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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주문에는 중국의 역사인물이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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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3 조회1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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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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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종단의 주문에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이 상당수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8수주의 28수 신명은 광무제(光武帝)를 보좌하여 후한(後漢)을 창업함으로써 평천하를 이룬 장군들이며 24절주의 24절후 신명은 중국 당 태종(唐太宗)과 함께 천하를 평정한 신하들이다. 민족종교를 표방하는 종단에서 왜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을 신명으로 믿고, 기도를 할 때마다 염송을 하느냐는 질문은 어찌 보면 당연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민족종교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즉 민족종교는 민족의 신이나 성인만을 신앙하며 선민의식을 강조하는 국수적인 종교가 아니라 그 민족이 지닌 보편적이면서도 우수한 사상과 문화를 기초로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를 체계화, 구체화한 종교라는 점을 정확히 알지 못해 품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않기에 지금까지의 여러 논의들을 종합하여 다시 한 번 그 의문에 대해 조금이나마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종단에서 믿어지는 많은 신명들의 탄생지역이나 유래를 살펴보면 특히 중국의 비중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의 포정문 옆 벽에 쓰인 ‘대순진리회 창설 유래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소위(所謂) 천지(天地)와 합기덕(合其德)하며 일월(日月)과 합기명(合其明)하며 사시(四時)와 합기서(合其序)하며 귀신(鬼神)과 합기길흉(合其吉凶)하여 창생(創生)을 광제(廣濟)하시는 분이 수천백년(數千百年)만에 일차식(一次式) 내세(來世)하시나니, 예(例)컨대 제왕(帝王)으로서 내세(來世)하신 분은 복희(伏羲) 단군(檀君) 문왕(文王)이시요 사도(師道)로서 내세(來世)하신 분은 공자(孔子) 석가(釋迦) 노자(老子)이시며 근세(近世)의 우리 강증산(姜甑山) 성사(聖師)이시다.

 

  이 글에 나타난 복희와 문왕은 고대 중국의 성왕(聖王)이며 노자와 공자는 중국 도교와 유교의 조성(肇聖)이다. 즉 대순진리는 구천상제님 전에도 창생을 가르치고 구하기 위해 내세하신 성인이 이미 중국에도 오셨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인께서 인세에 내세하실 때에는 진리를 펼치기에 적합한 하나의 국가나 지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그 진리를 어느 정도는 알아보고 이해할 정도의 문명이나 성정을 지니지 못한다면 창생의 광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개의 특정 지역에 성인이 내세하지만 이들이 펼치신 법이 인위적 사도가 아닌 천부적 진리이기에 역사 속에서 온 누리에 전파되어 인류의 영적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기에 지역적 민족적 한계는 장애가 되지 못한다. 이러하기에 중국의 성인이고 신명이라고 해서 우리가 인정하지 않고 신앙하지 못한다면 이는 도의 이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성인들 외에도 우리 종단에는 중국에서 유래한 신명이 많다. 15신위의 신명으로 영대에 봉안된 관우는 촉나라의 장수로 중국 민간에서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신앙된다.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朱子)를 상제님께서는 유교의 종장으로 세우셨다.01 또 상제님께서는 문왕, 이윤, 강태공, 신농씨 등의 인물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주문에서 28수 신명과 24절후 신명은 모두 중국의 역사적 인물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로 중요한 신성이나 천지신명이 중국에 많이 탄생하고 신명으로 봉안되었을까?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공사 3장 18절에서 상제님께서는 중국 관련 천지공사를 행하시면서 다음의 중국에 관한 덕겸의 말을 옳다고 인정하셨다.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와 예악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상제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시니라.02 

 

  또 다른 말씀을 살펴보면 상제님께서는 청나라 황제 광서제에게 응해있던 황극신(皇極神)을 우리나라로 옮겨 오게 하셨다.  


  상제께서 어느 날 고부 와룡리에 이르사 종도들에게 “이제 혼란한 세상을 바루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도다.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하여 있다” 하시며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송우암(宋尤庵)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 하시고 밤마다 시천주(侍天呪)를 종도들에게 염송케 하사 친히 음조를 부르시며 “이 소리가 운상(運喪)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고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군왕의 길이로다. 이제 황극신이 옮겨져 왔느니라”고 하셨도다. 이때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도다.03 

 

