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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조의 퇴사식지와 탈의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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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1.04 조회3,5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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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韓信)은 한 고조(漢高祖)의 퇴사 식지(推食食之)와 탈의 의지(脫衣衣之)의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徹)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은 한 신이 한 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 고조가 한 신을 저버린 것이니라. (교법 2장 4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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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BC 259~BC 210)이 천하를 통일한 후 20여년 쯤 되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때 천하의 패권을 놓고 나타난 사람들이 항우(項羽, BC 232~BC 202)와 유방이다. 『전경』에 보면 상제님께서 한 고조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말씀하신 구절01이 있는데 그만큼 전쟁을 많이 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방의 천하재패를 도왔던 서한삼걸(西漢三傑)이 바로 장량(張良, ?~BC 168), 소하(蕭 何, ?~BC 193), 한신(?~BC 196)이다. 그 중 한신은 항상 큰 칼을 차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몰락한 귀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칼로 자기를 죽이거나 아니면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는 시정잡배의 모욕을 받고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그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간 일화는 유명하다.

한신은 처음에 항우의 진영에 들어가 여러 번 계책을 올렸지만 자신을 단순한 병졸로만 취급하는 항우에게서 앞날을 기약할 수 없어 유방에게 갔다. 그러던 중 그의 배포와 천하대세를 꿰뚫는 안목, 뛰어난 지략을 알아 본 소하의 천거로 일개 사병에서 독립된 군사권을 지닌 대원수 즉, 상장군(上將軍)으로 등용된다. 그 후 한신은 위(魏), 연(燕), 조(趙), 제(齊)의 대군을 꺾으며 제나라 왕의 자리에 올랐고 점차 그 위세가 항우, 유방과도 견줄 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자 그의 책사인 괴철은 한신에게, 유방에게서 독립하여 항우ㆍ유방과 함께 천하를 삼분할 것을 권했다. 한신은 이를 거절했지만 정말 괴철의 말대로 한신이 천하를 나누려고 들었다면 중국 역사는 그 판도를 달리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신은 왜 그의 제안을 거절했을까? 당시 수많은 인재들이 난세에 입신양명의 뜻을 품고 초야에 묻혀 오로지 공부와 실력을 닦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그들은 항우와 유방에게 갔고, 항우와 유방은 자신의 전략에 적합한 인재를 채용, 막강한 지위를 내려주었다.

한신도 마찬가지. 사마천은 『사기』「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서 유방이 평소 오만무례해 대장을 제수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 부르는 것과 같으니 한신이 떠났다고 주장하는 소하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소하는 유방에게 좋은 날을 골라 재계(齋戒)하고 단장을 설치해 의식을 갖추도록 한다. 그렇지 않아도 시정잡배 가랑이 밑을 기어간 일(下之辱)이나, 거렁뱅이처럼 다니며 노파에게 밥 빌어먹었다는 후문이 있는 이름 없는 창고지기가 한 순간에 ‘높으신 분’이 된다는 것은 실로 많은 사람들의 질투와 의심을 받기 충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신을 총 군사권을 지닌 대원수직에 올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벤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0bb97eed94f384384e4b3d0445cbd2df_1515455 

그래서 유방은 소하의 간언을 들어 배장단(拜將壇)02을 쌓고 3일 동안 목욕재계 후 전 군사들 앞에서 ‘이 사람이 이제 대원수요.’라고 공포하는 전례 없는 일을 벌인다. 이것은 다른 장수들의 채용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으로 한신을 인정한다는 유방의 심중을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주는 처사였다.

당시 유방은 항우에게 관중을 넘겨주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촉(蜀)으로 들어왔는데 그 지세가 매우 험난했다. 게다가 항우의 군대와 비교했을 때 40만 대 10만으로 유방의 진영은 병력이 턱없이 부족해 도망가는 장수가 부지기수였고, 사병들은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명의 병사를 대원수로 등용하는 것은 유방에게 실로 모든 것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양손과 같은 소하가 도망가는 한신을 쫓아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천거하였으니 믿고서 한 번 올인 할 수 밖에….

