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이윤의 도움으로 대업을 이룬 성탕(成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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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20 조회5,985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이광주
상제께서 六월 어느 날 천지공사를 마치신 후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布敎五十年工夫終畢)”이라 쓰신 종이를 불사르시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윤(伊尹)이 오십이 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하셨도다.(공사 3장 37절)
성탕의 가계와 상나라의 부흥
성탕은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탕왕(湯王)’을 가리킨다. 그는 상(商)나라01를 창건한 왕으로 이름은 이(履) 또는 천을(天乙), 태을(太乙)이다. 탕(湯)은 그의 자(字)인데, 여기에는 사악한 것을 쫓아버리고 불길 속에 뛰어들어 백성의 고난을 해결해 새로운 천지를 연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나라를 새롭게 세웠으므로 ‘성탕(成湯)’이라 불리기도 한다. 탕왕은 조롱박 같은 얼굴 모양에 흰 피부와 수염이 있었다. 또 2m 가량 되는 큰 키에, 몸체는 구부정하고 소리는 우렁찼으며, 팔은 가늘고 길어 한눈에도 비범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탕왕은 상족(商族)의 시조 설(契)의 14대 손에 해당한다. 설의 아버지는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자 황제의 증손인 제곡(帝嚳)이고 어머니는 제곡의 둘째 비(妃)인 간적(簡狄)이었다. 어느 날 간적이 목욕을 갔다가 신비로운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보고 주워 삼킨 후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 설은 장성해서 우(禹)의 치수를 도왔고 순(舜)임금의 명으로 교육부장관격인 사도(司徒)에 임명되어 백관과 만민에게 오교(五敎: 오륜을 말함)를 가르침으로써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순은 그를 상[商: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일대]이라는 땅에 제후로 봉하고 자씨(子氏)라는 성(姓)을 내려주었다.
설이 수립한 상나라는 탕왕 때까지 도읍을 여덟 번이나 옮기며 꾸준히 발전했다. 상족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동방의 기마민족에 속한다. 그래서 무력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날로 세력과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특히 그들이 고안한 마차(馬車)는 뛰어난 기동력과 적재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으로 많은 물품을 싣고 여러 나라를 오가며 교역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전시(戰時)에는 빠른 기동력과 수송능력을 지닌 최첨단 무기로써 적들을 제압하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였다. 탕왕에 이르러 도읍을 설의 부친 제곡의 고향인 박(亳: 현재의 하남성 상구현 동남쪽)으로 옮긴 상나라는 국력이 더욱 신장하여 대외적으로도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국력의 신장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탕왕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신의를 지키고 친선과 교역에도 힘써 많은 제후들로부터 높은 신망을 얻었다. 『사기』 「은본기」에는 탕왕의 인품을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 온다. 한번은 탕왕이 교외로 나갔다가 들에서 한 사냥꾼이 사방에 그물을 치고 “하늘 아래 사방의 모든 새들은 모두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라고 축원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탕은 “어허, 한꺼번에 다 잡으려고 하다니!”라고 하며, 세 면의 그물을 거두게 하고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축원하게 했다. “왼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왼쪽으로 가게 하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만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 한수 이남의 제후국들이 이 소식을 접하고, “탕의 덕이 지극하도다. 그 덕이 금수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리하여 일시에 상나라에 귀의해 온 나라가 36개국이나 되었다.
하나라 걸왕의 폭정과 민심의 이반
요순(堯舜)시대와 달리 우(禹)가 건국한 하(夏)나라는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왕조체제였다. 471년간 존속했던 하나라는 17대 임금인 걸(桀)02에 이르러 멸망하기에 이른다. 걸왕은 몸집이 크고 힘도 강해서 맨손으로 호랑이, 늑대 같은 맹수와 싸워 이길 정도로 용맹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왕의 자리에 오른 뒤 덕행을 닦지 않고 무력을 써서 걸핏하면 다른 부족들을 침략해 재물과 미녀들을 약탈하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번은 그가 유시씨(有施氏)의 작은 제후국을 정벌하려 하자 유시씨가 많은 진상품과 함께 말희(妺喜)라는 절세의 미녀를 바치며 항복했다. 걸왕은 말희에게 매혹되어 총애했으며 그녀를 즐겁게 하려고 화려한 궁궐과 누대를 짓게 했다. 이를 위해 백성들은 혹독한 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천하의 재물이 탕진되었다.
