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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 신명청명(淸明) 절후를 관장하는 이정(李靖)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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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2.21 조회5,4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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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에 정통하고 관료로도 인정을 받았던 이정

 

이정(李靖, 571~649)의 자(字)는 약사(藥師)이고 경조[京兆,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북쪽] 삼원(三原)사람이다. 이정은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서사(書史)에 통달했다. 그의 조부(祖父) 이숭의(李崇義)는 북위(北魏, 386~534)에서 은주자사(殷州刺史)를 지냈고 아버지 이전(李詮)은 수(隋, 581~618)나라에서 태수(太守)를 지냈다.

 

벼슬을 하기 전 이정은 친구에게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대장부라면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主君)과 조우(遭遇)하여 때를 만나면 마땅히 공명(功名)을 세워 부귀(富貴)를 누려야지 어찌 문장이나 짓는 유학자(儒學者)가 될 소냐.”

 

그의 외삼촌 한금호(韓擒虎, 538~592)는 이름난 장수로 이정과 더불어 매번 병법을 논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정의 재주에 감탄하여 말하길 “이 사람이 아니면 누가 손자(孫子), 오자(吳子)와 더불어 이야기할 것인가.”라고 할 정도였다.

 

이후 이정은 수나라에서 벼슬하여 전내직장(殿內直長)이 되었는데 이부상서(吏部尙書) 우홍(牛弘, 545~610)이 이정을 보고 말했다.

 

“임금을 보필할 인재로다.”

 

그리고 좌복야(左僕射) 양소(楊素, ?~606)는 자기의 자리를 어루만지며 말하길 “그대는 종내 이 자리에 앉아야 마땅하오.”라고 하였다. 이처럼 이정은 병법에 정통했고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실력 있는 관료였다.

 

이정은 대업[大業, 양제(煬帝)의 연호로 605~616] 말년에 마읍[馬邑, 현재 산서성(山西省) 삭현(朔縣)]의 군승(郡丞)이 되었다. 그는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돌궐을 공격할 때에 이미 반란의 뜻이 있음을 알아채고 중앙정부에 ‘이연의 반란’을 보고했다.

 

이정이 ‘이연의 반란’을 보고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전후 사정이 있었다. 수문제(隋文帝)의 독고황후(獨孤皇后)는 이연의 이모가 된다. 이런 까닭으로 이연은 가문도 좋았지만 황후의 총애가 더해져 그의 출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수양제(隋煬帝)가 등극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수양제는 자신 주변의 세력이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였다. 게다가 당시에 수양제에게 “이씨가 마땅히 황제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권고한 방사(方士)01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연은 자신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수양제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수양제는 이연을 태원유수(太原留守)로 임명하면서도 그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마읍(馬邑)과 같이 태원 주변의 지역에 파견된 관리들에게는 이연 감시의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이연으로선 자신을 감시하는 관리들이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정이 이연의 모반을 감지하고 보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연을 계속적으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이연의 모반을 알린 이정의 보고서가 중앙정부에 제대로 전달되었다면 이연은 장안(長安)으로 소환되어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연의 입장에선 다행스럽게도 이미 중국 전역을 뒤덮은 반란의 물결로 인하여 장안으로 이르는 길이 막혔기 때문에 이정의 보고서도 전달되지 못했다.

 

이연이 장안을 점령하면서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 618~907)이 성립하였다. 이정의 행동은 수나라의 관료라는 자신의 신분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이연의 입장에선 반드시 응징해야 할 사안이었다. 이연은 이정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이정의 나이 48세였다. 이정으로선 공명을 세워 부귀를 누리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한 생애를 마쳐야 하는 순간이었다. 이정이 큰 소리로 이연에게 호소했다.

 

“공(公)께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본래 천하를 위하여 난폭한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심이 아닙니까? 큰일을 이루고자 하시면서 사사로운 원한으로 정의로운 선비를 죽이시겠습니까?”

 

죽음을 앞둔 사람이 단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대의명분에 호소하고 자신은 지금 죽임을 당한다면 그것은 ‘공이 나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더니 그런 사적(私的)인 원한이 나를 죽이고자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아니냐.’는 뜻이 담긴 이 당찬 언사(言辭)는 이연의 마음을 움직였다. 때를 놓치지 않고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이정을 살려 줄 것을 청(請)하니 이정은 곧 석방되었다. 곧이어 이정은 진왕부(秦王府)의 삼위(三衛)로 발탁되었고 이세민을 좇아 왕세충(王世充, ?~622)02을 평정하는 데 일조(一助)하여 그 공로로 개부(開府)03를 배수(拜受) 받았다.

