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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

    연원과 연운의 차이는 뭔가요?

    도전님께서는 “본 도의 연원(淵源)은 상제님의 계시(봉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이어 내려 왔다.”고 하셨고, 나아가 “이 연원은 바꿀 수도 고칠 수도 없으므로 연운(運縁)과 혼돈해서는 아니 된다.” 『대순지침』, p.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연원과 연운의 의미와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연원의 한자는 못 연(淵), 근원 원(源)으로서 그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사물은 천지 안에 있는 모든 자연현상이나 일 그리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모든 개별적 존재가 비롯된 근원으로서의 연원은 도(道)의 근원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천지의 이치가 일육수(一六水)에 근원하였다는 시원(始元)의 의미입니다. 이는 모두 물과 관계된 것인데, 복희 때는 용마(龍馬)가 황하에서 하도(河圖)를 지고 나와 거기에서 천리를 깨달았고 주 문왕 때는 신구(神龜)가 낙서(洛書)를 지고 나와 거기에서 천지의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금산사에 미륵불(彌勒佛)을 모신 자리에도 용소(龍沼)가 있습니다.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창건할 때 용소를 메우고 금불(金佛)을 세우라는 현몽(現夢)을 받아, 못을 숯으로 메워 솥을 얹고 솥 위에 도금을 해서 미륵을 세웠습니다. 여기서 시루는 증산(甑山)이신 상제님을 뜻하고, 솥은 정산(鼎山)이신 도주님을 의미합니다. 상제님께서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너라.”(행록 5장 29절)고 하심은 미륵불과 솥의 양산(兩山)의 진리를 밝혀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금산사에 미륵불을 모신 자리에도 용소가 있어 상제님과 도주님의 진리가 못, 즉 물에서 나온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원 근본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연원’입니다.

    『전경』에 “속담에 ‘맥 떨어지면 죽는다’ 하나니 연원을 바르게 잘 하라.”(교법 2장 43절)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천부적으로 정해져서 인위적으로 바꿀 수도 고칠 수도 없는 연원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도주님께서 십오 세 시 진주(眞主)로 봉천명 하시고 만주 봉천에서 이십삼 세 시 득도하심은 태을주(太乙呪)로 본령합리(本領合理)를 이루신 것이며 『전경』에 ‘12월 26일 재생신’이라 하신 것은 12월 4일로서 1년 운회의 만도를 채우실 도주님의 탄강을 뜻하심입니다. 이것을 딱 들어맞는 천부적 종통계승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상제께서 강세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생, 천사 등으로 호칭을 하였습니다. 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이시며 이분이 바로 구천상제님이시라고 밝히신 분은 도주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종통(宗統) 계승의 연원의 맥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주님의 화천 당시 유명(遺命)으로 도전님께 연원의 맥이 다시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구천상제님의 계시(봉서)와 도주님의 유명에 의해 종통계승의 연원의 맥이 이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우리 도의 연원에 따라 입도하는 도인들은 전도인(傳道人)과 연운(緣運)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전도인과의 관계를 뜻하는 연운에 따라 도인들은 사사상전(師師相傳)으로 맺어져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연운에 따른 포덕(布德) 업적에 따라 임원 체계가 형성되며 이 체계는 본 종단을 이끌어 나가는 기본 체계가 됩니다.
    연운체계는 포덕한 업적에 따라 형성된 조직체계로서 그 속에서 선각과 후각이라는 연운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러한 체계는 도심으로써 바로 확립되고 도심은 위아래 도인들이 서로 믿으며 변하지 않고 신뢰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때 “입도하려고 찾아간 사람을 타 방면에서 가로채어 입도를 시켜도 연운은 바뀌지 않습니다. 또한 도의 이치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해서 다른 도인의 협조를 얻어 입도를 시켜도 연운은 바뀌지 않습니다.” 『대순지침』, pp.15~16.
    그러나 연운관계에서 한 사람이 배도(背道)를 하였을 경우 배도한 사람을 배제한 상태에서 위ㆍ아래를 잇거나, 연운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일찍이 도전님께서 “연원에서 진리가 나오는 것이 연원도통이므로 원 근본은 연원이고 네 연운 내 연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위 상제님을 믿고 나가는 것이 연원의 핵심이므로, 특정 연운의 도인이 아니라 모두가 상제님의 도인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생명과 만상만유의 근본이 종통이므로, 종통이 바르지 못하면, 법이 있을 수 없고 경위가 바로 설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 속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으며 만물만상을 이루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대순회보』10호.
    그래서 이치를 아는 사람은 대순진리회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원은 구천상제님의 계시를 받아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과 유명으로 종통을 이으신 도전님을 의미하는 것이지 연원에 따라 입도하는 전도자와의 관계인 연운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제님, 도주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 온 연원의 맥이 도전님의 종통계승으로 마무리되었으므로 우리들은 그분들이 남기신 유지(遺志), 유법(遺法)과 유훈(遺訓)의 진법을 잘 수행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존 종교와 구별되는 대순진리회의 이치이고 진리입니다. 연원은 하늘에서 이어져 오는 천부적인 신성성이며 연속성이므로, 연원에 따라 입도하는 도인들 간에 성립된 연운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연원과 연운의 관계를 요약해 본다면, 첫째, 연원은 구천상제님의 계시를 받아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과 유명으로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께 이어진 천부적 신성성이며 연속성으로 도의 근원을 의미하고, 연운은 연원에 따라 입도하는 전도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연원은 절대 바뀔 수도 고칠 수도 없지만 연운은 배도자가 생겨날 경우와 같이 특수한 경우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 연원은 도의 근원이자 천부적으로 이어져 오는 신성성이며 연속성이란 점에서 종통과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운은 연원에 입각해서 신앙의 대상인 구천상제님과 도주님, 도전님의 진법(眞法)을 숭신봉행(崇信奉行)하기 위해 설립된 대순진리회의 진리를 선ㆍ후각 간에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연운체계로 확립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Q.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성경신 삼요체 중 신(信)을 읽어보면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란 구절이…

