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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과 영혼’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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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하명 작성일2018.09.27 조회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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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과 영혼’01을 읽고

- 심신을 안정시키는 집중 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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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방면 선감 송하명
 

  『집중과 영혼』의 저자 김영민은 인류가 수많은 세월 동안 ‘집중’하는 훈육과 공부를 통해 심신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집중을 훈육했던 학교나 종교가 제도적으로 그 힘을 잃어가다 보니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여 발생하는 여러 사회문제를 자주 듣는다. 그래서 그는 현대인들이 집중으로써 ‘영혼’을 각성(覺醒)시켜 심신이 안정화되기를 기대한다. 우리 종단의 교리에서도 안심·안신(安心·安身)은 허욕(虛慾)이나 허영(虛榮)과 같은 사사(私私)로운 것을 제거하는 수행을 통하여 심신의 지속적인 안정을 추구한다. 이는 집중의 특징인 사욕이 없는 심신의 지속적인 안정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정신과 집중』에서 철학적·심리학적으로 해석한 ‘집중’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작가는 심리학적으로 ‘집중’은 인류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정신적 진화의 성과라고 말한다. ‘집중’은 ‘음식 나누기와 식탁문화’02, ‘연기(延期)’, ‘차분해짐’, 그리고 ‘약속’ 등의 인류학적 계기들을 통해 형성된 극히 인간적인 새로운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특히 ‘차분함’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이 ‘집중’으로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차분해진다는 것은, ‘세상이 당장 욕망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내 감각 앞의 저 너머에는 무엇인가 아득하고 풍요한 지평이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욕망(慾望)을 연기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일로 이어졌다. 또한, 차분함은 인간이 생존과 본능의 필요에 따른 단발적, 충동적 집중이 아니라 ‘고른 지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아이들은 훈육을 통해 차분하고 얌전해지며 사회적 구실을 위해 교육받고 길들여졌다.
  이러한 교육의 특징은 조선의 유교적 학풍에서 아이들을 훈육했던 『소학』 공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소학』의 취지인 “쇄소응대(灑掃應對: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하며 윗사람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전일적(專一的)으로 집중하는 태도를 배양했다. 그에 따르면 이런 『소학』 공부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는 제도화되고 의례화된 공동체의 절차와 양식에 순응하면서 현실의 욕망을 연기하거나 기다리는 능력을 기르면서 차분해지는 집중의 태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처럼 저자는 차분함의 긴 이력이 도달한 능력인 ‘집중’은 무언가를 ‘삼가고 단속’하면서 배양되었다고 말한다. 그 중 특히 인간의 의식과 말과 태도에서 ‘삼감[愼]’이라는 경(敬)의 개념이 특출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그는 경(敬)의 사전적 뜻인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고 삼간다’, ‘예의가 바르다’에 내포된 의미는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는 것’이고, 한군데로 모으되 그 마음은 ‘차분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경’의 실천인 수렴(收斂)에는 말 그대로 ‘거두어들여 정리하거나 갈무리해둔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 의미를 사람에게 그대로 대입해서 ‘몸과 마음을 단속한다’라는 뜻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심신의 단속이 지속되면 인간의 집중이 고도화되면서 무의식의 정신적 현상을 겪게 된다고 한다.
  저자는 그 정신적 현상을 일종의 임계(臨界)현상03이라고 하였다. 개인의 행위가 임계 상태에 이르면 그 행위는 주체적 선택성을 잃고 어느새 ‘어떤(익명의) 현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 ‘익명의 현상’을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계시적 체험’, 또는 ‘신(神)’이라고 하였고 동양에서는 불교의 ‘선정(禪定)’ 상태로 비유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공부나 수행, 혹은 그 어떤 행위도 출발점에 선 것은 ‘자아’이지만 학문과 덕행을 갈고 닦으면 공부의 주체는 ‘탈자아화’ 곧, 과거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집중은 잡념으로 가득 찬 자신을 버리고 비움으로써 새로운 길을 얻는 종교적 인간, 영성적 인간, 선정(禪定)적 인간의 탄생에도 깊이 간여해 왔다.
  이와 같이 인류는 진화과정에서 단발적 충동을 차분화시키며 이를 문화·제도적으로 의례화·종교화하면서 집중하는 능력을 성장시켜 왔다고 한다. 나아가 ‘차분함의 지속적 유지’, ‘삼가고 단속하는 행위’를 통해 집중이 고도화되어 최상의 경지에 이르면 특정인은 자신을 비우는 임계현상까지 체험했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동아시아권에서 계승되어온 ‘공부’의 실천방법들은 인류의 정신문화에서 기념비적인 성취였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저자 김영민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 온통 ‘소학 없는 대학’의 형식으로 몰려가는 것을 걱정한다. 압축근대화, 졸부자본주의, 한탕주의 사회, 엘리트주의 교육 등에 갇혀 필수적인 훈련과 훈육을 등한시한 현대 사회는 그로 인한 불안한 증상에 직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순간적인 욕망의 충동에서 차분해지면서 심신을 안정화할 수 있는 집중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렇듯 집중을 통한 심신의 안정화를 위한 인류의 노력은 수행의 훈전(訓典)으로 삼고 있는 우리의 안심·안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안심·안신을 위해 행하고 있는 치성의례와 기도·수련·공부, 체계와 질서, 그리고 훈회와 수칙에 맞는 수도는 열중이 아닌 집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치성의례를 행하면서 경(敬)의 삼가는 자세, 곧 천지신명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서 약속된 시간을 기다리며 정성을 드린다. 그리고 기도·수련·공부와 같은 수도는 “심신을 침잠추밀(沈潛推密)하여 대월(對越) 상제의 영시(永侍)의 정신을 단전에 연마하여 영통의 통일”04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체계와 질서를 지키며 훈회와 수칙을 생활화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삼가며 단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을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사사로움 없는 양심을 회복하는 과정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인류사적으로 고도의 집중력을 키우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순회보> 2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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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김영민, 『정신과 집중』, (서울: ㈜글항아리) 2017. 작자 김영민은 이 책에서 공부의 목표가 ‘열중(熱中)’하는 일에서 벗어나 ‘집중’으로써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인간 ‘영혼’의 잠재적 가능성의 길을 여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집중과 열중을 구별하였다. 집중은 사욕(私慾)을 비워내는 차분하고 지속적인 과정인 데 반하여 열중은 호흡이 짧고 사욕이 응집되는 지점에 가깝다고 하였다.
02 독일의 사회학자인 게오르그 짐멜은 “독차지하고 싶은 이기적 식탐이, 여럿이 모여 함께 나누어 먹는 공동 식사의 경험이 쌓이는 과정 속에서 연기(延期)되며 절제·조절되고 재배치되면서 어느덧 식사의 사회학적 구조라 할 수 있는 식탁문화가 생겼다”라고 주장했다고 이 글의 저자는 말한다.
03 임계현상은 물리학에서 어떤 물리 현상이 갈라져서 다르게 나타나는 경계라고 한다. 김영민은 그 경계를 숫자 ‘3’이라 하고 불교 선문답(禪問答)으로 설명하였다. 선문답에서 질문하는 제자를 숫자 ‘1’, 답하는 스승을 ‘2’, 그리고 타자(깨달음)를 ‘3’이라고 하였다. 그 숫자 ‘3’의 초연(超然)한 상태를 비유하여 서양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회역(會域, Gegnet: 환히 트인 터)이라 하였고, 동양의 『예기』에서는 허실생백(虛室生白: 하얀 것을 얻어내는 빈방)’이라 하였다고 한다.

 04 『대순진리회요람』,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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