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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회와 아전의 교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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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9.12.25 조회3,3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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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용머리 고개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이 전주에서 갑진년 七월에 있었도다. 최 창권(崔昌權)이란 사람이 부내의 아전을 모아 일진회 타도의 의병을 일으키고자 각 군 각 면으로 통문을 보냈도다. 상제께서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하리라” 하시니라. … 그날 오후에 아전과 일진회원 사이에 화해가 이룩되니 일진회원들이 사문을 열고 입성하니라. 이 일에 상제께서 소비하신 돈이 엿 냥이었도다. 가라사대 “고인은 바둑 한 점으로써 군병 百만 명을 물리친다 하나 나는 돈 엿 냥으로써 아전과 일진회의 싸움을 말렸느니라” 하셨도다. (행록 3장 14절)

 

 

위의 구절을 보면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 시에 아전들이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통문을 보냈다고 되어있다. 당시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아전들이 일진회를 타도하려고 했던 것일까? 본문에서는 일진회와 아전 사이에 교쟁이 발생한 원인과 이들 사이의 화해하기 쉽지 않았던 사정을 살펴보고 상제님의 공사 이후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아전과 동학도들의 갈등 시작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던 동학도들은 일본군과 관군의 개입으로 실패한 후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처형된 후 손병희는 3대 교주가 되어 교단을 재정비하였다. 손병희는 이용구에게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는 동학을 조정의 탄압에서 벗어나 활동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이용구는 1904년 7월에 동학도들로 구성된 진보회를 창립하였다.01 그해 12월 진보회는 친일파인 송병준이 만든 일진회에 흡수·통합되었다. 진보회로 활동한 기간이 짧아 두 명칭을 혼용해서 쓰기도 하였지만 1904년 12월 이전은 ‘진보회’, 이후는 ‘일진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경』에서 아전과 교쟁을 하였던 일진회는 진보회이지만,02 진보회와 일진회에 대해 논할 때 『전경』과의 통일성을 위해 일진회로 명명하고자 한다.

일진회와 교쟁을 하였던 아전(衙前)은 ‘관아의 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을 칭하는 말은 여러 개이다. 중앙관서에서 일하는 사람을 서리(書吏)라 하였고 지방관아에서 일하는 사람을 향리(鄕吏)라 불렀으며 이외에도 구실아치, 이서 등으로 불렸다. 그들은 소속에 따라 사신들의 수발부터 세금징수와 지방행정의 보조까지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고려 호족에서 비롯된 아전은 조선 시대 들어와서 지방 세력에 대한 견제로 1445년 외역전(外役田: 아전들에게 지급되던 땅)을 몰수당했다. 아전에게 잘 주지도 않았던 녹봉을 이때부터는 아예 지급을 중단시켜 버렸다.03 이후 아전들은 먹고살기 위해 세금을 탈세하거나 비리를 저지르는 방식으로 소득을 창출하였다. 또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도 아전끼리 하였고 행정을 위해 알아야 할 내용도 따로 교육하여 그들끼리만 공유했다.04

일진회와 아전은 언제부터 어떻게 사이가 좋지 않게 된 것일까? 둘의 사이가 안 좋게 된 것은 동학농민운동 때부터이다. 1890년도 전후로 수령들의 학정과 아전들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은 고통받고 있었다. 백성들에게 환곡미를 강제로 대여해주고 이자를 갈취했는데, 장부에는 이자를 내지 않은 것으로 하여 다시 청구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이자를 두 번 내야만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그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아이를 장부에 올려 군포(軍布: 16~60세의 장정이 군대에 안 가는 대신 쌀이나 옷감을 내는 것)를 징수하기도 했다.05 이러한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더욱 참혹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동학농민군은 학정(虐政)을 일삼은 양반과 부패를 자행한 아전들을 찾아가 응징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다. 아전들은 양반에 비해 백성들과 직접 맞대며 원한을 더 많이 샀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06 아전들이 집무를 보던 연청(椽廳)이 불타버렸고 심지어 조상 무덤까지 파헤친 사례도 있었다.07 이에 분개한 아전들은 자신들의 결속력을 토대로 인근 지역의 아전들과 담합하여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줄 민보군(民保軍)을 주도하고 군자금을 대었다.08 특히 아전의 세력이 강했던 나주는 성을 지키는 수성군을 미리 모집하여 동학농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다.09 나주 외의 지역도 민보군을 결성하여 동학농민군에 대비하였고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꺾이고 나서는 민보군을 통한 아전들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예천 지역의 민보군은 1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사로잡아 살아있는 채로 생매장하였고 동학의 경전이나 작은 쪽지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포 즉시 사살하여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10 이렇듯 동학농민운동은 동학도들과 아전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갑오개혁이 아전에게 미친 영향

