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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典經』에 나타난 손병희(孫秉熙) 연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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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호 작성일2018.04.05 조회5,1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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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손병희의 사설

 

   『典經』에 기록된 손병희(孫秉熙) 관련내용 중에는 상제님께서 그의 교설(敎說)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하시고, 장차 그 교설로 인해 야기될 폐해를 염려하시어 손병희의 순회강연을 제지시킨 내용이 있다.

    그 내용은 손병희가 호남 일대를 순회하고자 전주(全州)에 머물고 있을 때 상제님께서 “그는 사설로 교도를 유혹하여 그 피폐가 커지니 그의 순회가 옳지 않다”라고 말씀하시고 박공우를 시켜 손병희를 경성으로 돌려보내게 하신 일인데37, 과연 상제님께서는 그의 교설 중 어떠한 부분이 그릇되었다고 판단하시고 손병희의 순회를 중지시키신 것일까? 

 

  1. 귀국 후의 활동

 

   1897년 12월 24일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교단을 넘겨받은 손병희는 망명 중이던 일본에서 귀국하기에 앞서 실추된 동학의 오명을 회복하고자 1905년 12월 1일을 기해 교명(敎命)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그로부터 1년 남짓 후인 1906년 1월 그는 일본당국으로부터 자신의 신분을 보장받은 뒤 귀국하여 곧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2월 16일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茶洞)에 설치, 나아가 각 군에도 교구를 설치하는 등 교단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분주하게 활동하였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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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이 끝난 후 1901년 1월 귀국하여 효창공원에서 찍은 손병희 환국기념사진.

 

   특히 교단의 명칭을 천도교로 개칭한 이후 그는 교단을 배반하고 교명을 팔아가며 동학의 지도자인양 행세한 일진회의 앞잡이 이용구와 그와 함께 일진회로 넘어간 두목급 61명을 교단에서 출교시켜 교(敎)와 회(會)를 분리시켰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직접 천도교 교단 총책임자의 직무와 더불어 교도(敎徒)들을 설교(說敎)하는데 주력하며 교세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손병희가 주로 민중들에게 강조한 사상은 종교국가론 즉, 교정쌍전(敎政雙全)이라는 것인데, 이는 말 그대로 교(敎)는 정치화되고 정(政)은 도덕화 될 때 둘이 완전해 진다는 즉, 권력의 도덕화와 도덕의 권력화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손병희는 도(道)를 교정쌍전으로 보았기 때문에 천도교를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종교운동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운동을 전개한다는 의미를 뚜렷하게 표명했다. 그가 이 같은 사상을 종교적 이상으로 내세운 까닭은 아마도 집권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된다. 

    한편 그는 자신이 꿈꾸는 종교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중을 주체세력으로 하여 사회를 개혁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여겨 교도들의 의식을 계몽시키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귀국 후 그는 근대 문명주의자로 변하여 있었는데, 그의 이 같은 면모는 망명지 일본에서 문명개화의 첩경이 언론과 교육의 창달에 있음을 절감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 때문인지 그는 귀국 당시 일본에서 인쇄기와 활자를 들여와 일간지 신문인 『만세보(萬歲報)』39를 발간하여 문명개화의 통로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창간한 『만세보』창간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만세보 창간사에서 “나는 민중을 계도하고 우리 민족이 장차 노예의 기반에서 벗어나 희생참독(犧牲慘毒)을 면하게 하기 위해 오로지 국민의 교육을 위해 이 신문을 창간하였다”고 주장했다.40 하지만 『만세보』에는 국민들의 의식계몽이라는 취지 아래 정치에 있어서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민중들의 사상적 전환을 위한 서구의 근대적 국가론을 소개41, 민중들로부터 은근히 새로운 국가형성의 분위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게다가 손병희의 『만세보』 창간의 저변에는 이용구가 천도교인들을 유혹하여 일진회에 가담시키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었다. 어찌 보면 귀국 후 그는 과거 자신이 획책한 거사에 자신이 직접 가담치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절체절명의 위기를 뒤늦게 수습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는 만세보가 이용구 등 일진회의 매국행위를 주로 비난했던 신문이었다는 사실만 눈여겨보더라도 쉽게 납득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도 1906년 9월 6일자 『만세보』 신문에는 이용구가 진보회를 통째로 친일파 일진회에 넘김으로 인해 빚어진 교단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일진회와 천도교를 분리하는 교정분리[敎政分離,이를 당시에는 교회분석(敎會分析)이라 했다]를 공포하고 앞으로 교인들이 지켜야 할 네 가지 준수사항을 주요기사로 다루기도 했다.42 

