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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의 만장(輓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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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06.15 조회1,3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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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항쟁을 이끌다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상제님께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그의 의병항쟁이 더 큰 유혈사태로 진행되는 것에 우려를 표명하셨으나, 최익현의 한결같은 ‘우국애민(憂國愛民)’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국권 상실 시기에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나라와 백성, 양심까지 팔아서 호의호식한 자들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에는 목숨까지 던진 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에 대한 상제님의 평가는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최익현과 같이 『전경』에 자주 언급되고 상제님의 찬사를 받은 인물이 드문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상제님께서 그 최익현을 위해 쓰신 만장이 교법 3장 20절에 있는데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최 익현(崔益鉉)이 순창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라사대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정 낙언(鄭樂彦)은 죽고 최 면암(崔勉菴)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 리 밖에 있는 군함을 물리치리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최 익현의 만장을 다음과 같이 지으셨도다.

讀書崔益鉉 義氣束劒戟

十月對馬島 曳曳山河橇

 

위 구절을 보면 상제님께서는 최익현의 일심을 칭찬하시고 일심의 힘에 대해 다시금 강조하시고 있다. 그리고 최익현이 순창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시점에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만장을 지으신 것이다. 만장(輓章, 挽章, 挽丈)은 죽은 사람을 애도한 글이다. 일정한 규격이 있는 것은 아니며, 문체(文體)에 따라 만사(輓詞), 만시(輓詩)가 있다. 만(輓)을 자전(字典)에서 찾아보면 ‘수레를 끌다’는 뜻이 있는데, 상여가 떠날 때 만장을 앞세워 장지로 향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망인이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려 좋은 곳으로 갈 것을 인도하게 한다는 뜻도 담겨있다.01 이 글에서는 상제님께서 쓰신 최익현의 만장과 그 해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최익현의 만장은 이미 간략하게나마 ≪대순회보≫ 111호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 글이 필요한 이유는 이미 소개된 내용이 간략해서 상제님께서 쓰신 최익현의 만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한시(漢詩)의 해석에 정답이 있을 수 없으나 기존의 해석을 보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최익현의 죽음과 관련한 내용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보완하고,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최익현의 만장에 관하여 ≪대순회보≫ 111호에 이미 실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시면서 상제님께서는 “글 읽던 최익현이 의기를 떨쳐 칼과 창을 쥐었지만, 10월 대마도에서 널에 얹혀 있다가 흔들흔들 고국산하에 돌아오도다(讀書崔益鉉 義氣束劒戟 十月對馬島 曳曳山河橇)”라고 그의 만장(輓章)을 지으셨다. 만장이란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짓는 글이니 상제님께서는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죽을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이다.02

 

 

최익현의 만장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하다.

 

 

讀書崔益鉉(독서최익현) 독서 최익현

義氣束劒戟(의기속검극) 의기는 창칼을 하나로 묶었네

十月對馬島(시월대마도) 시월 대마도에서 쓰러지니

曳曳山河橇(예예산하교) 산하에 교(橇)를 길게 끌었네

 

 

상기 구절 가운데 ‘독서최익현(讀書崔益鉉)’과 ‘의기속검극(義氣束劒戟)’은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먼저, ‘독서최익현(讀書崔益鉉)’은 최익현이 관직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의병을 일으킬 당시에는 관직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경과한 시기로 이때는 초야에 묻힌 글 읽는 선비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하신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된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으로 ‘의기속검극(義氣束劒戟)’은 조금은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상제님의 말씀 가운데 ‘최익현의 거사로써 천지신명이 크게 움직인 것은 오로지 그 혈성의 감동에 인함’03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의기는 창칼[의병]을 결속(結束)하게 만들었으며 군세(軍勢)도 적지 않았다. ‘처음에 80여명의 유생과 고을 사람들이 전부였던 군세(軍勢)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총 900명에 달할 정도로 급속하게 신장되었다’는 기록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04 그런데 최익현의 봉기는 처음부터 승산 있는 싸움은 아니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의병은 인원수, 무기, 편제, 훈련 상황 등 모든 군사적인 측면에서 관군 또는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상제님께서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최익현의 개인적 한계와 더불어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최익현의 거사가 비록 군사적 측면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도 그가 끼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최익현은 대쪽 같은 상소로 인망이 두터웠고 항일(抗日)의 선봉에 서 있던 당시 유림(儒林)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최익현이 상소를 통한 의견 개진과 대국민 호소에서 탈피하여 의병을 통한 무력항쟁을 선택한 것은 당시의 유림들과 항일을 지향하던 이들에게는 하나의 지향점을 제시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로나 그 이후의 역사를 볼 때 ‘의기속검극’은 최익현이 의기로 칼과 창을 묶어내었고, 이것이 대한제국시기와 그 이후 의병항쟁으로 이어진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05

