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길종단 대순진리회의 변천 과정과 무극 태극의 관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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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차선근 작성일2018.04.16 조회5,142회 댓글0건본문
차선근(대순종교문화연구소)
1. 들어가며
솔직히 고백하건대 필자는 입도하고 나서 상당한 기간 동안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몇 권 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아왔던 책들은 모두 무극이 태극을 생(生)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었고,01 또 역(易)과 관련해서 주위에서 들었던 이야기도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 우연히 김병환02이 쓴 「“자무극이위태극(自無極而爲太極)”인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인가」03와 「태극 개념 연구(一)」04라는 두 편의 글을 읽게 되었고, 그때 필자는 그간 무극과 태극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여주본부도장 포정문(布正門) 벽면에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고 하신 것도 정확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흘리고만 있다가 ‘대순=무극=태극’이라는 등식이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왔고,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대개 ‘나왔다’라고 하면 ‘분파(分派)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무극도의 한 분파가 태극도라는 말이고, 태극도의 한 분파가 대순진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단의 내부 사정을 잘 파악하지 않고 겉만 보고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간 우리 종단이 이름을 두 번 개명(改名)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개명을 했다고 그 본체마저 바뀐 것은 아니다. 우리 종단의 생명은 종통에 있고 종통은 곧 도의 본체이며, 그 도의 본체가 무극도·태극도·대순진리회를 통해서 굳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 종단은 현재까지 그 외형적 모습을 무극도·태극도·대순진리회로 순차적으로 바꾸어왔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대순진리회요람』의 첫 페이지에 가장 먼저 서술되어 있는 종단의 정의는 이 사실을 시사한다.
대순진리회는 조정산 도주께서 만주 봉천에서 강성상제로부터 그 천부의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신 데서 비롯하여,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이어받으신 도전께서 영도하시는 우금(于今)까지 반세기를 훨씬 넘은 六十여 년간의 발전사를 가진 종단의 명칭이다.05
1969년 4월에 발간된 『대순진리회요람』은 종단의 역사를 60년 이상으로 잡고 있다. 1969년부터 60년 이전은 1909년이며 이 해는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으로 가신 때이다. 결국 『대순진리회요람』은 대순진리회가 1909년부터 그 역사를 시작하여 발전을 거듭해 온 종단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1925년부터 1941년까지 존속했던 무극도와 1948년부터 1968년까지의 태극도, 그리고 1969년부터 지금까지의 대순진리회는 모두 1909년 이후부터 내려왔던 하나의 종단이라는 선상에서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그간의 사정에 따라 필자는 무극도와 태극도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대순진리회 변천 과정을 대강이라도 정리해 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울러 무극에서 태극이 나온 것으로 오해를 해 온 필자와 같은 사례가 없도록, 무극과 태극은 서로 같은 것이라는 사실도 풀어서 적어두면 또한 여러모로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2. 종단 대순진리회의 변천 과정
(1) 무극도에서 태극도로
우리 종단이 처음 창설되었을 때의 이름은 ‘무극도(無極道)’였다. 무극도 창도로부터 태극도까지의 연혁은 『대순진리회요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一九二五년(을축년) 四월에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을 건설하시고 종단 무극도(无極道)를 창도(創道)하시다.
一九四一년(신사년) 세계 이차대전 당시 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에 의하여 종교활동을 일시 중단하시고 전국 명산대천을 순회주환(巡回周環)하시며 수도하시다.
一九四五년(을유년) 八월에 조국광복을 맞이하신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께서는 신앙자유의 국시(國是)에 따라 종교활동을 부활하시다.
一九四八년(무자년) 九월에 도본부(道本部)를 경상남도 부산시에 설치하시다.06
주지하다시피 도주님께서는 1925년에 전북 구태인(舊泰仁)07에 도장을 건립하시고 무극도(無極道)라 이름 하셨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무극도가 강제 해산되었지만, 해방이 되자 도주님께서는 종교 활동을 재개하시고 1948년 부산에 도 본부를 다시 설치하셨으며 대략 1950년경에 종단의 명칭을 태극도(太極道)로 변경하셨다. 이 과정을 보면 무극도에서 태극도가 나온 것, 즉 분파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 단체의 이름이 무극도에서 태극도로 바뀐 것임이 자명하다. 즉 우리 종단이 무극도에서 태극도로 그 외형적 모습(명칭이나 건물, 터 등)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순진리회요람』은 상제님의 도가 펼쳐진 연혁을 종단 중심으로 기술하지 않고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 중심으로 기술하여 두고 있음이 눈에 띤다.08 이것은 중요한 문제로 뒷장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2)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로
다음으로 우리 종단이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는 것은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온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우리 종단이 어떻게 규정되는지부터 먼저 파악해야 하고, 그러려면 도주님으로부터 도전님께로 종통(宗統)이 전수되는 과정부터 개괄해보아야 한다.
