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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각(角) 별을 관장하는 등우(鄧禹) 신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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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1.26 조회5,4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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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角) 별을 관장하는 등우(鄧禹) 신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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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승리와 광무제의 즉위
    25년 정월. 이해는 건무(建武) 원년으로 유수가 제위에 올라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가 되는 해이다. 등우가 기관(箕關, 산서성 垣曲縣)으로부터 하동(河東)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하동도위(河東都尉)가 성문을 지켜 열어주지 않았다. 등우군은 하동을 공격하여 열흘 만에 대파하고 군대에 필요한 장비 및 물품을 천여 수레나 포획하였다. 등우는 군을 진격시켜 안읍(安邑, 산서성 夏縣)을 포위했는데 수개월이 지났지만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때 경시제의 대장군 번참(樊參)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대양(大陽, 산서성 平陸縣)을 지나 등우군을 공격해 왔다. 등우는 해(解, 산서성 臨晉縣)땅 남쪽에서 그들을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그 대장인 번참을 처단했다. 그런데 곧이어 왕광(王匡), 성단(成丹), 유균(劉均)이 합병한 군사 십여 만이 다시 등우를 공격하니 전세는 역전되었고 이 전투에서 등우군의 효기(驍騎)장군 번숭(樊崇)이 전사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싸움이 일단락되었을 때 군사 한흠과 휘하 장수들은 이미 승부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 장수들은 밤을 틈타 도주할 것을 권했지만 등우는 계속해서 싸우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총사령관이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등우의 고집이 뜻밖의 행운을 불러왔다. 왕광의 군대가 전날의 승세를 몰아 다음날 계속해서 등우군을 공격했다면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왕광은 다음날 등우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문제는 날짜였다. 결전의 날은 60갑자로 보면 계해일(癸亥日)이었다. 계와 해는 천간과 지지로 보면 모두 끝에 해당하는 날이어서 당시로서는 불길한 날로 인식된 날이다. 왕광은 궁일(窮日)에 싸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로써 등우는 자신의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왕광의 결정적인 실책이 등우군의 입장에서는 의외의 행운이었다.
    결전의 날인 그 이튿날 아침. 왕광이 군사를 총동원하여 등우군을 공격하였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등우군이 왕광의 군대를 맞았다. 등우는 전군에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적군이 자신의 진영에 가장 가까이 왔을 때 일제히 돌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왕광의 군대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왔을 때, 등우의 휘하 장수와 병사들이 북을 치며 함께 진격해 적을 크게 무찔렀다. 왕광이 패주하자 등우가 날쌘 기마병을 거느리고 급히 추격하여 유균(劉均), 하동(河東)태수 양보(楊寶), 지절중랑장(持節中郞將) 미강(弭彊)을 처단했다. 이 전투에서 부절(符節)을 획득한 것이 여섯이요, 관리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인수(印綬)를 획득한 것이 500이었고, 병기를 거둬들인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날의 승리로 하동지역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이때 등우는 광무제로부터 서쪽 방면 정벌에 관한 전권을 부여 받은 상태였다. 등우는 이문(李文)를 하동태수로 삼고, 나머지는 소속현의 우두머리들에게 맡겨 전쟁의 뒤처리를 수습하게 함으로써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달에 유수는 호(鄗, 하북성 柏鄕縣)에서 즉위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황제인 광무제(光武帝)이다. 광무제는 사신을 보내 등우를 대사도(大司徒)에 임명하고 그 사령장에서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칙령(勅令). 전장군(前將軍) 등우는 매우 충성스럽고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다. 이전에 짐과 더불어 진영 안에서 천리 밖 싸움의 승패를 도모하였다. 공자께서도 내게 안회(顔回)가 있은 뒤로 제자들이 날로 우애로와졌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더욱이 등우는 적장들을 베고 적군을 격파하여 산서(山西)지방을 평정하였으니 그 공이 더욱 뛰어나다. 지금 백성들은 서로 친애하지 못하다. 아버지는 의로워야 하고, 어머니는 자애로워야 하고, 형은 우애해야 하고, 아우는 공경해야 하며, 자식은 효도해야 한다는 이 다섯 가르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대는 사도가 되어 이 다섯 가지 가르침을 받들어 널리 세상에 펼쳐 실행되도록 하라.