 

그런데 만장 자체가 그 사람의 죽음을 상정한 것이긴 하지만 ‘시월대마도(十月對馬島)’와 ‘예예산하교(曳曳山下橇)’는 최익현의 죽음과 관련된 상황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최익현의 체포와 대마도로 끌려간 경위, 그리고 죽음과 관련한 자세한 사정은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왜놈들이 최익현을 잡아 대마도로 압송하다.

 

1906(병오)년 7월 8일에 왜놈들이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 등이 사령부에 갇힌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저항하며 굽히지 않자, 왜놈들이 마침내 등급을 나누어 형을 정했다. 김기술(金箕述) 이하 아홉 명은 태 백 대를 때려 석방했고, 고석진(高碩鎭)과 최제학(崔濟學)은 사 개월을 더 수감했으며, 최익현과 임병찬은 함께 대마도 위수영(衛戍營)으로 유배했다. 문인 자제와 고관 유생 삼십여 명이 배웅하면서 통곡하다 실성하자 최익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들은 이렇게 할 필요가 없소. 거듭 폐를 끼치고도 죽지 못한 것이 부끄럽소.”

그러고는 흔연히 수레에 올라타고 떠났다. 최익현의 아들 최영조와 임병찬의 아들 임응철(林應喆)이 부산항까지 따라갔지만, 왜놈들이 칼을 휘두르며 쫓아 통곡하며 돌아왔다.

이에 앞서 민종식이 패하자 휘하에 있던 이식(李植), 유준근(柳濬根), 신현두(申玄斗), 이상두(李相斗), 남경천(南敬天), 안항식(安恒植), 최중일(崔重一), 문석환(文奭煥), 신보균(申輔均) 아홉 명이 붙잡혔다. 왜놈들이 그들을 위수영으로 보내 가두고는 가혹하게 학대하니, 그 괴로움을 참지 못했다. 최익현이 이르자 왜놈들이 그를 매우 존경하여 조금 느슨하게 감금했으므로 이식 등이 그를 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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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하다

 

1906년 11월 17일에 전 판서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죽었다. 처음 최익현이 도착했을 때 그에게 왜국 곡식으로 만든 죽을 주었는데,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왜놈들이 크게 놀라 우리 정부와 통하여 음식을 제공했다. 임병찬 등이 다시 강권했지만, 나이가 많고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먹는 것이 차츰 줄더니 곱사병까지 겹쳤다. 10월 16일에 자리에 눕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날 서쪽을 향해 머리를 숙인 뒤 임병찬에게 구두로 마지막 상소를 남겼다. 살아 돌아가 임금에게 전해 달라고 하고 죽으니, 그의 나이 74세였다. 왜놈들도 그의 충의에 감동하여 줄지어 조문했다.

 

21일 영구(靈柩)가 부산에 이르자 우리 장사꾼들이 시전을 거두고 통곡했는데, 마치 친척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남녀노소가 모두 뱃전을 잡고 엎어지며 슬피 우니, 곡성이 넓은 바다를 뒤흔들었다. 장사꾼들은 자신들의 시전에다 호상소를 마련하고 상여를 꾸몄다. 하루를 머문 뒤에 떠나자 상여를 따라오며 미친 듯 우는 자가 수천수만이었다. 승려, 기생, 거지에 이르기까지 부의를 들고 와 인산인해를 이루니 저자 바닥 같았다. 만장과 뇌문을 모아 말 여러 마리에 싣고 갔지만 종일 십리도 가지 못했다. 부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인사들이 더욱 모여들었다.