    신(信)에 대한 해설의 전 문장은 이러합니다. “한 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辟)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差異)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期約)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限度)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한 마음을 정한 바엔…’으로 시작하여 중간은 믿음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그 과정을 통하여 ‘…기대한 바의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을 신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마음으로 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의 진실을 둘로 왜곡시키지 않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진실을 간직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를 둘이라 않고”가 담고 있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한번 마음으로 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또한 그 간직한 진실을 지키기 위하여 셋을 셋이 아니라고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셋을 셋이라 않고”가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셋을 셋이라 않고”는 타인을 향하는 경우와 자신을 향하는 경우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타인을 향하는 경우를 예를 들어보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으면서 독립군의 명단을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을 때, 사실을 순순히 자백한다면 - 셋을 셋이라고 한다면 - 이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 - 셋을 셋이라고 하지 않는 것 - 이 대한독립을 이루는 대업에 이 한 몸 헌신하겠다는 한번 먹은 마음을 변치 않고 기대하는 바의 대한독립을 달성케 하는 믿음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신을 향한 경우는 자신의 마음을 내적으로 관조하여 사심(私心)을 버리고 양심(良心)을 회복하는 기전(機轉)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양심과 사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데,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사사로운 욕심(慾心)이고 양심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입니다.(『대순진리회요람』
    pp.18~19) “셋을 셋이라 않고”라는 구절에서 ‘셋’을 ‘내 마음’으로 등치시켜 본다면 “내 마음을 내 마음이라 않고”가 됩니다. 앞의 ‘내 마음’이 사심이라면 뒤의 ‘내 마음’은 양심입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이라 않고”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사사로운 나의 욕심(내 마음 = 셋)을 정직하고 진실한 나의 본심(내 마음 = 셋)이라 않고’로 풀이 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을 정하고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 생길 수 있는 사사로운 욕심을 나의 본심으로 여기지 않고, 사심을 버리고 정직과 진실을 근본으로 하여 기대하는 목적을 완수하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그 의미를 또 다른 차원에서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물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교양을 쌓고 인생의 연륜이 쌓이다보면 사물의 본질은 좀 더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사물을 관찰하는데 있어서도 눈으로 보이는 것과 그것을 직접 만져보고 여러 가지로 분석해 본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도 “말은 타 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옳게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도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아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공위성이 보내온 별의 사진은 밤하늘에 보이는 그 별의 모습이 아니며, 현미경으로 이슬을 관찰한다면 그 속에 수많은 미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경구(警句)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하면서 동시에 인간 인식의 탐구영역의 무한한 확대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이런 면에서 “셋을 셋이라 않고”는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전경』 교법 3장 17절의 ‘최풍헌과 류훈장의 고사’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끝까지 최풍헌의 말을 따름으로써 피난하는 길을 구하고자 했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믿음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도인들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진행형의 도(道)를 닦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풍헌과 류훈장의 고사’는 우리 도인들에게 현재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아직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을 정하여 수도에 임하였다면 수도의 목적인 도통의 완성을 위하여 “셋을 셋이라 않고” 진실을 근본으로 성심(誠心)을 다하여 수도함으로써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케 하여야 합니다.