①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친자종도(親炙宗徒)09가 아니셨다. 그러나 도주님께서는 만주(滿洲) 봉천(奉天)에서 구세제민(救世濟民)의 뜻을 품고 입산수도하시다가 1917년 대순진리에 감오(感悟) 득도(得道)하시고 종통 계승의 계시를 받으심으로 해서 종통을 세우실 수 있었다.10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공사를 풀어나가시며 50년 공부 종필(終畢)로써 수도와 도통을 위한 모든 진법(眞法)을 세우셨다.
1957년 섣달이 되자 천부(天賦)의 종통계승자이셨던 도주님께서는 당신 다음의 종통을 세우시고자 하셨다. 이 무렵 도전님(당시는 도전 직책을 맡고 있지 않으셨음)께서는 도주님으로부터 “도전 오치국을 교체하려 하니 적임자를 말하라.”는 말씀을 들으셨다. 원래 도주님 재세시에는 육원제도(六院制度)라는 것이 있었으니 곧 시봉원, 포정원, 호정원, 전학원, 사정원, 보정원을 말했다. 그중 시봉원의 책임자가 도전(都典)이었고 도전을 보좌하는 직책으로 부전(副典)이 있었으며 당시 도전은 오치국, 부전은 이인호가 맡고 있던 터였다.11 도전님께서 후보자로 몇 사람을 아뢰었으나 도주님께서는 “마땅치 않다.”고 하시더니, 다음해인 1958년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總都典)이니라. 종전 시봉원의 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도주님 말씀대로 도전님께서 받으신 ‘도전’ 직책이 과거 오치국이 맡았던 ‘도전’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시봉원은 도주님을 시봉(侍奉)하는 곳이기 때문에 시봉원 책임자로서의 도전은 일종의 비서실장과 같이 도주님을 측근에서 모시는 일을 하는 직책이었다. 그러나 도전님께서 새로 받으신 ‘도전’은 종래의 도전과는 달리 도주님의 뒤를 이어 도를 이끌어나가는 ‘최고 책임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해 3월 6일은 도주님께서 화천하시던 날이었다. 그때 도인들이 도주님께 갖은 약을 다 지어 올렸으나 도주님께서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 내가 1분 늦게 가면 너희들은 몇 십 년을 고생한다. 나는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 의사 김재복이 주사기를 가지고 오자 그것을 빼앗아 바닥에 깨뜨려버리기까지 하셨다.
도주님께서는 간부 전원을 문밖에 시립케 하시고는, 도전님을 불러 도주님의 베개와 이불의 겉을 뜯도록 하셨다. 그 속에는 도인들이 모신 성금을 모아놓은 통장과 도장이 들어 있었는데 도주님께서는 그것을 도전님께 전해주시면서 “서러워 마라. 서러워 마라. 나 없다고 서러워하지 마라. 너는 총도전이니 앞으로 도의 모든 일을 도전령(都典令)에 의해 해 나가면 모든 도인들이 다시 만날 날이 있다. 앞에 있어도 모르고 뒤에 있어도 모르나니 내가 너희들을 찾아야 알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렇게 도주님께서는 도전님께 종통을 계승하게 하시며 도의 운영 전반을 맡아 이끌어나가도록 명을 내리셨다. 잠시 후 도주님의 목소리가 가늘어 잘 들리게 되지 않자 도주님께서는 도전님 귀를 가까이 하게 하고 근 한 시간 동안 도의 운영 사항 전반에 대해 말씀을 전하셨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김○○(협동상회 대표), 이○○(초대 도전이었음), 박○○(내무책 겸 수도책) 3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도주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크게 진노하시며 “당장 저 도적놈들을 내쫓아라.”고 하시며 “도적놈! 도적놈! 도적놈!”이라고 세 번 외치셨다고 한다. 도주님께서 이들을 보고 도적놈이라고 하신 데에는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전국이 전쟁터였던 우리나라는 먹을 것이 없어 거의 모두가 굶주리고 있었다. 1955년 도주님께서는 도인들의 배고픔을 덜어주시기 위하여 쌀을 직접 들여와서 싸게 파는 싸전을 내어주셨다. 