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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야기영원암전설 탐욕스러운 중 명학의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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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1.12.20 조회4,0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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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금강 명경대구역의 영원동(靈源洞)은 조탑장에서 영원동 골짜기 막바지인 백마봉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금강산에서 가장 깊고 고요한 곳으로 알려진 영원동에는 개울 물 흐르는 소리, 이름 모를 새들이 우짖는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온다. 그런 가운데 우뚝 솟은 지장봉(地藏峰: 1,381m)을 배경으로 탁 트인 곳에 ‘영원암(靈源庵) 터’가 자리하고 있다. 영원암 터 서쪽에는 여기저기 높이 솟은 봉우리들이 있고 기묘한 돌기둥들도 들쑥날쑥 서 있다. 지금은 소실되고 없지만 영원암은 금강산 일원에서도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알려졌었다. 신라 때 영원조사(靈源祖師)01라는 스님이 이곳에 살면서 도를 닦았는데 그와 그의 스승인 명학(明學)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경상도 동래군 범어사(梵魚寺)에는 명학이란 스님이 사찰의 방앗간과 전답 관리의 책임을 져서 수천 석이 넘는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의 근면으로 사찰의 재산이 많이 늘었고, 그도 보수로 받은 것과 방앗간 바닥에 떨어진 쌀을 주워 모아 저축한 것이 적지 않았다. 명학은 승려의 신분이었지만 이렇게 모은 쌀을 빌려주고 이자를 놓아 사유재산이 많아졌다. 그래도 그는 물욕(物慾)을 버리지 못하고 재산을 늘리는 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명학은 비록 학문과 지식이 없었으나 백여 명이 넘는 행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중에 영원(靈源)이란 상좌(上佐: 스승의 대를 이을 여러 승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가 있었는데, 그는 스승과 달리 재물에 대한 욕심을 초월한 채 오직 참선공부에만 전념하였다. 명학도 이를 기특하게 여겨 항상 말하기를, “나는 행자가 백여 명이 되어도 쓸 만한 자는 우리 영원이 하나밖에 없어….” 하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가끔 영원이 찾아오면, “내가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지 모르니 내가 죽거든 자네가 천도(薦度)를 잘해주게….” 하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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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어느 날 영원은 불도(佛道)를 깨치려면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스승인 명학에게 금강산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명학은 그를 만류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주었다. 이에 영원은 혼자서 금강산 깊은 골짜기인 영원동에 들어가서 경치 좋은 곳에 암자를 짓고, 십여 년 동안 마음 수양에 힘쓴 결과 불법을 깨닫게 되었다.

 

  하루는 영원조사가 영원암에서 참선하던 중 선정(禪定)에 들었는데, 명경대 앞의 시왕봉(十王峯) 밑에서 죄인을 다스리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듯 들려왔다. 살펴보니 염라대왕이 좌정하고 판관들이 늘어선 가운데, “이번에는 범어사의 중 명학을 데려오너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지옥사자가 “네이!” 하고 대답하더니, 명학을 끌어내어 뜰 앞에 꿇어앉혔다.

 

  염라대왕이, “너는 일찍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면 계행(戒行)을 잘 지키고 도를 닦아 중생을 구제해야 하거늘 어찌 이를 망각하고 재물을 탐하다가 죄를 지어 이곳에 왔느냐?” 하고 문초하였다.

 

  “저는 비록 공부는 못하였으나 죄를 지은 일은 없습니다.”

 

  “네가 승려의 신분으로 재물을 모아 천석꾼이 되었는데도 죄가 없다고 하겠느냐?”

 

  “그것은 제가 재물을 모으는 데 재미를 붙여서 쓸 것 안 쓰고 먹을 것을 먹지 않아 모은 재산일 뿐입니다. 결코 남의 것을 빼앗거나 해코지를 하여 부자가 된 것은 아니 오니 저는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놈, 잔소리 마라. 너는 부처님이 설한 계율을 지키지 않았을뿐더러 재물을 모으고자 남에게 부당한 처사를 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느냐!”

 

  “저의 재산은 사찰을 관리하고 보시하기 위한 것일 뿐이옵고, 다른 죄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자백을 아니하고 버티는 것이냐! 여봐라 명경(明鏡)을 가져오너라.”