    또한 9월 18일자 신문에는, 모든 교인은 일진회에서 탈퇴하여 천도교로 복귀하고 교구장은 교인들의 퇴회여부를 중앙총부로 보고하되 이를 어기면 교구장직은 물론 교인자격까지 박탈시킨다고 강력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미 이때는 그가 천도교를 선포하고 일진회와 천도교를 분리시킨 이후인지라, 한동안 동학의 지도자인양 행세했던 이용구의 친일행각과 나아가 이용구와 손병희 자신의 노선이 같지 않다는 사실이 탄로나 있었던 시기였다. 이 같은 시기에 손병희가 공식적으로 신문에 교인들의 복귀지시를 선포하니 교인들은 일진회를 탈퇴하고 다시 천도교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한편 교인들이 천도교로 속속 복귀하고 있을 당시 교단의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손병희가 교(敎)와 회(會)를 분리시키면서 이용구를 비롯한 61명의 두목급 인사들을 출교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출교당한 두목급 인사들이 교단의 재정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만큼 재정적인 부분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은 교단의 쟁쟁한 두목들이었던 것만큼 교단의 동산(動産)과 부동산(不動産)을 모두 관리하고 있었다.43 이처럼 손병희는 교단의 재정(財政)이 바닥난 상황에서 힘겹게 교단을 재정비해 나갔다. 당시 그의 곤궁함은 집세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로 인해 그는 집주인으로부터 대문을 봉쇄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44 

    한편 이를 기회로 여긴 일진회의 이용구는 또다시 그의 숨통을 죄여왔다. 이용구가 출교당한 61명의 두목들과 함께 천도교우동지(天道敎友同志) 구락부를 조직해 천도교를 가장하며 ‘천도교와 일진회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천도교 교단 자체의 활동을 방해, 공공연히 싸움을 걸어오는 등 그를 계속해서 음해 중상해 온 것이다. 

    이에 손병희는 자신의 실수 즉, 일국(一國)의 운명을 좌우할 큰 거사를 자신이 직접 실행치 않고 대리인〔이용구〕을 내세워 안일하게 일을 도모하여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진회라는 기형적인 매국단체를 낳아 이 같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 것을 한탄스러워 했다.45 

    하지만 그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칠 겨를도 없이 이용구 일파의 만행은 더욱더 악랄해졌다. 이용구가 함께 출교당한 61명의 두목들을 거느리고 마침내는 천도교에 항거하기 위해 시천교(侍天敎)46를 세우고 교주가 되어 또 다시 천도교에 응수해 온 것이다. 그는 교도들을 현혹하며 심지어는 교내재정이 바닥난 손병희의 상황을 비꼬아 ‘손병희는 반년 이내에 굶어죽을 것’이라는 악의에 찬 망언을 퍼붓기도 했다.

    한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병희가 천도교의 4대 교조로 지목했던 김연국(金演局)도 대도주직을 버리고 이용구의 시천교로 넘어가 버렸다. 이용구의 유혹에 넘어간 김연국 또한 시천교와 합세하여 그를 중상모략 해왔는데, 이로 인해 장차 자신이 꿈꾸는 이상국가 건설의 주체세력으로 내세우고자 했던 교도(敎徒)들이 시천교로 잇따라 넘어가자 손병희는 예기치 않은 위기를 벗어날 방안을 찾느라 고심에 빠진다.

    당시는 그의 언론기관이었던 『만세보』 신문 또한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의 사주를 받은 이인직으로 인해 『대한신문(大韓新聞)』47으로 제호(題號)를 바꾸고 친일내각 기관지로 탈바꿈해 있었던 상황이라 시천교의 만행을 빠른 시일 내에 전국의 교인들에게 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 손병희의 순회강연

 

   교단의 재정이 바닥난 상황에 일진회와 시천교의 음해중상까지 겹치자 천도교단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손병희는 신앙과 포교에 지장을 초래한 그들의 행위를 더 이상 관망할 수 없다고 여겨 각 지방에 있는 일진회원48들을 인도하여 다시 천도교로 복귀시키고, 두목급 61인의 출교로 인해 바닥난 교내재정을 해결할 차로 당시 전체교인의 7할이 분포되어 있는 ‘황해도와 평안도’49로 권동진 등 자신의 측근을 대동하고 순회강연에 나선다.(1908년 2월 6일)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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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북도 청원군에 소재한 손병희 생가.