싸전의 영업이 잘 되어 점점 커지자 도주님께서는 양곡위탁판매업체인 ‘협동상회’와 도정업체인 ‘대원산업주식회사’를 인수하여 경영하게 하셨다. 도주님께서는 그 책임자로 김○○, 이○○, 박○○를 정해 주셨는데, 협동상회가 다른 가게보다 쌀을 더 싸게 팔다보니 발전을 거듭하여 부산시내 전체 쌀 도매상에 쌀을 댈 만큼 커졌다고 한다. 그리고 감천과 아미동에도 협동상회의 분점을 각각 하나씩 더 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세 사람이 도주님께서 내어주신 가게이고 또 도의 재산이니까 한 푼이라도 개인적으로 유용하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쌀가게를 하다 보니 흙바닥에 쌀, 콩, 팥, 보리 등 잡곡이 떨어지는 일이 빈번했고, 흘린 것도 곡식이라 함부로 버릴 수는 없어 흙 범벅 그대로 모아다가 가마니에 담아두었더니 그 분량이 매우 많았다. 자갈치 시장의 밥장사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이 가마니들을 싸게 사가서 흙을 골라내고 잡곡밥을 지어 지게꾼 노동자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이 세 사람은 이 가마니가 원래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곡식을 주워 모아서 만든 것이니까 이것을 팔아 자신들이 임의로 사용하여도 아무런 죄가 없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한푼 두푼 돈을 챙기다 보니 점점 재물에 대한 욕심이 커져 갔고, 급기야 협동상회의 쌀을 1말, 2말 몰래 빼내다가 팔아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도의 재산에 임의로 손을 댄 사실을 알게 되신 도주님의 노여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도주님께서 화천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 3인이 들어오려 하자 도주님께서는 그들을 “도적놈”이라고 부르시며 당장 쫓아내라고 하신 것이다.12
다시 밖에 시립하여 있던 전체 임원들을 돌아보시며 도주님께서는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명년(明年)인 줄 알았더니, 금년이로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모든 일을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미시(未時)가 되자 모든 말씀을 마치신 도주님께서 인수(人壽) 64세로 화천하시니, 이 사실과 도주님의 유명(遺命)에 의한 도전님의 종통 계승은 ‘명령전달’과 ‘공포사항’으로 전 도인들에게 알려졌다.
명령전달
오십년공부종필이며 지기금지사월래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모든 일을 행하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공포사항
지존13께옵서 무술 삼월 초육일 을미시(오후 한시 삼십칠분)에 화천하시다.
명령에 의하여 앞으로 모든 행사를 종전대로 도전령에 의하여 행함.
모든 도인들은 조금도 낙심말고 성경신을 다하여 수도에 전심할 것.
지존께서도 항상 크게 의심날 일이 있고 땀 뺄 일이 있다 하셨음.
당시에는 인쇄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줄판(속칭 가리방)이라고 하는 철판에 철필로 글을 새기고 잉크를 묻혀 찍어내었고, 이렇게 만든 문서를 도인들에게 직접 일일이 돌렸다고 한다. 이를 전달받은 도인들은 ‘명령에 의하여 앞으로 모든 행사를 종전대로 도전령에 의하여 행해 나가라’는 공포사항에 따라 아무런 동요 없이 도주님과 똑같이 도전님을 모시면서 도전님의 명을 받들어 나갔다. 실로 이때 배포된 ‘공포사항’은 도전님의 종통 계승을 직접적으로 입증해주는 명백한 물증이라고 할 수 있다.
▲ 감천도장에서 태극도를 이끄시던 시절의 도전님 댁 모습.
