러한 상제님의 의지는 도주님께 계승되었으며, 1925년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면서 선포하신 목적(目的)에 온전히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목적 가운데 수도의 근본인 ‘무자기(無自欺)’는 인간 본래의 청정(淸淨)한 양심에 관한 것으로 수도의 목적인 도통을 이루는 근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자기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고 거짓된 언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수도인이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양심(良心)을 간직하고 도리에 맞는 언행을 하는 것입니다. 도전님께서는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있는 말로 일을 꾸미면 천하가 부수려 해도 못 부술 것이요, 없는 말로 일을 꾸미면 부서질 때는 여지가 없나니라.’ 하셨으니 무자기(無自欺)를 뜻하심이다.” 1)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무자기의 의미는 마음속 천성 그대로의 양심을 되찾아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사심(私心)에 사로잡혀 상대방에게 도리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자기에 대해서는 훈회와 수칙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수칙 세 번째인 ‘무자기는 도인의 옥조(玉條) 2) 니, 양심을 속임과 혹세무민(惑世誣民) 3) 하는 언행과 비리괴려(非理乖戾) 4) 를 엄금함’에서는 무자기의 실천을 위해서 자신을 속이는 ‘양심을 속임’과 상대를 속이는 ‘혹세무민하는 언행’과 ‘비리괴려’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훈회 첫 번째인 ‘마음을 속이지 말라’에서도 확인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물욕에 의해 쉽게 사심에 사로잡혀 천품성인 양심을 속이고 도리에 어긋나는 언행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훈회에서는 모든 언어ㆍ행동ㆍ처사에서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회복하기에 전념해야 하며, 바르고 곧은 마음으로써 모든 죄를 근절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자기는 수도의 목적인 도통을 이루는 근본이 됩니다. 무자기를 근본으로 인간 본래의 맑고 깨끗한 본질로 되돌아가서 무욕청정(無慾淸淨)이 되었을 때 도통에 이르는 것입니다. 5)
『대순지침』에 “마음이 참되지 못하면 뜻이 참답지 못하고, 뜻이 참되지 못하면 행동이 참답지 못하고, 행동이 참되지 못하면 도통진경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心不誠 意不誠 意不誠 身不誠 身不誠 道不誠).” 6)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마음에서 뜻이 생기고, 뜻에 의해서 행동이 이루어지는데 마음이 참되어야 참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 도에서 수도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도통도 마음을 바로 해야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도전님께서는 「훈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자기(無自欺)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즉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을 행하게 되면 잘못된 일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척이 되어 나타나게 되며, 이 척이 자신의 앞길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통을 바라고 큰 운수를 보고 나아가는데, 도통과 운수를 바라기만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나 자신이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을 처리함에 있어 매사에 경위(經緯)가 바르게 서야 합니다. 사람도 경위가 바로 선 것을 인격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경위란 쉽게 말해서 도리입니다.7) 이 말씀은 무자기의 실천이 도통의 자리에 참여하는 바탕이 된다는 뜻입니다. 수도인이 무자기를 실천하지 못하여 자신과 상대에게 거짓을 행하게 되면 척이 되어 자신의 앞길을 막게 되고 결국 도통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도통은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아서 진실하고 정직한 인간의 본질을 회복했을 때 받게 되는 것입니다. 8)
그러므로 무자기는 도통을 하기 위한 가장 근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무자기가 수도인의 옥조(玉條)로 제시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도통은 수도인의 수도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바르게 수도한다는 것은 마음을 유리알과 같이 맑고 깨끗하게 닦아 일심(一心)이 되는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도통이 될 때 유(儒)ㆍ불(佛)ㆍ선(仙)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心身)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된다고 하시고, 9)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에게 임하여 마음에 먹줄을 겨누게 하고 사정의 감정을 번갯불에 붙이리라.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사곡을 행하는 자는 지기가 내릴 때에 심장이 터지고 뼈마디가 퉁겨지리라. 운수야 좋건만 목을 넘어가기가 어려우리라.”(교법 3장 24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도통이란 어느 누가 물품을 수수하듯이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각자가 마음을 바르게 닦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신명공판(神明公判)은 도통을 받는 자리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고 수도 과정에서 먼저 받게 됩니다.
무자기의 실천 여부는 신명의 수찰을 통해 판단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은 인간적인 도덕적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명과의 관계를 맺습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고 마음을 속이는 것은 신명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인은 항상 신명의 수찰이 있음을 깊이 새겨 속임과 거짓이 없이 도인의 도리를 지켜야 합니다. 10)
도전님께서 “우리가 수도한다는 것은 도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자기를 근본으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이 바로 천지신명을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11) 라고 하셨듯이 천지신명은 인간의 크고 작은 일을 살피고 있으므로 수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무자기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으며 거짓된 언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자기가 수도인의 옥조(玉條)가 되는 이유는 인간 본래의 청정(淸淨)한 본질인 양심을 찾는 방법으로 수도의 목적인 도통을 받기 위한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도한다는 것은 도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니 우리는 무자기를 근본으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수도인은 본래의 천성으로 돌아가 양심을 찾게 되고 욕심과 사심이 없어져 유리알같이 깨끗하고 맑은 마음이 됩니다. 모든 수도인은 자신의 도리를 다하며, 무자기를 바탕으로 수도에 온 정성과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1) 『대순지침』, p.24.
2) 옥조(玉條)란 매우 중요한 조목이나 규칙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출처는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극진미신(劇秦美新)』에 있는 “아름다운 법도[六律]와 도량형(度量衡), 금옥(金玉)과 같은 법률(法律), 신령스런 점괘, 선왕의 전적(典籍)들이 모두 피어나도다(懿律嘉量, 金科玉條, 神封靈兆, 古文畢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3)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
4) 도리에 어그러져 온당하지 않음.
5)『대순지침』, p.39 참조.
6)『대순지침』, p.76.
7)《대순회보》 12호, 「도전님 훈시」
8)『대순지침』, p.38 참조.
9) 교운 1장 41절 참조.
10)『대순지침』, p.42 참조;『대순지침』, p.39 참조.
11)《대순회보》 12호, 「도전님 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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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전경』에 요순의 도가 다시 나타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요순의 도가 다시 나타난다는 상제님의 말씀은 『전경』에 “류 찬명이 어느 날 상제를 모시고 있을 때 상제로부터 요ㆍ순(堯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전하는 도다.”(교운 1장 46절)라는 성구에 나옵니다. 요순의 도가 다시 나타난다는 의미는 요순시대의 덕치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것과 그것은 구천상제님에서 도주님으로 다시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계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옛적에 신성(神聖)이 입극(立極)하여 성ㆍ웅(聖雄)을 겸비해 정치와 교화를 통제 관장(統制管掌)하였으되 중고 이래로 성과 웅이 바탕을 달리하여 정치와 교화가 갈렸으므로 마침내 여러 가지로 분파되어 진법(眞法)을 보지 못하게 되었느니라. 이제 원시반본(原始返本)이 되어 군사위(君師位)가 한 갈래로 되리라.”(교법 3장 26절)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오는 시대에는 군사위가 한 갈래로 되는 진법이 회복됨으로써 정치와 교화가 통합되는 덕치(德治)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덕치는 요순의 도에 잘 나타납니다.
‘요순의 도’를 요임금과 순임금이 도로써 천하를 다스렸던 심법(心法)이라고 본다면, 그 심법은 오늘날 「서전서문(書傳序文)」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서전서문」에 의하면, 이제삼왕(二帝三王)의 정치(政治)는 도(道)에 근본을 두고, 그 도는 마음에 근본을 두니 그 마음을 얻은 즉, 도덕정치(道德政治)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악과 교화는 마음의 발(發)함이요, 온갖 제도와 문물은 마음의 드러남이요,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케 함은 마음을 미루어 확장하는 것이니, 참으로 마음의 덕이 크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을 간직하면 천하가 다스려지고, 이 마음을 잃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지니, 다스림과 어지러워짐의 나뉨은 이 마음을 간직하느냐 잃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요순의 도는 이처럼 마음의 덕과 도에 근본을 두고 백성을 다스린 심법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심법은 정일집중(精一執中)입니다. 정일집중은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의 준말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여 잃어버리기 쉬우니 정일하게 하여 그 중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근본을 둔 요순의 도는 일상(日常)에서 행하여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상도(常道)를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순의 도가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을 때에는 천자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가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나라에서 오륜이 반포되었고, 관리를 보내서 민정을 시찰하며 백성이 이를 잘 지키는 지 살피기도 하였습니다. 나라 차원에서 오륜을 장려하였고 무도함을 경계했던 것입니다. 천자는 하늘을 받들어 상제와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통치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관리에게 명하여 천기를 살펴 백성들이 농사의 때를 알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가급적 형벌은 삼가고 관용과 덕으로 용서했고 감화시켰습니다. 천자의 자리를 물려줄 때에도 서로 양보하고 사양하였습니다. 이러한 어진 임금 아래에서 백성들은 오륜을 잘 지켰고 태평성세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나 은나라 말기에 오면서 천자는 무도해지고 역성혁명에 의하여 주나라가 세워집니다. 주나라에 오면 은시대에 상제를 모시던 신(神) 중심의 국가에서 예(禮)를 중시하는 인문주의(人文主義)적 풍토의 국가로 바뀌게 됩니다. 주나라 말기에 오면 예가 무너지고 힘에 의한 통치시대가 됩니다. 이때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온갖 사상이 나와 갖가지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가(儒家)와 법가(法家)만이 위정자의 선택을 받아 전국시대의 통치 이념이 됩니다. 그러나 법가는 하나의 통치 논리로서 정권을 장악하는 술로서 작용할 뿐 도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유가는 요순시대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정치권에서부터 도가 아닌 힘과 권력에 의해 통치하는 시대로 넘어와서 돌이킬 수 있는 역량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공자와 맹자 같은 분이 되돌리려고 노력했으나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정치권에서부터 도(道)로써 정치하려 하지 않고 통치자는 권력의 맛에 취해 도덕보다는 힘에 의한 통치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부터 도를 멀리 하고 힘을 앞세우니 백성들 사이의 풍속도 점차 무도해져 갔습니다.