걸왕은 말희와 신축된 궁전에 살면서 수많은 궁녀들과 함께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가무와 잔치를 벌였다. 또한 말희의 요청에 따라 궁전 한쪽에 커다란 연못을 파서 향기로운 술로 가득 채우고, 그 가장자리에 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육포를 숲처럼 걸어놓았다[주지육림(酒池肉林)]. 그리고는 그 연못에 배를 띄워 놀면서 먹고 마시며 온갖 난잡한 짓을 다했다. 걸왕이 북을 한 번 울리면 많은 사람이 소처럼 달려와 목을 길게 늘여 연못의 술을 마셔야 했는데, 그 수가 무려 3천이나 되었다고 한다. 간혹 술에 취해 못에 빠져 죽는 사람이 생기면 말희는 그것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다. 또한 그녀가 말이 끄는 수레를 노예에게 끌게 하고 호랑이를 시장에 풀어놓아 사람들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서로 부딪쳐 다치고 죽는 것을 보고 기뻐하면 걸도 덩달아 신나했다.
이와 같이 걸왕은 말희와 함께 주색(酒色)에 빠져 황음과 방탕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잔혹하게 착취했다. 더욱이 순순히 따르지 않는 제후나 불평의 기색을 보이는 신하와 백성들을 마구 잡아다가 혹독하게 처형했다. 이런 그가 늘 자신을 하늘의 태양에 비겼기 때문에 걸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저 지긋지긋한 태양이 어느 때 가면 명이 끊어지려나. 내가 너와 함께 멸망하리라.” 하고 말했다. 국가의 장래를 염려한 신하들 중에 관용봉(關龍逢)이란 충신이 있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걸왕에게 나아가 우임금처럼 덕치를 행하고 인애로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늘도 천명을 거두지 않는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걸은 그의 말을 비웃고 자신이 곧 하늘임을 자처하며 그를 참해버렸다. 그 후 하나라에 충신은 갈수록 적어지고 아첨하는 간신만 득세했으며, 탐관오리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이 더해져 나라가 더욱 부패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고 민심이 걸왕과 하나라를 떠나자 이윤(伊尹)과 비창(費昌)처럼 하나라의 유능한 신하들은 어진 정치로 민심을 얻고 있던 상나라의 탕왕에게 잇달아 귀순했다.
그럼에도 걸왕의 폭정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는 더 많은 재물과 미녀를 얻기 위해 제후대회를 열어 참가한 제후들에게 공물을 준비하여 바치도록 했다. 유민씨(有緡氏)가 제후대회에 참석했다가 반감을 품고 떠나버리자 걸은 곧바로 그의 나라에 쳐들어가서 멸망시키고 많은 재물과 노예, 미녀들을 약탈했다. 탐욕스러운 걸은 얼마 후 다시 작은 나라들을 정벌해 더욱 많은 재물을 약탈했는데, 그 과정에서 민산국(岷山國)의 두 미녀를 얻은 후 이들을 매우 총애했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이에 반감을 품은 말희가 하나라의 중요한 국가 기밀이나 군사정보를 상나라에 넘김으로써 하나라의 망국이 앞당겨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명재상 이윤과 탕왕의 만남
상제님께서 “걸의 악함도 그 때가 있고 탕의 선함도 그 때가 있다. 천도는 걸에게 악을 가르쳤고, 천도는 탕에게 선을 가르쳤다. 걸의 망함과 탕의 흥함은 이윤에게 있었다(桀惡其時也湯善其時也 天道敎桀於惡天道敎湯於善 桀之亡湯之興在伊尹).”03라고 하셨다. 이 말씀처럼 탕과 이윤의 만남은 걸의 폭정에 시달리던 하나라가 무너지고 상나라의 건국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이들의 만남에 관해 두 가지 설을 제시했다. 하나는 이윤이 탕왕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탕왕이 초야에서 처사(處士)로 지내던 이윤에게 사람을 다섯 번이나 보낸 후 비로소 그를 맞이했다는 설이다.04 그러나 상제님께서는 이윤이 50년이 되어서야 49년간의 그릇됨을 깨닫고 성탕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다고 하셨다.05 즉, 이윤이 하나라의 신하로 49년간 봉사하다가 50년에 비로소 하나라를 떠나 상나라를 받들었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첫 번째 설에 비추어 탕왕과 이윤의 만남을 재조명해 보았다.
