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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을 옮겨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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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2.10.01 조회21,4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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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172025_Daesoon_258_%EC%A0%84%EA%B2 ▲ 만동묘, 2014. 4. 23. 촬영

 

상제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01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 (공사 3장 22절) 

 

  위 성구는 1908년 상제님께서 황극신을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옮기신 공사에 관한 내용이다. 이 황극신을 옮겨오신 공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구에 나타난 용어와 개념 및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황극과 황극신에 대해 알아보고, 당시 서양 열강의 침탈에 무너져 가던 중국의 정세 그리고 만동묘의 유래 및 시대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를 통해 황극신을 옮겨오신 공사의 의미와 상제님의 권능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황극과 황극신의 의미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천자국으로 등극했을 때, 주나라의 무왕(武王)은 은나라의 성현으로 추앙받던 기자(箕子)에게 어떻게 상륜(常倫)02을 펼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며 정치의 근본을 알고자 했다.03 그때 얻은 가르침이 홍범구주(洪範九疇)04였는데, 이는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리던 중 하늘로부터 얻은 낙서(洛書)를 보고 만들어 전한 것이라고 한다. 홍범은 ‘세상의 큰 규범’이라는 의미이며 구주는 ‘9개 범주(範疇)의 통치영역’05이라는 뜻으로, 홍범구주는 곧 기자(箕子)가 주 무왕(武王)에게 전해준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었다.06
  이 홍범구주 아홉 가지 통치영역 중 다섯 번째가 황극(皇極)07인데, 이는 나머지 여덟 개 영역을 이끄는 홍범구주의 핵심으로 ‘임금이 극(極)을 세움’08을 말한다. 이러한 황극에 대해 주자(朱子, 1130~1200)는 ‘황(皇)’을 임금으로, ‘극(極)’을 표준(기준)으로 해석하였고, 표준(極)에 대해서는 ‘항상 만물의 중앙에 있어서 사방의 사람들이 이를 바라보고서 모범으로 삼는 것’09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임금 자신의 심법(心法)을 강조하여 이를 황극을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보았으니,10 황극이란 곧 ‘임금이 세워야 할 지극한 표준’을 말하며, 임금이 성인(聖人)의 심법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백성들도 임금의 법도를 지키고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11
  이 외에도 주자의 제자 채침(蔡沈, 1167~1230)이 지은 『서경집전(書經集傳)』의 “후세에 이 뜻이 전해지지 못했으니, 황극(皇極)의 도(道)가 천하(天下)에 밝혀지지 못함이 당연하다.”12라는 구절에서 황극지도(皇極之道)라는 표현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고려 문인 이곡(李穀, 1298~1351)의 『가정집(稼亭集)』에 “삼가 생각건대, 신(臣)이 지난번에 직무를 아뢰느라 입조(入朝)하는 행운을 얻었고, 그때 마침 황극(皇極)을 펼쳐 지원(至元: 원(元)의 초대 황제 세조의 연호)의 치세를 회복하는 시절을 만났습니다.”13라는 내용은 황극의 도가 펼쳐져 나라의 안정과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의미로 풀이되니, 황극은 곧 세상의 안정 및 질서 확립과 깊은 연관이 있는 개념이라 하겠다.
  한편, 고대에도 상제 신앙이 존재하여, 상제와 제신(諸神)의 관계에 있어서는 상제께서 최고위에 계시며 그 통솔 아래 수많은 무리의 신들이 각자 역할을 행하는 엄밀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믿어져 왔다.14 더불어 고대인들은 군왕(君王)의 통치가 천명(天命)15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이때의 천명은 곧 최고신인 상제(上帝)의 명(命)을 의미하는 것으로,16 천명을 받아 그것을 지상에 실현하는 하늘의 대리인을 천자(天子)라 칭해 왔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황극신의 역할을 이해해 본다면, 황극신은 상제님께서 통솔하시는 많은 신들 중 하나로, 상제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천자를 보위하며 천자로 하여금 황극을 펼쳐 세상에 법도와 질서가 구현되도록 돕는 신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중국의 황제가 천자로서 세상을 이끌어 왔기에 황극신이 광서제에게 응기하여 있었던 것이다.

