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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궁(阿房宮)과 동작대(銅雀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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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10.24 조회3,7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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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는 경석에게 가라사대 “갑오년 겨울에 너의 집에서 三인이 동맹한 일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그렇다고 대답하니라. 상제께서 “그 일을 어느 모해자가 밀고함으로써 너의 부친이 해를 입었느냐”고 하시니 경석이 낙루하며 “그렇소이다”고 대답하니라. 또 가라사대 “너의 형제가 음해자에게 복수코자 함은 사람의 정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너의 부친은 이것을 크게 근심하여 나에게 고하니 너희들은 마음을 돌리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들이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니 나를 좇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 하시니라. 경석이 세 아우와 함께 옆방에 모여 서로 원심을 풀기로 정하고 상제께 고하니 상제께서 “그러면 뜰 밑에 짚을 펴고 청수 한 동이를 떠다 놓은 후 그 청수를 향하여 너의 부친을 대한 듯이 마음을 돌렸음을 고백하라” 하시니 경석의 네 형제가 명을 좇아 행하는데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방성대곡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너의 부친은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을 괴로워하니 그만 울음을 그치라” 이르시니라. 그 후에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일월 동작대(千古春秋阿房宮 萬方日月銅雀臺)”란 글을 써서 벽에 붙이시며 경석으로 하여금 항상 마음에 두게 하셨도다. (교법 3장 15절)

 

 

  동학농민혁명 때 15세의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은 농민군의 간부였던 부친 차치구(車致九, 1851~1894)가 진압군[조선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재판도 없이 사형을 당하는 참상을 겪게 된다. 이를 목격했던 차경석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동학과 관련된 일진회(一進會)에서 활동했지만, 일진회가 일본의 어용단체로 변모할 무렵 자신의 진로를 모색하던 중에 1907년 상제님을 뵙고 따를 것을 결심했다. 이후에 상제님께서는 경석에게 마음에 새겨둘 교훈을 직접 써 주셨는데, 그 글귀가 바로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일월 동작대(千古春秋阿房宮 萬方日月銅雀臺)”이다.

  아방궁과 동작대는 중국의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과 조조(曹操, 155~220)가 각기 건축한 건물이지만, 현재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아방궁과 동작대는 진시황과 조조가 남긴 공과(功過)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을 역사적 담론장에 초대할 때마다 유독 오랫동안 함께 등장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진시황과 조조의 역사적 기록을 참고하여 아방궁과 동작대의 등장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통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교훈의 뜻을 살펴보는 데 있다.

 

 

진시황과 아방궁

 

  진시황이 활동한 시기는 여러 제후국이 분열을 거듭하던 춘추시대(春秋時代)를 지나 7개국이 쟁패를 다투는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그는 진(秦)나라 31대 왕으로 일대 혼란기였던 전국의 국면을 종식하고, 중국 최초로 통일제국을 세운 인물이다. 아버지 장양왕(莊襄王)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한 영정(嬴政: 진시황의 이름)은 전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했다. 진의 중국 통일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국 6개국인 연(燕)·위(魏)·제(齊)·조(趙)·초(楚)·한(韓)의 병합과 통일이 그의 즉위 기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550여 년간 지속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분열을 종식하고 최초로 통일을 이루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강력한 의지와 탁월한 능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01 그는 통일 후에 기존의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황제(皇帝)’로 바꾸었다. 그리고 통일제국이 자신을 시작(始)으로 2세, 3세로 내려가 만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리라 공언하며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게 했다. 이는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위엄에 반하는 자는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고, 무한한 권력과 불로장생을 누리기 위해 불사약(不死藥)을 찾기도 했다.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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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이후 진시황은 원래 근거지였던 함양(咸陽: 현재 섬서성 서안 인근에 위치)에 수도를 정하고, 순자의 제자로 법가였던 이사(李斯)의 의견을 들어 황제의 절대적 권력을 세우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한다. 그는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군현제(郡縣制)를 비롯하여 문자·화폐·도량형의 통일 등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화에 필요한 법령의 제도를 세웠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향후 역대 제국들이 시행한 중앙집권 체제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치적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사상적 탄압정책인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과 대규모 토목·건축사업인 만리장성과 아방궁, 순행용 도로의 건설 등으로 엄청난 폭정을 행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03 그중에서도 아방궁은 선대로부터 받은 함양궁(咸陽宮)과 별도로 진시황이 통일제국의 기세와 황권의 위엄을 표현하기 위해 직접 건축을 기획하고 정무를 보았던 황궁이었다.

