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신명경칩(驚蟄) 절후를 관장하는 고사렴(高士廉)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26 조회5,510회 댓글0건본문
▲ 고사렴(高士廉)
고검(高儉, 577~647)은 자(字)가 사렴(士廉)인데 자(字)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제(齊)01 청하왕(淸河王) 고악(高岳)의 손자(孫子)이며 아버지는 악안왕(樂安王) 고려(高勵)인데 수(隋)에서 조주자사(州刺史)를 지냈다. 고사렴은 민첩하며 지혜롭고 도량이 있었다. 그의 용모는 마치 그림과 같았고 한 번 본 책은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으며 점(占)치는 일도 잘했다.
수나라 사예대부(司隸大夫)인 설도형(薛道衡)과 기거사인(起居舍人) 최조준(崔祖濬)은 모두 나라의 중신들로 존중을 받았는데 고사렴이 이들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맺어 이로 인해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망국(亡國) 제(齊)의 종친(宗親)으로 널리 교유(交遊)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남산(終南山)02 아래에서 숨어살았다. 이부시랑(吏部侍郞) 고효기(高孝基)가 출사(出仕)를 권하니 인수[仁壽, 수(隋) 문제(文帝)의 연호, 601~604] 년간(年間)에 과거시험을 보아 치예랑(治禮郞)이 되었다.
613년 수(隋) 양제(煬帝)는 전년의 고구려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2차 원정을 감행하였다. 이때 예부상서(禮部尙書) 양현감(楊玄感, ?~613)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제는 원정을 중단하고 군대를 돌려 이 반란을 진압하였다. 수나라의 고위 관료들 중에는 양현감 반란에 동조한 이들이 많았는데 병부시랑(兵部侍郞)인 곡사정(斛斯政, ?~614)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양현감의 반란에 동조한 사실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평소 곡사정과 친분이 있던 고사렴은 단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주연(朱鳶) 주부(主簿)로 좌천되었다. 주연(朱鳶)은 한(漢)나라 시절부터 월남(越南) 경내에 두었던 현으로 고사렴에게 유배(流配)나 다름없는 발령이었다.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멀기도 했지만 풍토병이 있는 곳으로 연로하신 노모를 봉양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고사렴은 아내 선우(鮮于)씨로 하여금 노모를 봉양케 하고는 임지(任地)로 떠났다.
때는 천하대란(天下大亂)이라고 할 시기였다. 참담한 실패로 끝난 고구려 원정과 연이은 실정(失政)으로 중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월남에서 수도로 가는 길이 끊어졌는데 교지(交趾)03 태수인 구화(丘和)가 고사렴을 사법서좌(司法書佐)에 임명했다.
이때 흠주(欽州)04의 장수인 녕장진(長眞)이 군사를 이끌고 교지를 침공하니 교지 태수 구화는 녕장진을 두려워하여 항복하려고 하였다. 고사렴이 구화에게 말하기를 “녕장진의 군사가 비록 그 수가 많다 하더라도 일개 현의 군사로 멀리까지 왔으니 세력을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성내에는 병사들이 많으니 여전히 싸울만합니다. 어찌 남의 다스림을 받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구화는 고사렴을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삼아 녕장진을 격파했다.
622년[무덕(武德) 5년]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사신을 보내 영남(嶺南)05 지역을 돌아보게 하니 고사렴은 구화와 더불어 당(唐)에 투항했다. 이때 진왕(秦王) 이세민은 옹주(擁州)의 목(牧)으로 있었는데 고조에게 고사렴을 천거하여 치중(治中)이 되게 하고 그를 중시했다. 고사렴은 사적(私的)으로 이세민의 처외삼촌이다. 이세민은 16세에 당시 13세였든 장손(長孫)씨와 혼인하게 된다. 이 장손 씨는 뒷날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문덕황후(文德皇后)가 되는데 장손무기(長孫無忌)의 여동생이다. 장손무기와 장손 씨는 부친인 장손성(長孫晟)이 사망할 당시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였던 까닭에 외숙(外叔)인 고사렴에 맡겨진다. 고사렴은 이세민이 비상한 인물임을 감지하고 장손씨를 출가(出嫁)시켜 당(唐) 황실의 인척(姻戚)이 된 것이다.
현무문의 정변에서 큰 공을 세움
고사렴은 이세민이 등극하는 데에도 공을 세우게 된다.
태자 건성과 이세민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626년(武德 9년) 돌궐이 변경을 침공하자 고조는 제왕(齊王) 원길(元吉)을 돌궐 원정의 총사령관에 임명하게 된다. 태자(太子) 건성(建成)과 제왕 원길은 이 원정군의 환송연을 이용하여 이세민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이세민이 사전 탐지하게 되었다. 이세민이 이러한 음모를 고조에게 고하자 고조는 다음날 이들과 함께 이세민의 소환을 명하였다. 그리고 이세민과 측근들은 태자와 제왕이 고조의 부름에 응하여 입궐하기를 기다려 이들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무덕 9년 6월 4일. 태자 건성과 제왕 원길은 궁성 내부의 상황 파악을 위해 일단의 호위병들과 같이 궁성의 북쪽 정문인 현무문(玄武門)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호위병을 문 밖에 두고 현무문에 들어섰다. 현무문 경비의 책임자는 원래 태자 건성의 사람이었으나 이때는 이미 이세민 측에 매수되어 고사렴,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 절후를 관장], 울지경덕[蔚遲敬德, 춘분(春分) 절후를 관장], 후군집[侯君集, 처서(處暑) 절후를 관장], 장공근[張公謹, 백로(白露) 절후를 관장] 등 진왕부(秦王府)의 측근과 병사들의 매복을 돕고 있는 형편이었다.
