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조선국토 측량(測量)과 지도(地圖) 제작 : 강화도 조약(1876년)에서 한일병탄(1910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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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2.06 조회1,756회 댓글0건본문
연구위원 김주우
어떤 사람이 계룡산(鷄龍山)에 정씨가 도읍하는 비결을 묻기에 상제께서 이렇게 이르시니라. “일본인이 산속만이 아니라 깊숙한 섬 속까지 샅샅이 뒤졌고 또 바다 속까지 측량하였느니라. 정씨(鄭氏)가 몸을 붙여 일을 벌일 곳이 어디에 있으리오.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
(교법 3장 39절)
조선 시대에서는 정세의 불안과 그에 따른 혼란이 가증될 때마다 이망정흥설(李亡鄭興說)과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을 비롯한 정감(鄭鑑)의 도참비결이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계룡산에서 정씨가 도읍한다’는 비결은 극도로 혼란했던 19세기 말에 더욱 극성하게 된다. 당시 민중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이 비결을 어떤 사람이 상제님께 묻자, “그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고 하여 허망한 비결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일러주셨다. 상제님께서는 그 이유를 일본인이 조선의 국토를 산속, 섬 속, 바다 속까지 측량하여 정씨가 숨어서 일을 벌일 곳이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일본인이 어떤 계기와 목적으로 조선의 국토를 측량하였을까?
▲ 측량하는 모습 (출처: 『조선토지조사사업보고서』, 1918년)
19세기 말엽의 조선 사회는 내부의 모순과 함께 세계열강들의 이권 다툼이 본격화된 격랑의 시기였다. 당시 제국주의에 편승한 일본 또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호시탐탐 넘보고 있었다. 하지만 쇄국을 고수한 조선의 정책은 그 전반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일본은 동아시아 침략준비의 하나로 조선의 각종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데, 모든 활동의 기저에는 지리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조선국토의 정탐은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정한론(征韓論)과 근대 측량기관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성공에 힘입어 내부로는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고 외부로는 제국주의 영토확장을 국가적 과제로 삼았다. 정한론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격동기마다 논쟁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정한론이 처음 표면화되는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가 정한을 ‘당면한 급무’로 주장하면서 시작된다.01 이때부터 막부(幕府) 말기의 관념적 정한론을 계승한 것과 아울러 유신에 불만을 품은 각 번(蕃)의 군사를 조선 침략에 동원하여 국내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1873년 서구열강을 순방했던 시찰단은 내치의 우선을 강조하고 정한론이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편다. 당시 그들의 주된 쟁점은 조선을 정벌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침략의 시기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결국, 명치유신의 벽두에 시작된 정한론은 군사작전의 전개를 위한 지리정보의 작성과 외교, 통상 활동에 필요한 정보수집 등이 기본 전략으로 책정되었고, 추후 거기에 식민지 점령과 경영이라는 목적이 부가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세워진 대륙 진출의 목표는 조선에 대한 측량과 지도제작의 필요성을 요구하였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에서 관제지도의 제작은 내무성(内務省)이 주축이었으나, 한반도에 대한 지리정보와 측량은 일본의 해군과 육군에 의해 지도제작으로 전개된다.