    류훈장의 기대하는 바의 목적은 ‘왜군이 침입한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악해지는 터에 피난할 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도통을 하고자하는 우리 도인들의 목적에 비하면 류훈장의 목적은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보여준 믿음의 크기는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최풍헌이 언행을 거칠고 부족하게 보이게 꾸민 것이 첫 번째 시험이고 가산을 맡기라고 한 것이 두 번째 시험이며, 그 돈을 받아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한 것이 세 번째 시험이고 그러다 허망하게 죽은 것이 네 번째 시험이며, 유언을 남겨 지리산에 장사지내달라고 한 것이 다섯 번째 시험입니다. 어느 시험단계에서든 그의 믿음을 중지할 수 있었지만 최풍헌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셋을 셋이라 여기지 않고” 변함없는 믿음으로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케 된 것입니다. 결국 지리산에서 류훈장이 보게 된 것은 기대 이상의 것입니다.

    믿음이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케 하는 힘이라면 기대하는 바의 목적이 클수록 믿음도 그만큼 커야한다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도통의 목적과 피난의 목적을 비교해보고 피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시험과정을 통과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우리 도인들이 겪을 우여곡절과 도(道)에 대한 믿음의 크기가 얼마나 커야하는지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풍헌과 류훈장의 고사’처럼 우리 도인들도 도에 대한 믿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정직과 진실을 근본으로 정성에 정성을 다함으로써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토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 Q.

    교운 1장 38절의 두목과 수교자의 수에 대해 알려 주세요.

    먼저 교운 1장 3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상제께서 동곡에 머물고 계실 때 교운을 펴시니라. 종도 아홉 사람을 벌여 앉히고 갑칠에게 푸른 대(竹)나무를 마음대로 잘라 오게 명하셨도다. 갑칠이 잘라 온 대가 모두 열 마디인지라. 그중 한 마디를 끊고 가라사대 “이 한 마디는 두목이니 두목은 마음먹은 대로 왕래하고 유력할 것이며 남은 아홉 마디는 수교자의 수이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하늘에 별이 몇이나 나타났는가 보라”하셨도다. 갑칠이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더니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나 복판이 열려서 그 사이에 별 아홉이 반짝입니다”고 아뢰니라. 상제께서 “그것은 수교자의 수에 응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도다.