지금 봉거도위(奉車都尉)01를 보내어 등우에게 대사도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찬후(酇侯)02에 봉하며 식읍(食邑)으로 만호(萬戶)를 내린다. 그를 공경하도록 하라!

 

     최고의 찬사였다. 진영 안에서 천리 밖 싸움의 승패를 도모하였다는 것은 한고조가 장량을 두고 한 말이다. 광무제는 한고조의 창업 고사에 빗대어 등우를 장량에 비견한 것이다. 또한, 안회는 공자의 여러 제자 중에서도 출중한 인물로 스승인 공자마저도 찬탄해마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장량과 안회에 비견될 당시 등우의 나이는 불과 스물넷이었다.

  

각지의 반란을 평정한 등우
    유수가 제위에 오르고 후한이 건국되었다고는 하지만 압도적인 세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후한 건국 이후 10년 동안의 전국 평정을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되었다. 이제 자신들 이외의 모든 세력은 다 적이 된다. 여기에는 경시제 휘하의 장군들과 그를 따르는 세력도 예외일 수 없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것이다. 
    등우군은 분음하(汾陰河, 산서성 榮河縣)를 건너 하양(夏陽, 섬서성 韓城縣)으로 들어갔다. 경시제의 중랑장(中郞將) 좌보도위(左輔都尉) 공승흡(公乘歙)이 군사 십만을 이끌고 좌풍익(左馮翊)03의 군사와 더불어 아현(衙縣, 섬서성 白水縣)에서 등우를 막아 불가피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등우는 여기서 승리를 거둬 공승흡은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적미가 다시 수도 장안으로 침입하였다. 적미는 체계도 분명하지 않은 세력이었지만 엄청난 숫자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이때 경기지역을 지키는 삼보 관리들이 연달아 거듭 패했고 적미가 지나가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살상 당하니 백성들이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러던 중 등우가 승승장구하고 그의 군사들은 행동에 규율이 있어 포악하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들 등우를 고대하여 혹은 처자를 거느리고 혹은 짐을 등에 지고 와서 등우의 군사를 맞이하니 항복해 오는 자가 하루에 천 명을 넘었고 군사는 백만을 헤아렸다.
    등우는 지나는 곳마다 모두 수레를 멈추고 속도를 늦춰 투항해 오는 자들을 위로하니 남녀노소가 그의 수레 주변에 모여들어 감동하고 기뻐하였다. 등우의 명성이 관서(關西)에 떨쳐지니 광무제가 이 소식을 듣고 여러 번 사신을 보내 칭찬했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등우에게 적미가 장악하고 있는 장안을 빨리 공격하자고 청했다. 등우는 반대했다.
    “안 된다. 지금 우리 군사가 비록 많다하나 능히 싸울 수 있는 자는 적고, 현재 군량미도 넉넉하지 않은데다가 앞으로도 물자를 보충하기가 어렵다. 반면 적미는 이제 막 장안을 함락시킨 터라 군수물자가 넉넉하고 무기도 날카로우니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릇 적미의 무리는 도적 떼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 하루를 지탱할 만한 계략도 없으니 비록 군수물자가 풍부하다고 하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상태다. 그러니 견고히 장안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마침 상군(上郡, 섬서성 綏德縣), 북지(北地, 감숙성 環縣), 안정(安定, 감숙성 固原縣) 세 개 군은 땅이 넓고 사람은 적으며 곡식과 가축이 많으니 나는 그곳에서 머물며 군사를 휴식시키고 군량미를 보충해 병사들을 먹이리라. 그러면 적미의 무리가 쇠약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할 것이다.”
    그리하여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 순읍(栒邑, 섬서성 旬邑縣)에 이르렀다. 등우가 도착하여 적미측의 진영을 격파하니 군읍의 관리들이 성문을 열고 투항해 왔다. 서하(西夏) 태수  종육(宗育)도 아들을 보내 등우에게 항복문을 올렸다. 등우는 이를 다시 광무제에게 올렸다.