② 도주님께서 화천하시고 난 뒤 3년 동안 삼년상이 치러졌다. 이 기간 동안 남자 도인14들은 검은 고무신에 흰옷을 입었고, 여자 도인들은 검은 비녀 혹은 검은 댕기, 검은 신을 신었다. 삼년상이 끝나자 도전님께서는 “이제 물들인 옷도 입고 머리도 자유로이 해라.”고 말씀하셨고 전 도인들은 그대로 그 명에 따랐다. 도전님께서는 삼년상 직후에 봉축주를 바꾸셨다. 원래는 봉축주가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대운대사 소원성취케 하옵소서’였는데, 삼년상이 끝나자 도전님께서는 봉축주를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태극도주 조정산 대운대사 소원성취케 하옵소서’로 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이다. 그리고는 한 달이 채 못 되어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조성옥황상제 소원성취케 하옵소서’로 주문을 또다시 바꾸도록 하셨으니, 역시 도인들은 도전님의 명에 아무런 동요 없이 그대로 따랐다. 또한 도주님 재세시에는 감천도장에 오직 대강전(大降殿) 건물 하나뿐이었으나 도전님께서는 수진각, 진양원, 청학관, 백학관 등 건물을 더 지어 넓히셨고, 수도인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시학·시법공부뿐만 아니라 법학·청학공부도 돌리시는 등 도주님의 유법을 받들어 그대로 시행해 나가셨다.15
도주님께서 화천하신 1958년부터 10년 동안 당시 태극도의 도인들은 도전님을 충실히 받들었다. 도전님의 종통 계승이 도주님의 명(命)에 의한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으므로, 태극도의 도인들이 모두 도전님의 명을 따름을 천명을 받드는 것이라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태극도에 종통이 분명히 살아 있었다.16
③ 1967년이 되자, 갑자기 태극도의 임원들이 지금의 중앙종의회에 해당하는 협의회를 중심으로 도전님께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협의회는 포장(布丈: 선감에 해당)·호장(護丈: 교감에 해당)17들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회의기구로, 도주님께서 화천하시기 3년 전에 도주님의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도주님께서는 수도공부나 치성 행사를 제외한 도중사(道中事)의 운영 문제에 관련된 일을 협의회에서 의논하게 하셨으며 그 의결사항을 항상 챙기셨다고 한다.18 도주님 화천 후에는 도주님의 유명에 따라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께서 도에 대한 운영 전반을 맡으셨고, 협의회도 도주님의 명이었던 만큼 이를 잘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협의회의 의장이 “이제 우리는 그 어느 개인19의 명령에만 좌우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체계를 밟아 처리하는 지당성을 유지하는 데 본 협의회는 노력하여 나아갈 것이다.”20라는 말을 들고 나와 도전님의 명으로 태극도가 운영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또한 교화부장(오늘날의 교무부장)도 ‘협의회가 도전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가 절대 복종만 한다면 의회를 설립하신 지존의 뜻은 저버리는 것이 될 것’21이라고 하여 협의회 의장의 편에 섰다. 이것은 ‘도전령으로 행하라’는 도주님의 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이면서 곧 도주님에서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을 부정하는 명백한 배도(背道) 행위였다.
과거 도주님께서는 협의회를 만드시고 그곳에서 도무(道務)에 대해 의결하도록 하셨지만, 협의회의 결정대로 시행하지 않으시고 검토를 하신 후 명을 다시 내리셨다고 한다. 그중 하나의 예로, 당시 태극도의 대강전은 원래 협의회에서 임원회관으로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나, 도주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설계를 확대·변경하시어 대강전으로 짓게 하셨던 사실을 들 수 있다.22 또 ‘명령에 의하여 앞으로 모든 행사를 종전대로 도전령에 의하여 행함’이라는 공포사항에 따르면, 도전님께서도 도주님처럼 협의회에서 의결한 사항을 검토하신 후 조정을 하실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협의회는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의 명령과 관계없이 별도로 움직일 수 있는 기구가 되지 못함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사실 협의회 임원들의 의도는 ‘도전’이 협의회 임원들과 도무(道務)를 같이 처리해야 하는 직책임을 내세워 자신들도 도전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소란이 일어나자 태극도 도인들은 도전님을 따르는 파와 도전님을 배척하는 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들 사이에 큰 소요가 일어날 조짐마저 보였다. 도전님께서는 사태를 수습하시기 위하여 1968년 4월 7일 도주님의 유명을 거역하고 종통을 부정하며 도를 혼란에 빠뜨리는 몇몇 사람들에게 자격을 삭권하는 징계를 내리는 성명서를 발표하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난동을 부렸다. 이에 도전님께서는 2주일이 지난 4월 22일 다시 지시각서를 내리시어, 도인들이 남을 비방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또한 어떠한 유언비어에도 현혹되지 말며 오직 수도에만 매진할 것을 촉구하시면서 이에 대한 서약을 겸한 도적부를 다시 제출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협의회 임원들은 도전님의 명을 모두 부정하고 1968년 6월 19일 밤, 자신들의 측근들을 이끌고 도전님의 집무실을 찾아가 에워싼 다음 도전님을 강압(强壓)하여 도의 전권(全權)을 내어놓고 물러나시도록 만들었다.