  이상의 내용을 고려하여 생각해보면, 중국은 세계 예악과 문물의 중심지로 유·불·선의 도가 모두 모여 융성하였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즉 최고의 선진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지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천하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대중화(大中華)’ 개념은 객관적인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황제에게 ‘황극신’이 응하여 있다는 상제님의 말씀으로도 입증된다. ‘황극(皇極)’의 의미가 ‘제왕이 천하를 통치하는 준칙, 이른바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라고 해석된다고 할 때,04 ‘황극신’은 ‘곧 천하를 크고 바르게 다스리는 신명’이라 이해할 수 있기에 하늘은 중국의 황제를 천자(天子)로 택하여 문명의 중심으로 중국을 세웠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는 중국에 왔던 마테오리치, 즉 이마두가 사후에 문명신을 데리고 서양에 갔다는 상제님의 말씀에서도 시사된다.05 이렇게 문화와 문명의 중심지인 중국에 신명의 내세가 다른 지역보다 많을 것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인류 문화와 문명의 중심지인 중국이 혼란에 빠졌을 때도 하늘은 이를 방관하지 않고 신명을 내세케 하여 천하를 안정시켰을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상제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종도들에게 24절을 읽히고 또 말씀하시니라. “그때도 이때와 같아서 천지에서 혼란한 시국을 광정(匡正)하려고 당 태종(唐太宗)을 내고 다시 24장을 내어 천하를 평정하였나니 너희들도 그들에게 밑가지 않는 대접을 받으리라.”06

 

  즉 중국 수나라 양제의 실정으로 중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어 큰 혼란에 빠지게 되자 하늘은 혼란한 시국을 안정하게 하려고 당 태종을 내고 그를 받들어 천하를 평정할 24명의 재상과 장수를 인간 세계에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24명의 신하 중 특히 명재상인 위징에 관해서 상제님께서는 “위 징(魏徵)은 밤이면 옥경에 올라가 상제를 섬기고 낮이면 당 태종(唐太宗)을 섬겼다 하거니와 나는 사람의 마음을 뺐다 넣었다 하리라”07라고 말씀하시어 그가 상제를 모시는 신명이었음을 알려주신 바 있다.
  당 태종은 정관 17년(643년)에 24명의 공신들의 공을 생각하여 수도인 장안성(長安城) 삼청전(三淸殿) 내에 능연각(凌煙閣)을 짓고 여기에 24명 공신의 도상을 그려 봉안하였다.08 그 뒤로 24공신은 당의 개국공신으로 후대에 이르기까지 추앙을 받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이 24공신이 24절후를 담당하는 신명임을 주문으로 우리들에게 밝혀 주신 것이다.
  상제님께서 후한을 연 광무제와 그를 보좌한 28공신에 대해 직접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이들 또한 당 태종과 24공신처럼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 보낸 인물이라 유추할 수 있다.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전한(前漢) 말기와 왕망(王莽, 기원전 45-기원후 23)의 신(新, 8-23) 그리고 후한(後漢)의 창업 시기를 거치면서 전란 전 6백만 명에 가까웠던 인구가 100만까지 줄어들게 되었다.09 이러한 절체절명의 대혼란기를 안정시키고자 하늘은 ‘중흥(中興) 28장(將)’이라 불리는 28명의 공신을 세상에 내린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28장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반고(班固), 진종(陳宗) 등이 저술한 『동관한기(東觀漢紀)』에 기재되어 있다.

 

  황제께서 중흥 공신을 생각하여 남궁 운대에 28장을 그리게 하였는데 등우를 맨 처음으로 하고 다음 마성, 오한, 왕양, 가복, 진준, 경감, 두무, 구순, 부준, 잠팽, 견담, 풍이, 왕패, 주우, 임광, 제준, 이충, 경단, 만수, 합연, 비융, 요기, 유식, 경순, 장궁, 마무, 유융의 순으로 되어 있다.10

 

  여기서 황제는 후한의 현종(顯宗, 28-75) 즉 명제(明帝)를 말하며 그가 남궁(南宮)의 운대(雲臺)에 28공신의 화상을 그려 봉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중흥 28장이 하늘의 28수의 화신으로 알려진 시기는 『후한서(後漢書)』의 “과거에는 28장이 28수와 상응한다고 하였다. 상세하지 않다”11는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다. 즉 후한서의 저자 범엽(范曄, 398-445)이 유송(劉宋) 시대의 사람임을 고려할 때, 기원후 60년과 4세기 말 이전의 시기에는 28장이 28수의 화신임이 널리 알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조선의 지식인들은 28장과 28장이 모셔진 운대에 대한 설에 대해 일반적인 상식처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식인들이 쓴 시문에도 ‘운대(雲臺)’12, ‘가등(賈鄧)’13, ‘등우’14 등의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정조(正祖)의 시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운대(雲臺)’라는 제목의 시15도 실려 있다. 또 『영조실록』에는 28수와 28장의 상응관계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 기사가 있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서 유신(儒臣)을 불러 보고 다시 어필(御筆)로 ‘서궐임서 남두학사(西闕臨署南斗學士)’ 여덟 글자를 써서 내려 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이십팔장(二十八將)에 비하였는데, 지금의 유신(儒臣)은 여섯 사람이기 때문에 남두(南斗) 여섯 별에 비한 것이다.16