동학농민운동을 겪은 조선 조정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껴 1894년에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때 개혁을 위해 발표한 ‘홍범 14조’ 중에는 아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조항들이 있었다. “6조 인민의 조세는 모두 법령으로 정한 비율에 따르고, 함부로 명목을 더 만들어 과도하게 징수할 수 없다. 7조 조세의 과세와 징수 및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11에서 관할한다. 10조 지방 관제를 서둘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권한을 한정한다.”12 이 문항들은 조세 행정의 폐단을 시정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으며 특히 국세보다는 아전들이 관여하던 잡세에 주안점을 두었다. 새로 바뀐 조항에 따라 군 단위에서는 군수가 조세부과와 징수 업무를 맡았으며 군수의 지휘를 받은 세무주사가 조세의 부과와 징수뿐만 아니라 국세와 지방경비의 지출을 관장하였다.

이로 인해 각 지방에서 아전들이 많이 필요치 않게 되자 지방 관제를 개정하여 아전들의 인원수를 대폭 줄였다. 당시 부군현(府郡縣) 약 327개소에 소속되어있던 총 2만 2,300여 명의 인원 가운데 70%가 넘는 1만 6,000여 명의 아전들이 쫓겨나게 되었다.13 또한, 개혁의 일환으로 탁지부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조세와 관련된 제반 사무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 과정에서 아전들이 세금을 탈세하거나 관아의 물건을 함부로 쓴 것, 백성들에게 곡식을 무자비하게 징수한 것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다. 아전들의 세력이 남달랐던 나주의 경우는 탁지부에서도 놀랄 만큼 세금을 횡령한 금액과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징수한 금액이 많았다. 이에 탁지부는 나주관찰사14에게 그동안 횡령한 금액을 책임지고 납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아전들은 세금징수권이 회수되어 수입원이 사라진 데다가 횡령금액을 다시 국가에 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분노한 아전들의 불만과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들은 양반과 유생을 앞세워 군대를 모집하여 조정에 저항했지만, 곧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아전들은 처절한 응징을 받았다.15 이후 중앙정부에서는 세무 행정에서 아전들을 더욱더 배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세금을 걷는 단위가 개인이 아니라 군 단위 총액제 방식이었기에 군수와 세무주사가 토지나 인구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전들을 세무 행정에서 완전히 제외하기는 힘들었다. 갑오개혁의 실패, 아전들의 반발, 세무 업무가 원활하지 않음 등으로 인해 아전들은 세금징수권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뒷날 일진회와 다시 교쟁을 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갑진년의 일진회와 아전의 다툼

동학의 3대 교주가 된 손병희는 동학이 더 이상 탄압받지 않고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다. 그는 조정에 상소문을 올려 독립을 위해서는 동학을 국교로 지정하고 전국 360여 군에 민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6 하지만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손병희는 독자적으로 민회를 설치하고 문명개화 운동을 준비했다. 이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민회에 대한 탄압이 가해지자 1904년 2월 대동회(大同會)로 이름을 바꿨다. 6월에 다시 중립회(中立會)로 이름을 변경하였지만, 탄압은 계속 이어졌다. 계속된 탄압에 손병희는 동학이 공인받고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문명개화 운동이 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04년 7월 진보회로 이름을 바꾸고 4월부터 조금씩 진행하던 개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17