도전님께서 협의회 임원들에게 망극할 괴로움을 겪으신 며칠 뒤 6월 24일은 구천상제님 화천치성일이었다. 치성이 끝나고 철상(撤床)을 하려 하자 갑자기 과방(果房)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이를 보신 도전님께서는 아침에 며느리를 불러 깨끗한 와이셔츠 하나를 가져오게 하시어 갈아입으신 후 조용히 출궁하셨다. 훗날 도전님께서는 “과방이 무너지는 것을 보니 상제님께서 치성을 안 받으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내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도전님께서는 1969년 4월, 도의 전반적인 기구를 개편하시고 종단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시어 상제님과 도주님의 유지(遺志)·유법(遺法)을 받드시며 새롭게 수도인들을 영도하기 시작하셨다. 원래 부산 감천에는 10만 수도인들 중에서 약 3,000호 정도가 모여 살고 있었는데 이때 대략 800호 정도만 도전님을 따라왔다고 한다. 도전님께서는 유지(遺志)·유법(遺法)에 따라 포덕천하(布德天下)에 힘을 다하시니, 불과 30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수도인들의 수가 200만에 이르렀으며, 여주본부도장을 비롯하여 중곡도장, 제주수련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 토성수련도장 등 전국 5대 도장도 건립되었다. 또한 사회와 민생을 구제하시기 위하여 구호자선사업·사회복지사업·교육사업을 종단의 3대 중요사업으로 지정하시어 연차적인 계획에 따라 사회발전에 이바지하셨으며, 특히 대진대학교와 전국 6개 고등학교, 분당제생병원을 건립하시는 등 수많은 업적을 이루어 내셨다.
④ 종통(宗統)은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계보(系譜) 속에서 상제님의 대순하신 유지(遺志)와 도주님께서 짜 놓으신 유법(遺法), 도전님께서 가르치신 유훈(遺訓)으로 전해지는 진리 체계 그 자체로 규정할 수 있다.23 도전님께서 “종통이란 도의 생명이며 진리인 것입니다. 종통이 바르지 못하면 법이 있을 수 없고 경위가 바로 설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 속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으며 만물만상을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24라고 하신 데서 알 수 있듯이 종통은 도의 생명이며 진리이다. 따라서 종통이 사라진다면 곧 도가 사라지게 되고 종단도 생명을 잃게 된다. 여기에서 종통이 사라진다 함은 상제님-도주님-도전님에게까지만 이어지는 계보가 부정되거나 혹은 상제님의 유지, 도주님의 유법, 도전님의 유훈이 부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 이제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나온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도록 한다. 앞서 말했듯이 『대순진리회요람』은 상제님의 도가 펼쳐진 연혁을 종단 중심으로 기술하지 않고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대순진리회요람』에 따르면 도의 역사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이 종단이 아니라 종통이며, 또한 ‘종통의 뜻에 따라 종단도 그에 상응하여 변화해왔다’는 사실이 분명하다.25 따라서 종단은 그 외형적 모습을 구성하는 장소, 건물 같은 유형적 요소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통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순진리회라는 종단이 태극도 도장 건물을 떠나 다른 곳에 새로 지은 건물에 기반하고 있다는 이유로 태극도에서 분파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 종단의 심장은 종통에 있으므로 종통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고 그 본체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예로 무극도에서 태극도로 바뀔 때의 상황을 들 수 있다. 1925년 전북 구태인에 설립된 무극도장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한 뒤 모두 뜯겨 빈 터로 남아있었다. 무극도가 강제 해산될 당시 무극도장 터의 소유자는 김진염(金鎭)이었고, 김진염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평생 종교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김진염은 무극도의 도인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일제에 의해 무극도장의 건물이 모두 해체되고 그 터도 헐값으로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갔지만 1944년 김진염은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주변 친척들의 돈을 끌어 모아 다시 그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음에도 도주님께서는 무극도장 터를 다시 찾지 않으시고 1948년 부산 보수동에 도의 본부를 설치하시며 도명(道名)을 태극도(太極道)라 하셨다. 결국 무극도장 터에는 도장이 들어서지 않았다. 도주님 말씀처럼 ‘그 시기의 도수(度數)에 쓰였으니 족했던 것’이다.26 결국 1955년 김진염 일가는 그 땅을 어찌 사용해 볼 도리가 없어서 재단법인 영원학원(永圓學院)에 기증하고 만다.27 1948년 당시 무극도 도인이 무극도장 터를 어렵게 찾아 지키고 있던 상황에서, 도주님께서 그 터에 도장을 다시 세우고 종단을 출범시키시기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주님께서는 1941년 구태인의 무극도장을 떠난 뒤에는 그 장소를 다시 찾지 않으셨다. 이 사례는 우리 종단이 땅이나 건물에 의해 매어있는 것이 아니라 종통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도주님의 유명에 따른 유일무이한 종통계승자이신 도전님께서는 협의회 임원들의 난동을 피해 태극도장을 출궁하셔서 대순진리회를 새로 창설하셨다. 이 상황은 도전님의 이궁(移宮)에 따라 종통이 옮겨간 것이기 때문에, 태극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분파된 것이 아니라 도의 본체(종통)가 ‘태극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가 ‘대순진리회’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우리 종단이 태극도라는 외형적 모습(명칭이라든가 건물, 터 등)에서 대순진리회라는 외형적 모습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요람』에 ‘종단 대순진리회를 창설(創設: 처음으로 만들어짐)’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28 이것은 ‘분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종단의 외형적 모습이 새롭게 갖추어진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뿐이다.