근ㆍ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서양문명은 물질에 치우쳐 신도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천도와 인사의 상도가 어겨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천ㆍ지ㆍ인 삼계가 진멸할 지경에 이른 이러한 때 신성ㆍ불ㆍ보살이 하소연으로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이신 상제님께서 인신으로 강세하시게 된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강세하시어 전무후무한 진리의 도를 선포하시고 9년간의 천지공사를 보심으로써 수천백 년간 쌓이고 맺힌 무수무진한 원울이 풀리고 지상선경의 운로가 펼쳐져 세상에는 ‘요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예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주님께서 구천상제님으로부터 계시로 종통을 계승하시고, 도전님께서 다시 유명으로 종통을 이어 받으셔서 창설하신 대순진리회에는 이러한 요순의 도의 속성으로 덕치사상이 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우리의 공부를 ‘치천하 공부’라고 하셨습니다.『전경』에 의하면 상제님께서 “내가 평천하(平天下)할 터이니 너희들은 치천하(治天下)하라. 치천하는 50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 하라.”(행록 3장 31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포덕(布德)이 곧 치천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덕을 펼쳐 천하를 다스리는 덕치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포덕으로써 인도(人道)를 선도하여 윤리도덕의 상도를 바로 이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1)
요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상제님과 도주님 그리고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계승을 상징한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요순의 도는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에서도 드러납니다. 요임금은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하지 않고, 혈통과는 무관한 덕이 있는 순에게 전하였습니다. 상제님의 천부적인 종통이 혈식이나 친자 종도가 아닌 도주님께 전수된 것이 이와 유사합니다.
도주님께서 신유(1921)년 국화 꽃이 반개하는 9월 5일에 상제님의 성골을 모셔오고 도주님께서 15세 시 봉천명하신 수리와 같은 15일이 지나니 상제님께서 구제제민하시고자 강세하신 날이 되었습니다. 이날 통사동 재실에서 상제님 강세치성을 올린 후 “시시묵송 공산리 야야한청 잠실중 분명조화 성공일 요순우왕일체동(時時黙誦空山裡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 2) 이라는 칠언절구의 시를 읊어 주셨습니다. 요순의 도가 전승되는 과정을 비유하여 ‘요순우왕일체동(堯舜禹王一切同)’이라 하신 말씀 속에 천부적 종통계승의 상징이 담겨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요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는 성인의 심법을 닦은 사람들이 천하를 다스리는 이상세계가 펼쳐진다는 것과 상제님으로부터 도주님께 계시로 종통이 계승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면 큰 과차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도는 해원상생 대도입니다. 『대순진리회요람』에 “항상 남을 사랑하고 어진 마음을 가져 온공ㆍ양순ㆍ겸손ㆍ사양의 덕으로써 남을 대할 때 척을 짓지 않도록 하라.”3) 하였고, 도전님께서는 “인류의 평화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인보상조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이해하라.”4)하셨습니다. 요순의 시대가 다시 나오는 새로운 시대에는 천심(天心)을 가진 자만 살아남는 것이니, 해원상생 대도의 진리를 면이수지(勉而修之)하고 성지우성(誠之又誠)하여 수도의 완성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1)『대순지침』, p.19 참조.
2) 교운 2장 23절 참조.
3)『대순진리회요람』, p.20.
4)『대순지침』,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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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불고가사(不顧家事)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불고가사’는 『전경』 공사 3장 39절의 “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爲天下者不顧家事”라는 성구에 나옵니다. ‘위천하자불고가사(爲天下者不顧家事)’를 직역하면 ‘천하를 위해 일하는 자는 가사를 돌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직역에 따른 표면적인 이해는 수도인들에게 가정을 등한시 하게 하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 대해 도전님께서 “위천하자 불고가사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을 다 내 가족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이다.”1) 라고 일러주신 바 있습니다. 내 가정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실제로 가정을 방치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을 이웃과 사회, 더 나아가 전체 인류에 확장하여 남을 언제나 내 가족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불고가사’의 진정한 의미는 내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듯이 세상 사람들을 다 자기 가족처럼 여겨 천하를 화평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수도를 위해 출가(出家)했습니다. 반면에 우리 도는 미륵의 도, 어른의 도로서 절대 가정을 멀리하지 않습니다. 불가에 계율이 있듯이, 우리 도에는 훈회(訓誨)와 수칙(守則)이 있습니다. 이 수칙에 있는 가정화목 관련 내용을 볼 때, 우리 수도에서 가정은 반드시 지키고 보살펴야 할 대상입니다.
도전님께서 “가정화목ㆍ사회화합ㆍ인류화평으로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대순진리이다.”2) 라고 하셨습니다.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천하에 펴는 일은 가정과 이웃을 떠난 막연한 이상이 아닙니다. 가정화목이 곧 선경(仙境)의 초입문이요, 이웃화합이 선경의 토대인 것입니다. 도전님께서 “가화가 있는 곳에서 공(功)을 거둘 수 있으니 가정화합에 대한 교화를 먼저 하라.” 3)하셨고, 『도헌』의 도인의 권리 의무에서 제9조는 “도인은 가정에서 자기 위치의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순진리회 수도인은 도를 닦는다고 하면서 가족을 등지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도(道)로 인하여 가정에 불화가 생긴 경우에는 믿음을 일시 중지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도전님께서는 “도를 믿은 후부터 가정의 불화가 야기되었을 경우 가정화합에 전력을 기울이며, 가정화합이 불가능할 시는 믿음을 중지(中止)하도록 권고하여 가정의 평온을 회복시켜야 한다.” 4)
라고 하셨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도에 대한 믿음을 반대하는 이유는 우리 도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운한 마음을 품거나 척을 짓지 말고 잘 이해시켜 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상제님께서 이 세상에 강세하신 이유는 세상에 충(忠)이 없고 효(孝)가 없으며, 열(烈)이 없어 천하가 다 병이 들었기 때문에 해원상생ㆍ보은상생의 법리로 세상을 광제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강륜을 세우는 것이 무도(無道)한 세상을 건지는 처방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전님께서는 “수도란 인륜을 바로 행하고 도덕을 밝혀나가는 일”5)
이라 하셨습니다.
인륜도덕을 숭상하는 것이 우리 도의 강령인데 “불고가사”를 가사를 돌보지 못한다는 의미로만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도전님께서 도를 전할 때는 “모든 사람들을 가족과 같이 사랑하고 아껴서 마음으로 따르도록 하여 포덕하라.” 6)
고 하셨습니다. 도전님의 이 말씀에서 ‘불고가사’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가족과 같이 사랑하고 존경하며 인륜을 행하라는 뜻임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위천하자 불고가사’는 내 가족을 소중히 여기듯이 ‘남의 가족과 세상 사람들을 다 자기 가족처럼 아끼라.’는 것이며, 상제님 받드는 정성과 노력에 일심을 다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 ⟪대순회보⟫ 118호 「청계탑」 참조
2)『대순지침』, p.20.
3)『대순지침』, p.29.
4)『대순지침』, p.30.
5)『대순지침』, p.37.
6)『대순지침』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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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ㆍ후각 관계를 개선하고 잘 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상제님께서 칠산(七山) 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도 먹을 사람을 정하여 놓고 그물에 들며, 농사도 먹을 사람을 정하여 놓고 맺게 되며 심지어는 물 한 그릇조차도 연고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만사 모든 게 인연(因緣)입니다. 우리의 선ㆍ후각(先ㆍ後覺) 간(間)의 만남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선ㆍ후각의 만남은 상제님께서“삼생(三生)의 인연이 있어야 나를 쫓으리라.” 교법 1장 4절 참조.