    이 구절은 상제님께서 동곡약방에서 상제님의 가르침이 장차 어떻게 펼쳐져 갈 것인가 하는 교운(敎運)을 보신 내용입니다. 김갑칠 종도가 대나무를 마음대로 잘라 오라는 말씀을 듣고 약방 뒤편 대나무 숲에서 잘라 온 대나무가 열 마디였습니다. 그 중 한 마디를 잘라 이 한 마디는 ‘두목’이고 나머지 아홉 마디는 ‘수교자의 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공사에 따라 하늘에 별이 아홉 개가 반짝이는데 이것은 수교자의 수에 응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내용에서 ‘두목’과 ‘수교자’가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로 보이는데 먼저 두목에 대한 의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두목(頭目)이란 어떤 단체나 조직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상제님의 교운이 펼쳐져 나가는데 어떠한 단체나 조직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 단체의 우두머리인 두목을 지칭하는 말씀이겠지요. 가져온 열 마디 대나무 중 한 마디를 가리켜 말씀하신 게 아니고 그 중의 한 마디를 잘라 이 한 마디는 두목이라고 말씀하신 게 특이합니다. 아마도 나머지 아홉 마디와는 별개의 존재적 가치를 의미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이 구절만으로는 두목의 뜻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대두목에 대한 말씀이 교운 1장 41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 주면 되려니와 도통될 때에는 유 불 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찌 내가 홀로 도통을 맡아 행하리오”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여기서 대두목은 일반적으로 두목보다는 좀 더 큰 두목이라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같다고 봅니다. 이 구절을 살펴보면 두목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두목은 상제님께 도통줄을 내려받고 마음먹은 대로 왕래하고 유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분이라고 해석됩니다.
    나머지 수교자(受敎者)는 도통줄을 내려받는 두목과는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지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는 분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운을 펴시는 그 장소에 종도 아홉이 모여 있었는데, 상제님을 모시고 공사를 받드는 일을 한 훌륭한 분들이지만 단지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는 종도로서의 역할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분명 두목과 수교자는 그 역할이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수교자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홉 마디는 수교자의 수라고 말씀하셨는데 9라는 숫자는 단순히 ‘숫자 9’의 뜻도 있지만, 숫자 중에 끝수로서 ‘수효가 많다.’든지 ‘모든’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예를 들면 구산(九山)은 중국에서 각 지방의 명산 아홉 개를 뜻하기도 하지만 많은 산을 뜻하고, 구주(九州)ㆍ구야(九野)ㆍ구유(九有)는 모든 땅인 천하를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그렇다면 수교자를 단순히 종도 아홉으로만 보지 않고 이 세상 모든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곧 상제님께서 가르침 혹은 덕화를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내리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가르침과 덕화를 내리시지만 도통줄은 특별한 존재인 두목(대두목)에게만 내리시겠다는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상제님으로부터 계시로써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께서는 그 증표로 1919년 정월 대보름날 정읍 마동에서 상제님의 누이이신 선돌부인으로부터 상제님의 봉서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1909년 4월 28일 상제님으로부터 봉천명하시고 1958년 3월 6일 화천하실 때까지 50년 공부종필하셨습니다. 이것은 공사 3장 37절의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과 ‘이윤의 도수’에 대해 말씀하시며 공사 보신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도주님께서 종통을 계승하신 분이라는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께서는 무극도를 창도하시고 상제님께서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이심을 밝혀 주셨습니다. 또한, 종단의 취지ㆍ신조ㆍ목적 및 시학ㆍ시법공부 법방 그리고 기타 종단의 모든 체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상제님의 종통을 계승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따라서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두목(대두목)은 바로 조정산 도주님인 것입니다. 물론 도주님께서 종통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에 대한 상제님의 예시적인 말씀이나 종통에 대한 공사 내용은 앞에서 말한 이외에도 『전경』에 많이 나옵니다. 상제님께서 물샐틈없는 도수를 짜 놓았다 하셨는데 종통에 대한 부분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간혹 도주님만을 두목(대두목)이라고 생각하는 도인들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도주님께서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도전님에게 전수하셨고, 도전이라는 직책도 도주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것이며 도전(都典)이라는 의미가 모든 법을 마음대로 쓰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도주님께서 짜놓으신 도의 모든 법을 마음대로 운용하시는 분이 도전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두목(대두목)인 도주님으로부터 유명으로 종통을 이으신 도전님 또한 두목(대두목)이라고 보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교운 1장 38절의 두목은 상제님께서 계시로써 종통을 내리신 도주님과 다시 유명으로 도주님으로부터 종통을 이어받으신 도전님을 의미합니다. 수교자는 상제님으로부터 단지 가르침을 받는 역할로서의 종도 아홉 명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홉의 9라는 숫자를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수교자는 이 세상 모든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Q.

