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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귀(鬼) 별을 관장하는 요기(銚期)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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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13 조회5,8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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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수(鬼宿)

 

귀수는 28수 가운데 스물 세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남방(西方) 주작(朱雀) 칠수(七宿) 가운데서 두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4개로 상징 동물은 산양(山羊)이다. 정수의 속성(屬性)은 금(金)이며, 남방 주작의 머리에 해당한다. 여귀(輿鬼)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귀수를 의인화하여 남방귀금양성군(南方鬼金羊星君)이라 하는데 얼굴 생김새가 산양과 닮았다. 머리에는 산양처럼 뿔이 있고, 아래턱에는 수염이 있으며 장창(長槍)을 쥐고 있다고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요기

요기(銚期, ?-34)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차황(次況)으로 영천군(潁川郡) 겹현(郟縣, 하남성 禹縣) 사람이다. 요기의 키는 8척(尺) 2촌(寸)02이나 되었으며 용모가 준수한데다 근엄하여 자못 위엄(威嚴)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요맹(銚孟)이 계양(桂陽)태수로 있다가 죽자 요기가 3년 상(喪)을 치루니 향리의 사람들이 이를 칭찬했다.

 

이때 유수는 경시제(更始帝)03의 명령으로 하북을 평정해 가는 과정이었다. 유수가 영천을 관할하여 다스릴 때 요기에게 지의(志義)가 있음을 듣고 적조연(賊曹掾)으로 삼았다. 이후에 요기는 유수를 수행하여 계(薊, 북경시 大興縣)에 이르렀다.

 

이때에 왕랑이 한단에서 봉기했다. 왕랑은 한단에서 점을 치는 자였는데 혼란한 시대를 틈타 자신이 전한의 6대 황제인 성제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라고 주장했다.04 왕랑의 격문(檄文)이 계에 도착하니 계의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왕랑에 호응하려고 했다. 이때 유수가 수레를 타고 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보고자 모여들어 길 가득히 시끌벅적하였다. 이 때문에 길이 막혀 유수 일행이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요기가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눈을 부릅뜨고 좌우로 소리쳤다.

 

“물러서라.”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요기의 위세에 눌려 흩어졌다. 이렇게 길이 열리고 유수의 일행이 성문에 이르렀을 때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유수 일행이 공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성문을 빠져나갔다. 왕랑의 추격을 피해 신도(信都)에 당도한 유수는 요기를 비장(裨將)에 임명하고 부관(傅寬), 여안(呂晏)과 함께 등우(鄧禹)의 휘하에 배속시켰다. 기타 현들을 순시하고 또 방자현(房子縣)에서 병력도 징발했다. 등우는 요기가 매우 유능하다고 여겨서 그를 편장군에 임명하고 2,000 병력을 맡겼다. 이때 부관, 여안은 각기 수백 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등우가 귀환하여 그 상황을 유수에게 보고하니 그가 매우 기뻐했다. 유수는 다시 요기로 하여 진정(眞定), 송자(宋子)를 별도로 순시하게 하였다. 여기서 요기는 악양(樂陽), 고(槀), 비류(肥纍)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요기는 왕랑의 휘하 장수 아굉(兒宏), 유봉(劉奉)을 거록(鉅鹿) 아래까지 추격하다가 먼저 적의 진영에 뛰어들어 진을 무너뜨리고 직접 50여 명을 죽였다. 이때 이마가 창에 찔려 큰 상처를 입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마를 동여매고는 다시 싸움을 시작하여 마침내 적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왕랑을 멸한 이후에 유수는 요기를 호아(虎牙)대장군으로 삼았다. 이때 요기가 유수에게 말했다.

 

“하북의 땅은 그 경계가 변경 지방에까지 이어져 있어 사람마다 군대의 일을 익히 아는데 이를 정용(精勇)이라 합니다. 저간의 사정을 보자면 경시(更始)가 정도를 그르쳐 대통합(大統合)이 위태하며 해내(海內)의 백성 또한 의지할 바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철하신 공(公, 유수)께서 하산(河山)의 견고함을 바탕으로 날랜 정예(精銳)를 옹위하여, 만인에게 한(漢)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면 천하의 어느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유수는 요기의 위엄 있는 행동으로 계(薊) 땅에서 탈출할 수 있었음을 상기하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경이 앞장 서 길을 열어 주구려.”

 

이때 동마적(銅馬賊) 수십만 명이 청양(淸陽), 박평(博平)으로 쳐들어 왔다. 이에 요기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그들을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요기가 배수진을 치고 싸움에 임해 살상자가 더욱 많았다. 때마침 유수의 구원병이 이르러 이들을 격파하고 관도(館陶)까지 추격하니 모두 항복하였다. 또한 요기가 청독(靑犢)과 적미(赤眉)를 사견(射犬)까지 추격했는데 도적들이 요기 진영의 군수품을 습격하였다. 이에 요기가 도적들의 진영으로 들어가 직접 수십 명을 죽였으나 그 자신도 몸에 세 군데나 창에 찔리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요기는 끝내 이들을 격파하니 도적들이 달아났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광무제가 즉위하여 요기를 안성후(安成侯)에 봉하고 식읍 5천 호를 내렸다. 이때 단향적(檀鄕賊)과 오루적(五樓賊)이 번양(繁陽), 내황(內黃)으로 쳐들어오고 또 위군(魏郡)의 호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경시제가 탁경(卓京)으로 하여 그들을 거느리고 업성(鄴城)을 엎어 버리게 하려고 모의했다. 이에 광무제가 요기를 위군(魏郡)태수에 임명하고 대장군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요기가 군의 병사들을 징집하여 탁경을 공격했다. 요기가 탁경군 600여 급을 참수하자 탁경이 산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요기는 계속해서 추격하여 그의 장교 수십 명의 목을 베고 탁경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요기는 곧바로 번양, 내황으로 진격하여 수백 급을 참수시켰는데 이로 인해 위군의 경계가 청평(淸平)까지 이르게 되었다.