당시 상나라는 지금의 하남성 동쪽과 산동성 서쪽의 평원을 점유한 강대한 제후국으로 부상해 하나라와는 동과 서에서 대치하는 국면이었다. 탕왕은 백성들을 잘 돌보고 충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군신이 화목했다. 백성들은 편안하게 생업에 전념할 수 있어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라의 관리와 백성들 중에는 하나라를 떠나 상나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 이윤(伊尹)도 하나라의 관리로 있었다. 본래 그는 유신씨(有莘氏)가 다스리던 나라의 이수(伊水: 하남성 낙양시 소재)라는 강가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성이 이(伊)였고, 이름은 아형(阿衡) 혹은 지(摯)이나 후에 윤[尹: 우상(右相)의 벼슬]의 관직에 있었기에 이윤이라 불렸다.
요리사에게 길러졌던 이윤은 요리 솜씨가 뛰어나 하나라의 선관(膳官: 주방장)이 되어 임금의 수라를 조리하였다. 그래서 걸왕에게 직접 간언을 할 수 있었는데, 어느 날 이윤은 그에게 관용봉에 대한 처결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지 않으면 민심이 떠나고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직언했다. 걸은 이윤의 요리를 맛있게 먹었지만 그의 충언은 경멸에 찬 어조로 비웃고 노여워할 뿐이었다. 궁을 나온 이윤은 절망에 빠진 심정으로 어두운 밤길을 재촉하며 귀가하고 있었다. 그때 한 행인이 지나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시를 읊듯이 중얼거렸다. “어찌 박으로 가지 않으리, 그곳에는 빛과 희망이 있노라.” 당시 박은 탕왕이 다스리는 상나라의 도읍이었다. 상은 제후국에 불과했지만 탕왕의 덕이 높다는 소문이 퍼져 전국에서 뜻있는 인사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마침내 이윤도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려 동쪽의 박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하나라의 걸왕을 버리고 상나라의 탕왕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상나라에 이른 이윤이 탕을 만나고자 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유신씨(有莘氏)의 딸이 탕왕과 혼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솥과 도마를 등에 지고 탕비(湯妃)의 잉신(媵臣)이 되기를 청하여 탕왕을 만날 수 있었다. 잉신은 고대 귀족 집안의 여자가 시집갈 때 따라가는 남자 노복(奴僕)을 말한다. 상나라의 궁정에서 이윤은 맛있는 요리로 주목을 끌게 되어 마침내 탕왕 곁에 접근할 수 있었다. 탕왕이 요리에 대해 물어보면 거침없이 대답했을 뿐만 아니라 요리법에 빗대어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를 논하며 왕도(王道)를 설파했다. 탕왕은 그가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임을 간파하고 즉시 재상으로 등용해 국정을 담당케 하였다.06 그러자 이윤은 덕(德)으로 관리를 다스리고 민정(民情)을 잘 살펴서 경제를 부흥시키고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탕왕의 높은 인덕과 이윤의 탁월한 지략이 합해진 후 상나라의 국력이 눈부시게 성장하면서 점차 부근의 제후국들을 통합하여 동방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서경』 「주서(周書)」편에는 주공(周公)이 “내 들으니 옛날의 탕왕께서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은, 그때 이윤과 같은 신하가 있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 합니다.”07라고 말한 대목이 전해 온다.
상왕조의 건국과 성탕의 덕치
당시 각 지방의 제후들은 너나없이 포악무도한 걸에게 등을 돌리고 점차 조공도 바치지 않으려 했다. 이에 걸왕은 탕왕을 지방 제후들의 우두머리인 방백(方伯)에 임명하여 제후들을 단속하게 했다. 이때 상나라와 가까운 곳에 있는 갈국(葛國)의 제후가 무력으로 백성들을 억압하고 산천이나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자 탕왕은 “그대는 천명을 존중하지 않았다. 나는 대죄를 물어 그대를 징벌하려 하노라. 이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라고 하며 하늘을 대신해 그를 정벌했다. 이처럼 탕왕은 하늘의 도리를 따르며 천하를 바로 잡으려고 애썼으나, 걸왕은 반성할 줄 모르고 여전히 무도한 짓만 되풀이했다. 그러던 중 관용봉의 비보를 접한 탕왕은 길게 탄식하며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을 달래고자 조촐하게 제사를 지냈다. 