  진시황은 함양의 위수(渭水) 남쪽에 황제의 동산인 상림원(上林苑)을 자연경관에 조성한다. 그 상림원 속에 대규모의 황궁을 짓기 위해 기원전 212년부터 7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였으나 생전에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일부분인 전전[前殿: 정전(正殿) 앞에 있는 궁전]만 완공되었다. 이 전전이 바로 아방궁인데, 아방(阿房: 산이나 구릉의 이름으로 추측)의 옆에 지은 궁전이라 하여 임시로 불린 명칭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규모가 동서로 500보(步)이며 남북으로 50장(丈)으로 위쪽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쪽에는 5장(丈) 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04 나머지 황궁은 2세 황제에 의해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기원전 206년 항우(項羽, 기원전 232~202)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진의 궁궐이 불에 타 그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말이 전한다.05 이로써 진시황이 황제의 절대권력을 선양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방궁은 시황제 사후 4년 만에 진나라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조와 동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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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三國志)』 인물인 조조가 활동한 후한(後漢)의 말기는 통치권자의 무능으로 외척과 환관의 권력 다툼이 계속되자 백성의 생활은 극한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184년 농민들은 황건적(黃巾賊)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각지에서 할거하던 군웅들이 패권을 다툴 때 조조 역시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한다. 196년 조조는 황제인 헌제(獻帝)의 후견인을 자처하고, 수도를 낙양에서 허창(許昌)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조조는 황제를 표면에 내세워 후한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각 지역의 군웅을 정벌하여 중국의 북방을 완전히 제패할 수 있었다. 208년 승상(丞相)에 오른 조조는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남방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적벽대전에서 유비(劉備)와 손권(孫權) 연합군의 화공(火攻)에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여러 번 정벌에 나섰으나 끝내 자신의 포부를 이루지 못했다.06 

  조조는 북방을 통일할 무렵부터 이미 업(鄴: 현재 하북성 임장현 인근에 위치)을 자신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도시로 개발했다. 이 계획도시는 동서로 7리, 남북으로 5리에 이르는 광활하고 웅장한 도성으로 상수도 시설은 물론 방어와 생활의 편리성을 갖추었다. 이 업성은 후대 왕조의 도성[당(唐)의 장안, 명(明)·청(淸)의 북경]을 설계하는데 모범이 되었다고 하니 그의 남다른 선구안이 돋보인다. 조조는 도성의 북부 중앙에 국가적 행사를 거행하는 정전(正殿)인 문창전(文昌殿)을, 동편에 일상의 정무를 처리하는 청정전(聽政殿)을, 서편에 공원 지역인 동작원(銅爵園)을 건설했다. 동작원에는 뱃놀이와 낚시터를 갖춘 현무지(玄武池)를 비롯하여 전망대와 공연장을 갖춘 누대(樓臺)인 삼대(三臺)를 지었는데, 이 삼대는 동작대(銅雀臺)를 중심으로 양쪽에 금호대(金虎臺)와 빙정대(氷井臺)가 자리했다.07