    광무제는 관중지역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등우가 오래도록 출병하지 않자 편지를 보내 출병을 재촉하며 말했다.
    “사도(司徒, 등우)는 요(堯)임금과 같고 도망가는 저 도적들은 걸(桀)과 같다. 장안(長安)의 관리와 백성들이 의지하여 귀의할 곳이 없으니 그대는 마땅히 때에 맞추어 나아가 적을 토벌하여 서경(西京, 장안)을 진압하고 백성들이 마음을 잡도록 하라.”
    광무제의 연이은 재촉에도 등우의 전략은 변함이 없었다. 곧 장군들을 파견하여 상군(上郡, 섬서성 綏德縣)지역의 여러 현을 공격하고 병사와 곡식을 보충하여 북지군의 대요(大要, 감숙성 寧縣의 동남쪽)으로 돌아왔다. 등우는 적노장군 풍음(馮愔)과 거기장군 종흠(宗歆)을 파견하여 순읍(栒邑)을 지키도록 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두 사람이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여 서로 공격하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마침내 풍음이 종흠을 살해하고 이어서 등우를 공격하였다. 등우는 우선 전령을 보내어 광무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광무제가 전령에게 물었다.
    “풍음과 친하고 그가 아끼는 사람이 누구인가?”
    “호군(護軍) 황방(黃防)입니다.”
    광무제는 풍음과 황방의 사이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서로를 반드시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헤아리고 등우에게 전하여 말했다.
    “풍음을 잡을 자는 반드시 황방일 것이다.”
그리고는 상서(尙書) 종광(宗廣)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가서 황방을 항복시키도록 했다.
    그로부터 한달 남짓 되어 황방이 과연 풍음을 잡아들이고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와 처벌해 줄 것을 청했다. 경시제의 장군 왕광 호은(胡殷) 등도 종광에게 항복하여 모두 함께 동도(東都) 낙양(洛陽)으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이들이 도망치려하자 종광이 모두 목을 베어 버렸다. 풍음은 낙양에 돌아와서 사면 받아 죽음을 면했다.
    26(건무 2)년 봄에 광무제는 사자를 보내어 등우를 양후(梁侯)에 봉하고 식읍(食邑)으로 네 개 현을 내렸다. 이때에 적미는 서쪽 부풍군으로 달아나 있었다. 등우는 남쪽으로 장안에 이르러 곤명지(昆明池)에 주둔하고는 크게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먹였다. 그리고는 장군들을 거느리고 목욕재계하고 길일을 택하여 한고조 유방의 사당인 고묘(高廟)에서 정성스럽게 제사지냈다. 그곳에서 전한(前漢)의 11제왕의 신주(神主)를 모셔서 광무제가 있는 낙양에 보냈다. 또한, 전한 황제들의 능에는 관리와 병사를 배치하여 약탈에 대비했다.
    등우의 이러한 조처는 자신들이 한나라의 정통 계승자임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중국 황제들의 능은 대개 국력을 기울여 조성되지만 왕조가 몰락하거나 난세에 접어들면 가장 먼저 약탈 당하는 곳이다. 당대의 많은 반란 세력들은 한의 부흥을 내걸었지만 전한 황제들의 신주와 능의 보호를 위해 광무제와 같이 발 벗고 나선 곳은 없었다. 등우에 의한 전한 황제의 신주 수습과 능의 보호는 자신들이 여러 농민 반란 세력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한나라의 정통 후계자임을 보여준 행사였던 것이다.
    이후, 등우는 병사를 거느리고 남전(藍田)에서 연잠(延岑, ?-36)04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운양(雲陽, 섬서성 淳化縣)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중왕(漢中王) 유가(劉嘉)가 등우에게 항복하려 했는데, 유가의 재상 이보(李寶)가 거만하고 무례하여 등우가 그의 목을 베었다. 형의 죽음에 분개한 이보의 아우가 이보의 부곡민을 거느리고 등우를 공격하여 장군 경흔(耿訢)이 전사했다.