날로 세력이 커지던 탕을 시기하던 걸은 대노하여 즉시 그를 불러들여 하대(夏臺)08에 감금했다. 상나라에서 이윤을 중심으로 많은 금은보화와 절색의 미녀들을 걸에게 바치니 탕왕이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가 돌아오자 많은 제후들이 모여 걸의 악행과 포학무도함을 비판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해 하나라를 토벌하기를 청했다. 탕왕도 더욱 국력을 길러 하나라를 정벌하려고 마음먹었으나 곧바로 시행할 수는 없었다. 아직도 걸왕을 지지하는 제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하의 걸왕과 결탁한 제후 가운데 위(韋)씨, 고(顧)씨, 곤오(昆吾)씨 등이 난정(亂政)을 자행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렸다. 탕왕은 군사를 일으켜 먼저 위씨와 고씨를 정벌하고 다시 곤오씨를 쳐서 강토를 넓히는 등 전후 22개의 소국을 멸하여 동방의 패주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걸왕을 정벌하고자 했으나 하나라와 빈번한 접촉이 있던 이족(夷族)이 걸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어서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이때 이윤이 공물을 바치지 말고 동정을 엿보라는 계책을 올렸으므로 탕왕도 이에 따랐다. 그러자 걸왕이 크게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켜 상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이윤은 탕왕에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알리고 용서를 빌도록 했다. 탕왕은 걸왕에게 사죄하고 다시 하나라의 신하 노릇을 했지만, 그 이듬해에 다시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크게 노한 걸왕이 구이의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구이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드디어 때가 이른 것을 알게 된 탕왕은 이윤의 계책에 따라 제후들과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키니 동과 서의 대군이 격돌하게 되었다. 이때 탕왕은 제후로서는 처음으로 임금을 정벌하는 것이어서 천하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출사에도 신중을 기하고 그 취지를 도읍지인 박에서 제후들에게 선포해야만 했다. 그 요지는 하나라 정벌이 걸왕의 무도함 때문이며, 이는 오직 천명(天命)과 민심(民心)에 따른 것임을 밝히는 데 있었다.09
용맹한 상나라의 군대가 첨단 무기인 전차와 함께 진군하자 하나라 군대는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남쪽에서 크게 패하여 명조(鳴條)로 달아났다. 탕왕이 명조까지 쫓아가 결전을 치르니, 천운이 다한 듯 하나라 군사들은 싸우려 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투항해 걸왕이 생포되고 말았다. 탕왕은 그를 지금의 안휘성 소호시인 남소(南巢)로 추방했는데, 이로써 하왕조가 멸망하게 된 것이다. 53년간 재위했던 걸왕은 3년 후 안휘성 화현인 정산(亭山)에서 죽었다. 임종에 이르러 그는 한 맺힌 목소리로 “내가 하대에서 탕왕을 죽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10라고 말했다. 탕왕은 하나라의 후손을 제후에 봉했는데, 주나라에 이르러 하의 후손은 다시 기(杞: 지금의 하남성 기현)에 봉해졌다.
탕왕은 걸왕을 남소로 쫓아내고 회군하는 길에 신하로서 임금을 무력으로 정벌한 사실이 후세의 이야깃거리가 될까 두려웠다. 그러자 좌상인 중훼(仲虺)가 이 일은 천명을 받들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한 것임을 아뢰며 그를 위로했다.11 수도로 돌아온 탕왕은 우임금 때 만들었다는 천자의 상징인 구정(九鼎: 아홉 개의 정)을 상나라의 도읍인 박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이윤에게 바른 정치를 공포하게 하자 모든 제후들이 복종하였다. 드디어 탕왕이 천자의 지위에 올라 하나라를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성탕은 천명을 받들어 모든 법을 행하고 권선징악(勸善懲惡)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를 위해 백성들에게 인륜을 가르치고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안정시켰다. 또한 역법을 개정하고 복색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케 했으며 조회를 낮에 하기로 정했다. 탕왕은 스스로 “나는 용감무쌍하여 이 재난을 능히 평정할 수 있다.”라고 했기에 후세 사람들이 그의 시호(諡號)를 무왕(武王)이라 칭했다.
