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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8.25 조회4,186회 댓글0건본문
해외에서 선보인 우리 기도의식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지 두 시간 남짓, 비행기는 어느새 타이베이(臺北) 소재 타오웬(桃園)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대만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우리를 맞았고 야자수 나뭇잎이 바람을 타고 반갑게 손짓했다. 파란 하늘 아래 낮게 떠다니는 구름은 마치 생애 처음 외국땅을 밟고 들뜬 내 마음만 같았다. 공항에서 나온 우리는 자동차로 대만의 북동쪽에 자리한 이란(宜蘭)이라는 곳을 향했다. 차창 밖으로 낯선 오후의 정경이 스쳐갔다. 그 정경들은 지도 속 글자로 있던 대만이라는 나라에 조금씩 생명의 온기를 불어주는 듯 했다.
이번 대만 방문의 목적은 불광대학교(佛光大學校) 종교학과 류궈웨이(劉國威)교수의 초청으로 2008년 5월 9~10일간의 불광대학 비교종교학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6년 6월 ‘세계종교지도자대회’를 계기로 종단을 방문했던 류(劉)교수의 은사 류상쪼우(遊祥州)교수는 우리 도장과 수도인들의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가장 한국적인 종교의 모습을 우리 종단에서 발견했다고 전한 바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한국 종교를 대표해 먼 바다를 건너게 된 것이었다.
‘종교의례와 치병’이라는 학술대회의 공동 주제를 안고 우리 종단에서는 이경원 교감(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교수)이 ‘대순진리회의 기도의례의 종교적 상징성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 외에 특별한 이벤트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논문 발표 후 각국 종교의 의식시연을 가지는 시간으로 우리 종단에서는 한복을 차려 입고 ‘기도의식’을 선보이기로 한 것이다. 일행 가운데 필자를 비롯한 세 명이 시연하기로 했는데 벌써부터 밀려오는 부담감에 마음은 무거웠다.
하지만, 차창 밖 풍경에 어느덧 마음은 다시 호기심으로 차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한 도(道)의 크기이며 인구 2,200만이 사는 작은 섬나라 대만은 전체 지역의 2/3가 산지와 구릉지대로 되어 있고 북쪽은 아열대, 남쪽은 열대지방으로 무더운 곳이다. 산과 나무가 많긴 한데 산세는 험한 편이고 나무들은 열대식물이어서 그런지 우리 한국의 산천초목에서 느끼는 곱고 우아한 자태는 느낄 수 없었다. 더운 기후조건 때문일까, 대만에 대한 인상은 한편으론 여유롭게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열정과 생기가 다소 약하게 느껴졌다. 큰 빌딩들을 제외한 다수 건물들과 주택들은 20년 전의 한국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또 한 가지 재밌는 광경은 스쿠터로 가득한 대만의 도로이다. 검소함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대만인들의 특성상 스쿠터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애용하는 편리한 교통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대만에서는 수십 대의 스쿠터가 동시에 거리를 누비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국땅에서의 여러 인상을 기억 속에 남기며 학술대회 기간 동안 묵을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늦은 저녁 무렵이 되어 잠시 주위를 산책할 기회가 있었다. 대만 북동쪽의 이란은 개발이 덜 된 조용한 곳이었지만 소박하고 포근한 정이 느껴져 좋았다. 거리를 걷는데 여러 가정에서 신을 모시는 붉은 불빛이 보였다. 도교가 민간신앙으로 뿌리 깊게 이어져 온 대만의 종교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 이국의 땅,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낯설었지만, 그 속에서도 왠지 사람 사는 냄새는 어디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안 통해도 손짓과 표정, 인정어린 웃음 한 번으로 마음이 통할 때가 있었다. 그 따뜻한 느낌이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라가 달라도 역시 인간은 모두 하나임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대만에서의 첫날, 그 밤이 깊어갔다. 바로 다음 날이면 논문 발표 후 ‘기도의식’ 시연을 해야 하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많이 긴장하면 가끔 주문을 잊기도 하는데, 외국의 여러 학자들, 종교인들 앞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이불을 뒤척이다가 어느 사이에 잠이 들었다.
좀 덥긴 했지만 바로 가까이 산이 있어 숙소에서 맞은 아침은 싱그럽고 상쾌했다. 조식 후 숙소에서 자동차로 30분 가량 떨어진 불광대학교로 출발했다. 이란 거리를 지나서 외딴 산으로 꼬불꼬불, 불광대학교는 그렇게 산 위에 세워진 학교였다. 경치는 좋았지만 길이 멀어, 산으로 뻗은 도로를 타고 학교까지 등교하는 학생들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옆으로는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불광대학교(佛光大學校)는 대만의 불교 종단 불광산사(佛光山寺)가 운영하는 종합대학교이다. 설립자인 성운대사(星雲大師)는 도교와 유교의 전통신앙에 밀렸던 대만 불교를 60년 사이 대만 내에서 뿐 아니라 세계 불교를 이끄는 거목으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그는 “교육사업으로 인재를 기르고 문화사업으로 부처님 법을 널리 펼치며, 자선구제사업으로 사회복지에 앞장서고, 수행으로 인심을 정화시켜야 한다.”는 신념의 일환으로 불광대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신도수 100만에 세계 200개의 분원이 있을 정도로 국내외로 뻗어가는 불광산사의 성장력은 대단했다. 개인수도와 포교를 균형있게 발전시키는 모습에서 우리 종단이 수행과 포덕 그리고 3대중요사업을 조화시켜나가는 모습과 다소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대중 속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고 세계로 넓게 뻗어가는 친화력과 활력만큼은 배워도 좋을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광대학교에 도착한 일행은 마중 나온 학교 안내자들을 따라 발표장으로 들어갔다. 검정색 승복을 입은 한 까까머리 여학생이 쫓아와 웃으며 방명록 작성을 권했다. 방명록 작성 후 자료집을 받은 모두는 간단히 다과를 먹고 발표장으로 입장했다. 한국을 비롯해 대만, 베트남, 인도, 네팔, 일본 등의 여러 학자들이 이틀간 각자가 준비해 온 연구자료를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전에는 네팔과 일본, 인도에서 온 학자가 발표하기로 했고, 중식 후 이경원 교감의 발표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의식’ 시연은 그날 발표가 끝난 오후 늦게쯤에 있을 예정이었다.
