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 속 인물전국시대 사군자(四君子): 평원군(平原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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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10.16 조회5,862회 댓글0건본문
『전경』 예시 59절 상제님의 손병희 만사(輓詞)01에서 손병희의 명성과 비교된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02 중 평원군(平原君, ?~기원전 251)에 대하여 『사기(史記)』 「열전(列傳)」과 『전국책(戰國策)』,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평원군은 조(趙)나라 8대 군주 무령왕(武靈王, 기원전 340~295)의 아들이자 혜문왕(惠文王, ?~기원전 266)의 동생으로 성은 조(趙), 이름은 승(勝)이다.
형제 가운데 가장 현명했던 그는 혜문왕과 효성왕(孝成王, ?~기원전 245) 때 세 차례에 걸쳐 재상을 하였으며, 동무성(東武城)을 봉지로 받았다.
▲ 추연, 공손룡(출처: 바이두)
평원군은 기원전 298년에 재상이 되었으며, 그에게는 수천 명의 식객이 있었다. 식객 중에는 명가(名家)03의 주요 사상가인 공손룡(公孫龍, 기원전 325~250)과 음양오행설을 제창한 추연(鄒衍, 기원전 305~240)도 있었다. 공손룡은 자신이 어떤 설을 택하더라도 토론자들이 그 설을 이기지 못하게 하는 견백(堅白)의 논리에 뛰어났던 인물이다. 하루는 평원군이 공손룡과 추연에게 ‘흰말은 말이 아니다(白馬非馬).’라는 설로 토론하게 하였다. 추연은 공손룡의 변론을 듣고 이치가 아닌 말을 이치에 맞는 것처럼 교묘히 꾸며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하면서 토론을 마무리하였다. 그들의 토론을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가 추연의 말에 동의하였다.04 평원군은 이렇게 이름난 이들이 식객으로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인재를 거느리고 있었다.
기원전 270년 무렵 조나라는 권세가들이나 부자들이 세금을 바치려 하지 않아 일반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경제가 점점 힘들어졌다. 조세를 거둬들이는 관리인 조사(趙奢)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요한 권세가인 평원군의 세금을 먼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세금을 받아내고자 결심한 그는 이를 방해하는 평원군의 하인 9명을 죽였다. 당시 혜문왕의 동생으로 그 어떠한 귀족보다 강한 권력을 지닌 평원군에게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관리는 없었다. 조사는 화난 평원군에게 솔선하여 세금을 바치면 다른 귀족들도 따라 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안정되고 강성해지므로 결국 평원군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고 설득하였다. 이 말을 들은 평원군은 깨닫는 바가 있어 그동안 내지 않은 세금까지 내며 조사를 특별히 대하였다. 평원군의 추천으로 조사가 조나라 전체의 부세(賦稅)를 다스리게 되어 백성은 물론 국고가 풍족하게 되었다.
조나라는 진나라와 2년간 ‘장평(長平) 전투’를 하였다. 조사의 아들인 조괄(趙括)이 이끈 군대가 진나라 백기(白起) 장군에게 처참하게 패하자 기원전 258년 진나라는 조나라를 아예 멸망시키려고 조나라의 도읍지인 한단(邯鄲)을 공격하였다. 이에 평원군은 왕의 명령으로 서둘러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가야 했다. 그는 식객 가운데 문무를 갖춘 20명과 함께 가기로 했는데, 한 명이 부족하였다. 그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스스로 함께 가고자 청했다.
평원군은 모수가 자신의 식객으로 3년 동안 있으면서 특별히 그의 재능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현명한 자가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송곳이 주머니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금방 송곳 끝이 주머니 바깥으로 비어져 나오게 마련인데 모수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데리고 가려 하지 않았다. 이때 모수는 자신이 일찍부터 주머니 안에 있었더라면 송곳 끝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고 송곳이 아예 주머니를 뚫고 나왔을 것이라 주장하며 이번에는 주머니 속에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평원군은 그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고자 그를 데리고 갔다. 이 내용이 바로 낭중지추(囊中之錐) 고사이다.