 

  이런 내용들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28장을 광무제를 도와 한나라를 중흥시킨 충신의 표상으로써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28장이 하늘의 28수의 화신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지어 본다면 우리 종단은 인위적인 사도가 아니라 천부적인 신도로써 실제의 천지신명을 모시고 있기에 주문에 중국에서 유래한 신명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많은 연구에 따르면 주나라 이후 시기부터는 현대 문명의 기원이 중국이었음은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즉, 주역 시대의 문명이 중국을 중심으로 펼쳐졌기에 많은 신성과 천지신명은 중국으로 내세하였고 따라서 상제님의 천지공사에도 이러한 점이 반영되어 주문에 중국에서 유래한 신명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대순회보> 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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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교운 1장 65절. 또 어느 날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 수운(崔水雲)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진묵(震黙)을 불교(佛敎)의 종장(宗長)으로, 주 회암(朱晦庵)을 유교(儒敎)의 종장(宗長)으로, 이마두(利瑪竇)를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셨도다.
02 공사 3장 18절.
03 공사 3장 22절.
04 ‘황극(皇極)’은 『書經』 「洪範」에 처음 쓰이기 시작하였다. 『書經』 「洪範」, “五, 皇極, 皇建其有極.” 공영달(孔颖达)이 “皇, 大也. 極, 中也. 施政教, 治下民, 當使大得其中, 無有邪僻.”라고 주석하면서 ‘황(皇)’은 ‘大’로 ‘극(極)’은 ‘中’의 의미로 주로 이해되었다. 
05 교운 1장 9절 참고.
06 예시 66절.
07 교법 3장 33절.
08 『태평어람(太平御覽)』 「황왕부(皇王部)」 34, “十七年正月戊申, 詔圖畫司徒, 趙國公無忌等勛臣二十四人於凌煙閣…”
09 대순종교문화연구소, 「28수 신명과 광무제 유수」, 《대순회보》 153호 (2014), pp.67-68 참조.
10 『동관한기(東觀漢紀)』 卷2 「명제영평삼년(明帝永平三年)」, “帝思中興功臣, 乃圖畫二十八將於南宮雲臺, 以鄧禹爲首, 次馬成、吳漢、王梁、賈復、陳俊、耿弇、杜茂、寇恂、傅俊、岑彭、堅鐔、馮異、王霸、朱祜、任光、祭遵、李忠、景丹、萬脩、蓋延、邳肜、銚期、劉植、耿純、臧宮、馬武、劉隆. 又益以王常、李通、竇融、卓茂, 合三十二人. 馬援以椒房之親, 獨不與焉.”
11 『후한서(後漢書)』권22 「주경왕두마유부견마열전 제20(朱景王杜馬劉傅堅馬列傳第十二)」, “中興二十八將者, 前世所爲上應二十八宿, 未之詳也. 然咸能感會風雲, 奮其智勇. … 故光武監前事之違, 存矯枉之志. 雖寇鄧之高勳, 耿賈之鴻烈, 分土不過大縣數四, …”
12 『목은시고(牧隱詩稿)』15 「희허편(欷歔篇)」.
13 『사가시집(四佳詩集)』2 「시류(詩類)」 ‘한광무기(漢光武紀)’. ‘가등’은 가복과 등우를 이르는 것임.
14 『운양집(雲養集)』3 「석진우역집(析津于役集)」.
15 『홍재전서(弘齋全書)』 「춘저록(春邸錄)」 ‘운대(雲臺)’. “이십팔 인의 원훈들이 한 폭 안에 실렸으니(卄八元功一幅中), 제공의 용감하고 뛰어난 풍채 엄연하구려(英姿颯爽儼諸公), 명제의 덕이 고조보다 높음을 이제야 알겠네(始知帝德邁高祖), 고조가 남궁에 화공 두었음을 볼 수 없어라(未覩南宮著畫工)”
16 『영조실록(英祖實錄)』 36년 경진(1760, 건륭 25) 10월 8일. “上御景賢堂, 召見儒臣, 復以御筆, 書賜‘西闕臨署南斗學士’八字. 上曰: ‘古以二十八宿, 比二十八將, 今者儒臣, 乃六人, 故比之南斗六星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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