고 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는‘무릇 뜻있고 연운(緣運)있는 모든 중생은 해원상생(解冤相生)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지향하는 대순진리회에 동귀(同歸)함을 목적으로 이에 취지(趣旨)를 선포하는 바이다.’2)
란 글에서‘동귀(귀착점이 같아 함께 돌아감)’속에 담겨진 심오(深奧)한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도문소자(道門小子)는 상제님ㆍ도주님ㆍ도전님 세 분을 연원(淵源)으로 하여 선ㆍ후각의 연운(緣運)관계로 만났습니다. 이는 해원상생의 진리로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사람 사이의 관계인 연운에 대해서는 『도헌(道憲)』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우선 제14조에 의하면,“도인은 사사상전(師師相傳)에 의(依)하여 연운(緣運)의 상종관계(相從關係)가 성립(成立)된다.”라고 했고, 또 제15조에,“도인(道人)은 전도인(傳道人)의 은의(恩義)를 영수불망(永受不忘)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인연에 대해 우리는 바르고 명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선천(先天)의 수천 백 년간 상극(相克)으로 쌓이고 쌓여 있던 무수한 막힘과 대립이 소용돌이치며 나타나는 난법(亂法)의 사회 현상과 동시에 후천(後天)의 상생(相生)의 진법(眞法)이 세워지는 해원(解冤)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남녀의 분별을 틔워 제각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모든 것을 다 풀어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겨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는‘나는 나, 너는 너’라는 개인ㆍ이기주의의의 상극(相克)과‘우리’라는 상생(相生)의 두 흐름이 섞여 있습니다.
개인ㆍ이기주의의 사회현상은 상극으로‘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무도병(無道病)의 병리현상입니다. 대순진리회는 바로 이러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창설되었고, 그 핵심 사상은 상생(相生)의 법리로‘우리’를 지향하며,‘너와 나’의 조화와 화합 즉 융화단결(融和團結)을 생명으로 하는 종단(宗團)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 종단은 기존의 종교와는 달리 체계(體系)가 있습니다. 이 체계는 선감ㆍ교감ㆍ보정, 차선감ㆍ교령ㆍ정무, 선사ㆍ교정ㆍ정리, 선무ㆍ교무 및 일반 도인으로 구성됩니다.3)
이 체계는 조직체제(組織體制)로서 포덕한 업적에 따른 연운에 근거하며 이 체계로 상하(上下)ㆍ상호(相互)의 인간관계가 자연히 형성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할 일과 도리가 있고 이는 『도헌(道憲)』에 상세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해원상생을 종교적 법리(法理)로 하여 포덕ㆍ교화ㆍ수도의 사업을 합니다. 이로써 정신개벽 인간개조로 인간완성을 이룸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인도를 바르게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이 사업의 핵심은 해원상생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것이며, 이는 한 마디로‘남에게 척(慼)을 짓지 말고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척이란 나에 대한 남의 원한이고 척신(慼神)이란 나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신을 의미합니다. 수도는 한마디로 척신을 푸는 것입니다. 척신은 나의 마음이나 몸으로 발동하지만, 특히 선각이나 후각 또는 주변 사람을 통해 발동하여 보복할 수도 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럴 경우에는 상대방이 괜히 나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는데 이때는 상대방과 맞서기보다는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지 않은가 하고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전경』에서 그 실례를 보게 되면, 김형렬이 출타하였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예수교 신자인 김중구에게 혹독하게 능욕을 당하고 돌아와 상제님께 사실을 아뢰니, 상제님께서“청수를 떠 놓고 네 허물을 살펴 뉘우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김중구가 사경을 헤매였다는 사정을 듣고 재차 충고하시면서“금후에 그런 일이 있거든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먼저 네 몸을 살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4)
우리가 수도하며 실제 이런 상황에 처하면 상대방에 대한 분노나 원망이 앞서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상제님께서는 상대방에 대한 원망에 앞서 먼저 나에게서 찾을 때 그 허물이 풀린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처럼 상대방이 자꾸 싫어하고 방해할 경우 전생에 내가 지은 죄가 척이 되어 다른 사람을 통하여 나에게 갚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이럴 경우 내가 똑같이 상대하면 그 사람은 괜찮지만, 나 자신이 잘못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누구 하나 척 없는 사람이 없고, 수도하다보면 여러 장애물이 자꾸 닥치게 됩니다. 대운(大運)을 받는데 어찌 마(魔)가 없겠습니까? 남에게 눈 한 번만 흘겨도 척이 맺히니, 척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전생에 나의 척신이 그렇게 함을 알고 오히려 고마워하고 이를 통해 뉘우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모든 게 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척이 풀어지게 되고 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상생은 대화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선ㆍ후각 간에 조금이라도 의심과 거리낌이 있다면 기탄없이 대화를 나누고 의논하여 풀어야 합니다. 이로 인해 걸림과 막힘이 없어져 서로가 화합하여 하나로 되는 게 해원상생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현재 선ㆍ후각의 관계가‘나는 나, 너는 너’라면 상대방을 탓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해원상생의 진리를 바로 알고 실천하고 있는가? 상제님께서는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이 다 나에게 있다 하셨고, 도전님께서도 수도를 잘하고 잘못함은 자의(自意)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ㆍ후각이 서로 막히고 벽이 있는데 어찌 삼계(三界)에 투명(透明)하고 우주 삼라만상의 곡진이해(曲盡理解)에 무소불능(無所不能)한 한마음이 되겠습니까?
도주님께서는“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今不聞古不聞之道也)라 믿고 닦기가 어려우니라.” 5)
라고 하셨습니다. 전도인(傳道人)이 있어 도를 만났고 상제님과 삼생의 인연으로 도문소자가 되었는데 이보다 더 소중한 인연이 어디 있겠습니까? 진실한 도인이라면 『도헌(道憲)』 제15조의“도인(道人)은 전도인(傳道人)의 은의(恩義)를 영수불망(永受不忘)한다.”는 조항을 가슴에 새겨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모지정(慈母之情)과 은사지의(恩師之義)의 통심정으로 선ㆍ후각이 하나되어 지상천국건설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선ㆍ후각이 관계를 개선하고 잘 통하여 하나되는 그 첩경(捷徑)은 바로 나부터‘해원상생의 생활화(生活化)’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겠습니다.
1) 교법 1장 4절 참조.
2)『대순진리회요람』, p.9.
3)『도헌(道憲)』⌜제6장 포정원(布政院)」과『대순지침』, p.63 참조.
4) 교법 2장 28절 참조.
5) 교운 2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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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도장수호에 대한 의미와 수호를 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도장수호(道場守護)는 도장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도전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훈시하셨습니다.
안심 안신하고 수도에 임하기 위해 우리들은 도장을 수호하고 있습니다. 수호를 하는 목적은 도인들의 수도ㆍ공부에 만전을 기하는 데 있습니다.『대순회보』35호, p.2.
상제님께서 “이제 먼저 난법(亂法)을 세우고 그 후에 진법(眞法)을 내리나니 모든 일을 풀어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기노니 범사에 마음을 바로하라.”(교법 3장 24절)라고 하셨습니다. 난법과 진법이 혼재하는 시대의 특징은 불확실ㆍ불안ㆍ불신(不確實ㆍ不安ㆍ不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슬기롭게 수도하려면 무엇보다도 도장수호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먼저 도장수호의 의미를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다음으로 도장수호를 서는 이유를 성(誠) 날의 의미와 관련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도장을 수호하는 의미는 첫째, 도장은 신성(神聖)한 성역(聖域)으로 이러한 공간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마치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청와대를 지키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경호원들은 대통령과 청와대를 지키지만, 우리는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 그리고 천지신명을 모신 도장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도장수호가 철저하면 그 누구도 도장을 위해(危害)할 수 없습니다.