 

동래에서 떠나던 날에는 상여가 몇 차례나 움직이지 못했는데, 왜놈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변이 날까 두려워했다. 이에 엄히 경비했지만, 사람들을 오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상주에 이르자 왜놈들도 곤란하게 여겨 상여를 기차에 싣고 눈 깜짝할 사이에 고향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주에 이르는 삼백 리에 이미 십 일이나 허비했다.

 

곡성이 온 나라 골목마다 퍼졌고, 사대부에서 길거리의 어린아이들과 심부름꾼들까지 모두 눈물을 뿌리며 “면암이 돌아가셨다”하면서 조문했다. 나라가 시작된 이래 사람이 죽었다고 이처럼 슬퍼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만은 은졸의 의전도 없었으니, 적신들이 나랏일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최익현이 죽기 며칠 전날 밤에 서울 동쪽에서 커다란 별이 바다 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이 보이더니 얼마 뒤 부음이 이르렀다. 영구가 동래항에 이르자 갑자기 대낮에 처량하게 비가 내리더니 바닷가에 쌍무지개가 생겼다. 장례를 치를 때는 큰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쳤으며, 소상과 대상 때도 궂은 비가 종일 내려 사람들이 더욱 이상하게 여기고 슬퍼했다. 정미(1907)년 2월에 연산현의 경계인 어느 마을 뒷산 길가에 장사지냈다.

아들 최영조와 최영학이 면암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지만 이미 초상을 만났으므로 관을 사서 염하려고 했다. 왜놈들이 관을 보내왔는데도 최영조가 물리치고 받지 않자 그들이 위협하며 말했다.

 

“우리 관을 쓰지 않으면 영구를 돌려보내지 않겠다.”

어쩔 수 없이 그 관을 사용했지만, 집에 이르러 새 관으로 바꾸었다.

내가 무신(1908)년 9월에 그의 상청을 찾아서 조문객의 명부를 보니 한 치 남짓 되는 책이 네 권이나 되었다.06

 

 

위의 구절을 통해서 ‘시월대마도(十月對馬島)’가 뜻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최익현은 일본군에 체포된 이후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이 최익현을 대마도로 압송한 것은 체포한 이들 가운데 그가 주모자이면서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압박에도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마침내는 단식으로 저항했는데, 고령의 나이였던 그에게 이것이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황현이 기록한 것처럼 ‘10월 16일에 쓰러지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으니 ‘시월대마도(十月對馬島)’는 최익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끝으로 ‘예예산하교(曳曳山下橇)’는 최익현의 장례식과 관련이 있다. 그의 장례기간 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이렇게 땅이 비에 젖어서 문상객들이 평상시 신던 신을 신기 힘들었다. 이때 등장하는 교(橇)의 모습은 그림1)과 같은데, 『한한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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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길을 다닐 때 타던 도구. 진흙 썰매.

『집운, 제운』 교(橇)는 진흙길에 신는 것.

『사기, 하본기』 뭍에 다닐 때는 수레를 타고, 물에서는 배를 타고, 진흙길에는 교(橇)를 신고, 산행을 할 때는 국(梮, 밑에 징을 박아 미끄러지지 않게 한 등산용 신)을 신는다.