 

 

광서제(光緖帝)와 중국의 정세
202207172025_Daesoon_258_%EC%A0%84%EA%B2  상제님께서 혼란한 세상을 바루기 위해 당시 청나라 광서제에게 응기해 있던 황극신을 옮겨야만 했다면, 황제인 광서제는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중국을 이끌고 있었는지 그리고 황극신 공사를 행하신 1908년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의 정세는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청나라 말기 동치제(同治帝)가 만 2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죽자, 그의 어머니 서태후(西太后, 1835~1908)는 4살 된 조카를 양자로 삼아 황제로 옹립하였는데, 그가 바로 광서제(光緖帝, 1871~1908)이다. 4살 때 즉위(1875)한 광서제는 어릴 적부터 병약하였고, 사실상의 권력을 서태후가 장악한 까닭에 거의 평생을 서태후의 전횡에 시달리며 청조 말 격동기의 비극적 운명을 겪어야만 했다.17
  아편전쟁의 패배로 서양 열강에 의해 강제로 문호가 개방된 청나라는 양무(養武)운동을 통해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일부 지식인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서양의 기술만이 아니라 법과 사상까지도 받아들여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취지로 캉유웨이(1858~1927), 량치차오(1873~1929) 등에 의해 변법자강운동(1898)이 추진되었는데, 당시 27세의 나이로 서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난 광서제는 그들을 지원하며 자주적인 힘을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이 무술변법(戊戌變法, 1898) 역시 서태후를 정점으로 한 수구세력에 의해 100일 천하에 그치며 실패하였고, 변법파를 후원했던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궁중에 유폐되고 말았다.
  얼마 후, 서양 세력의 침탈과 함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의 위기가 고조되자 반외세를 외치며 의화단의 난(1900)이 일어났다. 이때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 일본의 8개국 연합군이 출동하여 수도 베이징을 점령(1900)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 베이징 의정서(1901)가 체결되어 중국은 막대한 배상금에 휘청거리며 베이징, 산해관 등 철도 인근의 열두 지역에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였고, 러시아는 이를 기회 삼아 의화단의 난 진압 이후에도 만주에 10만의 군대를 주둔시켰다.18 이로부터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강압으로 더 이상 자신들의 뜻대로 통치할 수 없는 반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청프전쟁(1884~1885)에서 패배하여 프랑스에 베트남의 종주권을 빼앗기고, 청일전쟁(1894)에서 패배하여 조선의 종주권을 일본에 넘겨주며 일찍이 동아시아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하였고,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와 함께 서양 세력의 강력한 힘에 무너지며 기울어가고 있었다. 또한, 황제인 광서제는 무술변법에 실패한 후 서태후에 의해 유폐되어 더 이상 황제로서 역할을 할 수가 없었고, 다시 권력을 잡은 서태후 세력은 자신들의 안위(安位)와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백성들의 삶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처럼 동아시아를 이끌어 왔던 중국의 황제와 정세(政勢)가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으며 중국이 더 이상 천자국으로서 세상을 이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상제님께서 광서제에 응기해 있던 황극신을 우리나라로 옮겨 오신 것이 아닌가 한다.

 

 