둘째, 시학ㆍ시법의 공부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주본부도장은 시학ㆍ시법의 공부가 항상 돌아가고 있습니다. 도전님께서 늘 강조하신 바와 같이 이 공부에 우리의 운수와 후천선경 오만 년이 달려 있고, 이 공부의 영향이 군생만물에 미치니 도인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법방(法方), 즉 진법(眞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는 도전님께서 가르쳐주셨던 모든 것을 그대로 행함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시학ㆍ시법의 공부를 비롯하여 주문 및 기도ㆍ치성 시 의례 등 모든 게 포함됩니다. 이는 누가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고치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전님께서 있는 법을 고치고 없는 법을 만드는 것이 ‘난법난도(亂法亂道)’라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도장수호하는 이유를 성(誠) 날의 의미와 관련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성 날은 월중 대행사(大行事)로서 한 달간 방면도인들의 심신합일(心身合一)한 정성을 상제님 전에 올리는 날입니다. 이날 임원들은 방면 도인을 대표하여 성금(誠金)을 모시고 여주 본부도장으로 옵니다. 본부 성날 유시(酉時)에 임원들은 영대(靈臺)에 올라가 상제님께 봉심(奉心)을 모시게 되는데 이를 성일(誠日)의 참배(參拜)라고 합니다. 임원들이 한 달 동안의 방면 사업을 상제님께 상고(上告)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본부성 날부터 나갈 때까지 보통 1주일 전후(前後)였는데 이때 진리토론회, 치성, 훈시, 작업 등이 있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임원이 성(誠) 때 도장에 머무는 것은 방면의 많은 도인을 대표해서 있기 때문에 참으로 중요하고 이는 공무(公務)라고 하셨습니다. 임원들은 시학원ㆍ시법원ㆍ정심원을 비롯하여 정각원과 임원실 및 대순회관까지 다 숙소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도장 수호였습니다. 도전님께서는 특히 시학원ㆍ시법원ㆍ정심원은 영대(靈臺)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수도인이 덕화선양을 함에 있어서는 다 같지만, 특히 상급임원들은 성(誠)ㆍ경(敬)ㆍ신(信)을 요체(要諦)로 위로 상제님을 받들고, 아래로는 앞의 수도인들을 잘 이끌고 가르쳐 도통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책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급임원은 도장수호에 정성을 다해야 하며 앞의 수도인들과 자신의 운수를 생각한다면 생명을 바쳐도 부족하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상급임원이 도장수호를 할 때 자연히 그 기운은 방면에 가게 되므로 내 마음과 몸을 항상 올바르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은 모든 것이 급속히 변해가고 있고 우리 종단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도장수호를 철저히 하고 해원상생ㆍ보은상생의 종교적 법리로 끊임없이 혁신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도인이 융화단결하여 종단의 과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도장수호는 신성한 도장을 지키고, 유일무이한 삼계의 진법을 사수하며, 생명보다 소중한 시학ㆍ시법공부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모든 수도인이 안심ㆍ안신하고 수도할 수 있는 것은 도장수호에 달려 있으므로 성ㆍ경ㆍ신을 다하고, 도장수호에 담긴 그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는 도장수호를 더욱 철저히 하고 도통을 받을 수 있는 참된 도문소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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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학(侍學)ㆍ시법(侍法)공부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수도하는 목적과 우리 도에서 실행하고 있는 공부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되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가 대순진리를 수도하는 목적은 개인적으로는 수도의 완성인 도통을 이루고 종단 전체로는 상제님의 유지와 도주님의 유법을 받들어 지상신선을 실현하며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입니다.
2. 수도의 목적은 한마디로 도통에 있습니다. 『대순지침』에 의하면 도통진경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은 첫째, 상제님 말씀을 언행이 일치되게 생활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심기(心氣)를 바르게 하고 의리(義理)를 세우고 심령(心靈)을 구하여 상제님 임의(任意)에 맡기는 것이며, 셋째는 훈회와 수칙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유가에서도 도문학(道問學)과 존덕성(尊德性) 1)이 있고, 불가에서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2)가 있습니다. 도문학과 점수에 해당하는 것이 상제님 말씀을 언행이 일치되게 생활화하는 것이라면 존덕성과 돈오에 해당하는 것은 모든 것을 상제님의 임의에 맡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상제님을 믿고 도를 닦아 나가는 한 모든 것은 다 잘될 것이라는 도적(道的) 낙관주의를 가지고 모든 것을 상제님의 임의에 맡기는 마음의 경지가 바로 도통진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수도의 목적은 도통이며, 도통의 조건은 역시 수도입니다. 수도 없이 도통은 없는 것입니다. 수도를 한다고 해도 올바른 수도법방, 즉 진법(陳法)이 아니고서는 도통을 할 수 없습니다. 수도 없이 도통이 없고 법방이 없는 수도가 없으며, 진법이 없는 도통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도에는 진법을 만나고, 그 법방을 닦아나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4. 우리 도의 수도법방은 도주님께서 ‘50년 공부종필’로 마련하신 창생을 광제하고 삼계를 광구할 천상천하의 유일무이한 진법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신성ㆍ불ㆍ보살들의 하소연으로 인세에 대강하시어 천하를 대순하시고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대순진리에 의한 종교적 법리로 인간을 개조하면 정치적 보국안민과 사회적 지상천국이 자연히 실현되어 창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전대미증유의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시고 그에 수반된 삼계공사를 행하셨습니다. 3)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으로부터 계시(啓示)로써 천부적 종통을 계승하시어 상제님의 대순하신 유지(遺志)를 받들고 50년 동안의 각골정려(刻骨精勵)하신 공부 끝에 전무후무한 삼계의 진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로써 수도인들이 상제님께서 전하신 상생대도를 어떻게 믿고 배우며, 닦고 행할 것인지 하는 수도의 좌표이자 도통완성을 위한 확고한 담보가 마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도전님께서는 도주님으로부터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하시고 상제님의 유지와 도주님의 유법을 구현하시어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시고 도장을 짓고 도인을 육성하셨으며 기본사업과 3대 중요사업을 통하여 대도(大道)를 현창하셨습니다. 이러한 천부적 종통계승을 연원(淵源)이라 하며, 이 연원이 대순진리의 근본입니다. 이 연원으로부터 벗어난 수도는 당연히 진법수도가 될 수 없습니다.
5. 수도는 몸과 마음을 침착하고 잠심(潛心)하여 상제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정신을 모아 단전에 연마하며 영통(靈通)의 통일을 목적으로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일념(一念)을 스스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잊지 않고 지성(至誠)으로 소정의 주문을 봉송하는 것으로 공부(工夫)와 수련(修鍊)과 평일기도와 주일기도로 구분합니다. 4)
여기서 공부는 일정한 장소에서 지정된 방법으로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주문을 송독하는 것으로 도전님께서 정해주신 일정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하는 것은 진법공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법공부는 여주본부도장에서 행하여지는 것만이 공부이지 다른 곳에서 그 누가 공부를 흉내 낸다고 해도 그것은 가도(假道)요 가법(假法)일 뿐입니다.
현재 여주본부도장에서 실행되고 있는 시학ㆍ시법공부는 수도법방 중에서도 도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학시법공부가 도주님의 50년 공부종필의 결정체이며 삼계광구의 유일한 진법입니다. 도전님께서는 평소에 우리가 운수를 받는 것이나 후천선경 오만 년이 시학ㆍ시법공부에 달렸다 하시며, 이 공부의 영향이 군생만물에 미치니 도인의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5.1. 우리가 도장을 수호하는 근본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도장(道場)은 정결(淨潔)하고 신성(神聖)한 곳입니다. 양위 상제(兩位上帝)님을 봉안하고 천지신명(天地神明)이 가득한 신성한 성지(聖地)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수도ㆍ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시며, “안심(安心)ㆍ안신(安身)하고 수도에 임하기 위해 우리는 도장을 수호(守護)하고 있습니다. 수호하는 목적은 도인들의 수도ㆍ공부에 만전(萬全)을 기하는 데 있습니다.” 5)
라고 훈시하셨습니다. 도전님께서 훈시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도장에서 수호를 서는 이유는 단순히 도장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서 도주님의 50년 공부종필의 결정체인 진법을 수호하고 도인의 생명보다 소중한 시학ㆍ시법공부에 만전을 기하여 수도의 완성을 이루는 데 있는 것입니다.
5.2. 일찍이 공부의 중요성은 상제님께서도 강조하신 바가 있습니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시며 부안 지방의 신명을 호출하여도 응하지 않아 사정을 알아보시고자 부득히 그 지방에 가서 보시니 상제님의 종도 중 한 사람인 신원일이 공부할 때 그 지방신들이 호위하여 떠나지 못하였던 까닭이라 하시며, 이런 일을 볼진대 공부함을 어찌 등한이 하겠는냐고 하셨습니다. 6)
신명이 공부하는 인간을 호위할 때는 상제님의 명에 응하지 않아도 명분이 설만큼 공부는 중요한 것입니다.
5.2.1.1.1.1. 또한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자(孔子)는 七十二명만 통예시켰고 석가는 五백명을 통케 하였으나 도통을 얻지 못한 자는 다 원을 품었도다. 나는 마음을 닦은 바에 따라 누구에게나 마음을 밝혀주리니 상재는 七일이요, 중재는 十四일이요, 하재는 二十一일이면 각기 성도하리니 상등은 만사를 임의로 행하게 되고 중등은 용사에 제한이 있고 하등은 알기만 하고 용사를 뜻대로 못하므로 모든 일을 행하지 못하느니라.”(교운 1장 34절)고 하셨습니다. 선천 성인의 도(道)는 도통하는 인원에 제한이 있었지만 위대한 권능과 무상한 지혜와 무변의 덕화를 지니신 상제님의 도는 제한이 없어서 누구나 마음을 닦은 바에 따라 그 마음을 밝혀주신다 하셨습니다. 실로 선천의 종교와는 전혀 다른 천지대도가 출현한 것이며, 우리 도인들은 대순의 상생대도를 수행하는 무상한 광영(光榮)에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 전에 깊이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5.2.1.1.1.2. 사람들이 무엇에 목숨을 거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가 가진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가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사회에서는 재리(財利)와 명리(名利)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세태를 개탄하시어 “이제 천하 창생이 진멸할 지경에 닥쳤음에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재리에만 눈이 어두우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교법 1장 1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도인들은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가장 근원적이고 지고한 가치는 구천상제님께서 펼치신 전무후무한 진리의 도(道)입니다. 이 도를 닦고 상제님의 덕화를 선양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또한 수행의 과정에서 공부는 도통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후천선경을 건설하는 시금석이므로 도인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니, 공부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5.3. 지금까지 수도의 목적은 도통이며 도통을 하는 데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도라는 것과 수도의 일환으로서 공부는 후천 5만 년의 천지조판을 짜는 일로 공부의 영향이 군생만물에 미치므로 도인의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충즉진명(忠卽盡命)이라 하였듯이 상제님의 유지(遺志)와 도주님의 유법(遺法), 도전님의 유훈(遺訓)을 받드는 일에 목숨을 다하는 충실성으로 실천 수행하여 나가야 하겠습니다.