 

   이때 강연의 주제로 권동진은 ‘종교의 효력’을 손병희는 ‘종교의 본령’ 즉 ‘종교의 정의’와 ‘국가와 종교’를 주로 강연하였는데, 아마도 그가 강연에서 이 같은 주제를 내세운 것은 이용구와 김연국의 말에 동요된 교인들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함으로 이해된다.

    그는 ‘종교의 본령’을 정의 내림에 있어서는 당시의 학자(學者)들의 학설(學說)을 일체 부정하고 종교는 오직 지(知)ㆍ정(情)ㆍ의(意)의 통일된 인격적(人格的) 숭고(崇古)에 의해서만 종교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어떤 학자들의 이견에 의하여 영치불변(永不變)할 것이 아니고, 종교는 고상한 인격(人格)에 의하여 불연자연(不然自然)으로 화출(化出)된 것을 이름이라 말하고, 천도교가 바로 그러한 종교라고 주장했다.51 

    한편 손병희와 같이 순회강연에 나선 권동진은 이때 ‘종교의 효력’에 관해서도 설교(說敎)하였다.52 이에 관해서는 객관적인 자료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당시의 교단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그는 교인들에게 교정쌍전(敎政雙全)의 국가건설은 민중이라는 말과 함께 새로운 민(民)은 천주(天主)를 모신 존엄하고 평등한 인격일 뿐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고 사회를 형성하는 도덕적 주체라고 하여 앞으로 이러한 세상이 건설되면 천도교인들이 부패한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정치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손병희의 종교국가론을 통해 종교의 효력을 주장한 듯하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의 양도를 순회할 당시 어느 날 밤, 그의 처소에 자객이 침입하여 그는 몸에 상처를 입고 신의주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날(1908년 4월 9일) 『대한매일신보』53 에는 손병희와 관련해서 ‘혹세무민함이 어찌그리 용이한지’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 기사의 요지는 당시 손병희의 측근들이 손병희가 문명공기를 받은 사람 즉, 신문명을 받아 사회를 개혁시킬 사람이라 말하며 민심을 동하게 했다는 것이다. 기사에서는 이 내용을 동학농민전쟁에 빗대어 그 당시 나를 따르면 장생불사하고, 칼이 와도 몸이 상하지 않고, 적들의 총기에 물이 난다던 몇몇 괴수들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민중들을 감언이설로 혹하게 하였다고 기록하며 손병희가 지금 또 그러한 방법으로 민중들을 피폐케 하고 있는 듯하다고 그의 강연으로 인한 폐해를 걱정하는 듯했다. 

    한편 이 같은 사건이 있은 후 그의 순회강연도 잠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곤궁한 교내재정을 채우기 위한 자금마련과 이용구에게 빼앗긴 교도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한시가 다급했기에 심신(心身)을 다잡고 다시 계획대로 순회강연 길에 오른다. 

    그가 황해도와 평안도 순회를 마치고 교도들의 마음을 제고하기 위해 또 다시 강연을 떠난 장소는 인천ㆍ군산ㆍ익산ㆍ전주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주로 강연한 주제는 「國之有敎가 如人之有心」 즉, 나라에 국교(國敎)있는 것이 사람에게 마음있는 것과 같다고 국가와 종교를 주테마로 강연했다.54 이처럼 그는 일진회와 시천교에 빼앗긴 교도들의 마음을 되돌려 곤궁한 교내재정을 해결, 나아가 이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여 교도들과 교정쌍전의 사상에 걸 맞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설교한 이상국가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교도들이 앞장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의식계몽이라는 취지 아래 민족종교인 천도교가 국교(國敎)가 되어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종교국가론을 주장했다.

    추측컨대 상제님께서도 아마 손병희의 이러한 점을 염려하여 그 불씨가 더 커지기 전에 그의 순회를 중지시킨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상제님께서 그의 순회를 중지시키지 않으셨다면 손병희의 잘못된 강연으로 인한 민중들의 피폐는 더욱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교도들을 앞세워 자신의 종교국가론을 실현하기 위해 의식계몽이라는 명분으로 교도들을 혹하게 하여 그들을 주체세력으로 내세워 또다시 혁명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동학농민전쟁으로 죽어간 동학도를 비롯해 진보회 등 동학의 잔여세력들의 처절한 죽음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손병희는 그들에게 또 한 번 재민혁세(災民革世)를 꿈꾸게 한 것이다.

