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폭 사장 전유초 혼반 고국 조무인(骨暴 沙場 纏有草 魂返 故國 吊無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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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0.07.16 조회1,358회 댓글0건본문
상제께서 갑진년 二월에 굴치(屈峙)에 계실 때 영학에게 대학을 읽으라 명하셨으되 이를 듣지 않고 그는 황주 죽루기(黃州竹樓記)와 엄자릉 묘기(嚴子陵廟記)를 읽으니라. 상제께서 “대(竹)는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말이요 묘기(廟記)는 제문이므로 멀지 않아 영학은 죽을 것이라” 하시며 이 도삼을 불러 시 한 귀를 영학에게 전하게 하시니 이것이 곧 “골폭 사장 전유초(骨暴沙場纏有草) 혼반 고국 조무인(魂返故國吊無人)”이니라.
(권지 1장 28절)
『전경』의 내용인 ‘골폭 사장 전유초, 혼반 고국 조무인’은 갑진년(1904) 2월에 상제님께서 동생인 영학에게 전한 시(詩)의 한 구절이다. 이 시를 전하게 된 배경은 『대학(大學)』을 읽으라는 상제님의 권유를 듣지 않고 「황주죽루기」와 「엄자릉묘기」를 읽는데 몰두한 영학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 당시 상제님께서는 시의 일부분만을 전하셨는데, 그것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과 내용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영학을 깨우치기 위해 전한 시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학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이미 많이 알고 있었던 시의 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사적 사건은 세월의 간격만큼이나 이해의 장벽 또한 존재한다. 그러므로 11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 시구(詩句)의 저자와 내용에 대한 검토는 『전경』의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유구국(流球國) 세자(世子)와 절명시(絶命詩)’라는 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1751년에 저술한 『택리지』는 각 지역의 특징과 환경, 인물, 풍속 등을 기록한 조선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로 손꼽힌다. 그는 이 책의 「복거총론·산수」에서 제주도에 표류한 유구 세자 사건을 기술해 놓았는데, 여기에서 ‘골폭 사장 전유초, 혼반 고국 조무인’은 유구 세자(琉球世子)의 절명시로 나온다. 즉 유구국(현재의 일본 오키나와)의 왕세자가 죽을 때 남긴 시라는 것이다. 먼저 이 절명시와 관련하여 이중환이 기술한 『택리지』의 유구 세자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인조(仁祖, 1595~1649) 때 왜(倭)가 유구국을 공격하여 그 왕을 잡아가자 유구의 세자가 보물을 싣고 왕을 구하러 가는 길에 표류하여 제주도에 이르게 되었다. 제주 목사 모(某)씨가 유구 세자에게 보물을 구경하고자 청하니, 유구 세자가 맑은 물을 담그면 술로 변하는 주천석(酒泉石)과 산을 덮어도 비가 새지 않는 거미줄로 짠 만산장(漫山帳)을 보여 주었다. 제주 목사가 보물을 빼앗으려고 하니, 유구 세자는 주천석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에 제주 목사는 남은 재물을 빼앗고 유구 세자를 죽이려 했다. 유구 세자는 종이를 청하여 율시 한 수를 적었다. 제주 목사는 세자를 죽인 후, 이 사건을 국경을 침범한 외적으로 몰아서 조정에 보고했으나 훗날 탄로되어 겨우 목숨만 건졌다.01
이중환은 사건을 서술하면서 유구 세자가 율시 한 수를 적었다고 하였는데, 이 절명시는 사건의 대미를 장식하여 유구 세자 살해 사건의 진실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한다. 다음은 『택리지』에 기록한 유구 세자가 쓴 율시의 전문이다.
堯語難明桀服身 요(堯) 임금의 말도 걸(桀) 같은 자를 밝히기 어렵고,02
臨刑何暇訴蒼旻 형에 임하여 하늘에 호소할 틈이 있겠는가?
三良臨穴人誰贖 삼량이 무덤에 임하였으나03 누가 대신할 것이며,
二子乘舟賊不仁 이자(二子)가 배를 탔는데04 도둑은 어질지 못하네.
骨暴沙場纏有草 뼈는 모래밭에 드러내 풀로 엉켜 있고,
魂歸故國弔無親 혼이 고국에 돌아가도 조상할 친척이 없어라.
竹西樓下滔滔水 죽서루 아래에 도도히 흐르는 강물,
遺恨分明咽萬春 남은 원한을 실어 분명히 만년 봄을 두고 오열하리라.