1) 존덕성(存德性)은 나에게 내재해 있는 천부의 덕성을 유지하고 키워가는 일이며, 도문학(道問學)은 마음 밖에 있는 온갖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터득해 가는 일이다.[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원불교대사전』 (서울: 원불교출판사, 2013)]
2) 돈오(頓悟)는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깨치는 것을 의미하고, 점수(漸修)는 얕고 깊은 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곽철환 편저, 『시공 불교사전』 (서울: 시공사, 2008)]
3)『대순진리회요람』, pp.10~11 참조.
4)『대순진리회요람』, pp.17~18 참조.
5)《대순회보》, 35호, 「도전님 훈시」
6) 교운 1장 63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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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종단 대순진리회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종단(宗團)의 의미
종단(宗團)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宗敎) 또는 종파(宗派)의 단체(團體)’입니다. 그러므로 종단 대순진리회라 하면 종교단체로서 대순진리회를 의미하게 됩니다. 종교단체는 사회단체의 한 유형입니다. 사회에서 규정하는 종단 대순진리회의 의미는 대순진리회를 하나의 민족종교단체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종단의 의미를 규정할 때는 이보다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도전님께서는 “종단의 생명은 상ㆍ하의 융화 단결입니다. … 우리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가 체계질서(體系秩序)를 확립하고 융화 단결하는 일이 종단의 가장 큰 힘이 됩니다.” 1)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단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단이라 합니다. 종단을 종교단체 이상의 의미로 풀이하자면 종(宗)자는 마루, 으뜸, 근본이라는 뜻이 있고 단(團)자는 둥글다, 모임, 단체 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단은 단체 중에서도 으뜸 되는 단체입니다.
상제님께서는 가을 개벽시기에 허다한 주의주장과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사람들의 모임이 활성화되는 것은 “이제 동서양이 교류되어 여러 가지 주의(主義)가 일고 허다한 단체가 생기나니 이것은 성숙된 가을에 오곡을 거둬 결속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교법 3장 38절)라고 밝혀주셨습니다. 이러한 때 사람들이 어떠한 단체에 몸담을 것인가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팔불근(八不近)으로 알려진 다음의 전경구절입니다.
“非人情不可近 非情義不可近
非義會不可近 非會運不可近
非運通不可近 非通靈不可近
非靈泰不可近 非泰統不可近”(교법 3장 47절)
인정이 없는 곳에 가까이하지 말고 인정이 있어도 의롭지 않으면 가까이하지 말며, 의로운 모임이 아니면 가까이하지 말고 그 모임에 운이 없으면 가까이하지 말며, 운이 통하는 곳이 아니면 가까이하지 말고 통하되 영(靈)에 통하지 않으면 가까이하지 말며, 영에 통하되 영이 크지 않으면 가까이하지 말고 영이 크더라도 큰 영신(靈神)들이 하나의 체계로 통합된 곳이 아니면 가까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덟 가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팔불근(八不近)의 요건을 만족시키는 단체는 지구상에서 오직 대순진리회 한 곳뿐입니다. 지구상에 허다한 영적인 단체가 있어도 위의 기준으로 분별하여 보았을 때 대순진리회를 능가하는 곳은 없습니다. 이것은 일개 종교나 종파의 단체가 다른 단체와 비교하여 우리가 최고라는 식의 인식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도(道)는 신도(神道)로서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사도(邪道)와 구분된다는 의미로서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도전님께서 훈시하신 바와 같이 하느님의 영(靈)을 모신 곳을 영대(靈臺)라 하고 천지신명을 모신 곳을 도장(道場)이라 합니다. 지구상에 영대를 모신 곳은 대순진리회밖에 없습니다.
또한 단(團)자가 둥글다는 의미를 지니듯이 종단은 무엇보다도 단결하여야 합니다. 원만하게 둥글게 화합단결하여야 합니다.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대순진리회 도인이면 모두 같은 것입니다. “네 방면 따로, 내 방면 따로” 하면서 방면 색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지나치다보면 방면도인을 사도인(私道人)화 하는 경향도 생기게 됩니다. 도인이라면 모두 상제님의 도인이지 그 누구도 도인들을 사도인화 하여서는 안 됩니다.
대순진리회의 임원체계는 성ㆍ경ㆍ신이 지극한 진실한 도인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인 만큼, 무엇보다도 도의 연원(淵源: 상제님-도주님-도전님)에 충실한 도인을 육성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도(道)를 보고 수도하는 도인을 양성해야지 사람을 보고 따라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대순진리회의 임원은 겸양지덕(謙讓之德)으로 도인들을 존중하고, 자모지정(慈母之情)으로 도인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몸소 실천하는 솔선수범(率先垂範)으로 지도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도인은 전도인(傳道人)의 은의(恩義)를 영수불망(永受不忘)하고 예로써 처신하며 선각과 임원들에게 보은지심(報恩之心)으로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면 종단의 화합과 단결은 굳게 담보될 것입니다.
대순의 해원상생의 평화사상이 가정에는 화목, 이웃에는 화합, 사회에는 화평, 세계에는 평화로 발현되듯이 종단에는 단결로 나타나야 합니다. 도전님께서 늘 강조하신 바와 같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속담은 실로 우리 도인들에 대한 말입니다.
『대순진리회요람』에 의한 대순진리회의 정의
『대순진리회요람』에는 대순진리회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는 조정산(趙鼎山) 도주(道主)께서 만주(滿州) 봉천(奉天)에서 강성상제(姜聖上帝)로부터 그 천부(天賦)의 종통 계승(宗統 繼承)의 계시(啓示)를 받으신 데서 비롯하여,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이어받으신 도전(都典)께서 영도(領導)하시는 우금(于今)까지 반세기(半世紀)를 훨씬 넘은 六十여 년간의 발전사(發展史)를 가진 종단(宗團)의 명칭(名稱)이다. … 그러므로 대순진리회는 대순하신 진리를 종지(宗旨)로 하여 인간개조(人間改造) 정신개벽(精神開闢)으로 포덕천하(布德天下) 구제창생(救濟蒼生)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建設)의 목적(目的)을 달성하기 위하여 창설(創設)된 종단(宗團)이다.”2)
『대순진리회요람』에 의하면 대순진리회에서 대순(大巡)은 상제님께서 삼계를 대순하시며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신명과 세계창생을 건지시려고 천지공사를 행하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대순에는 삼계대순ㆍ개벽공사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대순진리회의 창설과 발전사는 천부적인 종통(宗統)의 계승과 분리하여 논할 수 없는데, 종통은 도의 생명이며 뿌리로서 종통이 바르지 못하고서는 종단이 생명력을 유지하며 변화 발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순진리회요람』에서 명백히 언급하고 있듯이 대순진리회는 강성상제로부터 천부적 종통계승의 계시(啓示)로 조정산 도주님께서 이어받으시고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이어받으신 박우당 도전님께서 영도하시는 종단입니다.
『도헌』에는 “도전 유고 시 종무원장, 종의회의장 순으로 그 직무를 대리한다.”(『도헌』 제22조)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도전의 임기는 종신제(『도헌』 제20조)이고 종무원장의 임기는 제한을 받지 않는데(『도헌』 제25조) 중앙종의회의 최종적인 불신임이 결의되었을 시에는 차한에 부재한다(예외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현재는 전 종무원장이 중앙종의회로부터 불신임을 받았고 스스로도 도장을 나가 “무극대도”라는 단체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의회의장이 도전의 직무를 대리하게 되는데 직무를 대리한다는 것은 도전의 직무를 대신하여 처리한다는 뜻으로 권한대행과는 그 권한과 역할에서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의 유고 시 그의 잔여 임기의 권한과 직무를 대신 행사하는 것이고 직무대리는 대통령이 해외출장 시 그 직무를 대신하여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정법상 대통령의 유고 시는 권한대행을 쓰고 해외출장 등에는 직무대리를 쓰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도의 『도헌』에는 도전 유고 시 종무원장, 종의회 의장으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고 하지 않고 그 직무를 대리한다고 명시한 것은 도전 이하 더 이상의 종통의 계승자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도전의 권한을 대행할 자는 없는 것이며, 다만 도전님께서 어디 출장하신 것과 같이 그 직무를 대신하여 처리한다는 것이 도법과 체계에 맞는 것입니다.