    이 당시 민중들에 대한 상제님의 마음을 『典經』 ‘행록 3장 14절55과 15절56’을 토대로 살펴보면 상제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57 위의 두 구절은 진보회가 점차 동학임이 밝혀지면서 정부의 탄압을 받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동학농민전쟁 이래로 정부는 동학군이라면 무자비하게 씨를 말리는 상황이었으므로 진보회원들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와 ‘그대들이 이같이 고난을 겪기만 하고 벗어날 줄 모르니’라고 말씀하시고 동학농민전쟁을 거쳐 겨우 살아난 민초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반면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이후에 박절58하게도 자신이 꿈꾸는 종교국가론을 실현하기 위해 힘없는 민중들을 앞세우려 했다. 아마도 상제님께서는 손병희가 몇 번에 걸쳐 실패한 혁명을 또다시 꿈꾸어 불쌍한 민초들을 잘못된 길로 몰아가는 상황을 염려하시어 그 폐해가 더 커지기 전에 그의 순회를 중지시킨 것이라 사려된다. 

      

  3. 종교국가론

 

   종교국가론을 실현하기 위한 손병희의 마음은 3ㆍ1운동 이후 진행된 일제의 심문조서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운동의 전개방식에 있어서는 폭력적이던 기존의 거사방식에서 비폭력이라는 방식으로 선회하였지만, 이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고종황제의 독시(毒弑)설’을 기회로 삼은 기회주의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만약 그가 비폭력이 아닌 무장독립투쟁으로 3ㆍ1운동을 진행하였다면 3ㆍ1운동 당시 서양으로부터 동정심을 유발하지 못한다는 가정 또한 배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59

    한편 3ㆍ1운동 이후, 그는 일본 당국으로부터 심문을 받으며 “나의 뇌리에는 국가라는 관념은 없다.”, ‘종교가 만족스럽게 행하여지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였다.’라고 말하며, 국가의 실체인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민족보다 종교를 상위개념에 두고 우선시하였다. 이는 종교우선주의라 할 수 있다.60 물론 손병희의 독립운동이 민족독립을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획책한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저에는 당시 세계의 동향에 조선의 상황을 비추어 이를 기회로 삼아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천도교가 독립운동을 주관하여 민중들로부터 인망을 얻고, 향후 이를 기회로 어떠한 집권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61 이 같은 그의 마음은 아래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사려된다. 아래의 내용은 천도교 원로인 조기주 종법사가 1985년 4월 5일 천일기념일에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내가 손병희성사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3ㆍ1운동 직후 무슨 민간정부를 만들었다고 들었죠. 그게 무엇이냐고 하니깐 쉬쉬하면서 그것이 뒷날 바로 우리나라가 독립하면 곧장 나라를 다스려 나가는 기구라고 들었죠. 그게 바로 대한민간정부의 출시가 아닐까 해요.’62

 

   위 증언에 따르면 손병희는 3ㆍ1운동 이후 민간정부의 출현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헌데 문제는 그가 이 민간정부에서 자신이 대통령의 자리에 서고, 자신의 측근인 오세창을 부통령에 두었다는 것이다.63 이 내용을 몇몇 단행본64에서는 천도교 중진인 묵암 이종일이 1919년 4월 1일을 기해 비밀리에 결의하였다고 하지만 앞서 살펴본 조기주 종법사의 증언에 따르면 손병희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Ⅳ. 맺음말

 

   앞서 살펴보았듯이 손병희는 다무라와의 합동거사와 갑진개화혁신운동, 나아가 3ㆍ1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획책한 모든 거사에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도들을 설교함에 있어서 세상이 혼란한 모든 잘못은 사람에게 있기에 일차적으로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교도들에게 종교와 국가를 빙자한 근대국가론과 교정쌍전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종교의 효력, 그리고 천도교가 국교가 되어야만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나라에 국교 있는 것이 사람에게 마음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다.