    풍음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로 등우는 점점 약해지고 식량도 떨어져서 등우에게 귀소했던 사람들이 흩어져 떠나갔다. 그때 적미가 다시 장안으로 들어왔는데 등우가 그들과 싸우다 패하여 고릉(高陵)까지 달아났고 식량이 떨어져 군사들은 대추와 채소로 연명하였다. 광무제가 등우를 불러들여 칙명을 내려 말했다.
    “적미가 식량이 없어 동쪽으로 온 것이니 내가 그들을 꾸짖을 테니 여러 장군들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 경망스럽게 진군하지 말라.”
    등우는 임무를 받고도 공을 이루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등우는 여러 차례 굶주린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걸었으나 매번 불리하였다.
    27(건무 3)년 봄 등우는 거기장군(車騎將軍) 등홍(鄧弘)과 함께 적미를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패하여 병사들은 모두 죽고 흩어졌다. 등우로서는 쓰라린 참패였다. 등우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모든 군대를 잃고 홀로 24기(騎)만을 이끌고 의양(宜陽, 하남성 의양현)에 들어와 대와 양후(梁侯)의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사죄했다. 광무제는 조서를 내려 제후의 인수를 돌려주었고 몇 개월 후에 다시 등우를 우장군(右將軍)에 임명했다.
    이때 연잠(延岑)이 동양(東陽)에서 패하여 마침내 진풍(秦豐)과 합세하였는데 28(건무 4)년 봄 다시 순양(順陽)을 노략질하였다. 연잠은 한중(漢中)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여러 현을 공략하면서 세력을 확대하다가 진풍과 연합한 상태였다. 광무제는 등우를 파견하여 복한장군(復漢將軍) 등엽(鄧曄), 보한장군(輔漢將軍) 우광(于匡)을 도와 연잠을 등현(鄧縣)에서 격파하고 무당(武當)까지 추격하여 다시 그들을 깨뜨렸다. 연잠이 한중(漢中)으로 도망갔는데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광무제의 전국 평정과 공신에 대한 처우
    37(건무 13)년 중국이 평정되자 광무제는 여러 공신들의 식읍을 더해주었다. 등우는 고밀후로 봉해져 고밀(高密), 창안(昌安), 이안(夷安), 순우(淳于) 등 4개 현을 식읍으로 다스렸다. 광무제는 등우의 공을 높이 사서 그 아우 등관(鄧寬)도 명친후(明親侯)에 봉했다. 그 후 좌우장군의 관직이 없어지자 특진(特進)05의 지위로 봉조청(奉朝請)하게 하였다. 봉조청은 조정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만들어지는 임시관직으로 조정의 일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광무제는 자신들의 공신을 대우함에 있어서 한고조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을 건국한 전한의 공신들은 장량(張良), 진평(陳平) 등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 당사자들의 과실도 없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생긴 말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사냥이 끝나면 토끼를 쫓던 사냥개는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그때의 사냥개는 주인에 의해 솥에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토사구팽은 전한 최고 공신인 한신(韓信)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로 치열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으나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자신의 운명이나 토끼 사냥이 끝난 뒤의 사냥개의 운명이나 다르지 않다고 탄식한 말이다. 이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권력의 무상함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광무제는 건국 공신들을 봉조청에 임명하여 국가원로로 그에 상응한 대접은 하면서도 실권을 지닌 관직에서 배제함으로써 군신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없앴다. 또한 공신들의 과실을 문제 삼아 관작을 박탈한다거나 형벌을 내리지 않았다. 광무제의 이러한 조치로 후한 건국 공신들의 작위와 식읍은 한고조의 공신들과는 달리 온전할 수 있었다.
    등우는 문장이 밝고 행동이 돈독하며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겼다. 그는 슬하에 열 셋의 자식을 두었는데 각기 한 가지 재주씩은 갖추도록 하였다. 자신의 집안을 잘 다스리려 자손을 가르쳤으니 후세의 모범이 될 만 하였다. 게다가 식읍(食邑)에서 거두어들인 것만으로 살림을 하였으며 다른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광무제가 더욱 그를 중히 여겼다.