“대순진리회는 대순하신 진리를 종지(宗旨)로 하여 인간개조(人間改造) 정신개벽(精神開闢)으로 포덕천하(布德天下) 구제창생(救濟蒼生)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建設)의 목적(目的)을 달성하기 위하여 창설(創設)된 종단(宗團)이다.” 3)
이 부분에서는 대순진리회의 종지와 목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대순진리회는 상제께서 삼계를 대순하시며 천지공사를 보신 대순진리를 종지로 삼고 있으며,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하는 전 인류의 정신개벽으로 천하에 덕을 펴고 창생을 구제하여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설된 종단입니다.
그리고 대순진리회 신앙의 대상은 구천상제님 한 분입니다. 『대순진리회요람』에 신앙의 대상은 “구천상제[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聖普化天尊姜聖上帝)]” 4)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대순진리회는 구천상제님(하느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구천상제님께서 행하신 삼계대순ㆍ개벽공사의 대순진리를 종지로 하여 인간개조 정신개벽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목적으로 창설된 종단으로서 구천상제의 계시(啓示)로 천부의 종통계승을 받으신 조정산 도주님으로부터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이어받으신 박우당 도전님께서 영도하시는 100여 년의 발전사를 지닌 종단의 명칭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대상을 구천상제님 한 분이 아닌 세 분으로 규정하거나, 계시와 유명으로 전해진 천부적인 종통의 계승을 부정하여 도주님을 부정하거나 도전님을 부정하는 것, 또는 자신이 새로운 도전임을 자처하는 것 등은 대순진리회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므로 이러한 단체들은 대순진리회라는 고유 명칭을 사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도헌』에 의한 대순진리회의 정의
도(道)에는 법(法)이 있습니다. 법은 어떤 단체나 모임을 이끌어 가는 운영의 방법과 체계를 말합니다. 우리 도에서는 이것을 도법(道法)이라 합니다. 한 나라의 법(法) 중에 으뜸 되는 법을 헌법(憲法)이라 하듯 도법(道法) 중에 으뜸 되는 법이 도헌(道憲)입니다. 상제님께서도 인세에 오실 때는 지기(至氣)를 쫓아 천지 운행의 법도에 맞추어 오셨으며 도전님께서도 도(道)의 모든 운영을 『도헌』에 입각하여 행(行)하셨습니다. 『도헌』은 도전님께서 남기신 법이며 이것을 떠나 어떠한 개인이나 집단이 임의로 도(道)의 체계를 운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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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도장 내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대순진리회 도장(道場)은 영대(靈臺)에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모시고, 상생대도의 진법(眞法)을 수호(守護)하는 성역(聖域)입니다. 도장은 성스러운 성지(聖地)인 만큼 도장 안과 일각문ㆍ숭도문ㆍ본전에서 수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 있습니다.
예의범절은 약칭으로 예절이라고 합니다. 예(禮)란 인간사회의 질서를 위해 정한 생활규범이며, 절(節)은 절도(節度)로 일이나 행동 등을 정도에 알맞게 하는 한도를 의미합니다. 즉, 예절이란 일상생활과 사회적 제 관계에서 적절한 행동을 하도록 규제하는 규칙과 관습의 체계를 말합니다. 도전님께서는 예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훈시하셨습니다.
예(禮)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일생 동안 움직일 때나, 정지할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起居動靜)를 가리지 않고 항상 정도를 넘는 일이 없이, 공경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것을 이른다. 도덕과 인의(仁義)도 예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풍속도 예가 바로 서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는다. 부자 형제도 예가 아니면 윤리가 정립되지 않는다. 스승을 섬기고 학문에 힘쓰는 일도 예가 아니면 바른 수업(受業)이 될 수 없다. 군율(軍律)을 세우고 관직에 있어서 법을 행하는 것도 예가 아니면 위엄이 서지 않는다. 조상을 받들고 신명(神明) 앞에 치성을 드리는 일에도 정성의 예를 갖추어야 하므로 사념(私念)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 『대순지침』, pp.68~69.
이처럼 예는 사람이 평생 지켜나가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전경』의 운합주(運合呪)에는 “인의예지 인신지도(仁義禮智人神之道)”(교운 2장 42절)라 하여 인의예지가 신명과 인간의 도리라 하였습니다. 『논어』「안연편」에서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도(道)가 예를 체(體)로 삼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제 도장 내에서 지켜야 할 예절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도장에는 하느님과 천지신명을 모시는데 특히 영대에는 하느님의 진영을 모셨습니다. 전 우주에서 영대는 오직 대순진리회 도장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장은 매우 신성한 곳입니다. 도장 방문 시는 반드시 정장 차림을 하고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도장에 도착해서는 정해진 장소에 주차하고 도장 내에서는 양수거지(兩手据之)자세로 이동합니다. 양수거지의 원말은 양수교지(兩手交之)로 남녀 모두 왼손 위에 오른손을 살포시 포개어 단전(丹田)에 자연스럽게 갖다 대는 것을 말합니다. 도장 내에는 신명이 가득 차 계시므로 절대로 담배를 피우거나 침을 뱉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뛰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일각문(一覺門)은 불교의 일주문처럼 성속(聖俗)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각문 안에는 대원종과 대순성전, 종무소, 자양당이 있고 본전 쪽으로 다가가면 바로 숭도문(崇道門)이 나옵니다. 숭도문을 지나 올라가면 본전이 나오므로 상제님을 친견하는 마음가짐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숭도문 내에는 영대가 있고 도인의 생명보다 소중한 시학과 시법공부가 돌아가는 성소(聖所)가 있으므로 극성(極誠)ㆍ극경(極敬)ㆍ지신(至信)의 예를 갖춰야 합니다. 숭도문 안을 정내(庭內)라 하고 그 안에 들어서면 본전(本殿)을 향해 향전읍(向殿揖)을 하고, 내정(內庭)을 향해 인사를 드립니다. 이때 안경은 벗어야 합니다. 향전읍은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 앞으로 올린 상태에서 상체를 앞으로 숙입니다. 이동 시에는 양수거지 자세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조심스럽게 걸어야 합니다. 숭도문 안에서 사진촬영은 금하고, 금연도 준수하여야 합니다. 또한, 큰소리로 잡담하지 않습니다.
영대 앞을 본정(本庭)이라 이르며 본정에서는 최경(最敬)의 예로써 진퇴에 지성지경(至誠至敬)을 다하여야 하며 국궁자세로 이동합니다. 국궁(鞠躬)이란 양수거지한 상태에서 몸을 앞으로 굽혀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만 숙이는 자세보다 더욱더 존경의 표현을 나타내는 자세입니다. 마치 휘어 있는 활처럼 자신의 몸을 굽혀 극경의 예를 다하는 것입니다. 본전 4층에 오르고 내릴 때는 문턱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본전 4층에서 이동 시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합니다. 본전 안에서 대기 시에는 면수 자세로 임합니다. 면수(俛首)란 양수거지한 상태에서 허리는 펴고 머리를 앞으로 공손히 숙이는 것을 말합니다.
참배 시 구령자가 “일동거수(一同擧首)”하면 고개를 들고 양위상제님과 천지신명 전에 자신의 얼굴을 뵈입니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양위상제님과 천지신명 전에 자신의 얼굴을 보여드리며 인사드리는 것입니다. 참배 시 복장은 내 외수 모두 한복 착용을 원칙으로 하며, 신발은 고무신이나 가죽신을 신어야 합니다. 단, 외수는 양복정장과 구두를 신어도 무방합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휴대폰을 사용하거나 끈이 있는 가방을 어깨에 매는 것을 삼가합니다.
도장은 상제님과 천지신명이 늘 수찰하시므로 남이 보든 보지 않든 도법에 알맞게 극진한 성ㆍ경ㆍ신으로 솔선수범하여 예절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전님께서 “앉을 자리, 설 자리, 누울 자리, 할 말, 안 할 말 가려서 할 줄 알면 도(道)에 가깝다.”, “무례자(無禮者)는 무도자(無道者)다.”라고 훈시하셨습니다. 이 지침을 평소에 상기하여 참된 마음과 경건한 태도, 돈독한 신심으로 도인의 본분을 스스로 지켜나갈 때 체계질서가 바로 잡히고, 화합단결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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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남이 모르는 공부란 무엇인가요?
상제께서 앞날을 위하여 종도들을 격려하여 이르시니라. “바둑에서 한 수만 높으면 이기나니라. 남이 모르는 공부를 깊이 많이 하여두라. 이제 비록 장량(張良)ㆍ제갈(諸葛)이 쏟아져 나올지라도 어느 틈에 끼어 있었는지 모르리라. 선천 개벽 이후부터 수한(水旱)과 난리의 겁재가 번갈아 끊임없이 이 세상을 진탕하여 왔으나 아직 병겁은 크게 없었나니 앞으로는 병겁이 온 세상을 뒤덮어 누리에게 참상을 입히되 거기에서 구해낼 방책이 없으리니 모든 기이한 법과 진귀한 약품을 중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잘 알아 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 봄으로부터 이 동토에서 다른 겁재는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 만은 남았으니 몸 돌이킬 여가가 없이 홍수가 밀려오듯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공사 1장 36절.