  당시의 건축물을 대표하는 동작대는 구리로 만든 참새로 지붕 위를 장식했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 일설에 참새를 봉황 또는 공작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고대 중국의 수로(水路)를 기술한 『수경주(水經注)』의 「탁장수(濁漳水)」편에 의하면 동작대는 “높이가 약 10장(丈)이며 100여 칸의 방이 있다”고 하니,08 그야말로 높이 솟은 거대한 난공불락의 요새가 만들어진 것이다. 조조는 동작대를 완공한 후 아들과 문인들을 소집하여 경치를 감상하며 시회(詩會)를 자주 가졌는데, 212년 아들 조식은 동작대의 아름다움과 영원함을 담은 유명한 「동작대부(銅雀臺賦)」를 남겼다. 이 시부(詩賦)에 따르면 동작대를 중심으로 금호대와 빙정대를 연결하는 두 개의 높은 다리[이교(二橋)]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09

  조조는 216년 위왕(魏王)의 자리에 올라 업성에 도읍을 정했다. 220년 죽음이 임박했던 그는 자식들에게 “내 비첩(婢妾)과 기인(伎人)들은 동작대에 머물게 하고 잘 대접해라. … 그리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아침부터 정오까지 휘장을 향해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도록 하고, 너희들도 수시로 동작대에 올라 나의 묘인 서릉(西陵)을 바라보라.”10라고 유언을 남겼다. 조조가 정치와 문화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던 동작대는 580년 전란 때 양견(楊堅: 훗날 수나라의 문제)의 지시로 업성과 함께 불타 폐허가 되었다.

 

 

아방궁과 동작대에 대한 후대의 평가


  중국의 제왕들은 고대로부터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동산인 원유(苑囿), 즉 원림(園林)을 조성했다. 특히 진시황처럼 거대한 규모의 산수(山水) 속에 다양한 성격의 수많은 경관을 조합하고 배치하는 것은 통일제국의 자신감과 황제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황제 원림의 조성은 한(漢)나라와 더불어 이후의 왕조에도 여전히 지속하게 된다. 후한말의 분열기에 만들어진 조조의 수도인 업성(鄴城) 또한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여 원림을 세웠다. 다만 진·한대(秦漢代)보다 규모를 축소하여 오락과 관상의 기능이 강화되고, 자연 산수가 아닌 도성 안의 평지에 인공적인 경관을 조성했다는 차이가 있다.11 그러므로 진시황의 아방궁과 조조의 동작대는 자신들의 권력을 상징하는 원림을 조성하고, 그 속에 만든 대표적인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왕조의 몰락과 함께 원림 속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후대에서는 아방궁과 동작대를 소환하여 진시황과 조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가한다.

  진나라는 진시황의 기대와 달리 불과 15년 만에 멸망했다. 이 때문에 진시황이 거둔 천하 통일의 성공 못지않게 제국의 단명(短命)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화두를 안겨줬다. 다음 왕조의 한고조(漢高祖)는 자신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그 이유를 찾는 데 고심한다. 이때 참모 가의(賈誼)가 진의 흥망성쇠를 설명한 「과진론(過秦論)」을 제출하는데, 그 핵심은 인의(仁義)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곧 포악함을 멸망의 원인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이후 진시황의 생애와 통치의 실상을 기록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도 인용된다. 그 후 당나라의 시인 두목(杜牧)은 화려한 아방궁의 정경을 주제로 진시황의 사치와 피폐한 백성의 모습을 담은 「아방궁부(阿房宮賦)」를 지어 자신이 살던 만당(晩唐)의 시대 분위기를 풍자했다.12 이로써 진시황은 후대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문학 작품에서도 포악하고 사치를 일삼는 ‘폭군’으로 그려진다. 결국, 아방궁은 단명한 진의 오만과 사치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조조는 사후에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 헌제의 선양을 받아 황제에 등극하고 위(魏)나라를 건국하자, 그는 위무제(魏武帝)로 추존되었다.13 그러나 위나라는 265년에 서진(西晉)을 건국한 사마염(司馬炎)의 공격을 받고 46년 만에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다.14 서진의 역사가 진수(陳壽)는 조위(曹魏: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왕조로 인정하고 『삼국지(三國志)』의 서두에 조조의 일대기를 간결하게 기록했다. 이후 당(唐)나라에서도 이 관점을 견지하였는데, 당태종(唐太宗)은 직접 「제위태조문(祭魏太祖文)」을 지어 조조의 업적을 기렸고,15 시인 두목은 「적벽(赤壁)」에서 “동풍불여주랑편(東風不與周郎便) 동작춘심쇄이교(銅雀春深鎖二喬)”16라고 하여 조조가 패한 적벽대전의 의미를 폄하시켰다. 여기서 두목은 우연한 동풍이 없었다면 이교[오나라의 미인을 상징]17가 동작대[조조의 도성을 상징]에 갇혔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조조의 패배를 두둔한다.