 

 

천하대란의 평정에 큰 공을 세움

 

619[무덕(武德) 2]년 소선(蕭銑, 583~621)04이 강릉(江陵)05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정에게 이를 잘 무마하라는 조서(詔書)가 내려졌다. 이정이 경기병(輕騎兵)를 거느리고 소선의 토벌을 위해 가던 중 금주(金州)06를 지나가다가 도적(盜賊) 등세락(鄧世洛)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계곡 사이에 주둔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미 왕세충과 두건덕(竇建德, 573~621)07을 비롯한 당 창업과 존립에 위협이 되는 주요한 세력들이 제거되었다고는 하지만 수나라 말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이 완전히 평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등세락과 같은 무리들은 어디라도 있었다. 이 등세락의 토벌은 여강왕(廬江王) 이원(李瑗)이 책임을 진 것이었는데 그는 여러 차례 토벌에 나섰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정으로선 소선의 토벌이 먼저였지만 난감해 하고 있는 이원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정은 이원을 도와 계책을 수립하여 여러 번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등세락을 물리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이정이 협주(峽州)08에 다다랐을 때 그는 소선의 군대에 저지당하여 오랫동안 전진할 수 없었다. 이미 등세락을 토벌하는 데 시간을 소요하고 소선의 토벌에도 진전이 없자 한시가 급했던 고조는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고조가 이정을 살려두긴 했지만 그의 마음에 이정은 썩 내키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고조는 협주도독(州都督) 허소(許紹)에게 밀명(密命)을 내려 이정의 목을 베라고 지시했다.

 

허소는 고조 이연의 오랜 친구였다. 허소는 이정이 죽이기에는 아까운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고 고조를 설득하여 그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때 개주[開州, 사천성(四川省) 개현(開縣)]의 수장(首長)이던 염조즉(肇則)이 반란을 일으켜 기주(夔州)09를 약탈하니 조군왕(趙郡王) 효공[孝恭, 소한(小寒) 절후를 관장]이 이들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전세(戰勢)는 효공에게 불리하였다. 이는 지역을 근거로 한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면 중앙정부로서는 이를 진압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들은 그 지역의 지리에 정통하고 또한 지역민들에게 실질적인 통치자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제 중앙에서 갓 파견된 군대는 그 군대가 아무리 정예(精銳)라고 해도 지역의 사정과 인물에 대해 어두울 수밖에 없고 이는 작전을 수행하는 데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이정은 소선의 토벌을 일단 접어두고 염조즉의 토벌에 나섰다. 이정이 병사 800을 이끌고 먼저 염조즉의 진영을 기습하여 이들의 전열을 분산시켰다. 이정의 기습에 놀라기는 했지만 염조즉은 얼마 되는 않는 군사로부터 습격 받은 것을 알고 즉시 전열을 정비하여 당군(唐軍)과의 일전(一戰)에 대비하였다. 이정은 염조즉이 전열을 재정비할 동안 군사적 요충지에 복병(伏兵)을 배치하고 다시 맞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정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염조즉의 군대는 이정의 복병에 걸려 염조즉과 그의 부하 5,000이 사로 잡혔다. 이는 이정의 전술이 얼마나 탁월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이정은 염조즉의 목을 벰으로써 이 지역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이정의 연이은 승전보(勝戰譜)에 고조는 크게 기뻐하였다. 고조는 조서를 내려 이정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卿)은 힘과 정성을 다하여 큰 공을 세웠으니 그 공훈은 특별히 표창할 만한 것이다. 멀리서 그 지극한 정성을 보아 큰 상을 내릴 것이니 이제 부귀(富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고조는 손수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은 그대의 지난 허물은 잊은 지 오래되었다.”라고 하였다.

 

621(무덕 4)년 이정은 소선 토벌의 세부 계획 10책(策)을 올리니 고조가 이를 승인하였다. 한편 고조는 효공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토벌군을 다시 조직했다. 이정은 행군총관(行軍總管)과 행군장사(行軍長史)를 겸하여 군정(軍政)에 관한 모든 일을 맡게 되었다.

 

 

이해 8월. 소선 토벌을 위한 대병력이 기주(夔州)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가을 장마로 양자강(揚子江)의 물이 불어 삼협(三峽)10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였다. 소선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군(唐軍)이 진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면서 당군(唐軍)의 내습(來襲)에 대비하지 않았다.