위 구절에 의하면 남이 모르는 공부는 결국 의통(醫統) 공부로 귀결됩니다. 의통(醫統)의 의(醫)는 의원 의, 고칠 의이고, 통(統)은 거느릴 통, 합칠 통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통을 통할 통(通)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의술에 통하여 못 고치는 것이 없다.”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이한 법과 진귀한 약품을 귀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잘 알아 두라” 하신 것입니다.
의통은〈병세문〉에도 나오는데, 이에 의하면 “세상에 충 ㆍ 효 ㆍ 열이 끊어져 천하가 모두 병들었다(世無忠 世無孝 世無烈 是故天下皆病).”라고 하셨고, 이에 대한 처방으로 “도를 얻게 되면 큰 병도 작은 병도 약을 쓰지 않아도 낫게 된다(得其有道 則大病勿藥自效 小病勿藥自效).”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그다음에 나타난 의통(醫統)이란 문구와 연결되는 것으로 결국 득도(得道)를 의통이라 하신 것입니다.
원래 무슨 병에는 무슨 약이 좋다는 식으로 고유한 치료약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의학 기술의 발달로 많은 병이 정복되었지만 아직도 못 고치는 병이 많고, 또 새로운 병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종 병이 생기면 거기에 맞는 치료약이 없어 새로 개발하여야 하는데 워낙 병의 진화 속도가 빠르다보니 미쳐 약이 개발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신종 병에 희생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통은 모든 의술에 통하고 미리 준비해 놓은 약과 같아서 일종의 만병통치약과 같은 것입니다.
상제님께서 병겁 만은 남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상제님의 권능으로 천지공사로 다 푸셨지만 병겁 만은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포정문〈대순진리회〉글에도 ‘수천백 년간 쌓이고 쌓인 무수 무진한 삼계의 모든 원울을 무형무적지중에 해방하심에 있어서…’라고 하여 상제님께서 모든 원과 한을 해소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병겁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지만 이것에 대한 약(藥)도 우리에게 의통으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이 의통 공부는 구천상제님의 천지공사와 도주님의 오십 년 공부 종필로 전(傳)하신 도법과 도전님의 영도로 우리에게 내려진 공부입니다.
우리 공부가 ‘남이 모르는 공부’라고 하는 속성은 ‘판 밖’이라는 용어에서 잘 나타납니다. 구천상제님께서 ‘판 안에 있는 법으로써가 아니라 판 밖에서 새로운 법으로써 삼계 공사를 하여야 완전하리라’ 예시 1장 4절. ‘대범 판 안에 있는 법을 써서 일하면 세상 사람의 이목의 저해가 있을 터이니 판 밖에서 일하는 것이 완전하리라’ 행록 2장 14절. ‘판 밖에서 성도하리라’ 교운 1장 17절. 하신 ‘판 밖’의 의미는 사전적으로 ‘일이 벌어진 자리 밖’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전경』의 판 밖은 ‘선천의 도수에 의하여 벌어지는 현실이라는 제도권 밖’이라는 의미라 할 것입니다. 선천은 상극 도수이고 이로 인해 도가에서도 음해가 있어 도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목의 저해를 피해 천지공사나 앞으로 나오는 도의 완성도 선천의 도수가 작용하지 않는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천의 판이란 이미 선천의 상극 도수에 의하여 지배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방해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큰 배를 건조하는데 처음부터 바다 위에서 건조하면 출렁거리는 파도에 의해 쉽게 배가 완성되기 힘이 드니 출렁거리는 파도가 닿지 않는 곳에서 안전하게 완성된 뒤에야 바다에 띄우는 것과 같습니다. 상제님께서 개벽을 말씀하시면서 낡은 집에 살려면 엎어질 염려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따라서 행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지어야 하는 것 공사 1장 2절 참조. 이라 하신 말씀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병겁은 인류가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병겁이 천하의 무도병이 곪았던 것이 터지는 과정이라면 의통은 이를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을 상제님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입니다. 만약에 병겁이 오기 전에 전 인류가 도에 입문하고 수도를 한다면 인류가 겪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먼저 도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통은 나 혼자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이 죽어 갈 때 살리기 위한 준비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전경』의 또 다른 구절에 한 농부가 농한기인 이른 봄에 쉬지 않고 자기 논에 수원지의 물이 잘 들어오도록 봇돌을 깊이 파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비웃다가 여름이 되어 가물었을 때 그 농부만 근심 없이 물을 잘 대었다 행록 4장 24절.
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봇돌은 봇도랑을 말하는데, 보에서 여러 논에 까지 물길을 내어 물이 흘러오도록 만든 도랑입니다. 보(洑)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자그마하게 둑을 쌓고, 흐르는 냇물을 막아 두는 곳입니다. 봇돌을 깊이 파야 수원지에서 오는 물을 논에 잘 댈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마음 공부를 깊이 하여 연원으로부터 오는 도통과 도덕으로 많은 사람을 살리는 마음을 키우고 닦는 공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봇돌을 파는 농부의 비유에서 남이 모르는 공부의 또 다른 속성이 잘 드러납니다. 농한기에 어떤 농부가 봇돌을 팝니다. 다른 농부는 이를 비웃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되어 가뭄이 들었을 때 그 농부만 논에 물을 댈 수 있습니다. 여름이 와 가뭄이 들기 전에는 봇돌을 파는 일의 정당성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비소를 받을 뿐입니다.
여기서 봇돌을 파는 사람은 우리 수도인으로 앞날을 대비하여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이는〈병세문〉에도 나와 있듯이 편안할 때 위급함을 잊지 않는 진정한 호남아인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천하의 형세에 어두운 자는 죽는 기운을 얻고 천하의 형세에 밝은 자는 사는 기운을 얻는다고 하신 것처럼 봇돌을 파는 자는 천하의 형세를 아는 자로서 수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남이 모르는 공부’에서 ‘남’은 수도인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봇돌을 파는 농부를 다른 사람들이 비웃었듯이 우리의 도는 예나 지금이나 들어 본 적이 없는 도로 믿고 닦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봇돌을 파 수원지의 물이 자신의 논에 잘 들어오도록 한 사람은 자기 논에 물을 대고 남으면 이웃 논에도 물을 댈 수 있듯이 의통은 나 혼자 살자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봇돌을 깊이 판 정도에 의하여 논에 물을 대는 정도가 달라지듯이 닦은 바 기국에 의하여 의통이 되는 정도에 따라 사람을 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 과정에서 닦은 바 기국과 도의 깊이는 신명만이 알 뿐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종착역에서 서로 만나 하나가 되기 전까지 수도는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남이 모르는 공부’의 의미는 ‘자신만이 아는 마음 공부’의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도가 드러나기 전에는 우리의 공부는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남 잘되는 공부를 그날이 오기까지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도의 과정은 겁액을 극복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겁액은 척신으로 다가 옵니다. 그 대결에서 내가 한 수라도 높아야 수도의 다음 단계로 진행됩니다. 척신과의 대결에서 한수 한수 내가 높아져 갈 때 나의 수도는 점점 깊어져 갑니다. 그중 가장 큰 척은 교리적으로 혼란스럽게 하여 도를 못 닦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제님의 진리를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척과의 수 싸움에서 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척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감정 등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자신을 조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상제님의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남이 모르는 공부를 살펴보았습니다. 남이 모르는 공부는 병겁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는 의통 공부입니다. 이 의통은 의술에 통하여 못 고치는 병이 없는 것으로 득도(得道)에 그 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공부가 남이 모른 공부라고 하는 속성은 선천의 도수가 상극 도수로 현실이 이에 지배되어 있기 때문에 이목의 저해를 우려해서 천지공사에서부터 성도(成道)에 이르기 까지 판밖에서 해야 완전하리라 하신 상제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에 입문하지 않은 사람은 도가 완성되어 드러나기 전에는 그 진실을 알 수 없기에 남이 모르는 공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수도된 정도는 의통으로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수도과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므로 또한 남이 모르는 공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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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순진리회 명칭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의 명칭에 대하여 『대순진리회요람』에는 “조정산(趙鼎山) 도주(道主)께서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강성상제(姜聖上帝)로부터 그 천부(天賦)의 종통계승(宗統繼承)의 계시(啓示)를 받으신 데서 비롯하여, 유명(遺命)으로 종통(宗統)을 이어받으신 도전(都典)께서 영도(領導)하시는 우금(于今)까지 반세기(半世紀)를 훨씬 넘은 六十여(餘) 년간(年間)의 발전사(發展史)를 가진 종단(宗團)의 명칭(名稱)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신성ㆍ불ㆍ보살들이 진멸지경에 이른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劫厄)을 구천에 하소연하여 인세에 대강하신 구천상제님께서 인류와 신명을 구제하시고 지상에 영원한 선경의 낙원을 건설하시기 위하여 9년간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마치시고 화천하셨습니다. 도주님께서는 부조전래의 배일사상을 품으시고 만주 봉천지방으로 향하시던 중 구천상제님의 계시(啓示)로 봉천명(奉天命)하신 때 1) 로부터 도전님께서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하시어 종단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시고 영도해 오신 지 오늘날까지 100여 년이 지났습니다. 이 글에서는 대순진리회라는 명칭에 대하여 ‘대순(大巡)’이라는 어귀와 ‘대순진리(大巡眞理)’,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로 각각 나누어 대순진리회 명칭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대순(大巡)
대순은 큰 대(大) 자, 돌 순(巡) 자로 ‘크게 돈다.’는 뜻입니다. 대순이라는 용어는 『전경』에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교운 1장 9절)에서와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권지 1장 11절)에서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성ㆍ불ㆍ보살들의 청원과 하소연으로 인세에 대강하신 상제님께서 천하를 크게 돌아보신 것에서 유래합니다.