  그러나 남송(南宋) 이후는 주자(朱子)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주장한 유비의 촉한(蜀漢) 정통론18과 함께 두목의 시에 영향을 받아 ‘조조는 이교(二喬: 소교와 대교)를 동남(東南: 손권의 오나라)에서 차지하려고 한다’는 내용의 민담이 유행했다.19 이에 따라 조조의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설정되었고, 원말명초(元末明初)에 만들어진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은 손권의 참전을 유도하고자 조식의 「동작대부」를 인용하여 주유(周瑜: 손권의 참모)를 분노하게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데, 이때 조조가 “내 한 가지 소원은 천하를 평정해 제업(帝業)을 이루는 것이오. 다른 한 가지 소원은 강동(江東)의 이교(二喬)를 얻어 동작대에 두고 만년을 즐기는 것이니 그렇게만 된다면 비록 죽어도 한이 없으리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만들어진 것이다.20 또 동작대와 「동작대부」가 완성된 것은 적벽대전 이후의 일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인 사건의 선후 관계를 왜곡했다. 이로써 조조의 대부분 행적이 개인의 왕조를 건설하기 위한 간웅(奸雄: 간사한 영웅)의 처사로 그려진다. 특히 조조의 호화로운 도성을 상징하던 동작대는 이교와 결합하여 사욕에 빠진 조조의 탐욕을 더욱 정형화시켰고, 이는 곧 야심가 조조와 위나라의 모습을 단정하는 상징이 되었다.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일월 동작대

 

  주자학(朱子學)을 건국이념으로 표방한 조선 시대 또한 분서갱유를 저지른 진시황은 폭군으로 한나라의 제위를 찬탈하여 의리를 저버린 조조는 간웅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서 조조에 대한 평가는 16세기 후반에 유입된 소설 『삼국지연의』가 정사(正史)보다 더욱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러한 현상에 따라 아방궁과 동작대는 대체로 진시황과 조조를 상징하는 부정적인 대명사로 사용된다. 이에 아방궁과 동작대는 조선의 왕들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았던 교훈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21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의 문집(文集)22과 조선 후기의 공연예술인 판소리 <춘향가>와 <적벽가>에서도 활용되어 대중의 기억 속에 꾸준히 자리 잡았다.

  상제님께서도 종도들의 처세와 교훈을 위해 당시에 많은 사람이 알고 있던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를 자주 말씀하셨다. 당시 야심(野心)이 남달랐던 차경석에게는 특별히 진시황과 조조의 삶의 궤적이 함축된 아방궁과 동작대에 은유적 표현을 담은 가르침을 주셨다. 그 교훈은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일월 동작대(千古春秋阿房宮 萬方日月銅雀臺)”인데, “천고의 세월인 아방궁이요, 만방의 해와 달인 동작대라.”는 직역이 가능하다. 이 말씀은 진시황이 만세까지 황제의 권세를 누리고자 만든 아방궁과 조조가 만방에 위세를 떨치고자 만든 동작대의 일화를 항상 경계(警戒)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크고 화려한 아방궁을 만들어 만세까지 오랜 세월의 영광을 누리고자 했던 진시황과 높고 웅장한 동작대를 만들어 만방까지 해와 달의 위세로 비추고자 했던 조조의 허망한 욕망을 경석에게 일깨워주신 것이다.