초나라에 도착하여 왕을 알현한 평원군이 반나절이 지나도록 파병 요청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이때 모수가 허리에 칼을 차고 초나라 왕을 위협하며 진나라가 초나라 왕의 조상들을 욕보였음에도 원한을 갚으려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결국, 모수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초나라 왕은 진나라에 복수하기 위하여 조나라와 합종하기로 하였다.05 이후에 평원군은 일찍이 모수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그를 상객으로 삼았다.
초나라에서는 춘신군이, 위나라에서는 신릉군이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하러 왔다. 그러나 구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진나라 군대가 빠른 속도로 한단을 포위하여 항복할 지경에 놓였다. 평원군은 한단의 전사(傳舍)06 관리자의 아들인 이동(李同)을 통해 한단의 백성들이 땔감이 없어 죽은 자의 뼈를 모아 땔감으로 삼고, 식량이 없어 자식들을 서로 바꾸어 잡아먹으며 버티고 있는 상황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에게 나라가 망하면 포로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평원군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 군사들의 배를 채워주고 부인을 제외한 첩들에게 군대의 일을 돕도록 하였다. 그 결과 죽음을 각오한 3천 명의 군사를 얻게 되었다.
이동과 군사들은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바라며 진나라와 싸워 시간을 벌었다. 무사히 지원군의 도움으로 한단을 구할 수 있었으나 장평 전투에서의 참패로 이미 조나라의 군사력은 많이 쇠퇴해졌기에 다시 회복하기 힘들었다. 그로부터 7년 후 기원전 251년에 평원군은 삶을 마감하였다.
평원군 또한 다른 전국시대 사군자들처럼 인재를 우대하고 선비들을 공경하여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이러한 평원군도 크게 한 번 실수하여 많은 식객이 떠나버린 일이 있었다. 평원군이 아끼는 첩이 다리를 저는 식객을 보고 웃은 것이 문제였다. 그 식객은 격분하여 평원군을 찾아가 첩의 목을 내놓으라고 하였으나 평원군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첩을 죽이지 않았다. 이후 평원군이 여색을 좋아하고 선비를 천하게 여긴다는 소문이 돌자 그의 식객 반이 그를 떠나버렸다. 평원군이 어쩔수 없이 첩을 죽여 그 식객에게 목을 건네주고나서야 이후 식객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평원군은 맹상군보다는 식객의 재주를 알아보는 안목은 부족하였으나, 조나라의 왕족으로 오랫동안 재상을 역임하면서 주변에 현명한 자들의 간언을 듣고 깨달아 자신은 물론 나라를 지켜왔던 인물이다. 이러한 점이 높게 평가되어 전국시대 사군자가 되었다.
01 만사는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로 만장(輓章)이라고도 한다. “…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만사를 다음과 같이 지어서 불사르셨도다. 知忠知義君事君 一魔無藏四海民 孟平春信倍名聲 先生大羽振一新” (지충지의군사군 일마무장사해민 맹평춘신배명성 선생대우진일신)‘맹평춘신배명성(孟平春信倍名聲)’은 ‘손병희의 명성이 맹평춘신의 명성보다 배로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02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기원전 278), 조(趙)나라의 평원군,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기원전 238),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기원전 243)을 말하며, ‘전국사공자(戰國四公子)’라고도 한다. 이들은 전국시대 말기에 널리 인재를 우대하고 선비들을 공경하여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다. 맹상군 《대순회보》 221호, 춘신군 《대순회보》 216호, 신릉군 《대순회보》 218호.
03 제자백가의 하나로 이름[名]과 실재[實]의 관계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해 인간 인식의 상대성과 제한성을 강조하였다. 공손룡은 명실(名實)의 불일치를 극복하여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겠다는 명실합일의 정치사상을 전개하였다.
04 사마광, 『자치통감 1』, 권중달 옮김 (서울: 삼화, 2007), pp.192-194 참고.
05 사마천, 『사기열전(史記列傳) 上』, 정범진 외 옮김 (서울: 까치, 2003), pp.230-232 참고: 사마광, 『자치통감 1』, 권중달 옮김 (서울: 삼화, 2007), pp.285-289 참고.
06 고대에 관에서 제공하여 왕래하는 행인들이 머무르게 한 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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