또한 “공우가 三년 동안 상제를 모시고 천지공사에 여러 번 수종을 들었는데 공사가 끝날 때마다 그는 ‘각처의 종도들에게 순회 ‧ 연포 하라’는 분부를 받고 ‘이 일이 곧 천지의 대순이라’는 말씀을 들었도다.”(교운 1장 64절)에서는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시고 그 내용을 각처의 종도들에게 돌아다니며 알리게 하신 것도 대순이라는 의미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경』의 “도주께서는 九년의 공부 끝인 정사년에 상제의 삼계 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感悟)하시도다.”(교운 2장 6절)에서 “삼계 대순”이라는 표현과 『대순진리회요람』에 “… 삼계대순(三界大巡) 개벽공사(開闢公事)의 뜻을 담고 있는 그 대순(大巡)을 인용하여 이름한 것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대순의 어귀에는 ‘삼계대순 개벽공사’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개벽공사는 공사 1장 1절의 ‘천지공사’, 공사 1장 3절의 ‘삼계공사’, 『대순진리회요람』 「취지」의 ‘대공사(大公事)’ 등과 다 같은 표현입니다.
이렇듯 ‘대순’이라는 어귀에는 상제님께서 천하를 돌아보시는 것과 함께 종도들이 천지공사의 내용을 순회ㆍ연포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삼계대순 개벽공사’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대순진리(大巡眞理)
도전님께서 “상제께서 천하를 대순하시고 광구천하ㆍ광제창생으로 지상선경을 건설하시고자 인세에 강세(降世)하셔서 전무후무한 진리의 도(道)를 선포하셨다.” 2)
고 하셨는데, 이 ‘전무후무한 진리의 도(道)’가 바로 대순진리입니다. 앞에서 대순에는 ‘삼계대순 개벽공사’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하였는데, 대순진리는 바로 상제님께서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하시고 천지공사를 행하신 대순하신 진리를 뜻합니다. 대순진리는 한마디로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를 의미하는데, 이는 『전경』 교운 2장 19절에 “도주께서 이 상우를 데리고 부안 변산(扶安邊山) 굴바위에 이르러 이곳에서 공부하시면서 상제의 대순하신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법하시니라.”에서 ‘상제의 대순하신 진리’로 나와 있고, 『대순진리회요람』의 「취지」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상(無上)한 지혜(智慧)와 무변(無邊)의 덕화(德化)와 위대(偉大)한 권능(權能)의 소유주(所有主)이시며 역사적(歷史的) 대종교가(大宗敎家)이신 강증산(姜甑山) 성사(聖師)께옵서는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으로서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主宰)하시고 천하(天下)를 대순(大巡)하시다가 인세(人世)에 대강(大降)하사 상도(常道)를 잃은 천지도수(天地度數)를 정리(整理)하시고 후천(後天)의 무궁(無窮)한 선경(仙境)의 운로(運路)를 열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建設)하고 비겁(否劫)에 쌓인 신명(神明)과 재겁(災劫)에 빠진 세계창생(世界蒼生)을 널리 건지시려고 순회 주유(巡回周遊)하시며 대공사(大公事)를 행(行)하시니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冤相生) 대도(大道)의 진리(眞理)로써 신인의도(神人依導)의 이법(理法)으로 해원(解冤)을 위주(爲主)로 하여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보은(報恩)으로 종결(終結)하시니 해원(解冤) 보은(報恩) 양원리(兩原理)인 도리(道理)로 만고(萬古)에 쌓였던 모든 원울(冤鬱)이 풀리고 세계(世界)가 상극(相克)이 없는 도화낙원(道化樂園)으로 이루어지리니 이것이 바로 대순(大巡)하신 진리(眞理)인 것이다.”
대순에는 삼계대순 개벽공사, 즉 천지공사의 의미가 담겨 있고,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를 밝힌 위의 문장에서는 천지공사의 주체(主體)와 목적, 규범(規範), 의의(意義) 등의 내용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처음부터 ‘… 대강하사’까지가 천지공사의 주체를 나타내는 문장인데, 천지공사의 주체는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이십니다. 구천대원조화주신은 도주님께서 밝히신 전 우주를 총할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신격입니다.
그다음부터 ‘… 행하시니’까지가 천지공사의 목적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하시려고 ~하시니’라는 문장형태로 대공사를 행하신 이유, 목적이 밝혀져 있습니다. 천지공사의 목적은 지상천국 건설과 비겁(否劫)에 싸인 신명과 재겁(災劫)에 빠진 창생의 구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지공사의 규범은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어떠한 원리와 법칙으로 행하셨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음양합덕 …’에서 ‘… 종결하시니’까지가 천지공사의 규범입니다.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대도(大道)의 진리를 원리로 하여 신인의도(神人依導: 신명은 인간에게 의탁하고 인간은 신명의 인도를 받음)의 이법(理法)으로 해원(解冤)을 위주로 하여 보은(報恩)으로 천지공사를 종결하신 것이 천지공사의 규범입니다.
이러한 상제님의 천지공사로 인하여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 천지공사의 중요성과 가치, 즉 의의(意義)입니다. 상제님의 9년 천지공사로 인하여 해원상생(解冤相生)ㆍ보은상생(報恩相生)의 양대 도리로 만고에 쌓였던 모든 원울이 풀리고 세상에는 상극이 없는 도화낙원(道化樂園)이 이룩되리라는 것이 천지공사의 의의입니다.
그러므로 대순진리는 구천대원조화주신께서 삼계대권을 주재하시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인세에 대강하시어 지상천국 건설과 신명과 창생을 구제하실 목적으로 대도의 진리로써 신인의도의 이법으로 천지공사를 해원을 위주로 보은으로 종결하심에 따라 해원ㆍ보은의 도리로 만고에 쌓인 원한이 풀리고 영원한 상생의 도화낙원이 이룩될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다른 측면으로 대순진리는 이 우주의 근본진리로서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여주본부도장의 포정문 옆 벽에는 대순에 대하여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이 무극(無極)이고 무극이 태극(太極)이라. 우주가 우주된 본연법칙(本然法則)은 그 신비의 묘(妙)함이 태극에 재한바 태극은 외차무극(外此無極)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 태극이야말로 지리(至理)의 소이재(所以載)요 지기(至氣)의 소유행(所由行)이며 지도(至道)의 소자출(所自出)이라.”라고 쓰고 있습니다. 대순은 원이고 원은 무극이며 무극은 태극이고 태극은 음양(陰陽)이며 음양은 도(道)입니다. 음양이 도라는 것은 도전님께서 “도(道)가 음양이며 음양이 이치이며, 이치가 곧 경위며 경위가 법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3)
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대순은 곧 도(道)이고, 대순진리는 곧 도리(道理)입니다. 해원상생ㆍ보은상생의 양대 도리가 대순진리이며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리이고 우주의 근본법칙입니다. 전 우주의 천지일월(天地日月),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진리가 대순진리입니다.
각(角)은 가다 보면 꺾이고 막히는 데가 있지만, 원은 걸리는 데도 막히는 데도 없습니다. 무극은 끝이 없다는 뜻이고 태극은 클 태(太) 자를 씁니다. 그러므로 대순은 아주 무궁무진(無窮無盡)하고 무한무량(無限無量)한 것입니다. 대순진리는 무궁무진하고 무한무량한 진리입니다. 이러한 대순진리에 통하면 삼라만상의 곡진이해(曲盡理解)에 무소불능(無所不能)하게 되는데 이것을 도통이라 합니다. 4)
시속에는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 순리대로 된다, 모든 것이 순리다.”라는 말을 씁니다. 순리(順理)가 순리(巡理)입니다. 대순진리가 곧 순리입니다. 도전님께서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의 합일성을 밝혀 만상만유가 도 안에서 생성 존재하고 있는 진리를 확신케 하여야 한다.” 5)
하셨고, “도인들은 성ㆍ경ㆍ신을 요체로 삼아서 위로 상제님을 받들고 아래로는 사회의 모든 인사(人事)가 상제께서 대순하신 진리대로 이룩되어 가는 진리임을 깊이 심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6)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모든 인사가 대순진리대로 이룩되어가고 있음을 깊이 자각하여야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순진리’는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 즉 삼계대권을 주재하시어 진멸지경에 빠진 신명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