태자와 제왕은 현무문에 들어서고 한참 뒤에야 자신들이 사지(死地)에 들어섰음을 알게 되었지만 시기가 너무 늦은 때였다. 이들은 이세민과 울지경덕에 의해 처단되었다. 현무문 밖에 있던 이들의 호위병들이 뒤늦게 변고(變故)가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동궁(東宮)과 제왕부(齊王府)의 군사들이 합세하여 2천의 병력이 현무문 돌파를 시도하였다. 현무문은 원래 경비병의 숫자도 적었고 진왕부의 관속(官屬)들도 얼마 되지 않아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고사렴은 일단의 병사들을 이끌고 감옥으로 갔다. 그는 죄수들을 풀어 이들을 무장시켜서 현무문과 가까운 방림문(芳林門)으로 달려가 싸움을 도왔고 이로 인해 현무문을 지켜낼 수 있었다. 고사렴의 기지(機智)가 아니었다면 사태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역사에 ‘현무문의 변(變)’으로 기록된 이 일로 태자 건성과 제왕 원길이 제거되었다. 이 일로 크게 놀란 고조 이연은 이세민을 태자에 책봉하고 모든 일은 태자가 처결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퇴진하였다. 이로써 이세민은 태자이면서 황제나 다름없는 실권을 쥐게 되고 다음해 즉위하니 그가 당의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이다.
이세민이 태자가 되었을 때 고사렴을 동궁부에 소속된 우서자(右庶子)에 임명하였고 다시 시중(侍中)으로 승진되었으며 의흥군공(義興郡公)에 봉(封)해졌다. 그러나 고사렴은 태자 건성을 따르던 왕규(王珪)를 숨겨두고 제 때에 보고하지 않은 일 때문에 안주도독(安州都督)으로 좌천(左遷)되었다.
이후 고사렴이 익주(益州) 대도독부(大都督府)의 장사(長史)로 임명되어 촉(蜀)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방 사람들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질병을 혐오하여 비록 부모라고 해도 병에 걸리면 모두 그들을 버리고 갈 뿐만 아니라 멀리서 부모가 있는 집으로 음식을 던져 연명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인심이 각박하다 보니 비록 형제라고 해도 서로 재물을 빌려주지 않았다.
고사렴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펴고 사람의 도리를 널리 알려 이러한 풍속을 바로 잡도록 감독하고 또한 장려하니 풍속이 크게 변했다. 그리고 유생들을 데려다가 경전(經典)과 무예(武藝)를 가르치니 학교가 다시 흥기했다.
촉 지방은 진(秦)나라 때 이빙(李氷)06이 수로를 만들어 문강(汶江)의 물을 끌어 들였는데 물가에 있는 전답은 일경(一頃)에 천금(千金)을 호가하였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시대에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재산상 이득이 컸기 때문에 백성들 간에는 물가의 전답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고사렴은 수로를 확장하여 물길을 나누고 여러 곳에서 물을 끌어 쓸 수 있도록 하니 백성들이 부유해졌다.
고사렴은 조정에 들어와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고 허국공(許國公)으로 승진(昇進)되어 봉(封)해졌다. 평소 그는 감식안(鑑識眼)이 있다고 자부하였고 또한 각 성씨(姓氏)의 족보에도 밝아서 사람들을 관리로 임용함에 있어 가문이나 출신지역에 타당치 않은 적이 없었다. 635년[정관(貞觀) 9년] 고조 이연이 71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하였는데 고사렴이 사공(司公)을 겸하여 제왕의 무덤에 관한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는 이 공로로 특진(特進)되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다. 고사렴이 복야(僕射)07가 되면서 그의 집안은 삼대(三代)가 이 관직을 지내게 되니 세상 사람들이 더할 수 없는 부귀영화로 여겼다.
태종이 낙양(洛陽)에 행차하여 태자가 나라의 일을 보살피게 하고 고사렴을 태자소사(太子少師)로 삼아 돕도록 했다. 태종이 직접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낙양 지역을 다스리면서 관중[關中, 지금 중국 섬서성(陝西省) 지방] 땅을 걱정치 않는 것은 경(卿)에게 맡겨 두었기 때문이오.”라고 하며 고사렴을 치하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사렴이 관직을 그만둘 것을 청하자 허락하여 복야(僕射)의 직을 그만두게 하였지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더불어 중서문하삼품(中書門下三品)에 임명하여 정사(政事)에 참여케 했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태자는 나라를 보살피며 정주(定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고사렴을 태부(太傅)로 임명하여 나라의 중요한 일을 관장케 했다. 태자가 말하기를 “과인은 공의 가르침을 입어 근래에 정사를 다스리게 되었소. 책상에 앉아서 공을 대하자니 과인의 마음이 편치 못하오. 응당 별도의 책상을 마련하여 태부(太傅)를 받들도록 하겠오.”라고 하니 고사렴이 굳이 사양했다.