이 시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유구 세자의 심정이 짙게 그려져 있다. 시의 구절마다 왜에게 잡혀간 부친을 구하기 위해 왔다가 오히려 이국의 땅에서 자기 목숨도 지키지 못하는 원한의 사무침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특히 사후에 변변한 무덤도 없이 뼈가 모래사장에 흩어져 있고, 억울한 혼이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죽은 사실을 몰라 조상할 사람이 없다는 5구와 6구의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 시의 비극적 정조(情調)는 읽는 이로 하여금 비통한 심정과 함께 사건의 참혹성을 더욱 극대화하고 있어, 이후 유구 세자 사건의 전설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유구 세자 살해 사건은 『택리지』가 기술한 이후로 계속 파장을 일으키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유구 세자 절명시와 함께 여러 문학 작품에 실리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피서록(避暑錄)」,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변어전고(邊圉典故)」, 김려(金鑢, 1766~1821)의 「단량패사(丹良稗史)」를 비롯하여 작자 미상의 야담집인 『계서야담(溪西野談)』, 『기문총화(記聞叢話)』, 『청구총화(靑丘叢話)』 등을 찾을 수 있다.05 이상의 유구 세자 절명시를 살펴보면 전설화되는 과정에서 글자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서로가 대동소이하다. 박지원의 경우는 「피서록」에 유구 세자 사건과 절명시를 기록하고 그 출처를 『택리지』로 밝히면서 이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말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다수의 저자가 당시의 문인들에게 많이 읽혔던 『택리지』를 믿고 좇아 의심 없이 해당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그 결과 후대의 문헌에서는 제주 목사의 이름[이기빈(李箕賓)]까지 추가했으니06 이 이야기를 실제 역사로 이해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최근에는 유구 세자 살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인가’, ‘허구인가’에 대한 연구들이 있다. 따라서 유구 세자 살해 사건과 실제 역사적 사건의 부합 여부에 따라 유구 세자의 절명시 또한 그 작품의 저자가 제주도에 표류한 역사적 인물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다시 말해서 유구 세자의 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구 세자 사건은 역사적 사실인가?
『택리지』 이후 유구국 세자 살해 사건을 다룬 문헌들은 한결같이 인조시기에 제주 목사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유구 세자 사건과 역사의 기록은 어떤 상관성을 갖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인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1612년, 1613년)07와 『인조실록(仁祖實錄)』(1623년, 1625년)08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사건은 제주 목사 이기빈(李箕賓, 1563~1625)과 판관 문희현(文希賢, ?~1623)이 표류한 외국 선박을 약탈하고 살해한 이야기로 함축된다. 그러나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에는 정보의 차이가 있다. 제주에 표류한 배에 대해 『광해군일기』에서는 당(唐)과 왜(倭), 유구의 사람이 함께 탄 상선(商船)이라 했으나 『인조실록』에는 유구국의 세자가 보물을 실은 배라고 했다. 또 표류한 유구의 인물에 대해 『광해군일기』에는 문사가 능숙한 유구의 사신이 이기빈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하고, 『인조실록』에는 유구의 세자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이 둘의 기록에서 진실의 여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09, 조선의 외교정책인 사대교린(事大交隣)에 따르면 표류한 우호국민[유구인과 중국인]의 살해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특히 대상이 왕세자라면 매우 큰 외교적 마찰이 예상되나 유구국과 명나라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어떠한 항의도 없었다.10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실제 역사기록인 이기빈 사건과 『택리지』를 비롯한 민간 문헌에 수록된 유구국 세자 살해 사건의 내용이 엄밀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이기빈이 제주 목사를 사임(1611년 9월)하기 전인 1611년 중반기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택리지』에서 말한 인조 때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의 시기는 광해군(光海君, 1575~1641) 3년 때 일이다. 또 실록에서 유구 세자가 절명시를 남겼다는 『택리지』의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에 기반할 때 민간에서 기록된 유구 세자 살해 사건은 역사적 사실과 달리 만들어진 이야기로 취급될 개연성이 있다.
생원 최삼(崔參)의 애도시(哀悼詩)인가?