『배인 집해』 교(橇)의 형태는 삼태기 같고 진흙길에서 바로 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교(橇)는 진흙길에서 신는 신이다. 그리고 예(曳)는 끌 예 자로 땅에 늘어뜨리고 간다는 뜻이며, 예예(曳曳)는 길게 뻗치는 모양을 나타낸다.08 『매천야록』의 기록처럼 사대부에서 심부름하는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시작된 이래 사람이 죽었다고 이처럼 슬퍼한 적이 없었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문상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상여를 따르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 10리도 가지 못했다는 구절에서 엄청난 인파가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예산하교(曳曳山下橇)’, ‘산하에 교를 길게 끌었네’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이 교를 신고 최익현의 상여의 뒤를 따르는 모습을 표현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10월 대마도와 연결해서 보면, ‘10월 대마도에서 쓰러져 고국에 돌아오니 산하에 교를 길게 끌도록 하였네’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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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여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지만 그 죽음의 무게는 판이하다. 면암 최익현은 상제님께서 만장을 써서 애도를 표하실 정도의 인물이었다. 『전경』에는 최익현과 관련한 상제님께서 언급하신 또 다른 구절이 있다.

 

 

상제께서 최 익현과 박 영효(朴泳孝)의 원을 풀어주신다고 하시면서 “천세 천세 천천세 만세 만세 만만세 일월 최 익현 천포 천포 천천포 만포 만포 만만포 창생 박 영효(千歲千歲千千歲 萬歲萬歲萬萬歲 日月崔益鉉 千胞千胞千千胞 萬胞萬胞萬萬胞 蒼生朴泳孝)”라 쓰고 불사르셨도다.

(공사 2장 22절)

 

 

최익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상제님께서 만장을 통해 언급하신 ‘독서최익현’이다. 일반적으로 선비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글 읽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의 모습을 최익현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글을 읽는다는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평소에는 글을 읽고 수양하다가 어떤 시기가 도래하여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을 때 그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거는 그런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상제님께서 남기신 최익현의 만장을 통해서 그가 한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또한, 면암 최익현의 일심이 영원히 빛날 것임을 그의 만장과 더불어 ‘천세 천세 천천세 만세 만세 만만세 일월 최익현’이란 구절을 통해서 상제님께서 밝혀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0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7』, <만사(輓詞)> 항목, 1989, p.628.

02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47. 최익현과 일심(一心)」, ≪대순회보≫ 111호, p.15.

03 상제께서 이달 그믐에 동곡으로 돌아오신 다음 날 형렬을 데리고 김 광찬이 가 있는 만경에 가셨을 때에 최 익현이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때는 모를 심는 시기이나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인심이 흉흉하여 사람들이 직업에 안착치 못하고 의병에 들어가는 자가 날로 증가하여 더욱 의병의 군세가 왕성하여 지는지라. 상제께서 수일간 만경에 머무시면서 비를 흡족하게 내리게 하시니 비로소 인심이 돌아가 농사에 종사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더라. 이때 최 익현은 의병의 갑작스러운 약세로 순천에서 체포되니라. 그가 체포된 소식을 들으시고 상제께서는 만경에서 익산 만중리 정 춘심의 집으로 떠나시며 가라사대 “최 익현의 거사로써 천지신명이 크게 움직인 것은 오로지 그 혈성의 감동에 인함이나 그의 재질이 대사를 감당치 못할 것이고 한재까지 겹쳤으니 무고한 생민의 생명만을 잃을 것이니라. 때는 실로 흥망의 기로이라 의병을 거두고 민족의 활로를 열었느니라”고 하셨도다. (공사 1장 24절)

04 최근묵, 「면암 최익현의 의병운동」, 『백제연구』 14,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83, pp.58~60 참조.

05 이와 관련된 내용은 최근묵의 위의 논문과 다음에 상세하다. 김성수, 「최익현과 박영효의 원」, ≪대순회보≫ 65호, pp.65~67 참조.

06 황현 지음ㆍ허경진 옮김, 『매천야록(梅泉野錄)』, 서해문집, 2006, p. 376, pp.384~386.

07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한한대사전7』, 2004, p.595, 그림1)도 동일.

『集韻, 祭韻』 橇, 泥行所乘.

『史記, 夏本紀』 陸行乘車, 水行乘船, 泥行乘橇, 山行乘梮.

「裵駰 集解」 橇形如箕, 擿行泥上.

08 민중서림, 『한한대자전』, 2006, p.955. 

<대순회보 2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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