고사렴이 정주(定州)에서 돌아와 병주(幷州)에 이르렀는데 병에 걸렸다. 태종이 친히 고사렴이 거처하는 곳에 행차하여 병문안을 했다. 647년(貞觀 21년) 고사렴의 병이 더욱 심해지자 태종이 그의 집에 행차하여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이때 고사렴이 천명을 다하니 그의 나이 71세였다. 태종이 조문(弔問)하려고 하니 방현령이 간언(諫言)하기를 “단약(丹藥)을 복용하고 있으시므로 상가(喪家)에 가셔서는 안됩니다.”고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짐의 이번 행차는 군신간의 예(禮) 때문만은 아니다. 고사렴은 짐과 옛 정(情)이 깊고 짐의 인척(姻戚)이다. 경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곧 기병(騎兵) 수 백기를 이끌고 궁을 나섰다. 태종이 고사렴의 집 앞에 이르니 장손무기가 말 앞에 엎드려 고사렴의 유언을 전하면서 문상(問喪)을 막았으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손무기가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 문상을 막으니 태종이 궁궐로 돌아와 남쪽을 보면서 곡(哭)했다.
조서를 내려 사도(司徒)와 병주도독(幷州都督)을 증직(贈職)하고 시호(諡號)를 문헌(文獻)이라 했으며 태종과 문덕황후의 합장릉인 소릉(昭陵, 현재 섬서성(陝西省) 예천현(禮泉縣) 소재)에 배장(陪葬)했다. 바야흐로 한식(寒食) 날이 되자 상궁에게 명하여 네 수레분의 음식을 가지고 가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제문(祭文)은 태종이 직접 썼다. 태종은 상여가 횡교(橫橋)를 벗어나자 성의 서북쪽 망루에 올라 멀리서 바라보고 곡(哭)하며 전송했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태위(太尉)를 증직(贈職)하고 태종의 묘정(廟廷)에 제사지냈다.
고사렴은 행동이 점잖고 품위가 있었다. 무릇 임금에게 말을 아뢸 때는 홀(笏)08에 기록하여 그것을 보면서 말했다. 나이 어린 태종을 보고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장손 씨를 출가케 하여 그녀가 문덕황후(文德皇后)가 된 것도 다 고사렴에게 사람 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임하여서는 자신의 묘(墓)에 오직 옷 한 벌이면 족하다고 하면서 다른 부장품(副葬品)은 넣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평생 책 보기를 즐겼고 선왕(先王)의 가르침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01 북제(北齊, 550~577). 후한(後漢) 이후 중국을 재통일한 진(晉)에서 내란(內亂)이 발생하고 이를 틈탄 북방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으로 중국은 양자강을 경계로 남북조(南北朝)로 갈라지게 된다. 북제(北齊)는 동위(東魏)의 실권자였던 고양(高洋)이 세운 나라로 남조(南朝)에도 제(齊)가 있었음으로 이를 구분하기 위해 북제라고 하며 5주(主) 22년 동안 폭군(暴君)과 암군(暗君)들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었고 577년 후주(後周)에 병합되었다.
02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남동쪽에 있는 산. 주남산(周南山), 중남산(中南山), 남산이라고도 한다.
03 한 대(漢代)에 둔 군(郡)의 이름. 현재 베트남의 북부의 통킹, 하노이 지방.
04 수 대(隋代) 광서(廣西) 장족(壯族) 자치구(自治區) 흠주(欽州) 시 북동쪽에 둔 주(州).
05 오령(五嶺)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광동(廣東), 광서(廣西), 안남(安南) 지역.
06 이빙(李氷).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 사람. 소왕(昭王) 때 촉군태수(蜀郡太守)가 되어 제언(堤堰)을 쌓아 관개시설을 하고 물길을 뚫어 촉군을 옥야천리(沃野千里)로 만들었다. (檀國大學校東洋學硏究所, 『漢韓大辭典』6, pp. 1211~1212, 2003 참조.)
07 진(秦)나라 때는 활 쏘는 것을 맡은 벼슬이었다. 한(漢)나라에서는 건시(建始) 4년(B.C. 29) 상서(尙書) 5인 중 한 사람을 복야로 삼았고 권한이 중해져서 건안(建安) 4년(199)에 좌, 우복야를 두었는데 당(唐) 나라 이후에는 상서성(尙書省)의 장관을 지칭한다. 송나라 이후에는 폐하였다.
08 천자(天子) 이하 공경(公卿) 사대부(士大夫)가 조복(朝服)을 입었을 때 띠에 끼고 다니는 것. 군명(君命)을 받았을 때는 이것을 기록해 둠. 옥(玉), 상아(象牙), 대나무 등으로 만들었음.
<대순회보 89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