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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절교 불출오성(古人絶交不出惡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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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9.11 조회9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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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께서 몇 달 동안 경석을 대동하시고 공사를 보셨도다. 이때 상제께서 임피(臨陂) 최 군숙(崔君淑)의 집에 머물고 계셨는데 어느 날 이곳을 떠나 동곡에 들르지 아니하고 바로 태인으로 가셨느니라. 이 일로써 광찬은 “우리는 다 무용지물이라”고 더욱 불평을 품고 상제를 크게 원망하는지라. 형렬은 민망하여 태인 하마가로 찾아가서 상제를 배알하고 광찬의 불평을 알리면서 “어찌 그러한 성격의 소유자를 문하에 머물게 하시나이까”고 의견을 아뢰니 상제께서 “용이 물을 구할 때에 비록 가시밭길이라도 피하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시니라. 형렬이 곧 돌아와서 광찬에게 “고인 절교 불출오성(古人絶交不出惡聲)”이라 이르고 금후부터 불평을 말끔히 풀라고 달랬도다. (교법 3장 13절)

 

 

위 『전경』의 말씀은 상제님께서 종도인 차경석을 대동하고 동곡(銅谷: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의 옛 지명)을 떠나 몇 달간 공사를 보실 때 이야기이다. 당시 동곡에서 머물던 종도 중에 김광찬은 상제님께서 차경석을 편애한 것으로 여겨 원망과 불평을 심하게 드러냈다. 김형렬은 그 사실을 상제님께 알리고, 동곡에 되돌아온 후 김광찬의 불평을 풀어주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나온 말이 “고인 절교 불출오성(古人絶交不出惡聲: 옛사람은 절교해도 헐뜯는 말을 하지 않는다)”이다.

 