이 시는 유구 세자가 지은 것이 아니라 강릉의 생원(生員)이 지었다는 주장이 있다.11 조선 중기의 민인백(閔仁伯, 1552~1626)이 지은 『태천집(苔泉集)』에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인물들의 일화 등을 수록한 「용사추록(龍蛇追錄)」의 <홍인걸(洪仁傑), 홍인간(洪仁侃)> 편에 유구 세자의 절명시와 내용이 똑같은 애도시가 실려 있다. 이 조목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삼척부에 일본의 포로로 끌려갔다 탈출한 조선 유민들이 표류해 왔는데, 삼척 부사 홍인걸과 동생 홍인간이 공적을 탐하여 그들을 몰살했다. 당시 강릉의 생원 최삼이 시를 지어 이들을 조문했다. 堯語難明桀服身 臨刑無路訴蒼旻 三良入穴人思贖 二子乘舟賊不仁 骨暴荒原縈有草 魂飛古里吊無親 竹西樓下滔滔水 長帶餘悲咽萬春. 이 사람의 말이 세상에 퍼지자 탄핵이 거듭 일어나고 홍인걸은 8년간 고문을 당했으나 끝내 죄를 자백하지 않고 병으로 옥사했다.
홍인걸 사건은 1595년(선조 28년 7월 26일)에 ‘강원도 순안어사 노경임이 왜적에게서 도망친 우리나라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인 방백[삼척 부사 홍인걸]을 탄핵했다’라는 『선조실록』의 기록을 볼 때 임진왜란 시기에 삼척부(三陟府)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실록에는 유구 세자의 절명시가 없는 것처럼 최삼의 애도시를 찾을 수 없다. 삼척 부사를 지낸 허목(許穆, 1595~1682)이 1662년 저술한 읍지(邑誌)인 『척주지(陟州誌)』 또한 이 사건을 기록하나 최삼과 애도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12 이후 김구혁(金九爀, 1798~1859)이 쓴 삼척 부사에 관한 기록물인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는 이 사건과 함께 애도시를 소개하면서도 시의 저자를 당시 사람이라고만 밝혔다.13
그럼 시의 저자로 알려진 강릉의 생원 최삼은 누구인가? 일설에서 강원도 관찰사였다고 추측하지만, 조선의 과거급제 목록인 『사마방목(司馬榜目)』에서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삼은 최근에 발간된 『한시작가·작품사전』에 애도시와 내용이 같은 〈죽서루(竹西樓)〉의 저자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14 따라서 민인백이 기록한 최삼의 애도시 또한, 저자가 실제 역사의 인물인지 아니면 가공의 인물인지 신빙성에 의문이 생긴다. 앞서 『태천집』에 최삼의 시가 소문으로 돌아 은폐된 홍인걸 사건이 밝혀졌다는 이야기를 참고하면 최삼은 누군가에 의해 가공된 인물이라 생각된다.
분명한 사실은 최삼의 애도시를 기록한 민인백의 활동 시기[1552~1626]가 유구 세자의 절명시를 기록한 이중환의 활동 시기[1690~1752]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최삼의 애도시는 『택리지』에 실린 유구 세자의 절명시와 비교할 때 몇 군데의 글자를 제외하곤 거의 같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유민(流民)의 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두 시의 7구에 나오는 ‘죽서루’가 삼척에 현존한다는 것이다. 죽서루는 고려의 충렬왕 때 창건하여 조선의 태종 때 중창한 누각으로 관동팔경(關東八景)의 손꼽히는 명승지다. 삼척의 명소답게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문인의 문학적 소재가 되었다.15 이를 볼 때 최삼의 애도시는 유구 세자의 절명시보다 먼저 써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다면 최삼의 애도시가 유구 세자의 절명시로 편입된 것이다.
나아가며
지금까지 『전경』에 ‘골폭 사장 전유초, 혼반 고국 조무인’ 의 저자를 규명하기 위해 이 시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과 민간 문헌에서 제주 목사 이기빈 사건[유구 세자 사건]과 삼척 부사 홍인걸 사건을 살펴보았다. 여러 문헌을 검토한 결과 이 시는 『택리지』의 기록과 달리 삼척 부사 홍인걸 사건을 기록한 민인백의 『태천집』에 최삼이 쓴 애도시로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삼이란 인물은 확인할 수 없다.