    게다가 그는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동학농민전쟁으로 죽어간 동학도를 비롯해 진보회 등 동학의 잔여세력들의 처절한 죽음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그들을 주체세력으로 내세워 또 한 번 혁명을 꿈꾸게 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위와 같은 취지 아래 일진회와 시천교에 빼앗긴 교도들의 마음을 되돌려 쇠약해진 천도교의 교세를 확장, 나아가 많은 교도들을 앞세워 자신의 종교국가론에 걸 맞는 이상사회를 실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마음은 3ㆍ1운동에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처럼 손병희는 종교국가론을 바탕으로 한 국가체제를 구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국가보다 종교를 상위개념에 두고 우선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획책한 거사들에서 나라의 안위와 독립을 위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서 종교를 통한 집권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대순회보>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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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권지 1장 33절 참고.

38 1906년(광무 10) 『황성신문』 3월 16일자 기사에 의하면 당시 천도교에서는 각 지방에 대교구(大敎區)를 설치하였는데 교구는 교인 10만 명 이상으로 정하며 교구수(敎區數)는 72, 구장(區長)의 성명은 如在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대교구는 교인 10만 명 이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대교구가 모두 72개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도교인이 칠백만 명 이상이나 된다는 계산이다. 좀 과장된 통계라고 볼 수 있으나 천도교의 교세가 놀라울 정도로 늘어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국종교협의회, 『韓國社會와 宗敎』, 신명출판사, 1989, p.106.)

39 1906년(광무 10) 6월 17일 손병희의 발의로 천도교에서 창간한 일간신문. 사장에 오세창(吳世昌), 발행인 겸 편집인에 신광희(申光熙), 주필에 이인직(李人稙)의 진용으로 발족하였는데, 반민족행위에 대한 비난과 일진회를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40 『만세보』, 1906년 6월 17일 참고.

41 『만세보』, 1906년 9월 19일 참고.

42 1. 교인이 일진회에 가입하고자 하는 자는 그 성명과 함께 사유를 중앙총부에 통지할 것.

2. 교직을 갖고 일진회에 입회한 자는 그 교무의 겸직을 불허함.

3. 이미 민회에 들어간 자는 비록 다수 연비(聯臂)의 천주(薦主)라도 개인의 교인 자격만 가짐.

4. 교인으로서 일진회에 들어가 교단의 규칙을 위배하는 자는 교헌에 따라 처리함.

43 『신인간』 379호, p.27 참고.

44 『신인간』 379호, p.28 참고.

45 ‘자기 개인의 창도아래 그리고 자기 독단의 책임 밑에 추진되었던 이번 갑진대혁명이 이처럼 수포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국권의 약화까지 초래하게 됨을 본 선생의 흉중에 참을 수 없는 자괴와 분노와 초조함이 일고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孫秉熙先生記念事業會, 『義菴孫秉熙先生傳記』, 1967, p.217.) / ‘갑진개화운동은 선생께서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도제(徒弟)들에게 지휘 명령하여 진행한 운동이었으므로, 나중에 이용구 등이 배신하여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진회라는 기형적인 매국단체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나라사랑 제 7집」, 의암 손병희 선생 특집호, 외솔회, 1972, p.49.) / ‘의암도 일본에서 때때로 이용구의 보고를 받으면서 의심이 없지도 않던 차에 두목들의 자세한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때는 이미 지났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로 남게 되었다. 실로 그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나라를 구하고자 한 것이 이용구의 배신으로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된 것이다.’(李光淳, 『義菴 孫秉熙』, 太極出版社, p.181.) / ‘의암은 자신의 실수로 이런 무서운 결과가 나타난 것이 한없이 원통하고 수운ㆍ해월 두 선사께 여간 죄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李光淳, 『義菴 孫秉熙』, 太極出版社, p.185.)

46 이용구가 손병희의 천도교 계열에서 이탈하여 창립한 동학의 한 종파.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47 1907년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기관지로 발간되었던 친일신문. 천도교의 기관신문 『만세보(萬歲報)』의 시설을 인수하여 1907년 7월 18일에 창간하였는데, 9월 7일부터는 한글판을 따로 발행하였다. 사장은 『만세보』 주필이었던 이인직(李人稙) 이었고, 일진회의 기관지였던 『국민신보(國民新報)』와 나란히 친일선전을 일삼아 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는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 국권피탈(國權被奪) 이후인 1910년 8월 30일 『한양신문(漢陽新聞)』으로 개제하였으나, 9월 1일로 폐간하였고 독자는 『매일신보(每日申報)』가 인수하였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EnCyber, 2003)

48 이때 일진회라 하면 시천교도와 일진회들도 모두 포함한 것. 당시 이용구가 일진회장도 역임하고 있었음.