 

9월. 이정은 군대를 진군시켜 삼협 아래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총사령관 효공을 위시한 제장(諸將)들의 전략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진군(進軍)을 멈추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러나 이정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군대의 운용에서 신속(神速)함은 최고의 덕목입니다. 이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대병력을 소집하여 여기까지 온 것을 소선(蕭銑)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을장마로 불어난 물과 같이 질풍노도로 적을 공격한다면 이것이 상책(上策)입니다. 적들이 능히 군사를 소집한다고 해도 갑자기 소집된 군대가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소선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군의 진군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총사령관인 효공이 이정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고 당군은 이릉(夷陵)11까지 진격했다. 이때 소선의 장수 문사홍(文士弘)이 정병(精兵) 수만을 거느리고 청강(淸江)에 주둔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효공은 당장 이들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정은 이 공격에 반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가(不可)합니다. 소선의 장수 문사홍은 뛰어난 장수이고 그의 군사들도 정예병입니다. 이제 그들이 형문성(荊門城)을 잃었으니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설욕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적을 상대하여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마땅히 남안(南岸)에 주둔하시어 적들의 예기(銳氣)가 꺾이기를 기다린 연후에 공격하신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효공은 이번에는 이정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신속하게 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책(上策)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이 갑자기 때를 기다리자고 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대의 운용에서 임기응변(臨機應變)이란 실로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이정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효공은 자신의 뜻대로 공격하기로 하고 이정은 진영에 남기로 했다.

 

과연 이정의 예측대로 효공은 패(敗)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효공을 물리친 적은 자신들의 승리에 취하여 주변의 배를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이정의 눈에 비친 적들은 이미 군대가 아니라 노략질하는 도적에 불과했다. 이정은 노략질하느라 혼란에 빠진 적을 공격하여 대파했다. 400척의 배를 빼앗고 당군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익사한 자들만 만 명이 넘었다.

 

이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격했다. 스스로 5,000의 날랜 병사를 이끌고 선봉(先鋒)에 서서 소선의 본거지인 강릉(江陵)까지 진격하여 소선의 성 아래에 진영을 설치했다. 소선은 문사홍을 이미 패퇴시키고 자신의 근거지 바로 밑까지 밀고 들어온 당군이 두려웠다. 소선으로선 믿었던 군대의 패퇴도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급속한 진격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다급해진 그는 강남(江南)에 징병(徵兵)을 실시하여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효공의 본진이 잇달아 도착하여 포위망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이정이 소선의 장수 양군무(楊君茂)와 정문수(鄭文秀)를 연달아 격파하고 군사 4,000을 포로로 잡았던 것이다. 이로서 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다. 소선의 전략은 자신이 소집령을 발동한 군대가 외곽에서, 성 내부의 군대는 안쪽에서 당군을 협공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01 방술(方術)을 행하는 술사(術士). 신선을 찾아다니고 연단(煉丹)을 배워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추구하는 사람 또는 의생(醫生)·점쟁이·점성가(占星家)·관상가(觀相家) 등을 이르는 말.

02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3 삼공(三公)·대장군(大將軍)·장군 등이 관서를 설립하고 관리를 선발하여 두는 것.

04 후량(後梁) 선제(宣帝)의 증손(曾孫)으로 수(隋)나라 말기인 617년 악주(岳州) 교위(校尉) 동경진(董景珍) 등이 기병(起兵)하면서 왕으로 추대되어 양왕(梁王)이라 하였다. 다음해 칭제(稱帝)하고 강릉(江陵)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성품이 외면적으로는 관후(寬厚)하나 안으로는 시기심이 많았다. 이로 인해, 대신과 장군들을 의심하게 되니 이들이 모반하면서 병세(兵勢)가 약해졌다. 무덕(武德) 4년(621) 당군(唐軍)의 토벌로 성이 함락되기 전에 항복하였고 장안(長安)에서 참수(斬首)되었다.

05 현재 호북성(湖北省) 강릉현(江陵縣).

06 주명(州名). 섬서성 안강현(安康縣).

07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08 당대(唐代)에 호북성(湖北省) 의창시(宜昌市) 지역에 둔 주(州).

09 사천성(四川省) 동북부, 봉절현(奉節縣)에 있는 도시.

10 사천성(四川省)과 호북성(湖北省)의 경계에 있는 양자강(揚子江) 상류의 세 협곡.

11 호남성(湖南省) 악양현(岳陽縣)에 있는 군(郡).

 

<대순회보 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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