<대순회보> 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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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표적으로 『우주 변화의 원리』(한동석, 대원출판, 2001, p.382)를 들 수 있다.
02 現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대학 인문학부 철학전공 부교수
03 퇴계학연구원, 『퇴계학보』 Vol 93, 1997, pp.126∼134
04 한국외국어대학, 『인문학연구』 Vol 6, 2001, pp.83∼107
05 『대순진리회요람』 p.5
06 『대순진리회요람』 p.12
07 現 전북 정읍시 태흥리 삼리마을 524-1번지
08 『대순진리회요람』 pp.9∼13, 四. 沿革 참고
09 상제님 재세 시 상제님을 직접 뵙고 따라다니던 종도.
10 구천상제님의 계시를 받으신 도주님께서 종통을 세우셨다.<80.7.22>(『대순지침』, p.13)
11 1968년 6월 25일자 『태극도 월보』 p.7 참고. 시봉원 책임자 도전으로 최초로 된 사람은 이윤섭이었고, 오치국은 두 번째로 도전이 된 사람이었다.
12 도주님 화천 후 이 세 사람은 따로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들 3인은 작당하여 1959년에 도의 재산인 협동상회를 ‘협화산업주식회사’로 명의를 변경하여 그들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협화산업은 태극도 재산으로 환원되었고 이 일로 인해 이들은 모두 제명되었다.
13 도주님을 존칭하는 말. 당시 수도인들은 도주님을 옥황상제님이라고는 부르지 않고 도주님, 정산(鼎山)님, 지존(至尊)님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14 태극도 시절에는 내수(內修)·외수(外修)라는 말이 없었고, 임명을 모시지 않은 평도인인 경우 모두 수반이라고만 불렀다.
15 공부는 도주님께서 화천하시기 불과 석 달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6 이상은 태극도에서부터 수도하여 온 대순진리회 상급 임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17 원래 대체 임원은 포감 하나밖에 없었으나, 1956년경 도주님께서 포장과 호장 두 가지로 바꾸셨다.
18 각주 11.
19 도전님을 말함.
20 1968년 1월 25일자 『태극도 월보』 p.7
21 이 말은 1968년 6월 25일자 『태극도 월보』 「협의회와 도전 부전의 권한 관계」에 실린 것이지만, 이것이 논리성과 객관성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평소 생각을 정리한 말이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을 이전부터 해오고 있었던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22 각주 11.
23 『대순지침』, pp.13~14 / 『대순회보』 5호, p.2(1986.10.28 훈시) / 『대순회보』 10호, p.2(1988.10.10 훈시) 참고. 상제님의 유지가 하나의 일정한 진리 체계로 구체화된 것이 유법 즉 진법(眞法)이며, 그 진법이 바르게 시행되기 위한 가르침이 유훈이다. 유지, 유법, 유훈의 관계는 이와 같이 규정된다.
24 『대순회보』 5호, p.2
25 각주 8.
26 교운 2장 20절 참고.
27 김성수, 「증산계 종단 연구의 문제점: 無極道 해산 시기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종교문화학회 창립기념 국제학술대회』 Proceedings, 동아시아종교문화학회, 2008, pp.287∼290 / 『대순회보』 85호, pp.24∼28
28 『대순진리회요람』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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