49 그가 권동진 등 그의 측근을 대동하고 순회강연 하였던 황해도와 평안도의 구체적인 지명은 서흥·영변·박천·가산·곽산·선천·철산이다.

50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2월 6일 참고. / 천도교중앙총부교서편찬위원회, 『천도교 약사』, 2006, pp,136~137 참고.

51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경인문화사, 1970, p.69. / 조기주, 『동학의 원류』, 보성사, 1979, p.319 참고.

52 조기주, 『동학의 원류』, 보성사, 1979, p.265 참고.

53 1904∼1910년 사이에 발행되던 일간지. 양기탁(梁起鐸)이 영국인 E. 베델[裵說(배설)]과 함께 창간했으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베델이 사장을, 양기탁은 총무를 담당했다. 그 당시에는 일본이 한국의 언론에 대해 철저한 검열과 직접 탄압을 가했는데,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인 명의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 검열할 수 없었다. 주필 박은식(朴殷植)을 비롯하여 신채호(申采浩)·장도빈·안창호(安昌浩) 등 집필진은 자유롭게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정책을 비판하였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논문, 고종의 친서를 싣는 등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하여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시켰다. 일본은 베델을 추방하려 여러 번 시도하였고, 결국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와 논설을 근거로 베델과 양기탁을 고소해, 베델은 3주간 금고형을 받고 양기탁은 무죄로 풀려났다. 그 뒤 1908년 발행인이 베델의 비서인 A. 만함으로 바뀌었고, 1910년 8월 28일 1461호로 총독부에 의해 폐간되었다. 처음에는 순한글판 신문을 발행하였으나 곧 국한문 혼용으로 바꾸었고, 1907년부터는 국한문 혼용판과 한글판을 따로 발간하였다. 1905년부터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도 발행하였다. 1개월 구독료는 당시 30전이었으며, 발행부수가 3종류를 합쳐 1만부가 넘는 큰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폐간 전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신속한 보도와 준열한 논설로써 대중을 계몽하고 항일사상을 고취시킨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2002.)

54 이현희, 『근대인물 한국사 304 손병희』, 동아일보사, 1995, p.88 참고. / 서울육백년사 http://seoul600.visitseoul.net/ 참고. / 李光淳, 『義菴 孫秉熙』, 태극출판사, 1979, p.203 참고.

55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이 전주에서 갑진년 七월에 있었도다. 최 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부내의 아전을 모아 일진회 타도의 의병을 일으키고자 각군 각면으로 통문을 보냈도다. 상제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하리라.…”(행록 3장 14절)

56 이후에도 얼마간 상제께서 그 주막에 머무르셨도다. 밤마다 부내의 순검들이 순회하면서 사람들을 조사하여 일진회원을 색출하는지라. 상제께서 일진회원에게 “그대들이 이 같이 고난을 겪기만 하고 벗을 줄을 모르니 무슨 일을 하느뇨.……”(행록 3장 15절)

57 이 두 구절에 기록된 일진회가 진보회를 뜻하는 것임은 이미 연구된 바 있다. 『상생의 길』 2호, 「일진회에 대하여」, 대순진리회 교무부.

58 인정이 없고 야박함을 뜻함.

59 손병희 등 천도교 상층부에서는 폭력적 민중시위의 경우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있을 것이며,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하였다. (강만길 외, 『한국사 15』, 한길사, 1994, p.101 참고.)

60 한국사연구회, 『韓國史의 國際環境과 民族文化』, 2003, p.169 참고.

61 천도교계의 일부 인사들이 의암을 정점으로 하여 은밀히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홍보하여 의암은 50만 한국교포사회에서 거의 영웅화되다시피 하였다. 나아가 의암의 명성은 국외 한인사회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회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된 의암이 뒷날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결론인 것이다. 〔『동학학보』 제10권 1호(통권 11호), p.268 참고.〕

62 이현희, 『3ㆍ1혁명 그 진실을 말한다』, 신인간사, p.311.

63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Ⅰ』, 집문당, 1983, pp.54~56 참고. / 『묵암비망록』, 1925년 1월 10일.

64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Ⅰ』, 집문당, 1983, pp.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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