‘고인 절교 불출오성’은 과거 우리 선조들이 사람들 간의 관계 맺음에서 즐겨 쓰던 격언이다. 이 말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사마천(司馬遷)이 기록한 『사기(史記)』 「악의열전(樂毅列傳)」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중국 전국시대에 연(燕)나라의 명장인 악의(樂毅)가 강성한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70여 성을 점령했지만, 철옹성인 거(莒)와 즉묵(卽墨)은 빼앗지 못했다. 연나라 소왕(昭王)은 악의의 공적을 높이 여겨 제나라 땅에 봉하고 창국군(昌國君)이라 불렀다. 얼마 뒤 소왕이 죽고 아들 혜왕(惠王)이 등극하였는데, 그는 태자 때부터 악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즉묵을 사수하던 제나라의 전단(田單)이 그 사실을 알고 연나라에 첩자를 보내 “악의는 새 임금과 사이가 좋지 않다. 함락하지 못한 성을 친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지만, 장차 왕이 될 계획을 꾸미고 있다. 그러므로 제나라는 연나라의 다른 장수가 올까 걱정할 뿐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언제나 악의를 의심하던 혜왕은 그 첩자의 소문을 듣자 곧바로 장수 기겁(騎劫)을 보내고 악의를 소환한다. 혜왕의 의도를 간파한 악의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웃 국가인 조(趙)나라로 망명했다. 이후 연나라는 기겁의 연이은 패배로 악의가 함락했던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이에 혜왕은 후회와 더불어 악의가 조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해 올까 전전긍긍했다. 혜왕은 사람을 보내 질책과 사과를 하는데, 악의는 편지로 ‘선왕(先王)과의 의리’와 ‘망명의 이유’를 곡해할까 봐 충심 어린 진언을 했다. 편지의 말미에 “고지군자교절 불출오성 충신거국 불결기명(古之君子交絶 不出惡聲 忠臣去國 不潔其名: 옛날의 군자는 절교해도 헐뜯는 말을 하지 않고, 충신은 나라를 떠나도 명예를 위해서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다)”이라는 말을 남겼다. 사귐이 다하더라도 상대방을 험담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결함을 위해 군주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후에 전한(前漢)의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戰國策)』, 남송(南宋)의 주자(朱子)가 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등에 널리 인용되었고,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또한 많이 회자가 되었다. 특히 조선의 선비들은 유학인 성리학의 영향으로 군신(君臣)과 교우(交友) 간의 신의(信義)를 중시했기 때문에 ‘군자교절 불출오성’의 미덕을 강조했다. 그들의 교유는 인격 함양을 위한 배움의 장이기도 하였는데, 동학(同學), 사제(師弟), 붕당(朋黨) 등의 관계 기준을 의리(義理)에 근거했다. 그러므로 절교의 가능성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그와 같은 결정을 할 때는 신중한 태도가 요구되었다. 『논어집주』에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의리를 추구하느냐 이익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01고 한다. 소인(小人)보다 군자(君子)의 삶을 지향하던 조선의 선비들은 어떤 문제로 절교를 했어도 험담이나 악담하지 않는 것을 도리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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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인간사에서 갈등의 문제는 항상 존재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스승의 행적이 문제가 되어 친교가 절교에까지 이른 경우가 많았다. 상제님에 대한 김광찬의 불평은 차경석의 과거 행적에서 비롯되었다. 차경석의 부친 차치구(車致九, 1851∼1894)는 동학농민혁명의 농민군 주역으로 장령(將領)의 직책을 맡은 간부였다. 부친의 영향을 받은 차경석은 동학운동에 참여했고, 22세에는 일진회에 가담했다.02 동학운동의 재건을 위해 힘쓰던 차경석은 1907년 28세 때, 어느 날 주막에서 우연히 상제님을 만나 따를 것을 결심하게 된다.03 이후 집안일을 돌볼 겨를이 없어 가세가 어려울 정도로 상제님을 따르는 일에 열중했다.04 그러나 김광찬은 “경석이 본래 동학당이고 일진회에 참가하여 불의한 일을 많이 행하였을 터인데도 이제 그를 도문에 들여놓은 것은 상제의 공평하지 못하심이라고 불평”05하고, 상제님께서 차경석을 상종하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광찬의 경우처럼 동학당이나 일진회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동학이 주장한 폐정개혁(弊政改革)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는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1894년]의 빌미를 제공했고, 일진회06는 이용구(李容九)와 송병준(宋秉畯)의 주도로 일제의 앞잡이로 변질되는 등 진실 여부를 떠나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때마침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의병이 봉기했지만, 일본군의 섬멸(殲滅) 작전에 무차별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특히 동학당과 의병은 조선 정부나 일본군에게 폭도(暴徒) 또는 도적(盜賊)으로 규정되었다.07 여기에 이들을 빙자한 도적과 화적(火賊)의 무리가 민간에 악행[약탈과 살인]을 저질렀던 많은 사례를 볼 때, 민생의 고통과 원망이 극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08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참혹한 화난(禍難)의 실상을 지켜본 사람들은 동학당과 일진회, 의병과 연관되는 모든 관계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는 상제님과 종도들 또한 의병 혐의로 고부 경무청[경찰분서]에 압송되어 고초를 겪었던 화난의 시기였다.09 상제님께서 차경석을 대동하고 공사에 쓰신 것은 당시 그의 성(誠)·경(敬)·신(信)이 지극했기 때문이었다.10 그러나 김광찬을 비롯한 몇몇 종도들은 차경석의 과거 이력을 성토할 뿐만 아니라 그를 같은 문하에 둔 상제님을 함께 원망했다. 상제님께서는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자 김형렬에게 “용이 물을 구할 때에 비록 가시밭길이라도 피하지 않느니라”고 일깨움을 주셨다. 이 짧은 말씀 속에 진멸(盡滅)의 위기로부터 천하창생(天下蒼生)을 구제하시려는 천지공사(天地公事)의 절박한 정황을 읽을 수 있다. 상제님의 진의를 이해한 김형렬은 김광찬에게 고사성어를 인용하여 ‘고인 절교 불출오성’이라 이르고, 금후부터 불평을 말끔히 풀라고 달랬다.

 

상제님께서 “남을 헐뜯는 말은 그에게 해가 되고 남은 해가 밀려서 점점 큰 화가 되어 내 몸에 이르나니라”11고 하신 말씀을 상기해 볼 때, ‘고인 절교 불출오성’의 격언은 인간의 삶을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윤리문제를 넘어 존립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헐뜯는 말로 인해 내 몸에 미치는 화는 나의 존립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인관계는 먼저 자기의 몸을 바로 잡을 때 서로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고인 절교 불출오성’은 과거에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매우 유효한 담론임에 틀림이 없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대순회보》

『논어집주(論語集註)』

『매천야록(梅泉野錄)』    

 

 

 

01 『논어집주(論語集註)』 「옹야편(雍也篇), “謝氏曰 君子小人之分 義與利之閒而已.”

02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차경석이 상제님을 배알함」 《대순회보》 117호(2011), pp.12-13 참조.

03 행록 3장 37절.

04 행록 4장 30절.

05 교법 2장 32절.

06 일진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성수, 「일진회에 대하여」 『상생의 길』 2호(2004), pp.8-16 참고.

0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 동학농민혁명자료총서, 한민족독립운동사 참조.

08 행록 3장 58절; 교운 1장 15절;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 『매천야록(梅泉野錄)』 2 → 建陽 元年 丙申(1896년)① → 「기우만의 기병」 참조.

09 행록 3장 55, 58절.

10 공사 2장 19절.

11 교법 1장 11절.

 

 

<대순회보 2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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