    57년 광무제가 죽고 황태자 유장(劉莊)이 2대 황제에 올랐다. 이가 명제(明帝)인데 명제는 등우를 태부(太傅)로 삼고, 그를 존경하여 등우가 알현할 때 동향(東向)을 허용하였다. 동양의 관점에서 보통 임금은 남면(南面)한다고 표현된다. 북쪽에 앉아 있는 임금이 남쪽에 있는 신하들을 본다는 의미인 ‘남면’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임금이 남쪽을 본다면 임금을 알현하는 신하는 북면(北面)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 등우의 경우는 동향(東向)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귀빈(貴賓)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후 등우는 1년여를 더 살다가 병이 들었다. 명제는 그의 집으로 여러 번 병문안을 갔고 등우의 두 아들을 랑(郞)으로 삼았다.
    등우는 58(永平 1)년 57세로 죽으니 시호(諡號)를 원후(元侯)라 하였다. 명제는 등우의 봉국을 셋으로 나누어 장자 등진(鄧震)은 고밀후(高密侯), 등습(鄧襲)은 창안후(昌安侯), 등진(鄧珍)은 이안후(夷安侯)로 삼았다.
    등우가 죽고 난 2년 후인 60(영평 3)년 명제는 한나라를 중흥시킨 공신들을 생각하고 이들 28명의 초상을 남궁(南宮) 운대(雲臺)의 벽에 그려놓게 하였다. 등우가 처음이고, 다음으로 마성[馬成, 항(亢) 별을 관장], 오한[吳漢, 저(氐) 별을 관장], 왕양[王梁, 방(房) 별을 관장], 가복[賈復, 심(心) 별을 관장], 진준[陳俊, 미(尾) 별을 관장], 경감[耿弇, 기(箕) 별을 관장], 두무[杜茂, 두(斗) 별을 관장], 구순[寇恂, 우(牛) 별을 관장], 부준[傅俊, 여(女) 별을 관장], 잠팽[岑彭, 허(虛) 별을 관장], 견담[堅鐔, 위(危) 별을 관장], 풍이[馮異, 실(室) 별을 관장], 왕패[王覇, 벽(壁) 별을 관장], 주우[朱祐, 규(奎) 별을 관장], 임광[任光, 루(婁) 별을 관장], 제준[祭遵, 위(胃) 별을 관장], 이충[李忠, 모(昴) 별을 관장], 경단[景丹, 필(畢) 별을 관장], 만수[萬修, 자(觜) 별을 관장], 합연[蓋延, 삼(參) 별을 관장], 비융[邳肜, 정(井) 별을 관장], 요기[銚期, 귀(鬼) 별을 관장], 유식[劉植, 유(柳) 별을 관장], 경순[耿純, 성(星) 별을 관장], 장궁[藏宮, 장(張) 별을 관장], 마무[馬武, 익(翼) 별을 관장], 유융[劉隆, 진(軫) 별을 관장]등 28명이다. 여기에 왕상(王常), 이통(李通), 두융(竇隆), 탁무(卓茂)를 더하여 모두 32명의 초상이 남궁 운대에 모셔졌다. (등우 끝)

 


01 천자의 측근에서 수레를 배송하는 무관직. 한무제 때 시작되었으며 녹봉 이천 석.
02 현재 호북성(湖北省) 광화현(光化縣).
03 장안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져서 이를 삼보(三輔)라고 칭하는데, 우부풍(右扶風, 장안의 서쪽), 경조(京兆), 좌풍익(左馮翊)이다. 좌풍익은 장안의 동쪽.
04 남양(南陽, 현재 하남성 남양) 사람. 한중(漢中)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주변 현을 공략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진풍(秦豊)과 연합하였다가 진풍이 패하자 공손술(公孫述)에 투항하여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고 여녕왕(汝寧王)에 봉해졌다. 36(建武 12)년, 오한(吳漢)이 촉(蜀)을 평정할 때 이에 맞서 싸웠으나 연패하였다. 공손술이 죽자 항복했고 처형되었다.
05 조회에 참여하는 지위.

 

《대순회보》 1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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