만동묘의 유래와 시대적 배경
  상제님께서는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 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19라고 하셨다. 이 시기는 중화(中華)주의를 표방했던 명나라가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 멸망(1644)하여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중화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약 250년간 명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조선에도 큰 혼란과 사상적 변화가 일어났던 때였다.
202207172026_Daesoon_258_%EC%A0%84%EA%B2  이미 병자호란(1636~1637)을 겪으며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 임금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군신(君臣) 관계를 맺게 된 치욕을 맛보았던 조선은 현실적으로 친청(親淸)의 노선을 가느냐, 명분론에 따라 친명(親明)의 노선을 가느냐의 갈림길에서 정치적ㆍ사상적 혼란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청나라가 중국의 북경을 점령(1644)한 이후,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효종은 즉위(재위 1649∼1659)와 함께 친청파를 제거하고 북벌론을 주장하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을 등용하였다.
  이때 서인 집권 세력의 영수로서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내세우던 송시열은 기존 중화 문명의 나라였던 ‘명(明)’이 멸망하자 오직 조선만이 ‘중화’의 문화적 핵심인 인륜 질서와 예악의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는 조선의 중화 계승의식을 바탕으로 소중화(小中華)주의20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중화주의는 조선이 중국에 버금가는 문화 수준을 가진 나라로, 조선이야말로 명나라를 계승한 유일한 중화(中華)임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비록 청나라의 힘에 굴복하였지만, 유교문화를 이어오며 의리와 명분을 중시했던 조선은 오랑캐인 청나라와 차별되는 우월한 문화를 가졌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충만했으니,21 만동묘의 건립은 이러한 소중화 의식이 확산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신종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사당을 세워 배향(配享)22해야 한다는 주장은 천안(天安)의 진사 이중명(李重明)에 의해 처음 제안(1668, 현종 8)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23 그러던 중 숙종(재위, 1674~1720)이 1687년(숙종 13) 홍문관24의 관원들에게 

 

“신종 황제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공이 있는 분이다. 임진년에 만약 신종 황제가 천하의 군사를 출동하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우리나라가 재조(再造)하여 오늘이 있게 되었겠는가? 명나라 조정이 시급히 망하게 된 것도 동정(東征)을 하였기 때문이 아닐 수 없는데, 우리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복수하여 치욕을 씻지도 못했고…”25

 

  라며 명나라 신종 황제의 은혜와 고마움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자, 송시열은 이러한 숙종의 견해를 천리(天理)가 밝아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을 중요한 언급이라 여겼다.26 그는 사당을 건립하여 신종과 의종(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제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굳혔으나, 202207172026_Daesoon_258_%EC%A0%84%EA%B2죽음에 이를 때까지 실행하지 못한 채 자기 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유지를 남겼다. 그리하여 권상하가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건립(1703)하였는데, 그때 거의 전국적이라 할 만큼 유림(儒林)의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에 대해 학계에서는 중국을 사대(事大)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명나라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많은 원조와 함께 군사를 출병하여 도운 까닭에 재정 상황이 크게 악화되었고,27 그로 인해 국운이 기울면서 비운을 맞이했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만동묘의 건립과 제사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라기보다는 이미 멸망한 명나라와 신종 황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바탕으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받은 도움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은 데서 출발한 것이라 하겠다.
202207172026_Daesoon_258_%EC%A0%84%EA%B2  역사적으로 변방의 나라에서 직접 중국 황제의 제사를 모시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만동묘의 건립과 제사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했던 명나라 신종 황제의 은혜에 대한 숭명보은(崇明報恩)의 정신과 명나라 멸망으로 조선이 곧 중화를 계승했다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바탕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또한 그 안에는 병자호란 때 군신관계를 맺은 치욕에 절치부심하며 결코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문화적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조선 유림의 정서가 배경에 자리하고 있었다. 만동묘의 제사가 국가 행사는 아니었으나, 이후 조선 왕실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성대하게 지속되었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잠시 철폐(1865)되었다가 복구된 이래, 일제강점기까지도 유생들에 의한 비밀 제사로 이어지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1942)될 때까지 약 230여 년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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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동묘, 2014. 4. 23. 촬영

 

 