어떤 사건이 이야기로 전설화되어 후대의 민중들에게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내용이 지닌 흥미뿐만 아니라 교훈적 요소가 필요하다. 유구 세자 살해 사건은 유구 세자가 지었다는 절명시를 수록함으로써 사건의 흥미성과 비극성을 더했다. 그리고 굳이 사건의 진위를 따지지 않더라도 시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전해졌다. 이유원(1814~1888)은 1871년에 저술한 『임하필기(林下筆記)』 「춘명일사(春明逸史)」에 ‘유구태자시(琉球太子詩)’를 수록하고 “외국의 시로서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 없으나 이 시는 사람들이 모두 외우고 있다”라고 했는데, 이 서술에서 외국의 시라는 잘못된 정보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사람에게 읽혔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상제님께서 영학에게 보내주신 한 구절의 시는 당시 사람들이 많이 애송했던 시의 내용이었다. 앞서 살펴본 『택리지』와 『태천집』의 시와 비교하면 몇 글자의 차이가 있으나 큰 뜻은 다르지 않다. ‘골폭 사장 전유초, 혼반 고국 조무인’은 시의 전문에서 5구와 6구에 해당하는 구절로 저자의 비극적 심정이 가장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는 영학의 잘못을 경계(警戒)하기 위해 이 시 한 구절을 보내셨던 것이었다. 당시 영학은 『대학』을 읽으라는 상제님의 명을 어기고,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린 「황주 죽루기」와 「엄자릉 묘기」를 즐겨 읽었다. 이후에도 상제님의 말씀을 듣지 않던 영학은 도술을 배우길 원해 술서(術書)를 공부하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
01 이중환 저, 이익성 옮김, 『택리지』(서울: 을유문화사, 2002), pp.168~170.
02 요(堯)는 중국 고대 성군(聖君)이고 걸(桀)은 중국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폭군(暴君)이다.
03 춘추시대 진(秦)의 목공(穆公)이 죽었을 때 삼량(三良: 세 명의 어진 신하)인 엄식(奄息), 중행(仲行), 침호(鍼虎)를 함께 순장했다. [『시경(詩經)』, 「진풍(秦風)·황조장(黃鳥章)」]
04 춘추시대 위(衛)의 선왕(宣王)이 아들 급(伋)의 아내가 될 선강을 빼앗아 살며 수(壽)와 삭(朔)을 낳았다. 선강은 급을 제(齊)에 사신으로 보내고 도중에 도둑을 두어 죽이게 했다. 착한 수가 계획을 듣고 급을 다른 배에 태워 대신 가서 죽었다. 급이 나중에 도착하여 신분을 밝히고 도적에게 또 죽었다. 이에 선왕은 삭을 세자로 세웠다. [『시경(詩經)』, 「패풍(邶風)·이자승주장(二子乘舟章)」]
05 홍진옥, 「유구세자 살해설과 김려의 유구왕세자외전」, 『대동한문학』 47(2016), pp.136~138.
06 최상수, 『한국민간전설집』(서울: 통문관, 1958), pp.176~178.
07 『광해군일기』에는 1612년 4월 15일에 “중국 선박을 약탈한 제주 목사 이기빈, 판관 문희현의 형량을 대신과 의논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1613년 1월 28일에는 이들을 귀양보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사관은 재화를 실은 상선에는 당(唐)·왜(倭)·유구(琉球) 세 나라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에 25~26세의 유구 사신은 문사가 제법 능숙하여 이기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문희현이 모두 죽였다는 내용을 첨가했다.
08 『인조실록』에는 1623년 4월 14일에 인목대비가 승정원에 지시 내려 중국에 보고하는 글에 “유구국 세자가 우리 땅에 표류하여 왔을 때 변방의 신하에게 몰래 죽이도록 했다”라는 말을 첨가하도록 하니, 당시 영상(領相)이었던 이원익이 그가 세자인지 알기 어렵다고 답한 기록이 있고, 1625년 1월 8일에 이기빈의 졸기(卒記)는 유구국의 왕자가 보물을 싣고 제주에 표류하자 이기빈과 문희현이 재화를 몰수하고 그들을 죽일 때 유구 왕자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다.
09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은 선조(宣祖)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광해군 시대와 광해군을 폐위하고 반정(反正)을 명분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 시대의 산물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
10 홍진옥, 「유구세자 살해설과 김려의 유구왕세자외전」, 『대동한문학』 47(2016), p.132.
11 박혜민, 「소문과 진실의 경계」, 『연민학지』 21(2014), pp.282~284.
12 박재홍 역, 『국역척주집』(삼척: 도서출판 두타, 2001), p.70.
13 홍진옥, 「유구세자 살해설과 김려의 유구왕세자외전」, 『대동한문학』 47(2016), pp.141~142.
14 NAVER 지식백과, 최삼(『한시작가·작품사전』)
15 박수밀, 「유구세자 이야기의 진실과 변이 양상」, 『우리어문연구』 51(2015), p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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