‘종교의례와 치병’이라는 공동 주제를 봐도 알 수 있듯 각 학자들의 개별 주제는 각 종교의 종교의례가 환자들에게 미쳤던 실제 사실을 자료로 연구한 것이었다. 그 내용들은 종교의례의 기적적인 현상보다는 환자가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와 의식을 종교를 통해 배워간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일본 불교의 경우 그런 점과 아울러 장례의식까지 대행하는 점에서 그들의 상업적인 의도도 엿볼 수 있었다.
오전 발표가 다 끝나갈 무렵 조금씩 졸음이 밀려왔다. 양복정장에 넥타이, 비록 냉방시설이 잘 되어 있었지만 갑갑함은 피할 길 없었던 것이다. 졸음과 싸우던 사이 중식시간이 되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잠시 학교를 둘러보았다. 탁 트인 교정은 깨끗한 느낌이었고 학생들의 모습은 해맑았다. 높은 곳에 위치한 불광대학교에서는 저 멀리 수평선이 내다보였다. 그러다 문득 바다 건너 세상에 내디딘 첫 발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나의 좁은 견문으로 잊혀진 미개척지였고 내 능력은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자각에서였다. 우리 수도에서 넓게 덕을 펼치는 것만큼 큰 것이 없는데 넓은 세상을 두고 자신에게 갇혀 있었다는 실망은 한편 씁쓸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발표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급한 걸음으로 자리를 찾아가 우리 종단 측 이경원 교수의 논문발표를 기다렸다. “대순진리회의 기도의례의 종교적 상징성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해외 종교인들과 학자들 앞에서 유일무이한 대순진리회의 기도의례를 소개한다는 사실에서 의미심장함을 느꼈다. 발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발표 후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질문으로 관심을 표했다. 그 가운데 여성과 남성의 평등사상에 대한 대순사상의 입장을 묻는 질문도 있었는데, 내 머리 속은 이미 『전경』 속 상제님 말씀 한 구절을 찾고 있었다.
그 뒤 두 분 학자의 발표로써 그날의 학술발표는 마치고 각 종교의 의식시연 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긴장이 되는지 벌써부터 마음은 떨려왔다. 가장 먼저 불광대학교 학생들의 독경 시연이 있었다. 화려한 의례복을 입은 수십 명이 행사장 가득 정렬했다. 그런데 비해 단 세 명, 소박한 한복을 입고 주문을 봉송하는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보면 시각적으로는 많이 보여줄 것이 없었다.
의식시연이 있는 동안 한쪽 빈 방에서 한복을 갈아입는데 주문에 대한 걱정이 다시 엄습해왔다. 많은 외국인이 카메라를 들고 지켜보고 바다 건넌 곳 그 하늘 아래서 돌리는 주문인데 실수 없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은 더해 갔다. 외수 둘, 내수 하나 곱고 소박한 한복으로 단장한 우리 일행은 차분히 순서를 기다렸다.
앞선 시연을 관람하는 중 화려한 몸짓과 의복에서 나오는 색채가 분명 우리 종교의식의 방향과 크게 다름을 느꼈다. 인도와 네팔의 의례는 일종의 예술 공연 같았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하는 의문부터 시작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우리 순서가 돌아왔다. 준비해 온 향과 향로, 양초와 성냥을 앞에 올리고 그 리고 납폐지를 준비해두었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굵은 소나기 줄기처럼 우리 모두를 적시는 듯 했다. 다들 어떤 의식이 펼쳐질지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우리는 양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로 향로 앞으로 다가섰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집사를 보게 돼 앞 쪽에 서고 나머지 두 내·외수 분이 양쪽에 자리했다. 이제 의식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머릿속은 텅빈 것처럼 해야 할 순서가 금방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법배로부터 시작한 배례 모두를 마쳤다. 그리고 납폐지를 태우며 주문을 봉송해갔다.
천천히 주문은 머릿속에서 먼저 메아리처럼 울리고 그 다음 입으로 흘러나왔다. 주문의 다음 글자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지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문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갑자기 주위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은 자세, 그 속에서 주문만 봉송하는데 우리 모두의 얼굴과 온 몸에서는 땀이 비오 듯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모두가 놀랐던 점이. 앞선 시연에서는 역동적인 동작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땀 흘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기를 얻은 양 모두는 마치는 순간까지 더 정성스럽고 힘 있게 주문소리를 빚어냈다.
기도의식이 끝나자 의식을 관람했던 여러 사람들은 시연과정 흘렸던 그 땀의 의미와 연고에 대해서 무척 궁금해 했고 더불어 신기해하며 질문을 던져왔다. 한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본인 스스로도 이것이 바로 남모르는 우리 공부의 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결코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신도의 법방은 진리와 에너지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날 밤은 너무도 편안한 밤일 수밖에 없었다. 나름 큰일을 마무리한 것처럼 가벼운 마음이었다. 가만히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날 꿈속에서 분명 나는, 신선선녀의 모습으로 주문을 외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보았다.
<대순회보 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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