1871년 일본은 병무성(兵務省)에 육군부 참모국(參謀局)과 해군부 수로국(水路局)을 설치하였다. 참모국의 임무는 국내외의 첩보 활동과 지도제작 및 지지(地誌)의 편찬이었으며, 그 산하 간첩대가 주도적인 업무를 수행했다. 수로국은 국내외의 해안과 항만·도서 및 수로(水路) 등을 측량하면서 해도(海圖) 제작과 수로지(水路誌)를 편찬하는 측량 전문부서였다. 1872년에는 병무성이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되고, 육군 참모본부(參謀本部, 1878년)와 해군 수로부(水路部, 1886년)로 확대 개편된다.02
일본 육군은 측량기술 습득을 위해 소속 장교를 독일에 유학시킨 것을 계기로 측량과 지도제작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1884년 육군성 참모본부는 내무성의 기술진을 흡수하여 산하에 측량국(測量局)으로 체제를 일원화한다. 이때부터 일본의 모든 측량 및 지도제작의 주체가 강력한 군대조직으로 들어가게 된다. 1889년에 이르러 측량국은 육군참모총장 직속의 독립된 조직인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로 변모한다. 이 독립조직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반세기 동안 일본의 지도제작을 수행하였다.03
조선 연해 측량과 해도(海圖) 제작
19세기 말 조선은 서구 열강 및 일본으로부터 개방의 압력을 받고 있었는데, 이 요구는 한반도 연해에 대한 측량과 지형도 제작으로부터 시작된다. 1875년 일본은 강화해협에서 군함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유발하여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1876년)]을 맺게 된다. 조약 7조에 “일본은 조선의 연해, 도서, 암초 등을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한다”라는 불평등 조항을 만들어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계획한다. 그러나 조약을 맺기 전에 일본이 조선의 해역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일본 해군은 서구열강이 조선 연안을 측량한 일부분의 지도를 이미 확보했기에 가능했다.04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조선 연안을 실측하기 위해 일본의 군함들이 동원된다. 군함 천성호(天城號)는 1878년에 개항장을 물색하기 위해 부산에 정박하면서 연안을 측량하고,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무력시위차 조선해역을 돌며 원산항의 해로와 북청 일대의 수심을 측정하였다. 그리고 1880년에는 울릉도 일대를 측량하였다.05 또 다른 군함 고웅환(高雄丸)은 1879년에 부산항을 거쳐 서해안 일대와 강화도 통지부를 측량하였다. 그 결과 일본 해군 수로부는 1894년부터 조선 연안의 항만과 항로를 조사·측량한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를 발행한다. 그리고 1896년에 일본의 군함이 측량한 내용을 반영한 지도인 「조선전안(朝鮮全岸)」을 간행했다.06
당시 일본 해군은 조선의 식민지화와 대륙침공을 위해 1899년부터 1910까지를 측량정비 확충기로 정하고 조선반도의 연안 측량을 추진했다. 이에 군함 4척과 소형측량선 약 38척이 동원된다.07 1900년에는 반성호(磐城號)가 대동강에서 압록강까지의 연안과 평양의 연안을 측량한다. 1901년에 해문호(海門號)는 67명의 측량대를 대동하고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충청도의 연안과 황해도의 수로를 측량하였다. 1905년 육로(陸路)는 부산부터 원산까지 해안을 측량하였다. 1907년에 군함(軍艦)은 함경북도 웅원단에서 함경남도 송도까지 측량하였다.08 이 과정에서 러일전쟁의 발발로 작전용 해도를 긴급히 제작하기 위해 측량수를 증원하였다. 이처럼 일본 군선의 연안 측량은 크고 작은 섬을 포함하여 한반도 전 해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간첩대(間諜隊) 파견과 조선 육지 측량
일본은 조선의 연안 측량에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에 비해 내륙의 지리정보는 국가기밀이기 때문에 외국이 합법적으로 측량을 할 수 없었다. 일본 참모국 간첩대의 한반도 지리정보를 위한 정찰과 비밀 측량은 1877년에 처음 시작된다.09 하지만 일본 공사관으로 위장한 참모부 장교가 임오군란 때 살해당하는 등 내륙의 첩보 활동은 쉽지 않았다.