개화운동은 4대 강령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실시되었다. 4대 강령은 “1.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기초를 공고히 할 일, 2. 정부를 개혁할 일, 3. 군정과 재정을 정리할 일, 4. 인민의 생명 재산을 보필할 일”18이었다. 일진회원(당시 진보회원)들은 개화운동의 성공을 위해 4대 강령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다. 손병희의 서기였던 민영순의 『갑진개화일기』에 보면 “우리는 장차 살아도 살 집이 없고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게 된다. 하루빨리 죽기를 맹세하고 일심단결하여 4대 강령을 실천하자”19라고 말한 대목에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일에 임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화운동은 아전들의 위기감만 조성하였다. 그 내용이 아전들을 존폐의 위기까지 몰고 갔던 갑오개혁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진회원들이 개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게 된 7월에 일진회와 아전 간의 교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최창권20이 전주부 내의 아전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기 위해 여러 사람의 성명을 적어 차례로 돌려보는 통문을 보냈다. 이 소식을 전해들으신 상제님께서는 일진회원들이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각종 탄압을 받다가 어렵게 살아났는데 다시 죽을 위기에 놓이자 이를 몹시 안타깝게 여기시고 그들을 제생하기로 하셨다. 이를 위해 용머리 주막에서 많은 사람에게 술을 권하고 종이에 글을 쓰셨다. 이후 종이를 여러 쪽으로 찢어 노끈을 꼬아서 주막의 문돌쩌귀와 문고리에 연결하여 공사를 보셨다. 그날 오후 아전과 일진회 사이에 극적인 타결이 이뤄짐에 따라 전주부 내로 들어오지 못했던 일진회원들이 전주부성의 사문(四門)을 열고 입성하였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원한이 가득했던 그들의 관계가 풀어진 것이다.

당시 일진회와 아전 간에 화해가 성사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들 사이에는 동학농민운동 때부터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았고,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전들의 세금 탈세와 부정부패는 유지되어야 하는 수입원이었고 일진회가 전개한 문명개화운동은 동학이 지속되는 탄압에서 벗어나 공인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일진회의 문명개화 운동은 아전들에게 갑오개혁의 악몽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고 아전들의 폐해는 일진회의 문명개화 운동을 통해 척결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였다. 이러한 그들의 관계가 상제님께서 공사를 행하신 이후로 해소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01 성주현, 「1904년 진보회의 조직과 정부 및 일본의 대응」, 『경기사학』 8권 (2004), p.445.

02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진보회와 일진회Ⅰ」 《대순회보》 101호 (2009), pp.10-11 참고

03 조윤민, 『두 얼굴의 조선사』 (서울: 글항아리, 2016), pp.131-132 참고 .

04 홍성찬, 「19세기 20세기 초 향리층의 사회경제 동향」, 『경제사학』 24호 (1998), p.7.

05 조윤민, 앞의 책, pp.157-158.

06 홍성찬, 앞의 글, p. 21.

07 신영우,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의의」, 『동학학보』 10권 2호 (2006), p.24.

08 배항섭, 「1896년 나주 향리층의 의병주도와 그 배경」, 『대동문화연구』 51권 0호 (2005), p.198.

09 같은 글, pp.197-198 참고.

10 신영우, 앞의 글, p.25.

11 국가의 예산·결산·조세 출납·화폐 등의 업무를 총괄하고 각 지방의 재무를 감독하였다. 9개월 만에 탁지

부로 개칭하였다.

12 《관보》, 「대군주가 종묘를 참배할 때의 서고문」, 1894. 12. 12.

13 배항섭, 앞의 글, pp.201-202 참고.

14 각 도에 파견되어 지방통치를 맡았던 최고의 책임자이다.

15 배항섭, 앞의 글, pp.215-216 참고.

16 이현희, 「갑진개화운동의 역사적 전개」, 『동학학보』 4권 (2002), p.16.

17 같은 글, p.18.

18 같은 글, p.20.

19 같은 글, p.19.

20 상제님을 따르던 종도들 사이에서 최창권으로 알려진 인물은 여러 역사적 자료를 살펴보면 정창권(鄭昌權)으로 기술되어 있다. 정창권은 갑오동학농민혁명 때 전라도 감영(監營)의 장교로 있으면서 동학농민군 토벌에 공을 세웠고, 1902년 전라북도 관찰부 총순(總巡)을 거쳐 1904년 중추원 의관(議官)으로 임용되어 그해 직책에서 물러났다. [「東學黨征討人錄」, 『東學亂記錄』卷下(서울: 國史編纂委員會, 1959) ; 「甲午軍功錄」, 『東學亂 記錄』卷下(서울: 國史編纂委員會, 1959) ; 『承政院日記』3145책, 고종 39년 4월 6일자 참고 ; 『承政院日記』3173 책, 고종 41년 7월 29일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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