 

  염라대왕이 명경으로 명학을 비추니 그가 생전에 행했던 잘못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림처럼 나타났다. 이를 본 명학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숙였다.

 

  “네가 지금 똑똑히 보았겠지. 이래도 딴 말을 하겠느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가 중이었던 것을 고려해서 무서운 지옥에 보내지 않고 구렁이 의 형체를 씌워 보낼 것이니, 천 년 동안 엎드려서 반성해 보아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명학은 “우리 상좌 영원의 행실을 본받았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영원아, 부디 네가 나를 잘 천도해다오.”

 

  이런 스승의 목소리가 영원조사의 귓전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는 급히 시왕봉(十王峯) 아래에 가서 염불과 독경을 하였고, 그 길로 바랑을 메고 수백 리나 떨어진 범어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범어사에 가보니 스승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명학의 49잿날을 맞아 백여 명의 행자들을 비롯해 사찰의 스님과 전답지의 소작인까지 모여 법석거리고 있었다.

 

  영원조사가 슬피 울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절간에 있던 여러 스님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너는 남의 상좌인데 어디 가서 떠돌다가 십 년 넘게 돌아오지 않았느냐. 지금 비로소 돌아온 것을 보니 분명히 스승의 재산을 나누어 가지려는 속셈인 게로구나.” 하고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런 소리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잘못을 사죄했다. 그리고 쌀을 구해 멀겋게 죽을 쑤어서 큰 그릇에 담아 창고 앞에 두고, 명학의 혼백이 나오기를 바라며 축원하였다. 그랬더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창고에서 기어 나왔다.

 

  영원조사는 “스님, 이러한 업보(業報)을 받은 것은 전생에 불·법·승 삼보(三寶)와 계행을 지키지 않고 탐심으로 재물을 모은 까닭입니다. 이 죽을 잡수시고 속히 해탈하여 허물을 벗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구렁이가 눈물을 흘리며 죽을 다 먹은 뒤에 영원에게 말했다.

 

  “슬프도다! 스님이여! 헛된 것들을 사랑하고 집착하지 말았어야 했거늘….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허물에서 벗어나고자 하오이다.”

 

  말이 끝나자 구렁이는 스스로 머리를 들어 땅에 세 번 곤두박고 죽었다. 이를 지켜본 승려들이 매우 놀라는 와중에 구렁이 밑에서 파랑새가 나오더니 어디론가 날아갔다. 영원조사가 이것을 놓치지 않고 뒤쫓아 가니 어떤 마을의 전씨(全氏) 집 안방으로 들어간다.

 

  다음 날 영원조사가 그 집에 가서 말하기를 “이 댁에서 열 달만 지나면 반드시 귀한 동자를 낳을 것이니, 애지중지 잘 키워 7세가 되거든 나에게 맡겨 도를 닦게 하시오.”라고 당부하였다. 그 집주인은 “스님의 말을 명심하여 꼭 그대로 하겠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열 달이 되니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단정하였다. 그 집주인은 이 아이를 잘 키워 7년 후에 찾아온 영원조사에게 맡겼다. 그는 아이를 영원암으로 데려가서 방안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그리고 문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 이 문구멍으로 문 앞에 있는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열심히 정진하라고 일러주었다. 동자는 똑바로 앉아 밤낮으로 공부하더니 문구멍으로 황소가 뛰어드는 것을 보고 오도(悟道)하여 전생의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동자가 영원조사를 보고 말하기를, “스님이 전생에 나의 상좌였구려! 그런데 이제는 스님이 나의 스승이 되어 내가 스님의 어린 상좌가 되었군요.”

 

  “그렇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因果)라는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원조사는 7세 동자와 전생의 일을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웠고, 두 스님은 같은 도인으로서 오랫동안 금강산에 머물면서 수도에 정진하였다. 이후 명학의 후신인 이 스님을 후원조사(다시 태어나 불도에 통달한 스님)라 하였고, 영원조사가 지은 암자를 영원암(靈源庵)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01 조사(祖師): 불교에서 1종(宗)이나 1파(派)를 세우거나 혹은 뛰어난 행적을 남긴 승려를 비롯하여 사찰의 창건자 등에게 붙이는 호칭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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