  지금까지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국의 국가적 존속이 위태로운 시기에 상제님께서 청나라 황제에 응기해 있던 황극신을 우리나라로 옮기셨고, 만동묘가 재조지은(再造之恩)28과 숭명보은(崇明報恩)의 정신을 잊지 않으며 명나라 황제에 대한 제사를 지내오던 가운데 황극신을 옮겨오게 된 인연처(因緣處)가 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 공사(1908) 이후, 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는 황극신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해혁명(1911)으로 붕괴되고 말았으니, 이러한 점은 대중화(大中華)의 백성으로 하여 그 국토를 회복하도록 하신 중국 해원 공사와도 연계되며 중국 공사(公事)라는 큰 범주 속에서 함께 이해되기도 한다.
  이렇게 황극신이 봉안되어 있던 만동묘에 도주님과 도전님께서 방문하시기도 하였다.29 하지만 이후 황극신이 천지공사에 어떤 형태와 역할로 참여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구현하기 위해 도주님께서 완성하신 진법을 도전님께서 펼치시고 ‘덕화’를 펴시어 지상천국을 이루고자 하신다는 점은 고대로부터 천명을 실현하기 위해 천자인 황제가 ‘황극’이라는 표준을 세워 ‘덕화’를 폄으로써 대중지정(大中至正)한 세상을 만들고자30 하였던 것에 비추어 그 의미가 구조적으로 상통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천자에게 응기했던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세상을 이끄는 문명의 중심이 우리나라로 옮겨진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며, “소중화가 곧 대중화가 되리라”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나라의 국운 융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01 ‘운상(運喪)할 때 부르는 노래와 어로(御路)’ 관련 선행 연구는 다음을 참고할 것.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만동묘로 황극신을 옮기시는 공사」, 《대순회보》 135호 (2012).
02 항상 지켜야 할 변함없는 인간의 도리. 『서경(書經)』 「홍범(洪範)」에는 ‘이륜(彛倫)’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彛 떳떳할 이, 倫 이치 륜, ‘항상 변하지 않는 이치’를 의미하는 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만고불변의 도리)
03 『사기(史記)』 권 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武王旣克殷 訪問箕子, 武王曰 於乎 維天陰定下民 相和其居 我不知其常倫所序 … 箕子對曰 … 禹乃嗣興 天乃錫禹 洪範九等 常倫所序)”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서, 기자(箕子)를 방문하여 가로되, 하늘이 음덕으로 아래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화목하게 살도록 정하였으나, 나는 그 상륜(常倫)을 펴는 바를 모르겠도다. … 기자가 이에 가로되 … 하늘이 이에 우임금에게 홍범구등(洪範九等=홍범구주)을 주시어 상륜(常倫)이 펼쳐진 것이라 하였다.)
04 『서경(書經)』, 「홍범(洪範)」, “天乃錫禹 洪範九疇 彛倫攸敍” ; “홍범구주는 하(夏)나라와 상(商)나라를 거치면서 균평한 정치사회를 건설하는 대원칙으로 부상하여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사상과 더불어 9주(九疇)의 논리로 발전해서 정부를 조직하고 지역을 나누는 기본원칙이 되었다.” 서정기 역, 『새 시대를 위한 서경(書經)』, (서울: 살림터, 2003), p.57.
05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의 아홉 가지를 말한다.
06 정재훈, 「홍범연의의 제왕학」, 『국학연구』 35 (2018), p.118.
07 ‘황극 개념’ 관련 선행 연구는 다음을 참고할 것. 차선근, 「황극(皇極), 그리고 『정역(正易)』」, 《대순회보》 106호 (2010).
08 『서경(書經)』, 「홍범(洪範)」, “五皇極 皇建其有極”
09 진덕수(陳德秀, 1178~1235), 『대학연의(大學衍義)』 권 11, “朱熹曰 … 蓋皇者 君之稱也 極者 至極之義 標準之名 常在物之中央而 四外望之以取正者也”
10 소진형, 「조선 후기 왕의 권위와 권력의 관계 -황극 개념의 해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p.47 참고.
11 『書經』, 「洪範」,“皇極 皇建其有極 時五福 用敷錫厥庶民 惟時厥庶民 于汝極 錫汝保極” 참고.