강화도 조약 6년 후 일본은 임오군란 때 발생한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1882년)을 체결한다.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 제2조에 “일본공사·영사 및 수행원과 가족의 조선 내지(內地) 여행을 허락하며, 여행할 지방을 지정하면 예조에서 증서를 발급하고 지방관은 증서를 대조하여 호송한다”라는 조항을 명시하였다. 이 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수행원으로 위장한 참모부 장교들의 첩보 활동과 비밀 측량조사는 이전보다 수월하게 진행된다. 당시 참모부는 청일전쟁과 조선정복을 대비하여 한반도에 파견된 장교들에게 은밀하고 신속하게 제작할 수 있는 보측(步測)과 목측(目測)의 간이 측량방법을 지시하였다. 그들은 주로 나침반과 휴대용 제도판을 사용하여 도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도로와 그 주변의 주요 지형지물을 기록하였다.10
잠입한 간첩대 장교들의 정보수집과 지형도 제작은 다양한 노선으로 전개된다. 첩보 활동은 역할분담을 통해 한반도를 종횡하였는데, 그 결과 1882년에서 1890년까지 다양한 지적의 지형도가 집중적으로 작성되었다. 간첩대의 임무는 지도제작 외에도 군사작전에 필요한 지리서(地理書)인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1888년)을 간행하기 위해 각종 정보수집을 겸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들이 남긴 지형도에는 취락의 호구(戶口) 수를 비롯하여 간선도로와 지선도로를 연결하는 교통로, 강과 연해의 수심, 봉수대, 성곽, 전답(田畓) 등의 정보가 작성되었다. 특히 각 도의 군사기지[감영·수영·병영 등]와 행정기관이 소재한 요충지는 여러 장교가 수차례 정찰하여 색인도에 별도로 표시를 하거나 다른 곳에 비해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다.11
일본 군부의 조선 지리정보 조사는 사실상 청일전쟁 이전에 일단락을 이룬다. 간첩대의 개별적인 부분도(部分圖) 제작은 한반도 전역을 망라하는 1:200,000 지형도로 제작되었다.12 일본은 이처럼 치밀한 사전 조사를 통하여 조선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이를 발판으로 만주나 중국 대륙의 침략을 준비한다.
임시측도부(臨時測圖部) 파견과 조선 전도(全圖) 제작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청일전쟁(1894-1895)을 일으킨 일본은 기존에 제작된 조선의 지형도[1:200,000]가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1:50,000 지형도 제작에 착수한다.13 이에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한반도와 요동 반도의 군사용 지형도를 제작하기 위해 임시측도부(1894년)를 조직했다. 1895년에 측량수 183명과 운송부·마부 46명을 포함한 총 229명이 한반도에 잠입한다. 이들은 4개 반을 편성하여 1반은 원산에 본부를 설치하고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를, 2반은 한성에 본부를 설치하고 한성과 인천 및 경기도 일대를, 3반은 평양에 본부를 설치하고 평안도와 황해도를, 4반은 대구에 본부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및 충청도를 정찰했다.14 그러나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에 따른 민심의 악화와 정세 불안으로 6개월 만에 모두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군사적 이익과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반도의 측량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1904년 러일전쟁(1904-1905)이 일어나자 2차 임시측도부를 한반도에 파견했다. 2차 조직은 참모본부 소속 경위측량반·지형측도반과 통역을 포함하여 104명의 측량부대로 구성되었다.15 당시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년)을 맺어 조선[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했다. 먼저 측량을 통해 군사용 토지수용[전신취급소와 망루(望樓)를 설치하기 위해 연안과 섬을 포함]과 함께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고, 통신관리권과 연해 항해권을 장악하는 등 자국의 경제적 이권을 확보해 간다.16
2차 임시측도부는 1895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밀측정이 가능한 측량기구를 갖추었으며, 종전과 달리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공연하게 작업하였다.17 이들의 주요임무는 1차 임시측도부의 작업을 수정·보완하는 것으로 조사되지 않은 곳의 측량과 이미 측도한 도엽(圖葉) 중 정밀도가 떨어지는 곳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임시측도부는 1895년에 황해도·경상도·경기도, 1896년과 1898년에는 충청도, 1899년에는 전라도, 1900년에는 함경도, 1905-1906년에 평안도를 측량하였다.18 임시측도부가 청일전쟁부터 작업한 1:50,000 지형도는 1911년에 처음 간행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조선약도(朝鮮略圖)」, 「군용비도(軍用秘圖)」라 불린다. 이후 군사요충지를 삭제한 후 「약도(略圖)」라는 명칭으로 간행되어 일본 국내에서 판매하기도 했다.19
1908년 2차 임시측도부는 간측도(簡測圖) 제작에 돌입한다. 간측도는 간단한 삼각(三角) 측량법을 사용하여 정밀도를 높인 1:50,000 축적의 지형도를 말한다. 1908년에 함경도 일부와 경상도 및 전라남도 남부의 지형을 재측량하고 간측도를 제작하였는데, 이러한 기존 지형도의 수정작업은 한일병탄 후인 1911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결과 기존에 간행한 「군용비도(軍用秘圖)」보다 정확도가 향상된 「조선오만분지일지형도(朝鮮五萬分之一地形圖)」를 제작하였다.20
식민지배의 예고, 조선국토 측량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근대지도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부국강병을 표방한 제국주의의 팽창정책은 군사작전과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무엇보다도 정확한 지도의 확보가 우선시되었다. 따라서 중국진출의 교두보로서 조선을 상정하고 그 교두보를 침략하기 위해 한반도의 지리정보를 확보하는 데 집중한다.