  차경석은 상제님을 따르기 전에 동학의 중진인 부친이 잡혀 죽었고 그 또한 동학 총대를 지냈던 이력이 있었다. 상제님의 가르침은 당시 동학의 신도들이 바라던 왕후장상(王侯將相: 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이 목적이 아니라 해원상생(解冤相生: 맺힌 원을 풀고 서로 잘 되게 함)의 진리임을 경석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이 허영과 야망에 매몰되면 자기는 물론 남에게도 원망이 쌓여 척이 발생한다. 결국, 역사가 증명하듯 원망과 척이 쌓였을 때 세계와 인류의 평화는 불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궁극의 평화는 상제님의 가르침인 해원상생을 실천할 때만 보장받을 수 있다. 허욕을 경계한 아방궁과 동작대의 교훈은 차경석 개인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적용이 가능한 수도의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01 유지원, 「분열에서 통일로-진시황의 공과 과」, 『열린정신 인문학연구』 4 (2003), pp.176-177.

02 사마천, 『사기(史記)』, 김영수 옮김 (서울:바다출판사, 1999), p.286.

03 유지원, 앞의 글, pp.167-173.

04 사마천, 앞의 책, p.69. 궁전 건축물 규모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동서로 600m~800m, 남북으로 113m~150m에 이른다. [위키백과(ko.wikipedia.org) 참조]

05 같은 책, p.215.

06 진수, 『정사 삼국지: 위서(魏書)1』, 김원중 옮김 (파주:휴머니스트, 2018), pp.44-90.

07 이재하, 『인간 조조』 (서울:바다출판사, 1999), p.295.

08 역도원(酈道元), 『수경주(水經注)』, 대춘초당장서(待春艸堂藏書), p.93. 높이 10장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33.3m로 계산하기도 한다. [위키백과(ko.wikipedia.org) 참조]

09 진수, 앞의 책, p.143.

10 이재하, 앞의 책, p.286.

11 이주노, 「중국 원림의 역사적 변천에 관하여」, 『중국문학』 38 (2002), pp.216-222.

12 양준석, 「진(秦)의 단명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과진론과 아방궁부 비교분석」, 『인문과학연구논총』 39 (2018), pp.85-93.

13 진수, 앞의 책, p.118.

14 같은 책, p.224.

15 이재하, 「조조에 대한 평가문제」, 『중국문제연구』 9 (1997), pp.74-75.

16 折戟沈沙鐵未銷, 自將磨洗認前朝, 東風不與周郎便, 銅雀春深鎖二喬.(모래에 묻힌 부러진 창 아직 삭지 않아, 내 닦고 씻어보니 앞 왕조의 것이네. 동풍이 주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면, 동작대에 봄이 깊었을 때 이교가 갇혔으리.) 노재준, 「두목의 영사시 연구」, 『태동고전연구』 12(1995), p. 189-190.

17 『삼국지』 「오서·주유전」에 의하면 “당시 교공(橋公)의 두 딸을 포로로 잡으니 모두가 경국지색이었다. 손책이 대교(大橋)를 아내로 맞고 주유는 소교(小橋)를 아내로 받아들였다.”라고 하였는데, 두목은 두 자매를 ‘이교(二喬)’라고 불렸다. 진수, 『정사 삼국지: 오서(吳書)』, 김원중 옮김 (파주:휴머니스트, 2018), p.283.

18 김옥란, 「조조 형상의 변모양상」, 『한중인문학』 39 (1997), p.325.

19 박영옥, 『삼국지 고증학1』 (서울:청양, 1997), p.206.

20 나관중, 『삼국지4』, 확석영 옮김 (파주:창비, 2003), p.172.

21 『성종실록』 72권, 성종 7년 10월 21일; 『선조실록』 164권, 선조 36년 7월 14일; 『연산군일기』 61권, 연산 12년 1월 27일; 『중종실록』 70권, 중종 26년 1월 28일.

22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 양천(陽川) 허균(許筠, 1569~1618),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대표하여 사대부들의 문집에 다수의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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