『십팔사략』에는 탕왕의 덕치와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탕왕이 걸왕을 정벌하고 천하를 다스린 후 7년간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었다. 성군의 정치에도 천하는 다시 어려움에 빠졌고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탕이 기우제를 지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천문을 관장하는 태사(太史)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인신공희(人身供犧)를 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어진 탕왕은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모두 백성을 위한 일인데 만약 꼭 사람을 희생해야 한다면 내가 그 제물이 되겠노라.”라고 말했다. 탕왕은 재계하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깎아 몸을 정결하게 했다. 그리고 흰 띠풀를 몸에 묶고 스스로 희생이 되어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제단이 있는 뽕나무 숲으로 나아갔다. 이곳에서 그는 6가지 일로써 자신의 책임을 물으며 하늘에 축원을 올렸다. 탕왕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사방 수천 리의 넓은 지역에 큰비가 내렸다. 그의 정성에 감동한 하늘이 단비를 내려 7년간의 가뭄을 종식시킨 것이다. 이렇게 탕왕은 건국 초기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윤과 중훼 같은 어진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상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할 수 있었다. 그가 재위에 오른 지 13년 만에 죽었지만, 상나라는 재상인 이윤의 보좌로 탕왕의 손자인 태갑(太甲) 때까지 국정이 잘 다스려졌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권력은 하늘로부터 부여된 것이었다. 그 권력이 폭군에게서 천명을 받든 군주에게 옮겨지는 것을 혁명(革命)이라 부르는데, 이 경우 무력행사도 허용되었다. 이때 왕의 성(姓)이 바뀌었기 때문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도 하였다. 요·순 시대에 덕이 있는 사람에게 권력을 전하던 선양(禪讓)의 전통은 세습왕조인 하나라가 들어선 이후 무너졌다. 그리고 성탕에 이르러 처음으로 혁명에 의한 왕조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유교 사회에서 탕왕은 폭군인 걸왕을 몰아내고 태평성대를 연 성군으로 칭송되어 왔다. 그럼에도 신하가 군주를 무력으로 벌하는 혁명은 중국 사회에서 오랜 세월 동안 논란거리가 된 게 사실이다. 탕왕 자신도 이런 측면을 인식했기 때문에 하나라 정벌을 전후로 천명과 민심에 의탁해 혁명의 당위성을 강조한 바 있다. 도주님께서 남기신 『전교(傳敎)』에 따르면 기원전 2251부터 기원전 1225년 사이인 초통(初統) 중회(中會)와 계회(季會)에는 초통 초회(初會)처럼 요·순·우와 같은 성군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한 회(會)에 한 분의 성군만이 등장했는데 중회와 계회에 각각 등장하신 분이 바로 탕왕과 문왕(文王)이다.12 따라서 유교 사회에서 성탕의 역성혁명에 대한 오랜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순사상에서는 탕왕에 의한 걸왕의 방벌(放伐)이 천명에 의해 이뤄진 정당한 왕조 교체였음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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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회보> 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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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46년경까지 존립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은(殷)나라’라고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전반기는 상(商)이고 후반기는 은이다. 즉 탕왕이 하(夏)의 걸(桀)을 무력으로 추방하고 새로 나라를 창건했을 때는 ‘상’이라고 했다. 그 후 19대 왕 반경(盤庚)이 기원전 1300년경에 도읍을 안양(安陽)으로 옮겨 나라 이름을 ‘은’으로 개칭하고, 30대 왕인 주(紂)에 이르러 멸망할 때까지 은이라 일컬었다.[장기근, 『삼황오제의 덕치』 (서울: 명문당, 2003), p.330.]
02 걸은 상나라 최후의 임금인 주(紂)와 함께 포악한 임금의 대명사로 거론되곤 한다. 이들을 흔히 ‘걸주(桀紂)’라고 하며 이상적 임금으로 추앙받는 ‘요순(堯舜)’과 대비된다.
03 공사 3장 39절.
04 『맹자』 「만장ㆍ상」에도 이윤이 걸왕의 폭정을 피해 초야에 묻혀 요순(堯舜)의 도(道)를 즐기다가 탕왕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감동해 그를 섬기며 왕도(王道)를 실천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맹자, 『맹자』, 박경환 옮김 (서울: 홍익출판사, 2011), pp.239-240 참조]
05 “이윤(伊尹)이 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공사 3장 37절)
06 진(晉)나라의 황보밀은 『제왕세기』에서 성탕이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솥을 지고 도마를 든 채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후에 요리를 잘하는 이윤을 만나게 되었다고 기술했다.[위안커, 『중국신화사(상)』, 김선자 외 옮김 (서울: 웅진씽크빅, 2010), p.375.]
07 『書經』, 「周書」, “公曰 君奭 ‘我聞 在昔成湯旣受命 時則有若伊尹格于皇天’.”
08 감옥 이름.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 남쪽에 있다.
09 『서경』 「상서(商書)」 탕서(湯誓) 참조.
10 『사기』 「하본기」 , “桀謂人曰, 吾悔不遂殺湯於夏臺, 使至此.”
11 『서경』 「상서(商書)」 중훼지고(仲虺之誥) 참조.
12 차선근, 「전교 統會의 연대와 그 관련 역사」, 『상생의 길』 3 (경기: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5), p.142 p.14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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