    우리 도를 신도(神道)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도(道)를 신도(神道)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단순한 의미의 도(道)라는 말과는 확실히 그 의미가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 취지와 목적, 그리고 우주에 대한 이해 수준의 차이에 따라서 각기 다른 수많은 도가 있습니다. 본래 우주의 이치는 하나로서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도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 수많은 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들 모두가 인위적(人爲的)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도(道)를 신도(神道)라고 명명한 것은 응당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명확히 아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알지 못하고는 올바른 도를 닦을 수 없고 궁극적으로는 수도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진리이든지 그것을 성취하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각기 거기에 상응하는 방법과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도(道)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독특한 목적과 깨달음이 있고 이에 도달하기 위한 특별한 수도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고 큰 운수를 받으려면 반드시 먼저 신도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고, 그 목적과 취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여 그에 알맞은 수도법에 따라 일심(一心)으로 성ㆍ경ㆍ신(誠敬信)을 다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도(道)는 신도(神道)임을 누차 말하였으나 깨닫지 못함은 신도와 인위적(人爲的)인 사도(邪道)를 구별하지 못한 까닭이다”(『대순지침』39쪽)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우리는 인위적인 사도와 신도의 차이점을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들의 차이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올바른 신도의 각(覺)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에 맞는 수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인간들은 천지의 존재법칙(存在法則), 운행법칙(運行法則) 즉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인(聖人)들은 하늘이 내려준 우주의 이치를 보고 깨달아 인간들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인간들의 욕심과 아집, 편견, 독선 등으로 인하여 그 본래의 이치가 변질되고 올바르게 전해지지 못하였으니, 이렇게 해서 생긴 수많은 소산물들을 우리는 인위적인 사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 사도는 어느 정도는 진리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많은 부분이 변질되어 하늘과 땅의 이치를 거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 본래의 무욕청정한 마음자리로 돌아가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인간들을 병들게 하고 타락하게 하며, 또한 우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도라는 것은 인위가 아닌 신위(神爲)의 차원(次元)에서 이루어지고 운용(運用)되는 도(道)를 말합니다. 신(神)은 진리에 지극하다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신명(神明)은 인간처럼 편견ㆍ오만ㆍ아집 등이 없으니 천지의 이치를 어그러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는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공사 1장 3절)라는 말씀과 같이 모든 일을 근본적으로 신도로부터 해결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세상에는 신도 아닌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에 신명이 가득 차 있으니 비록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를 것이며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옮겨가면 무너지나니라.”(교법 3장 2절)라는 말씀에서 보더라도 천지만물이 신도안에 포용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이 신(神)으로 구성되어 있고 만사가 신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지므로 모든 것은 신의 일이고 모든 도는 신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신도란 보다 깊고 높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조그마한 신(神)의 차원에서 말하는 신도가 아니라 우주를 관장하는 높은 우주적 차원의 신명을 통한 신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제님께서 행하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잠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상제님께서는 천지신명들의 하소연에 의해 천하, 온 우주를 대순(大巡)하신 후 인세에 강세하셨습니다. 그리고 천ㆍ지ㆍ인(天地人) 삼계(三界)가 너무나 깊이 병들고 도수가 어그러져 이것을 뜯어 고치는 대역사(大役事)를 하신 것입니다. 선천(先天)의 세상이 지나친 상극(相克)으로 인하여 온 우주에 원이 가득 차 있어 이것을 뜯어 고치고 원을 풀어 상극(相克)도수를 상생(相生)도수로 바꾸시는 것을 천지공사라 합니다. 즉 온 우주, 온 천지를 개조(改造)함에 있어서 사사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신명들 즉 천지신명들의 참관 하에 공적(公的)으로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주관하는 것은 오직 우주의 조화주(造化主)이신 상제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이것을 함께 도울 수 있는 신은 바로 우주의 운행도수를 맡을 수 있는 천지신명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상제님께서 주관하시고 천지의 모든 대신명(大神明)들이 참여하여 짜 맞추어진 도수는 천부적인 종통(宗統) 계승에 의해 그 맥이 전해지게 됩니다. 우주개조(宇宙改造)를 위해 삼천(三遷)의 이치로서 맞추어진 도수로 인해 그 완성의 임무가 도주님,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십년공부종필(五十年工夫終畢) 도수(공사 3장 37절 참조)로써 도주님의 종통계승은 확정되었으니, 이를 알려주시기 위해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행록 5장 2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제님께서는 때로 금산사의 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 이름 하시고 세속에 있는 말의 양산도와 비유하시기도 하셨도다.”(예시 15절)라는 기록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이란 서울로부터 만방에 펼쳐 나가는 것…”(예시 46절)이라고 하여 대순진리회의 출현이 예시되어 있으니 이와 같은 것을 천부적 종통계승이라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도를 신도라 함은 상제님께서 천지신명들을 대동하고 우주를 뜯어 고쳐 새로운 후천(後天)을 창조하는 공사를 행하셨는데 이것이 완성되기 위해서 천부의 종통계승으로써 현재의 대순진리회가 창도 되었던 것인 바, 바로 이러한 우주적 차원의 신명에 의한 도라는 뜻으로 신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구천상제이신데, 구천(九天)이라 함은 이 우주를 총할하시는 가장 높은 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구천상제님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을 뜻하며, 하느님께서 천지 대신명을 벌여놓고 펼치신 도가 바로 우리 도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인위적인 사도와 대비하여 우리 도를 신도라 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를 해 나가면서 우리 도는 신도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도의 특징을 잘 밝혀 주는 것으로 수도의 엄격성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간 이 신도라는 말을 자신의 잘못된 언행을 합리화하는 데에 무심코 쓰게 되는 경우도 있고, 단지 신비주의에 치우쳐 사사로움을 감추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도가 말 그대로 신도임을 깨닫는다면 천지의 이치를 올바로 느끼고 모든 일을 경위에 맞게 처리하고 무자기를 바탕으로 어두운 방에서도 결코 자기를 속이지 않는 진실성을 가지고 수도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도(神道)라 함은 인간이 사사롭게 지어낸 도가 아니라 우주를 조화하시는 상제님께서 우주의 모든 대신명(大神明)들을 대동하고 우주를 개조하기 위해 공사를 행하시고 이에 따라 수도를 할 수 있도록 짜여진 도를 말합니다. 이러한 도를 행하는 목적은 인간개조, 정신개벽으로 신인조화(神人調化)를 이루어 우주의 모든 이치에 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시 인위(人爲)를 경계하고 심(心)을 곧게 세워 성(性)을 올바로 발휘함으로써 천리(天理)의 지극(至極)함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대순회보』 12호 - 「신도(神道)의 의미와 수도의 자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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