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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금강수(金剛水)에 얽힌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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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03.19 조회5,1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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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도 바꾸지 않을 샘물 하나

허약해서 왔던 사람 튼튼해져 돌아가네,

신선들 마시던 물 틀림없구나,

누룩으로 빚은 술과는 비교 못하겠네.

어찌 가슴속만을 맑게 한다 하리?

정신까지 상쾌하여지네.

각자가 양대로 마시면,

세상 물욕은 한꺼번에 없어지리.

 


  이 시는 조선말기의 대유학자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금강산의 유명한 약수인 ‘금강수’를 마시고 읊은 것이다. 내금강의 백운동계곡에는 금강산 명승지의 하나인 백운대(白雲臺)가 있다. 아침이면 서리서리 감돌던 흰구름이 흩어지고 저녁에는 구름이 다시 산허리를 감는다는 백운대는 예로부터 내금강의 경치를 바라보기 좋은 전망대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는 하늘 높이 솟은 혈망봉과 법기봉, 그리고 골짜기 안에 굽이굽이 절경을 펼친 만폭동 등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바로 이 백운대 아래에 만병통치로 소문난 ‘금강수’라 불리는 샘물이 있다. 백운대에 올랐다가 마셔보지 않고는 떠날 수 없고 맛들이면 다시 찾게 된다는 좋은 샘물이다. 이 금강수와 관련된 일화들이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금강수’가 알려진 유래

 

  오래 전에 금강산 골짜기에는 백운학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한창 일할 나이였으나 속병이 있어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병마(病魔)에 시달려야만 했다. 운학은 자신의 병에 좋다는 약초란 약초는 모두 구하여 달여 먹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학은 금강산 약수를 찾아 마시면 병을 고칠 수 있다던 옛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약수를 마시는 것뿐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약수에 대해 말해왔지만 정작 그 약수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운학은 점심을 준비해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와 골짜기를 누비며 약수가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개월이 흘렀건만 바라던 약수가 나타나지 않아 점차 맥이 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기운을 내서 금강산에서도 아름다운 계곡으로 유명한 만폭동으로 들어갔다. 


  만폭동에서 운학은 여러 날 동안 골짜기 안을 누비고 다녔으나 이번에도 역시 허탕만 치고 말았다. 맥없이 지팡이를 끌고 내려오던 그는 한쪽 날개에 상처를 입은 백학 한 마리가 다른 쪽 날개를 퍼덕이며 백운대쪽으로 힘겹게 오르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슬금슬금 백학의 뒤를 쫓다가 백운대 밑에 이르렀다. 그는 얼른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백학을 바라보았다. 


  백학은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고여 샘물을 이룬 곳에 다가가더니 정신없이 물을 마신 다음 그 물을 입에 담았다가 다친 날갯죽지에도 바르는 것이었다. 잠시 후 백학은 상처 입은 날개를 퍼덕여 보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백운대를 한 바퀴 돌고 저 멀리 하늘로 훨훨 날아갔다. 


  눈앞에서 벌어진 신기한 광경에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운학은 ‘저 샘이 혹시 내가 찾고 있는 약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렇지 않아도 온종일 산을 타느라 목이 마르고 몹시 지쳐있었던 그는 샘물가에 이르자마자 맑은 물을 두 손에 담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쑤시고 저리던 팔과 다리의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맺혀있던 가슴속도 후련해지면서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였다. 원기를 회복한 운학은 기쁨에 복받쳐 “이 샘물이야말로 내가 찾던 금강수로다!”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운학은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끼니때마다 샘물을 마시며 지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고질병이던 속병을 완전히 고치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금강산의 사람들은 이 샘물을 가리켜 ‘금강수’라 불렀다. 금강수에 대한 소문은 차차 온 나라에 퍼졌고 조선 말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려고 만폭동 백운대 밑으로 찾아들었다고 한다.  
  


영접사(迎接使)의 인사

 

  불교의 성지로도 유명한 금강산의 금강수가 여러 가지 질병치료에 효과가 크다는 소문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파다하였다. 이러한 때에 조선의 사신이 자기가 부리던 마부를 중국에 데려가곤 했는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사신일행이 중국에 당도했을 때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영접사가 대뜸 사신보다 먼저 마부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관례를 벗어난 뜻밖의 일을 당하여 계면쩍기도 하고 언짢기도 했던 사신은 연회에서 영접사에게 왜 마부에게 먼저 절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영접사는 “마부는 금강산의 약수(금강수)를 마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사신은 그의 말을 듣고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오랫동안 자기를 따라다녔던 그 마부는 금강산 태생으로 중국으로 여러 번 오갔기 때문에 영접사와도 서로 구면이었다. 필경 마부가 조선의 명산 금강산에 있는 ‘금강수’에 대한 자랑을 했으리라 짐작한 사신은 지금까지 그 물을 마셔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임금의 명령으로 다시 사신의 중임을 맡고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 갈 때는 ‘금강수’를 꼭 마시고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출발 일정이 너무 촉박해 직접 가지는 못하고 마부로 하여금 ‘금강수’를 떠오게 해 겨우 그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이번에도 사신은 그 마부를 데리고 갔는데 국경을 넘어서니 지난번의 그 영접사가 미리 나와 사신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신은 이번에는 틀림없이 영접사가 자기에게 먼저 절을 하리라고 생각하며 벌써부터 흐뭇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영접사는 마부에게 먼저 절을 하더니 자기에게는 반절만 하는 것이었다. 사신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 사유를 따져 물으니,


  “마부는 생수(生水)를 마셨고 사신은 사수(死水)를 마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사신께서 고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우리나라에 오게 된 기일을 따져보면 매우 촉박하여 금강산에 가서 생수를 마시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니 생수를 마신 마부에게 큰절을 하고 약효가 절반도 안 되는 사수를 마셨을 사신께는 반절을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영접사의 말에 사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두 번이나 창피를 당한 사신은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중국에서도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는 ‘금강수’를 직접 마시고자 백운대부터 찾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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