 

 

요기의 후덕한 처사와 간언(諫言)

 

요기는 한 번 싸움에 임하면 물러서지 않을 정도로 용맹했지만 목민관으로서의 일처리에는 있어서는 후덕하게 처사하여 인심(人心)을 얻었다. 자신이 다스리고 있던 군(郡)에서 발생한 반란 사건을 처리하면서 요기는 형률(刑律)에 얽매이지 않았다. 다음은 반란 사건과 그 처리 과정이다.

 

반란을 모의한 주모자는 업(鄴)의 호족인 독도적(督盜賊) 이웅(李熊)의 동생 이륙(李陸)이었다. 그는 반란을 일으켜 단향적(檀鄕賊)05을 끌어들이려 했다. 적지 않은 세력을 가진 단향적이 외부에서 성을 공격하고, 때를 틈타 성안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면 성이 단향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륙의 모반은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모의 그 자체로 중대 사안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륙의 모반을 태수인 요기에게 고발했으나 요기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고발하는 사람이 서너 명이 되자 요기는 이륙의 형인 이웅을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웅이 머리를 조아리고 탄원하기를 노모와 함께 죽여 달라고 했다. 이에 요기가 말했다.

“벼슬아치로 지내는 것이 도적이 되어 즐기는 것만 못하다면 노모와 함께 동생에게로 가도 좋다”

 

요기는 관리를 시켜 이웅을 성 밖으로 보냈다. 이웅은 이륙을 설득하고자 업성의 서문으로 갔다. 이륙은 태수의 아량을 헤아리고 나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자살하는 것으로 요기에게 사죄했다. 요기가 이를 안타까워하며 예로써 이륙의 장례를 치뤄 주고 이웅에게는 이전의 직책을 되돌려 주었다. 이에 군(郡)의 사람들은 요기의 위신(威信)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이륙의 반란 사건은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반란이 횡행하던 시절에 왜 요기는 반란에 대한 고변(告變)을 믿지 않으려 했을까. 게다가 반란자와 그 가족을 바로 처벌하든지 최소한 감옥에 가두고 주모자를 잡아들이는 것이 합당한데도 오히려 풀어주었다. 또한, 모반사건이 주동자의 자살로 일단락되자 이웅을 다시 관직에 복귀시키기에 이른다.

 

먼저 이웅은 신망이 높은 인물로 요기는 그를 대단히 신임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웅의 집안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웅의 동생 이륙은 형과는 달리 어지러운 세상에 편승하여 반란을 모의했다. 태수인 요기가 이웅에게 동생에 대한 고발이 접수되었는데 알고 있냐고 물었을 것이고, 이웅이 ‘내가 형이지만 모르는 일이다’고 잡아떼지 못하고 ‘노모와 같이 죽여 달라’ 한 것이다. 군(郡)에서 태수의 지위는 황제나 다름없다. 문제를 삼자면 크게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을 물의를 일으킨 그 한 사람이 자살하는 것으로 매듭지은 것은 태수로서 요기가 보여준 후덕함의 결과였다.

 

29(건무 5)년에 광무제가 위군(魏郡)에 행차하여 요기를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했다. 광무제는 요기를 낙양(洛陽)으로 불러들여 다시 위위(衛尉)06에 제수했다.

 

요기는 신의를 중시하였는데 장군이 되어 상대를 항복시키거나 함락시키고도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 조정에 머물고 있을 때는 나라를 걱정하고 광무제를 충심으로 보필했다. 때때로 자신의 마음에 납득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광무제에게 서슴없이 간언(諫言)했다. 일찍이 광무제가 가벼이 성문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에 요기가 어가(御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신이 듣기로 고금의 경계하는 말에 변고(變故)는 뜻하지 않은 데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원하옵건대 일 없는 출입을 자주하지 마십시오.”

 

광무제는 요기의 간언을 듣고 수레를 돌려 환궁(還宮)했다. 34(건무 10)년에 요기가 죽자 광무제가 친히 염(斂)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안성후(安成侯)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시호(諡號)를 충후(忠侯)라 했다. 그의 아들 요단(銚丹)이 뒤를 이었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45.

02 현재 한 자[尺]라고 하면 대략 30cm를 의미하지만 시대마다 달랐다. 이 시기 길이를 잴 때에 순제척(舜帝尺)을 썼는데 이때 한 자는 약 23.5cm로 8척(尺) 2촌(寸)이면 대략 192cm에 해당한다.

03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이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4 왕랑의 봉기와 관련한 사항은 다음을 참조. 「벽(壁) 별을 관장하는 왕패(王霸) 신명」, 『대순회보』 173호, 65~68쪽.

05 단향적은 동해군(東海郡)을 근거로 일어난 도자도(刀子都)란 도적에서 비롯된다. 그가 살해되자 그 나머지 무리들과 또 다른 세력들이 단향(檀鄕, 산동성 滋陽縣)에 모여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한때 그 무리가 10만에 달했다. 이들이 단향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단향적이라 불린다.

06 진(秦)나라 때부터 설치된 관직으로 궁궐의 경비를 담당했다.

 

<대순회보 1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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