일본의 조선반도에 대한 측량은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해상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의 내륙은 외국인의 여행뿐만 아니라 지리정보의 수집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그러므로 국가기밀인 지리정보와 지형도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에 수많은 간첩 장교인 측량수를 잠입시킨다. 은밀한 첩보 활동은 지리정보와 더불어 군사적 작전에 필요한 조선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이러한 작업이 향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탄(倂呑)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의 측량은 군사요충지 확보와 경제적 침략까지 고려하여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다. 그들이 제작한 지도에는 조선의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부설의 예정지뿐만 아니라 남해안 일대의 도서지방이 빠짐없이 수록되었고, 북부지방의 산림지대와 광산지대도 포함되었다.
특히 일본의 군사적 정탐은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조선의 지리정보 부족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파악하는 것에서 비롯됐다. 이를 위해 정밀한 정탐과 지도제작이 선행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일본인이 산속, 섬 속, 바다 속까지 모두 측량하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지난 역사에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해 도읍을 정할 때는 일반적으로 군사상의 전략적 거점을 확보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의 지리정보수집 자체가 곧 식민지를 위한 지도와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했다는 사실에 근거할 때 ‘계룡산에 정씨가 도읍’하는 비결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제님께서 특별히 일본인의 조선 측량을 말씀하신 것은 당시 횡행하던 허망한 참언(讖言)에 현혹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경계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민심을 조작하는 이러한 참언의 폐해로부터 무고한 민중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일러주신 가르침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순회보> 213호
참고문헌
『전경』
국립해양조사원, 『국립해양조사원 50년사』, 인천: 국립해양조사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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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호, 「일본 수로부 간행의 수로지와 해도에 나타난 독도」, 『독도연구』 17, 2014.
허종구, 「일제의 조선 잠입도측에 관한 연구」, 경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2.
허종구·이범관·김홍택, 「일제에 의한 조선 잠입도측 연구」, 『한국지적학회지』 28-2, 2012.
수야준평(水野俊平),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지명학』 17, 2011.
해야복수(海野福壽)·이진수, 「한국측도사업과 조선민중의 저항」, 『측량과 지적』 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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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김호동, 「일제의 한국침략에 따른 ‘일본해’명칭의 의미변화」, 『한국고지도연구회』 2 (2010), p.45.
02 한철호, 「일본 수로부 간행의 수로지와 해도에 나타난 독도」, 『독도연구』 17 (2014), p.136; 남영우, 『일제의 한반도 측량침략사』 (파주: 법문사, 2011), p.19.
03 허종구·이범관·김홍택, 「일제에 의한 조선 잠입도측 연구」, 『한국지적학회지』 28-2 (2012), p.115.
04 허종구, 「일제의 조선 잠입도측에 관한 연구」 (경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2), p.47.
05 허종구·이범관·김홍택, 앞의 글, p.118.
06 한철호, 앞의 글, p.137.
07 국립해양조사원, 『국립해양조사원 50년사』 (인천: 국립해양조사원, 1999), p.57.
08 허종구·이범관·김홍택, 앞의 글, p.119.
09 남영우, 『일제의 한반도 측량침략사』 (파주: 법문사, 2011), p.36.
10 같은 책, p.67.
11 같은 책, pp.72-74, p.131.
12 수야준평(水野俊平),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지명의 자료적 가치에 대하여」, 『지명학』 17 (2011), p.107.
13 같은 글, p.107.
14 허종구, 앞의 글, p.76.
15 해야복수(海野福壽)·이진수, 「한국측도사업과 조선민중의 저항」, 『측량과 지적』 3 (2006), p.71.
16 송지연,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군용지수용과 한국민의 저항」 (이화여대 석사학위 논문, 1997), p.9.
17 해야복수(海野福壽)·이진수, 앞의 글, p.72.
18 수야준평(水野俊平), 앞의 글, p.112.
19 남영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지도제작」, 『한국지도학회』 7 (2007), p.28.
20 같은 글, p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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