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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신원일 부친의 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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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2.06.05 조회4,4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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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91444_Daesoon_253_%EC%A0%84%EA%B2             ▲ 1871년 5월 한강어귀에서 촬영된 조선의 어선 / 출처: 위키백과

 

 

  『전경』에는 종도들과 그들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제생 16절~18절의 신원일과 그의 부친에 관한 이야기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는 신원일 종도가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한 1905(乙巳)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이 시기에 상제님께서는 신원일 부친의 어업을 흥왕하게 하시고 또 그의 채무를 탕감해 주기도 하셨다. 이 일화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상제께서 을사(乙巳)년 정월 그믐날에 … 상제께서 그를 부르니 원일이 와서 배알하고 상제를 자기 집에 모시고 공양하니라. 그의 아버지와 아우가 상제의 장기 체류를 싫어하므로 원일이 상제께 “가친이 본래 해마다 어업을 경영하다가 작년에 폭풍 때문에 큰 손해를 보았으니 선생님께서 금년에는 풍재를 없게 하여 주시면 가친을 위하여 행이 되겠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풍재를 없게 하고 어업을 흥왕케 하리니 많은 이익을 얻으면 후에 돈 千냥을 가져오라” 이르시니라. 원일의 부자가 기뻐하여 승낙하니라. 과연 말씀대로 그해에 풍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칠산 바다의 어업 중에서 원일의 아버지가 가장 흥왕하였도다.
(제생 16절)

 

  제생 16절에 따르면 신원일의 부친이 어업을 했던 곳은 칠산 바다이다. 칠산 바다는 전남 영광군 낙월면에 위치한 칠산도(七山島) 주변 해역을 말한다.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칠산도는 원래 육지였던 골짜기가 바닷물에 잠겨 7개의 섬이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칠산 바다는 칠산도를 중심으로 좁게는 법성포와 송이도 사이의 바다를 말하고, 넓게는 낙월도에서 전북 부안군 위도를 거쳐 군산시의 고군산군도에 이르는 너른 바다를 이른다.01
  위의 『전경』 구절에서 신원일 부친의 어업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어업을 경영하다’라는 말을 통해 신원일의 부친은 돈을 받으며 뱃일을 하는 선원이 아니라 선주로서 선원들을 고용하여 어업을 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또 어업이라고 하는 게 날씨가 좋으면 1년 중 많은 날을 조업할 수 있는데 ‘작년에 폭풍 때문에 큰 손해를 보았으니’라는 기록에서 그가 칠산 바다에서 집중적으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기에 풍재(風災)로 인해 고기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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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산 바다 (출처: 네이버 지도)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瑣錄』02을 살펴보면 칠산 바다에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고기가 무엇인지 찾을 수 있다. 『지도군총쇄록』에 따르면 칠산 바다에서는 해마다 고기가 많이 잡혀 조선 팔도에서 수천 척의 배가 모여들었다. 거래액만 해도 수십만 냥에 이르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잡히는 것이 조기라 하였다. 매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칠산 바다에 조기 어장이 형성된다. 그물을 치고 조기 잡는 배가 100여 척이나 되고, 매매된 조기를 조선 팔도로 실어나르는 수많은 상선(商船)까지 더해져서 칠산 바다에는 수천 척의 배가 모였다. 여기서 잡은 조기를 조선 팔도 사람이 함께 먹었다고 하니 당시 칠산 바다의 조기잡이가 얼마나 큰 규모로 이뤄졌는지 알 수 있다.
  『지도군총쇄록』의 내용 중에 칠산 바다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고기가 조기라는 말과 매년 봄 칠산 바다의 조기 어장에 조선 팔도의 배 수천 척이 모인다는 기록을 통해 신원일 부친이 폭풍 때문에 큰 손해를 본 것은 조기잡이로 짐작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제생 16절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1905년 초에 상제님으로부터 어업이 흥왕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신원일의 부친은 그해 봄 칠산 바다에 대규모의 조기 어장이 형성되었을 때 조기잡이에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상제님의 약조대로 그는 풍재 없는 칠산 바다에서 가장 많은 조기를 잡아서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원일 부친은 칠산 바다에서 얼마나 많은 조기를 잡았을까? 조선 팔도에서 모여든 배들의 숫자만으로도 그 양이 엄청났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신원일 부친의 어획량이 『전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비슷한 시기의 관련 자료를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1903년 위도 앞에서 조업했던 일본 안강망(鮟鱇網)03어선 1척이 하룻밤에 잡아 올린 조기는 풍어 시에는 48,000마리이고 흉어 시에는 20,000마리에 달했다고 한다.04 법성포나 무장, 흥덕 지역에서 조업했던 지예망(地曳網)05어선의 경우는 풍어 시에 1회에 수십만 마리를 잡았다고 한다.06 이 두 척의 배가 갖고 있던 어망의 종류와 조기를 잡았던 위치는 다르나 신원일의 부친이 풍재 없는 칠산 바다에서 가장 흥왕했다고 했으니 하룻밤에 적어도 48,000마리 이상 혹은 수십만 마리의 조기를 잡았을 것이다. 칠산 바다에서 조기잡이 할 때 불렀다는 “돈 실로 가자 돈 실로 가자 칠산 바다로 돈 실로 가자.”라는 뱃노래 가사가 절로 수긍되는 내용이다.