임명식이 끝나고 유방과 한신은 전쟁의 국면에 대해 논의하는 아주 중요한 만남을 가진다. 한신의 뛰어난 분석력과 지략을 들은 유방은 그때서야 한신을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하며 자신의 음식을 그에게 내려주고 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었다.03 이때부터 유방은 그와 함께 천하제패의 앞날을 기약한다. 이 일은 훗날 한신이 천하를 삼분하여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유방이 자신을 신임하여 등용하여 준 의리를 지키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사실 중국 사람들에게 음식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중국인은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 빼고 다 먹고, 다리가 4개인 것은 책상 빼고 다 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중국 사람들에게 먹는 일이 중요하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생존여건을 말할 때 우리가 의식주(衣食住)라고 해서 보여지는 외관을 중요시 한다면 중국은 식의주(食衣住)라 하여 먹고 사는 실질적인 문제를 최우선으로 한다. 0bb97eed94f384384e4b3d0445cbd2df_1515455 

그들에게 있어 먹고 사는 문제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모든 통치자들의 중대 사안 중 제 1순위를 차지했다. 부국강병의 첫 번째를 백성들이 배불리 먹는 것으로 삼은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중국 사람들의 배고픔은 나라를 뒤바꿀 정도였다. 워낙에 영토가 큰지라 조정은 밥을 굶어 사람이 죽어나가는 현실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고,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이 난을 일으킬 때마다 배부른 왕조들은 물갈이 하듯 바뀌었다.

옷 역시 그렇다. 중국 속담에 ‘십리 밖에서는 사람을 알아보고 백리 밖에서는 옷을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옷으로 그 사람을 알아볼 만큼 옷을 통해 그 사람의 신분, 지위, 경제적 능력까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철저한 신분사회였을 때는 다른 말이 더 필요 없다. 좀 더 적극적인 표현을 하자면 중국 사람들은 옷이 사람의 몸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신체의 일부분으로도 보았다. 그래서 옷을 나누어 입는 것은 각별한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시경(詩經)』 「무의(無衣)」편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豈曰無衣 與子同袍(우리가 입을 옷이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당신과 함께 전투복을 입네).” 

중국말에 동포(同袍)와 유사한 발음으로 동포(同胞)가 있다. 같은 옷을 입을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는 같은 태막을 둘러싸고 있는 것과 같다. 즉, 우리는 형제다라는 깊은 신뢰와 정을 돌려 말하는 것이다.04

유방이 천하를 제패한 후 토사구팽한 한신의 말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뜨겁다. 하지만 괴철이 삼분지계(三分之計)를 권했을 때 한신인들 고민하지 않았을까? 사람이라면 부족한 군주를 배신하고 자신의 세력을 굳히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사마천이 『사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한신은 유방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등용해 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버릴 수 없었다. 유방은 한신이 막강한 군사권과 공로를 내세워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한신의 인부(印符)05와 군사권까지 빼앗아갔지만 그때도 한신은 유방을 따랐다. 유방이 한신을 상장군으로 등용한 것이 유방의 모든 것을 건 정치적 모험이었다 할지라도 선비가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충(忠)을 다하는 것처럼 한신도 유방에게 충을 다했다. 상제님께서 한신을 말씀하신 것도 유방을 배신하고 또 다른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자신을 신임하여 등용해준 유방의 은혜를 생각해 끝까지 그를 믿고 섬기려고 했던 한신의 마음〔見利思義〕을 알아주신 것이 아닌가 한다.

 

 

01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말위에서 천하를 얻었으되 우리나라는 좌상(座上)에서 득천하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예시 28)

02 대순회보79호 「중국 섬서성, 하남성 답사기(1), p.50, 51 참조.

03 臣事項王官不過郎中位不過執戟言不聽劃不用故倍楚而歸漢漢王授我上將軍印予我數萬衆解依依我推食食我言聽計用故吾得以至於比夫人深親信我我倍之下祥幸爲信謝項王. 『통감(洞鑑)』「한기(漢記)」

04 이중톈 지음·강주형 옮김, 『초한지 강의』, 에버리치홀딩스, 2007, p.23

05 수장의 도장과 수장을 표시하는 금석류의 조각물로 이 조각물은 반쪽만 소지하는데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거나 왕에게 서한을 보낼 때 동봉했다.

 

<대순회보 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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