12 채침, 『서경집전』, 「홍범」, 제14장, “後世此意不傳 皇極之道 其不明於天下也 宜哉”, ; 서경집전은 주자(朱子)의 만년에 채침이 스승의 명을 받아 『서경(書經)』에 주(註)를 달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완성한 책으로, 제설을 아우르고 주석이 분명하여 원대(元代) 이후 과거 준비의 필독서가 되었다.
13 이곡(李穀, 1298~1351), 『가정집』, 「표전(表箋)」, “伏念臣昨因述職 幸獲入朝 適逢皇極之敷 庸復至元之治.”; 지원
(至元)은 원나라 초대 황제 세조의 연호를 말하며, 원말(元末) 명초(明初)의 학자인 섭자기(葉子奇, 1327~1390)는 『초목자(草木子)』에서 원나라 초기의 치세(治世)에 대해 “원나라는 세조 이후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린 지 6~70년이 되었다. 형을 가볍게 하고, 세금은 적게 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있었고, 죽은 자는 묻힐 수 있었다. 만 리를 가더라도 자기 집처럼 숙박할 수 있었다. 실로 태평성세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14 이경원, 「대순상제관연구」, 『대순사상논총』 1집 (1996), p.297.
15 “갑골문이나 금문에서 천명의 용례를 찾아볼 수는 없으나 『시경』과 『서경』에는 다양한 ‘천명’의 용례가 등장한다. 그 사례로 『서경(書經)』의 「반경중」(盤庚中) 편은 은나라 말기에 형성된 것으로 인정받는데, “내 天으로부터 받은 命을 너희에게 영속시켜 주려고 하는데 내 어찌 너를 위협하는 것이겠는가. 너희 무리를 받들어 기르려는 것이다
(予迓續乃命于天, 予豈汝威, 用奉畜汝眾.)”라고 언급된다.” 장현근, 「중국 고대 정치사상에서 천명(天命) 관념의 등장과 군권의 정당화」, 『중국학연구』 73 (2015), p.508 참고.
16 “천명(天命)이 곧 최고신인 상제(上帝)의 명(命)임을 보여주는 근거는 『시경(詩經)』 「대아·탕(湯)」편의 “疾威上帝, 其命多辟. 天生烝民, 其命匪諶.”에서 나타난다. 이는 『시경』이 성립된 은나라 후반부터 주나라 초에 천명(天命) 관념이 존재하였다는 증거이며, 은나라 때부터 존재해 온 이 천명 관념을 내세워 주(周) 무왕과 주공이 주나라 건국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장현근, 같은 글, p.509 참고; 주자(朱子,1130~1200) 또한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상제는 하늘의 신이며, 형체의 측면에서 ‘천(天)’이라 부르고 주재(主宰)의 측면에서 ‘상제(上帝)’라 한다”라는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언급하였다. 빈동철, 「고대 중국의 천(天)은 상제(上帝)와 동일한 개념인가?」, 『공자학』 16 (2016) p.18 참고.
17 황매희 편집부, 『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 (용인: 황매희, 2010), p.289.
18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서울: 가람기획, 2012), p.82 참고.
19 공사 3장 22절.
20 소중화주의는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조선 유림(儒林)의 정신적 토대를 형성하며 큰 영향을 준 지배적 사상이었다. 근래 역사학계에서는 조선 후기 현실 문제의 개선에 실패했던 성리학을 망국의 원인으로 보려는 식민사관과 달리, 조선 중화 문명의 측면에서 그 가치를 논하는 관점이 제시되며 주목되기도 한다. 정옥자, 우경섭 등 일부 국내 학자들은 ‘소중화주의’를 넘어 이를 ‘조선중화주의’라 일컬으며, 만동묘와 대보단을 사대주의의 상징물이 아닌 조선중화주의의 상징적 징표로 설명하고 있다. 배성, 「숙종조 만동묘 건립논쟁에 관한 일연구」, 『청계사학』 15 (2001), p.95 참고.
21 임부연, 「유교 의례화의 정치학-만동묘와 대보단을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15 (2009), p.160 참고.
22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
23 배성, 앞의 글, p.101.
24 조선시대에 왕실의 책이나 문서를 관리하고 정책을 연구해 임금의 정치에 도움을 주었던 관청.
25 『숙종실록』 권 18, 13년 2월 신해(辛亥).
26 배성, 앞의 글, p.103.
27 변옥윤, 「만력제」, 《경남일보》, 2017.01.17. “신종 황제가 임진왜란 때 군사 4만을 파병하고 쌀 100만석을 원조했고, 정유재란 때는 군사 20만과 내탕금 은화 500만냥을 조선에 원조했다.”
28 거의 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
29 교운 2장 49~50절.
30 김경수, 「‘황극’에서 ‘중용’으로 다시 ‘대공(大公)’으로」, 『남명학연구』 37 (2013), p.28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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