 

202203091444_Daesoon_253_%EC%A0%84%EA%B2  ▲ 복원된 서해 조기잡이 중선망어선(조선시대~근대) 시험 항해, 국립해양문화연구소, 「전통선박 조선기술」, 2009. p.176. (좌), 전통시장에 전시된 굴비(말린 조기) (우)

 


  이렇게 많은 조기는 얼마에 팔렸을까? 1905년 당시 평양에서 객주를 운영하던 박영조라는 사람은 생산 지역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하였는데 칠산 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가장 비싸게 책정하여 1,000마리를 100원에 팔았다.07 당시 1원은 5냥08에 해당하므로 1,000마리는 100원 즉, 500냥에 팔린 것이다. 이렇게 비싼 칠산 바다의 조기는 ‘곡우사리’라고도 불린다. ‘곡우사리’란 곡우(穀雨) 때가 되면 칠산 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를 말한다. 조기는 칠산 바다에 이르러 산란을 시작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알이 꽉 차고 영양이 풍부하여 맛도 좋다. 그래서 칠산 바다의 조기는 조기 중에 으뜸이고 가격 또한 가장 비쌌다.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았던 조기를 가장 많이 잡은 신원일 부친의 이익을 명확하게 계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가 잡은 조기의 양이나 조업 일수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09 다만 조기 어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사흘 벌어서 일 년 먹고산다.’10라는 옛말에서 그의 수입이 아주 많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원일의 부친은 많은 이익을 얻으면 상제님께 千냥을 드리기로 약조하였다. 1905년 평양의 박영조 객주의 도매가를 기준으로 볼 때, 千냥은 2,000마리 값에 해당한다. 이것을 시대는 다르지만 대략 계산해보기 위해 1903년 안강망 어선을 예로 들면 풍어기 하룻밤에 잡은 48,000마리는 24,000냥이 된다. 바다 위에서 조기잡이 배와 상선 사이에 거래되는 조기의 가격이 객주에서 거래되는 도매가보다 싼 것을 고려해도 그의 어업이 칠산 바다에서 가장 흥왕했으니 상제님과 약속한 千냥은 조기잡이로 벌어들인 이익에 비하면 아주 적은 금액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원일 부친은 상제님과 약속한 千냥을 보내오지 않았다. 상제님께서는 “이것은 대인에 대한 기만이니라. 나의 일은 일동이라도 사사롭게 못하나니 이제부터는 그대 집의 어업이 철폐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11 소탐대실이라는 말과 같이 신원일 부친은 千냥을 아끼려다가 어업이 철폐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면 1905년 봄 신원일의 부친은 상제님의 권능으로 조기 어업에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벌어들인 이익에 비해 얼마 되지 않은 千냥에 대한 그의 욕심은 상제님을 기만 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어업이 철폐되게 하였다. 이후 채무 변제 독촉에 시달리는 그를 측은히 여긴 상제님께서는 권능으로 그의 채무를 탕감해 주셨다.12 어려움에 처했던 신원일의 부친과 힘들었을 그의 가족에게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신 것이다. 이후 그가 상제님을 잘 모셨는지에 대한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일은 신원일이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01 『한국지명유래집』 참고.
02 전라남도 지도군(智島郡, 현 전남 신안군 지도읍)의 초대 군수로 부임했던 오횡묵(吳宖默)이 1895년 2월 공상소감동(工桑所監董)으로 지도군 초대 수령(守令)으로 내정된 때부터 1896년 5월 지도군에 부임해서 근무한 후 1897년 5월 여수군수가 되어 떠날 때까지 기록한 일기체 형식의 글이다. 『두산백과』.
03 안강망은 긴 주머니 모양의 그물로 조류가 빠른 곳에 큰 닻으로 고정한 후 조류에 밀리는 고기를 잡는다. 『표준국어대사전』.
04 박광순, 「위도(蝟島)의 조기파시(波市)에 관한 일고찰」, 『한국도서연구』 11(2000), p.6.
05 지예망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지인망(地引網)의 일종으로 강이나 바다에 넓게 둘러치고 여러 사람이 두 끝을 당겨서 고기를 잡는 큰 그물을 말한다. 『표준국어대사전』.
06 박광순, 앞의 논문, p.7.
07 오창현, 「18~20世紀 西海의 조기 漁業과 漁民文化」,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2), p.296.
08 1894년 7월 11일 조선 정부는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을 공포하여 은본위제를 도입한 후 1905년 6월부터 일본에 의한 화폐정리사업이 실시되기 전까지 1원=5냥으로 보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09 회유성 어류인 조기는 산란을 위해 곡우 때 칠산 바다에 도착해서 6월까지 평안북도의 대화도 근해까지 올라간다. 신원일 부친이 칠산 바다를 중심으로 조업했을 것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어선들이 조기의 이동을 따라가며 조업하므로 신원일 부친의 정확한 조기 어업 기간을 추측하기 어렵다.
10 김준, 「바다에서 바다를 보다」 156화, 《오마이뉴스》 2006.12.27.
11 제생 17절.
12 제생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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